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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きみとし たけく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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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韓 日 國 際 學 術 會 議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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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개 회 사 (재)한일문화교류기금 이사장 李 相 禹 800여년전 몽골지배 아래에서 고려는 몽골과 함께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침공했었습니다. 대륙국가가 일본 열도를 침공한 유일의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한국과 일본간의 관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기금까지도 그 전쟁의 흔적이 한국과 일본에 남아있습니다. 한일문화교류기금은 동북아역사재단과 더불어 바로 이 전쟁을 오늘의 시각에서 다시 분석해 보는 세미나를 계획했습니다. 한일관계의 오늘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서입니다. 오늘 세미나에는 한국과 일본학계의 전문가들을 모두 모셨습니다. 日 本 에서 무라이 쇼오스케 ( 村 井 章 介 ) 교수, 에노모토 와타루( 榎 本 渉 ) 교수, 모리히라 마사히코( 森 平 椎 彦 ) 교수, 후나다 요시유키( 船 田 善 之 ) 교수, 사에키 고오지( 佐 伯 弘 次 ) 교수 등이 참석하셨고, 한국에서는 이재범 교수, 김보한 교수, 남기학 교수, 윤용혁 교수, 장동익 교수, 손승철 교수, 그리고 동북아역사재단 의 이훈 박사 등이 참가했습니다. 아주 좋은 토론이 되리라고 생각됩니다. 욕심 같아서는 몽골 학자도 초청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세미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김용덕 이사장의 배려로 성사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회의를 준비해 오신 한일문화교류기금 김수웅 상무이사님과 손승철 운 영위원님께서도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비록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유서 깊은 도산서원과 하회마을도 돌아보시면서 즐거운 시 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4 開 會 辭 ( 財 ) 韓 日 文 化 交 流 基 金 理 事 長 李 相 禹 800 余 年 前 モンゴル 支 配 下 で 高 麗 はモンゴルとともに 二 回 にわたって 日 本 を 侵 攻 しました 大 陸 国 家 が 日 本 列 島 を 侵 攻 した 唯 一 の 戦 争 でした この 戦 争 は 長 続 きはしませんでしたが 韓 国 と 日 本 の あいだの 関 係 に 大 きな 影 響 を 及 ぼし いままでもその 戦 争 の 痕 跡 が 韓 国 と 日 本 に 残 っております 韓 日 文 化 交 流 基 金 は 北 東 亞 歴 史 財 団 とともに まさにこの 戦 争 を 現 在 の 視 覚 から 改 めて 分 析 して 見 るセミナーを 計 画 いたしました 韓 日 関 係 の 現 在 を 理 解 するため 役 に 立 つと 考 えたからでございま す 今 日 セミナーには 韓 国 と 日 本 学 界 の 専 門 家 の 皆 さんをご 招 待 いたしました 日 本 からは 村 井 章 介 教 授 榎 元 渉 教 授 森 平 椎 彦 教 授 船 田 善 之 教 授 佐 伯 弘 次 教 授 などがご 参 加 し 韓 国 では 李 在 範 教 授 金 普 漢 教 授 南 基 鶴 教 授 尹 龍 爀 教 授 張 東 翼 教 授 孫 承 喆 教 授 そして 北 東 亞 歴 史 財 団 の 李 薰 博 士 などが 参 加 なさっております 大 変 有 益 な 討 論 が 行 われると 思 われます 欲 を 出 してモ ンゴル 学 者 もご 招 待 しようとも 考 えておりましたが 残 念 ながら 思 い 通 りにはできませんでした 今 日 のセミナーは 北 東 亞 歴 史 財 団 の 金 龍 德 理 事 長 の 心 づかいがありまして 行 われることができ ました この 席 をかりて 深 く 感 謝 いたします そしてこの 会 議 を 準 備 してくださった 韓 日 文 化 交 流 基 金 の 金 秀 雄 常 務 理 事 と 孫 承 喆 運 営 委 員 にも 礼 を 申 し 上 げます ただの2 泊 3 日 の 短 い 日 程 ではございますが 由 緒 ぶかい 陶 山 書 院 と 河 回 村 もご 見 学 なさいながら 楽 しいお 時 間 を 過 ごすように 申 し 上 げます
5 환 영 사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김 용 덕 이번에 동북아역사재단과 한일문화교류기금이 공동주최하는 학술회의를 위해 멀리 일본과 한 국 각지에서 오신 여러 석학과 전문가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6년 9월에 설립된 신흥 연구기관입니다. 한 중 일 등 동아시아의 역사문 제 등에 대한 종합적 연구 분석과 다양한 학술적 교류, 그리고 여러 지원사업 등을 통하여 객관 적이며 보편적 역사인식을 확립하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지역의 협력과 번영, 평화체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곳입니다. 우리는 한 중 일 사이에 놓여있는 여러 가지 역사현안 문제를 미래지향적이며 평화지향적인 안목으로 해석함으로써 한국과 이웃, 세계 여러나라들의 우호협력과 상호이해를 도모하고자 합 니다. 이번 학술대회의 주제는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몽고의 고려 일본 침공과 한일관 계 로 정했습니다. 13세기 몽고의 고려, 일본 침공은 동아시아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습 니다. 고려와 일본은 몽골의 침략과 오랜 전쟁으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만, 이후 양국은 상당기 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 학술대회가 한국의 추로지향( 鄒 魯 之 鄕 ) 으로 불리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열리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학술회의가 끝난 뒤 한국 유교문화의 상징인 도산서원, 한국의 오 랜 전통이 살아있는 민속마을인 하회마을을 견학하고 동아시아 문화의 보편적 가치도 느껴보시 기 바랍니다.
6 지난 9월 저희 재단에서는 독일 프랑스 공동역사교과서 를 발간하였습니다. 역사학자는 수 준 높은 지식과 양심에 따라 미래를 내다보려 하며, 이를 위해 과거의 빛으로 현재를 조명한다 는 이 책 머리말의 경구는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번 학술 대회를 통해 몽골의 고려, 일본 침공으로 비롯된 동아시아의 전쟁과 교류에 관한 여러 문제들이 활발하게 토론되기를 기대합니다. 멀리 일본에서 오신 무라이 쇼스케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과 한국의 여러 교수님들, 그리고 대회 준비를 위해 애써주신 한국의 손승철 교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번 학술대 회 개최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해주신 한일문화교류기금의 김수웅 사무국장을 비롯한 실무진께도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번 학술회의에 참석하신 참가자 여러분 께도 거듭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10월 25일
7 歡 迎 辭 北 東 亞 歴 史 財 団 理 事 長 金 龍 德 今 回 北 東 亞 歴 史 財 団 と 韓 日 文 化 交 流 基 金 が 共 同 主 催 する 学 術 会 議 のため 遠 く 日 本 と 韓 国 各 地 からいらっしゃった 碩 學 と 専 門 家 皆 さんに 深 い 感 謝 のお 言 葉 を 申 し 上 げます 北 東 亞 歴 史 財 団 は 2006 年 9 月 に 設 立 された 新 しい 研 究 機 関 です 韓 中 日 など 東 アジアの 歴 史 問 題 などに 対 する 総 合 的 な 研 究 分 析 と 多 様 な 学 術 的 交 流 そして 多 くの 支 援 事 業 などを 通 じて 客 観 的 かつ 普 遍 的 な 歴 史 認 識 を 確 立 し これを 通 じて 東 アジア 地 域 の 協 力 と 繁 栄 平 和 体 制 の 基 盤 をつくる ための 所 です 私 たちは 韓 中 日 のあいだに 置 かれているさまざまな 歴 史 の 懸 案 問 題 を 未 来 指 向 的 平 和 志 向 的 な 眼 目 から 解 釈 することで 韓 国 と 隣 り ひいては 世 界 各 国 との 友 好 協 力 と 相 互 理 解 をはかろうとしてお ります 今 回 の 学 術 大 会 の 主 題 は 多 くの 専 門 家 たちの 意 見 を 取 り 集 め モンゴルの 高 麗 日 本 への 侵 攻 と 韓 日 関 係 に 決 めました 13 世 紀 モンゴルの 高 麗 や 日 本 侵 攻 は 東 アジア 社 会 に 大 きな 変 化 をもた らしました 高 麗 と 日 本 はモンゴルの 侵 略 と 長 年 の 戦 争 により 大 きな 苦 痛 を 経 験 しましたが 以 後 両 国 は 相 当 の 期 間 にわたり 平 和 な 関 係 を 維 持 してきました 私 たちはこれを 通 じて 多 くの 教 訓 を 得 られること ができると 存 じております 私 は 今 回 の 学 術 大 会 が 韓 国 の 鄒 魯 之 郷 と 呼 ばれる 慶 尚 北 道 の 安 東 で 開 かれるようになったこと をすごく 嬉 しく 思 います 学 術 会 議 が 終 わった 後 韓 国 儒 教 文 化 の 象 徴 である 陶 山 書 院 古 から 韓 国 の 伝 統 が 生 きている 民 俗 村 である 河 回 村 を 見 学 して 東 アジア 文 化 の 普 遍 的 な 価 値 も 味 わってみてくだ さい
8 去 る9 月 我 らの 財 団 では ドイツ フランス 共 同 歴 史 教 科 書 を 発 刊 いたしました 歴 史 学 者 は 高 い 水 準 の 知 識 と 良 心 によって 未 来 を 見 通 そうと 考 えており このために 過 去 の 光 で 現 在 を 照 明 する というこの 本 の 序 文 の 句 節 は 私 たちに 大 事 な 教 訓 を 与 えていると 存 じます なにとぞ この 学 術 大 会 を 通 じてモンゴルの 高 麗 日 本 侵 攻 から 始 まった 東 アジアの 戦 争 と 交 流 に 関 する 多 くの 問 題 について 活 発 な 討 論 が 行 われることを 期 待 します 遠 く 日 本 からいらっしゃった 村 井 章 介 教 授 を 含 めた 多 くの 先 生 方 々と 韓 国 の 多 くの 先 生 方 々 そし て 大 会 準 備 のためにいろいろと 苦 労 をなさってくださった 韓 国 の 孫 承 喆 教 授 にも 礼 を 申 し 上 げます ま た 今 回 の 学 術 大 会 の 開 催 のために 尽 力 をなさってくださった 韓 日 文 化 交 流 基 金 の 金 秀 雄 事 務 局 長 を 含 めた 實 務 担 当 者 方 々にも 深 い 感 謝 の 気 持 をお 伝 え 致 します 忙 しい 日 程 にもかかわらず この 学 術 会 議 に 参 加 してくださった 参 加 者 の 皆 様 にも 深 く 感 謝 致 します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年 10 月 25 日
9 學 術 大 會 日 程 10 月 24 日 ( 金 ) 12 : 20 九 州 Team 仁 川 空 港 Loby 集 合 13 : 00 金 浦 空 港 ( 國 際 線 Loby)에서 東 京 Team, 韓 國 Team 合 流 安 東 向 發 16 : 30 安 東 韓 國 振 興 院 16 : 40 儒 敎 文 化 博 物 館 見 學 19 : 00 晩 餐 10 月 25 日 ( 土 ) 第 1 部 : 開 會 및 基 調 講 演 (09:30 10:30) 進 行 : 孫 承 喆 ( 江 原 大 ) 開 會 辭 : 李 相 禹 ( 韓 日 文 化 交 流 基 金 理 事 長 ) 祝 辭 : 金 容 德 ( 東 北 亞 歷 史 財 團 理 事 長 ) 基 調 講 演 : 麗 ㆍ 蒙 軍 의 日 本 侵 攻 과 東 아시아 世 界 村 井 章 介 ( 東 京 大 ) 第 2 部 : 午 前 主 題 發 表 (10:30 12:00) 13 世 紀 以 前 의 麗 日 關 係 發 表 : 李 在 範 ( 京 畿 大 ) 蒙 古 의 高 麗 侵 略 과 高 麗 의 對 應 發 表 : 森 平 椎 彦 ( 九 州 大 ) 中 食 (12:00-13:30) 午 後 主 題 發 表 (13:30 15:30) 三 別 抄 와 麗 日 關 係 發 表 : 尹 龍 爀 ( 公 州 大 ) 麗 蒙 軍 의 日 本 侵 功 과 日 本 의 對 應 發 表 : 南 基 鶴 ( 翰 林 大 ) 日 本 侵 攻 以 後 의 麗 日 關 係 發 表 : 佐 伯 弘 次 ( 九 州 大 ) 休 息 (15:30-16:00)
10 第 3 部 : 綜 合 討 論 (16:00 18:00) 司 會 : 張 東 翼 ( 慶 北 大 ) 榎 本 涉 ( 日 本 中 央 大 ), 李 薰 ( 東 北 亞 歷 史 財 團 ), 村 井 章 介 ( 東 京 大 ) 船 田 善 之 ( 九 州 大 ), 金 普 漢 ( 檀 國 大 ) 晩 餐 (18:30 20:30) 10 月 26 日 ( 日 ) 08 : 30 陶 山 書 院 見 學 安 東 河 回 마을( 柳 成 龍 生 家, 紀 念 館 ) 訪 問 16 : 00 金 浦 空 港 着, ( 解 散 ) 東 京 Team 金 浦 20:15 發 - 羽 田 22 ; 35 着 NH 16 : 40 仁 川 着 九 州 Team 仁 川 18:20 發 - 福 岡 19 : 40 着 JAL
11 목 차 개 회 사 開 會 辭 2 환 영 사 歡 迎 辭 5 學 術 大 會 日 程 7 발표문 <기조강연> 몽골 내습과 異 文 化 접촉 村 井 章 介 世 紀 以 前 의 麗 日 關 係 李 在 範 33 13세기 전반에 있어서 麗 蒙 交 涉 의 한 단면 모리히라 마사히코( 森 平 雅 彦 ) 57 삼별초와 여일관계 尹 龍 爀 71 蒙 古 의 日 本 侵 略 과 日 本 의 對 應 南 基 鶴 93 일본침공 이후의 麗 日 關 係 사에키 코지( 佐 伯 弘 次 ) 121 토론문 13세기 이전의 麗 日 關 係 발표자 : 李 在 範 / 토론자 : 榎 本 渉 세기 전반에 있어서 麗 蒙 交 涉 의 한 단면 발표자 : 모리히라 마사히코 / 토론자 : 이훈 139 蒙 古 의 日 本 侵 略 과 日 本 의 対 応 발표자 : 南 基 鶴 / 토론자 : 후나타 요시유키( 舩 田 善 之 ) 141 일본침공 이후의 여일관계 발표자 : 佐 伯 弘 次 / 토론자 : 金 普 漢 145
12 발표문 일본어 원문 < 基 調 講 演 > 蒙 古 襲 来 と 異 文 化 接 触 村 井 章 介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李 在 範 世 紀 前 半 における 麗 蒙 交 渉 の 一 断 面 森 平 雅 彦 191 三 別 抄 と 麗 日 関 係 尹 龍 爀 205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南 基 鶴 225 日 本 侵 攻 以 後 の 麗 日 関 係 佐 伯 弘 次 253 토론문 일본어 원문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発 表 者 : 李 在 範 / 討 論 者 : 榎 本 渉 世 紀 全 般 における 麗 蒙 交 渉 の 一 断 面 発 表 者 : 森 平 雅 彦 / 討 論 者 : 李 薰 273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発 表 者 : 南 基 鶴 / 討 論 者 : 舩 田 善 之 275 日 本 侵 攻 以 後 の 麗 日 関 係 発 表 者 : 佐 伯 弘 次 / 討 論 者 : 金 普 漢 279
13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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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몽골 내습과 異 文 化 접촉 村 井 章 介 ( 東 京 大 學 ) 머리말 1371년 南 朝 方 征 西 府 의 권력자로서 九 州 를 제압하고, 大 宰 府 를 수도로 삼았던 懐 良 親 王 ( 後 醍 醐 천황의 황자)은 건국 직후에 명으로부터의 외교 사절을 맞이했다. 사자는 이름을 趙 秩 이라 고 하였고, 일본에 대한 명의 중화지배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臣 從 의 의사 표시를 재촉하도록 하 는 것이 임무였다. 懐 良 은 趙 秩 과 문답을 주고받았고, 이윽고 그 설득에 부응해 表 箋 을 바쳐 臣 으로 칭하고, 祖 来 를 파견하여 秩 을 따라 入 貢 하게 했다. 이를 접한 洪 武 帝 는 곧바로 懐 良 을 日 本 國 王 에 봉했다. 이 사건은 남북조 내란의 성격을 크게 바꾸게 되었는데[ 村 井, 2003], 그 점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여기에서는 두 사람의 문답에 주목하고 싶다( 明 実 録, 洪 武 4 年 10 月 癸 巳 条 ). 懐 良 : 지금 新 天 子 가 몽골 때와 마찬가지로 중화를 장악해 趙 라고 하는 姓 의 사자를 보내왔다. 아마 도 너희는 옛 蒙 古 使 의 자손일 것이다. 기분 좋은 말로 유인해 우리를 덮칠 생각일 것이다. 趙 秩 : 나는 蒙 古 使 의 후예가 아니다. 나를 죽이면 재난이 너희들에게 닥칠 것이다. 우리 조정의 1명 의 군사, 1척의 전함은 몽골군 100명에 상당한다. 예를 갖추어 너희를 회유하려는 우리 조정 과 너희를 공격하려는 몽골을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몽골 내습의 직전, 1271년과 72년(2번째를 73년이라고 하는 설이 있지만 잘못이다[ 朱 雀, 200 8]) 2번에 걸쳐서 太 宰 府 에 온 몽골 사자의 이름은 趙 良 弼 이었다. 그와 같은 同 姓 의 사자를 맞 이한 懐 良 은 곧 100년 전 전쟁의 재현을 연상했다. 몽골 내습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는
16 1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지를 알 수 있다. 몽골 내습은 전근대에 일본의 영토 내에서 치룬 대외 전쟁으로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 이 외에 1019년 刀 伊 의 入 寇 와 1419년 應 永 外 寇 가 있지만, 전쟁의 규모는 비교도 안 된다. 그 만큼 몽골 내습은 동시대 및 그 후의 일본에 커다란 각인을 남겼다. 이 점에 대해서는 鎌 倉 幕 府 의 추이, 御 家 人 制 나 惣 領 制 의 변질, 유통경제의 진전 등 다양한 관점으로부터 검토되어 왔지만, 여기에서는 異 文 化 와의 직접적인 접촉이라고 하는 각도로에서 몽골 내습이 가진 의미를 생각해 보고 싶다[ 村 井, 제9장 참조]. 1. 외교 전쟁은 외교의 연장 이라고 하는 명제는 몽골 내습에 대해서도 성립된다. 1266년 8월부의 大 蒙 古 國 皇 帝 로부터 日 本 國 王 에게 보내진 국서는 고려를 통해 1268년 정월 太 宰 府 에 도달 했다. 시간이 걸린 것은 고려의 소극적 저항 때문이다. 국서는 몽골이 중화를 영유 하고 있다는 것, 고려가 몽골에 의해 義 는 君 臣 이라 하더라도, 歡 은 父 子 와 마찬가지 라고 하는 관계의 설정 이 이루어진 것을 언급한 뒤, 국교를 맺어 親 睦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첫머리의 奉 書, 말미의 不 宣 이라고 하고 있어 그만한 예우를 표현하고 있어, 그다지 거만한 문언은 아니다. 그러나 군사를 이용하기에(일으키기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누가 좋아할 것인가. 라고 한 구절은 동아시 아 외교에 익숙하지 않는 일본 측, 특히 막부에게 커다란 군사적 위협으로 비쳤을 것이다[ 杉 山, 2003]. 조정은 처음에 전통적 대외자세에 따라 답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1269년에 도래한 몽골 中 書 省 牒 [ 張, 2005]에 대해서는 太 宰 府 명의의 返 牒 을 보내는 것이 결정되어[ 荒 木, 2008] 문안 을 작성했다. 그러나 막부의 태도는 일관되게 武 斷 的 으로 返 牒 을 묵살하였고, 異 国 警 固 番 役 의 창설 등, 군사적 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러한 가운데 太 宰 府 까지 도달한 것으로서는 2번째와 3번 째의 사절이 바로 그 趙 良 弼 이었다[ 佐 伯, 2003]. 趙 良 弼 と 南 浦 紹 明 蒙 古 史 趙 良 弼 은 2번째의 도래 직후에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불길한 이름으로서 일본인 의 역사적 기억으로 새겨졌다. 그러나 生 身 의 인간으로서 그는 여진족 출신의 문인으로 스스로 대일외교의 역할을 자청하고 있었다는 것으로부터도 상상할 수 있듯이 높은 교양을 갖춘 境 界 人
17 몽골 내습과 異 文 化 접촉 15 이었다[ 山 本, 2001]. 그 정치적 입장은 결코 주전파는 아니었고, 2번째 사행에서 돌아간 그는 元 (1271년 국호를 세움)의 황제 쿠빌라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일본 정벌의 무익을 호소했다( 元 史 권159, 趙 良 弼 傳 ). 臣 日 本 に 居 ること 歳 余. 其 の 風 俗 を 覩 るに, 狼 勇 にして 殺 を 嗜 み, 父 子 の 親, 上 下 の 礼 有 るを 知 らず. 其 の 地 は 山 水 多 く, 耕 桑 の 利 無 し. 其 の 人 を 得 れども 役 すべからず, 其 の 地 を 得 れど も 富 を 加 へず. 況 んや 舟 師 海 を 渡 るに, 海 風 期 無 く, 禍 害 測 る 莫 し. 是 れをしも 有 用 の 民 力 を 以 て 無 窮 の 巨 壑 を 填 む と 謂 ふなり.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몽골 내습을 蠻 族 의 나라가 문명국 일본에 걸어온 전쟁 이라고 하는 이미지로 파악해 왔다. 그것은 동시대인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1271년 趙 良 弼 이 첫 번째로 도래 해왔을 때, 太 宰 府 의 長 少 弐 経 資 는 蛮 夷 의 사람이 궁궐에 온 사례가 없다. 牒 状 의 취지를 받들 어야만 한다. 고 응대하여( 吉 続 記, 文 永 8 年 10 月 24 日 条 ), 良 弼 의 상경을 거부했다. 하지만 良 弼 은 반대로 유교적 예의를 알지 못하고, 정복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적은 蠻 國 이라고 일본을 간주하고 있었다. 실제, 文 永 의 役 후에 도래한 元 使 를 참살해버린 막부의 대응은 동아시아의 외교 관례를 무시한 것이며, 蠻 國 과 닮은꼴의 행동으로 간주되어져 재차의 전쟁에 대한 회피의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버린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 체제 중에 趙 良 弼 의 사적으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 大 徳 寺 派 妙 心 寺 派 의 祖, 南 浦 紹 明 과의 詩 唱 和 이다. 南 浦 는 入 宋 하여 名 僧 虚 堂 智 愚 에게 嗣 法 하였으며, 1267년에 귀국해 70년 에 博 多 西 郊 姪 浜 (메이노 하마)의 興 徳 寺 ( 開 基 는 北 条 時 定 )에서 지낸 뒤, 72년에 太 宰 府 에 가까 운 横 岳 崇 福 寺 ( 開 基 는 少 弐 氏 )의 주지가 되었다. 円 通 大 応 国 師 語 録 偈 頌 에 蒙 古 国 의 사신 趙 宣 撫 의 韻 에 답한다. 라고 제목을 붙인 22 首 가 보인다(현대어 번역은 [ 西 尾, 1999b]). (1) 遠 公 不 出 虎 渓 意 慧 遠 이 虎 渓 를 나오지 못했다는 의미는 非 是 淵 明 誰 賞 音 陶 淵 明 이 아니었다면, 누가 그 뜻을 이해하겠는가. 欲 話 箇 中 消 息 子 그 사이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싶다. 蒲 輪 何 日 到 雲 林 왕골로 씌운 車 輪 수레를 타고 拙 寺 에 와본 것이 언제든가 (2) 外 國 高 人 来 日 本 외국의 고관이 일본에 도착했다. 相 逢 談 笑 露 真 機 만나서 담소해보니 玄 妙 한 행동을 보인다. 殊 方 異 域 無 差 路 나라를 달리하더라도 真 理 에 다름은 없고 目 撃 道 存 更 有 誰 한 번 본 것만으로 道 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18 1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그 위에 누가 있을 것인가 西 尾 賢 隆 은 이 唱 和 時 에서 南 浦 가 있던 절을 (1)에 나오는 虎 渓 三 笑 의 고사에 어울리는 환경 으로부터 崇 福 寺 라고 추정하고, 唱 和 의 연대를 良 弼 의 2번째의 일본 방문 때로 비정하였으며, 상경을 허가받지 못해 大 宰 府 에서 荏 苒 의 날을 보내는 良 弼 을 陶 淵 明 과 같은 自 適 으로의 휴식 으로서 받아들이고 싶다. 라고 말했다. 따라야 할 견해일 것이다. (1)은 良 弼 이 대면 전에 南 浦 에 게 보낸 시에 대한 화답이고, (2)는 직접 만나 서로 얘기를 나눈 후의 창화이다. (1)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혜원과 도연명으로 대표되는 중국 문화에 대한 동경과 조예를 볼 수 있고, (2)에서는 선종과 유교를 관철하는 道 에 비추어 보자면 나라나 지역의 차이는 본질적 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세계관이 퍼져 있다. 긴장한 국가 간 관계 속에 있더라도 일본인의 도해 승과 여진인 외교관이라고 하는 경계인 상호 간에는 공감이 교감되고 있었다. 귀국해서 전쟁 회 피를 말한 良 弼 의 염두에 남포와의 해후가 있었다고 상상해 보고 싶어진다. 또, 이 회견에서 남포의 입장을 일개인이 아니라, 외교의 일각을 담당한 사람의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伊 藤, 2002]. 몽골 내습의 직전에 송으로부터 귀국해 北 條 氏 연고의 흥덕사와 少 弐 氏 연고의 崇 福 寺 에서 주지를 역임한 그의 경력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南 浦 는 良 弼 로부터 얻은 대륙 정보를 막부 관계자에게 전달했을 것이므로 鎌 倉 幕 府 의 외교적 대응을 무단적이라고만 평가하는 것은 재고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 정보가 막부의 정책 판단에 반영된 형적은 없다. 삼별초의 日 本 請 願 몽골 내습에 대한 종래의 견해는 몽골 고려라고 하는 적에 대해서 우리 카마쿠라 무사가 얼 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라고 하는 도식에 치우쳐 있었다. 지금 눈을 유라시아로 넓혀 제지역이 몽골의 급격한 팽창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라고 하는 시점에 선다면, 다른 역사적 현실이 보인다. 예를 들어, 1280년대에는 전통적으로 견원지간이었던 베트남 참파 간에 몽골의 위협이나 침략에 대항한 국제적 共 同 이 성립했었다[ 旗 田, 1965]. 그리고 같은 역사적 조건은 동아시아에도 있었 다[ 村 井, 1988]. 몽골군이 고려에 침략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보다 40년 이상이나 빠른 1231년의 일이다. 당시 고려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무인 정권(일본의 막부에 유사)은 다음 해에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 로 옮겨 저항의 자세를 나타냈다. 그 후 30년간 6번에 걸친 침략의 피폐에 빠져든 고려는 1260 년에 종속적인 강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19 몽골 내습과 異 文 化 접촉 17 삼별초란 징병제에 의한 부병 대신해 무인 정권 군사력의 핵심이 된 정예부대로 반몽 30년 전쟁의 주된 담당자였다. 1270년, 무인 정권이 쿠데타로 넘어져 왕실이 몽골에 완전히 굽히려 했을 때, 삼별초는 몽골 병사가 많이 와서 인민을 살육한다. 무릇 나라를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毬 庭 에서 만나자. 라고 하는 격문을 날려 반란에 일어섰다. 반란군은 왕족 한 명을 왕에 옹 립하고 정부기관을 조직하여 근거지를 한반도 서남단의 진도로 옮겼으며, 게릴라전법으로 몽골 군과 고려 정부를 괴롭혔다. 1271년, 삼별초는 牒 狀 을 일본에 보내 원군과 자금을 요청했다. 고려의 정통 정부를 자인하 는 삼별초는 강화도로부터 진도로의 이동을 천도 라고 말한다. 또, 漂 風 人 護 送, 遣 使 問 訊 등 평 등 호혜의 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했다. 그 시야에는 일본과의 공동에 의한 몽골에의 저항이 취해 지고 있었다. 참고로 첩장이 보내진 것은 진도가 함락한 동년 5월 이전으로 몽골군 장수 忽 林 赤 이 開 京 에서 일본으로의 출격기지인 合 浦 에서 출격한 것은 동년 8월이다. 첩장 발신의 시점에서 합포를 포함한 김해부는 삼별초의 세력 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屯 金 海 府 之 兵, 先 廿 許 人, 送 日 本 国 事 라고 하는 첩장의 한 구절은 종래 나 자신을 포함해 몽골군의 동정을 전한 것이라고 해석되어 왔지만, 이영이 말하고 있듯이 삼별초 자신의 행동을 말한 것일 것이다[이영, 1999]. 더욱이 삼별초의 외교 활동이 일본에 대한 원조 요청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이 근년의 연구 에서 밝혀졌다[ 太 田 彌, 1995 山 本, 2001]. 趙 良 弼 이 태어난 곳인 河 北 省 賛 皇 県 에 있는 石 刻 史 料 賛 皇 復 県 記 에 良 弼 의 첫 번째 도일에 대해 명을 받아 동쪽의 일본에 사신을 보낸다. 크고 넓은 바다로서 그 사이를 측정할 수가 없다. 叛 賊 인 耽 羅 가 그 사이를 덮고 있다. 라고 있다 년 5월에 진도로부터 제주도(탐라)로 옮긴 삼별초가 良 弼 의 외교 활동을 방해했다고 한다. 이 와 같은 사실은 元 朝 名 臣 事 略 에 수록된 良 弼 의 묘비명에는 이미( 大 宰 府 에) 이르렀다. 宋 人 과 高 麗 耽 羅 모두 그 일을 막고 어지럽힌다. ( 少 弐 氏 가) 公 을 大 宰 府 에 머무르게 해 사람을 보내 守 護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별초의 방해 공작이 太 宰 府 에서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 거기에 宋 人 이 관여하고 있었다는 두 가지 점이 알려지고 있다. 良 弼 의 太 宰 府 도착은 1271년 9월 19일로 같은 달 3일부터 京 都 의 조정에서는 삼별초의 첩 장에 대한 대응이 논의되고 있었다( 吉 続 記 ). 太 宰 府 에서 良 弼 과 접촉한 탐라 라고 하는 것은, 이 첩장을 휴대하고 도항한 사절단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金 海 府 로부터 일본에 보내진 약 20 명의 병사는 그 호위를 담당했었다고도 생각된다. 太 宰 府 는 정반대의 임무를 띤 2개의 사절단을 동시에 맞이해 긴장에 싸였을 것이다. 良 弼 에 대한 방해 공작에는 宋 人 도 관여하고 있었다. 賛 皇 復 県 記 에 時 に 偽 宋, 海 道 の 両 浙 を 去 ること 遠 からざるを 以 て, 大 いに 之 を 畏 れ 라고 있는 바와 같이 남송은 良 弼 의 설득이 이루어져
20 1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일본이 몽골의 陣 營 에 포함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몽골에서 보면, 고려의 반몽골 세력, 남 송, 일본의 3자가 제휴하는 것은 더할 바 없는 위협이었다. 남남송의 공작은 良 弼 의 재차 도일에 즈음하여도 시도되었다. 賛 皇 復 県 記 에 때로는 송을 가장하여 僧 滕 原 瓊 林 등을 파견하여 ( 良 弼 의) 사행을 세워 염탐하였다. 라고 있어, 良 弼 은 일 본인과 송의 使 僧 에 대해서 송인의 浮 偽 無 信 을 내세워 중국 대륙의 대부분은 몽골의 것이 되고, 동남 彈 丸 의 땅만 남았을 뿐이라고 내세웠는데, 승려는 입을 다문 채 반론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같은 내용으로서 良 弼 의 묘비명에도 송나라의 使 僧 瓊 林 이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渝 平 ( 和 平 을 교란하고?)하고, 이로써 회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公 이 돌아갔다. 라고 있어, 이것은 일본을 몽골 에 따르게 한다고 하는 良 弼 의 임무를 사승이 방해하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 다. 남송이 일본에 보낸 사승 瓊 林 이란 일본으로부터의 도해 선승 桂 堂 瓊 林 인것 같다. 延 宝 伝 燈 録 권3과 本 朝 高 僧 伝 권23에 의하면, 그는 文 永 연중에 입송해, 후에 杭 州 径 山 住 持 가 된 虚 舟 普 度 로부터 臨 済 宗 松 源 派 의 법을 이어받아, 귀국 후 洛 東 의 勝 林 寺 에서 지내게 되었다. 귀 국 때에 虚 舟 의 法 衣 와 頂 相 을 賜 與 받았고, 嘉 元 연중에는 해외에서 건너온 虚 舟 和 尚 語 録 을 募 縁 출판했다고 한다. 그의 스승 虚 舟 가 있던 곳은 蘇 州 와 杭 州 등 南 宋 중추부에 있는 사원이 며, 그 모임하에 있던 瓊 林 과 같은 도해승은 대일 외교에 안성맞춤의 인재였다. 이상과 같이 文 永 의 役 직전, 일본에 대한 3개의 세력의 외교적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그 중 에 남송만이 趙 良 弼 의 일본 설득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는 점에서 성과를 올렸다고 말할 수 있 다. 결과적으로 良 弼 과 삼별초에 의한 공작은 완전히 반대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두 실패 로 끝났다. 여기에서는 삼별초에 대해서만 언급해 두도록 하겠다. 첩장을 받은 조정은 亀 山 院 에서 회의를 열어 대응을 검토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첩장이 고 려의 반몽골 세력의 것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았고, 글자 등의 해석을 儒 者 들이 서로 경쟁할 뿐이었다. 한편, 北 条 時 宗 을 수반으로 한 막부는 첩장을 접하고, 九 州 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御 家 人 에게 그 영지로 가서 守 護 의 지휘 아래에서 異 國 의 방어 에 임하도록 명령했다. 첩 장은 몽골의 위협을 전했다고 하는 문맥에서만 이해되고 있었고, 자국의 방위를 굳히는 것뿐이 었으며, 삼별초의 국제적인 공동 제안이 고려된 형적은 없다. 제주도에 거처한 삼별초는 나아가 2년간을 더 계속해서 저항하다가, 1273년에 원 고려 연합 군에 의해 괴멸되었다. 그 다음 해에, 元 은 일본 정벌을 실행으로 옮겼다( 文 永 의 役 ). 전쟁이 생 각지도 못한 결과로 끝난 직후, 막부는 이국 정벌, 즉 한반도로의 反 攻 에 착수한다. 거기에는 모험적인 보복주의가 있을 뿐이었고, 삼별초의 입장에 대한 단 하나의 이해도 보이지 않는다. 당
21 몽골 내습과 異 文 化 접촉 19 시의 막부에 이국 정벌 을 감행 할 정도의 여력이 없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2. 전투 몽골 전투에 참가한 肥 後 国 御 家 人 竹 崎 季 長 는 文 永 弘 安 두 차례 전투의 모습과 그 중간에 앞장서서 적진에 쳐들어간 공훈에 대한 인정의 요구를 구하기 위해 鎌 倉 으로 향한 경위를 그림 두루마리에 그리게 해, 文 永 의 役 에 대한 은상으로서 배령한 肥 後 国 海 東 郷 의 鎮 守 甲 佐 大 明 神 에 봉납했다. 이것이 유명한 蒙 古 襲 来 絵 詞 (이하, 絵 詞 라고 생략한다)에서 현재는 宮 内 庁 三 の 丸 尚 蔵 館 에 소장되어 있다. 蒙 古 襲 来 絵 詞 는 季 長 개인의 눈을 통해 몽골 전투라고 하 는 세계 전쟁의 일단을, 동시대성과 사실성을 가지고 그려낸 작품이다. 대외 전쟁의 경험이 없는 일본의 무사들은 편성도 전법도 무기도 완전히 다른 이국의 군을 상대로 어떻게 싸운 것일까. 주로 吉 田 光 邦 [1975], 佐 藤 鉄 太 郎 [2005], 太 田 彩 [2000]의 성과에 의거하면서 鎌 倉 무사가 몽 골 전투를 통해서 어떠한 이문화와 접촉했는지를 살펴보겠다. 陸 戰 絵 詞 에 그려진 몽골군의 무기로서는 화약을 사용한 병기인 철포 (총)이 눈을 끈다. 철의 반 구 둘을 합한 것 내부에 화약을 장치해 손에 들 수 있는 투척기를 사용해 적진에 던져 작렬시키 는 것으로 그다지 살상력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굉음에 의한 위협 효과는 발군이었다. 八 幡 愚 童 訓 (이하, 愚 童 訓 이라고 약칭함)은 도망칠 때에 철포를 쏘아 어둡게 하였는데, 그 소리가 높이 울렸고, 마음을 혼란케 하여 간을 조리게 하였으며, 어지럽게 귀가 울려 亡 然 하게 東 西 를 분별하지 못했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퇴각 시에 사용되었던 것은 絵 詞 의 그림과 일 치한다. 이것에 북등 징의 소리도 더해져, 대단히 떠들썩한 전쟁이었던 것 같으며, 愚 童 訓 에 그 소리의 굉장함에 일본의 말이 모두 놀라 進 退 할 수 없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활과 화살은 쌍방이 사용하고 있었지만, 몽골군의 활은 2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宋 式 의 단궁 으로 쥐는 부분이 패인 형태를 하고 있으며, 사정거리가 길고, 화살촉에는 독이 발라져 있었던 것 같다. 또 하나는 쥐는 부분에 패인 곳이 없는 몽골식의 장궁이다. 또, 몽골군의 진에서는 병사 의 대부분이 창이나 칼끝을 세워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그다지 사용되지 않았기에 예 상외로 유효하였는데, 愚 童 訓 은 칼 끝, 무기의 자루, 무기류 등이 틈새를 찔러와 뺄 수가 없
22 2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외 愚 童 訓 에는 석궁이라고 부르는 투석기도 있었다는 것을 말하 고 있다. 몽골군의 陣 에는 큰 북이 3개와 징( 銅 鑼 )이 하나 보이지만, 이것들은 愚 童 訓 에 물러날 때 는 逃 鼓 를 치고, (진을) 펼칠 때는 責 鼓 를 울리는 것에 따라서 행동하였다. 라고 있는 바와 같이 병력을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신호 수단이었다. 소리를 내는 것이 상징하는 집단 전법은 일 본군을 당황하게 하였다. 愚 童 訓 은 一 面 에 나란히 서서 다가오는 자가 있다면, 중간을 퇴각 시키고 양쪽의 끝을 회합시켜 감싸게 하여 남김없이 토벌한다. 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如 日 本 戦, 相 互 名 乗 リ 合 テ, 高 名 不 覚 ハ 一 人 宛 ノ 勝 負 ト 思 フ 処, 此 合 戦 ハ, 大 勢 一 度 ニ 寄 合 テ, 足 手 ノ 動 処 ニ 我 モくト 取 付 テ 押 殺 シ, 虜 ケリ. 是 故 懸 入 ル 程 ノ 日 本 人, 無 漏 者. 야!, 야!, 우리들이야말로 라고 자칭하고 있는 동안에 밀려 모여들어 깔아 뭉게 버리는 희 비극에 전투 방법의 차이가 보이고 있다. 전투 개시 때도 그러하였으며, 愚 童 訓 에 의하면, 일 본의 대장 少 弐 景 資 가 箭 合 ノ 為 トテ 小 鏑 ヲ 射 タリシニ 라고 하여 몽골의 진영으로부터 와 하고 웃음소리가 올랐다고 한다. 鏑 矢 는 날리면 소리를 내는 의례용의 화살이다. 그런데 文 永 의 役 의 처음 전투에 竹 崎 季 長 는 선두에서 공을 세우려고 제일 앞에서 몽골의 진영에 공격해 鳥 飼 潟, 즉 현재의 福 岡 市 城 南 区 鳥 飼 주변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a: 凶 徒 は 麁 原 に 陣 を 取 りて, 色 々の 旗 を 立 て 並 べて, 乱 声 暇 なくしてひしめきあふ. b: 季 長 はせむかふを, 藤 源 太 すけみつ 申 す. 御 方 は 続 き 候 らん. 御 待 ち 候 て, 証 人 を 立 てゝ 御 合 戦 候 へ と 申 を, 弓 箭 の 道, 先 をもて 賞 とす. たゞ 懸 けよ とて, をめいて 懸 く. c: 凶 徒, 麁 原 より 鳥 飼 潟 の 塩 屋 の 松 のもとにむけ 合 せて 合 戦 す. 一 番 に 旗 指, 馬 を 射 られて 跳 ね 落 さる. 季 長 以 下 三 騎 痛 手 負 ひ, 馬 射 られて 跳 ねしところに, 肥 前 の 国 の 御 家 人 白 石 の 六 郎 通 泰, 後 陣 より 大 勢 にて 懸 けしに, 蒙 古 の 軍 ひき 退 きて 麁 原 に 上 がる. 詞 書 에 이렇게 기술한 季 長 의 분전 장면은 많은 蒙 古 襲 来 絵 詞 의 그림 중에서도 가장 유명 하다. 몽골 병사의 화살에 맞은 기병의 말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리며, 季 長 의 오른쪽 무릅에도 화 살이 명중하고 있다. 머리 위에서는 던져진 창들이 날아가고 폭탄이 작렬하고 있다. 왼손에는 季 長 에게 화살을 맞은 3명의 獰 猛 한 얼굴을 한 몽골 병사가 있으며, 그 뒤를 한 무리의 몽골병이 퇴각해 간다.
23 몽골 내습과 異 文 化 접촉 21 그런데, 근년의 연구에 의해 이 그림에는 많은 의문점과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 다. 佐 藤 鉄 太 郎 과 太 田 彩 의 분석 결과를 내 나름대로 종합해 소개해 보겠다(자세한 것은[ 村 井, 2001]을 참조). 중심을 이루는 그림 7은 2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오른쪽 중간의 그림 7-Ⅰ에 기마의 季 長, 왼 쪽 중간의 그림 7-Ⅱ에 뒤를 보이고, 도망치는 몽골의 보병이 배치되어 있으며, 두 종이의 이음 매를 사이에 두고 季 長 과 대치하는 3명의 몽골 병사가 그려져 있다. 그러나 원래의 두 종이는 연속하지 않은 것으로 3명의 몽골 병사는 추가한 것이다(잘 보면, 이 3명만이 다른 몽골병과 비 교해 윤곽선, 옷차림, 표정 등의 붓 사용법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7-Ⅰ의 우측에 있는 그림 6은 우측으로 季 長 의 자형 三 井 資 長 이 있는데, 말 위에서 화살을 몽골병에게 쏘고 있 으며, 좌측에 몽골병 10명(그 중에서 1명은 기마), 季 長 에게 등을 돌리고 도망가고 있다. 이것을 그림 7-Ⅰ과 그림 7-Ⅱ의 사이로 옮기면, 오른족에 왼쪽으로 몽골병이 퇴각하는 모습이 자연스럽 게 연결된다(다만 사이에 약간의 결핍이 있다). 그림 7-Ⅰ로 연결되게 된 그림 5에는 말을 쏘면서 무리지어 있는 季 長 이 가지고 있는 깃발 뒤로 말을 탄 채 깃발을 들고 선도하고 白 石 通 泰 의 군 단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詞 書 c에 있는 通 泰 가 季 長 의 위기를 구하는 상황이 명료하게 그려져 있다. 한편, 그림 7Ⅱ의 왼쪽으로 계속되는 그림8에서는 울타리와 격자의 방패를 늘어놓은 곳의 뒤에 몽골병이 진을 펴고 있는데, 이것은 詞 書 a를 묘사한 것이다. 이 復 原 案 에서는 詞 書 c에 대응하는 그림이 詞 書 a에 대응하는 그림보다 앞(오른쪽)에 와있고, 詞 書 와 그림이 시간적으로 역전한다. 그것을 필연적으로 만든 것은 오른쪽 단에 白 石 通 泰 의 기 마 군단, 왼쪽 단에 몽골군의 陣 이라고 하는 양감을 배치해, 중앙 우측에서 季 長 과 그 부하들의 고군분투, 좌측에서 거기에 쫓기는 몽골병을 그리는 화면 구성의 논리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선 공의 공적 이라는 그림에 대한 해석이다. 일본 측의 전법은 어디까지나 단독의 리더에 이끌린 군단이 독자적인 의지로 움직인다. 군단 은 큰 규모로 菊 池 武 房 과 白 石 通 泰 의 100여 騎, 작은 규모로 季 長 과 같은 數 騎 이다. 詞 書 b에 의하면, 從 者 스케미츠(すけみつ)에게 아군의 도착을 기다려 証 人 을 세우고 싸우도록 권유받은 季 長 은 선공이야말로 무사의 道 라고 말하며 적진에 돌입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전투 방법이 나타나 있지만, 어느 쪽이나 개인 중심인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선공과 같은 모험적 행동은 전 투 전체의 귀추에 있어서 마이너스가 되지는 않지만, 당시 일본군은 그것을 상주는 이외의 논리 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通 泰 군단은 기마병들이 같은 모습과 방향을 보이는 한 무리의 덩어리로서 그려 통일적인 의지를 표상하고 있다. 군단의 규모가 커지면, 그 내부에서 집단 전법의 비중이 커지는 것이다. 더욱이 스케미츠가 권했던 전법에는 개개의 무사단을 넘어
24 2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집단전으로 연결되는 요소가 있었고, 때문에 季 長 의 무사의 道, 선공으로서 賞 을 내림 의 형태 가 눈에 띄는 것이다. 해전 絵 詞 하권은 대부분이 弘 安 의 役 의 해전 장면으로 점해져 있다. 국내의 전투 중에서도 중 세의 해전을 이만큼 극명하게 그린 그림은 없다. 우선은 배의 묘사부터 보겠다. 일본 측의 병선에는 대소 두 종류가 있다. 작은 것은 草 野 大 矢 野 秋 月 등의 惣 領 이 인솔해 각각 10명 미만을 실었던 刳 船 (쿠리부네)보다 아주 약간 큰 정도의 선박이고, 큰 배는 季 長 을 포 함한 肥 後 勢 의 혼성부대와 少 弐 経 資 등의 세력이 탄 약간 대형 구조의 선박이다. 후자의 1척의 선미에는 적선에 옮겨 탈 때 사용하는 작은 端 船 (하시부네) 가 이어져 있다. 季 長 이 몽골 병사의 목을 베는 유명한 장면에서는 약간 대형의 선박의 적선에 季 長 의 종자가 갈퀴로 끌어서 다가가 고 있다. 몽골군의 병선도 대소의 두 종류가 있다. 작은 것은 走 舸 로 경쾌한 操 船 이 가능한 타입이며, 말하자면 상륙용 선박이다. 선상에 거실이 없으며, 현측에 방패를 늘어놓아 방어한다. 여러 척이 그려지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에는 뱃머리나 방패에 일본군이 쏜 화살이 무수히 박혀있다. 일본 측의 큰 배와 동일한 크기 아니면, 그것 보다 약간 큰 것처럼 보인다. 큰 선박은 闘 艦 으로 갑판 이 있으며, 화물 창고에도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 큰 것은 선미에도 1실을 설치하고 있다. 뱃머리 위에는 網 代 의 담이 있는데, 갑판에 있어도 半 身 을 숨길 수 있게 되어 있다. 뱃머리 측의 구멍으로부터 노를 내어서 젓는다. 季 長 이 옮겨 탄 1척과 그 좌측에 그려진 3척이 이것에 해당 되는데, 어떤 선상에서는 병사가 북과 징을 울리고 있다. 일본군은 선박을 이용한 전쟁에서도 기마전 같이 개인 중심이었다. 弘 安 의 役 의 종반에 季 長 은 몽골의 패잔병이 있는 鷹 島 로 향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병선이 돌아가 버려 오지 않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곳에 지나가던 타카마사라는 무사의 배에 수호의 부르심이 있습 니다. 라고 거짓말 하여 승선하려고 했으나, 금방 들켜버렸다. 빌다시피 끈질기게 부탁하여 겨우 季 長 본인만 승선할 수 있었지만, 투구는 若 党 (신분이 낮은 가신)에게 맡겨진 채 였다. 季 長 이 투구 대신에 정강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대는 도구(스네아테)를 얼굴에 대고 있는 것을 본 타카마 사는 옆에 있던 若 党 의 투구를 빌려주려고 하지만, 季 長 은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투구를 쓰지 않고 맞는다면 季 長 의 탓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처자가 탄식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받을 수 는 없습니다. 라고 거절한다. 사실, 絵 詞 에는 격렬한 움직임으로 季 長 의 이마에서 날아간 스네
25 몽골 내습과 異 文 化 접촉 23 아테가 확실히 그려져 있다[ 藤 本, 2003]. 季 長 의 예로 보아 주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로 각 御 家 人 은 자기 부담으로 배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둘째로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자기 몸 하나만이라도 저돌적으 로 전진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였다. 전투의 이튿날 아침, 季 長 으로부터 戰 功 에 대한 보고를 받은 관동의 사자는 自 船 候 はで, 一 度 ならずかり 事 ( 虚 言 )のみ 仰 せ 候 て, 船 々に 召 され 候 て, 御 大 事 に 会 はせ 給 候 御 事 は, 大 猛 悪 の 人 に 候 と, 上 (かみ)の 見 参 に 入 まいらせ 候 べく 候 라고 약속하고 있다. 大 猛 悪 은 넘쳐난 용맹에 질린 듯한 기분을 나타내고 있다. 또, 若 党 을 내버려두고 타카마사의 배에 옮겨 탔을 때, 季 長 은 다시 또 무사의 道, 앞으로 나감으로서 상을 받는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일본 측의 공격에 대응하는 몽골군의 전법은 이것 또한 어디까지나 조직적이었 다. 草 野 次 郎 의 야습으로 피해를 입은 뒤, 그들은 주의하여 배를 서로 대어 돌려서 방어하고, 다가오는 자가 있을 때, 큰 배에서 石 弓 을 쏘게 하면 일본의 배는 작기 때문에 맞아서 파괴되지 않을 것이 없다. 라는 작전을 취했다( 愚 童 訓 ). 몽골군이 선상에서 이용하는 방패는 여러 종류 있지만, 배 마다는 통일되어 있어 군단 조직 본연의 자세를 나타낸다. 첫째는 焦 茶 色 의 장방형 판으로 상부에 1척은 白 丸, 1 隻 은 黒 丸, 1 隻 은 검은 휘장과 같은 모양이 그려지고 있다. 둘째는 위에 부분에 구름 모양으로 卍 의 모양이 그려져 있고, 뒤에는 가동식의 버팀봉이 붙는다. 卍 모양은 漢 人 들 사이에서 이용되고 있던 것으로 武 経 総 要 라는 책에 의하면, 皮 漫 이라고 하는 생 소가죽으로 만든 병기의 표면에도 이 형태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셋째는 외형은 卍 을 곁들 인 방패와 같지만, 卍 의 부분의 사각의 형태가 파여 있다. 넷째는 1장의 판이 아니라, 網 代 나 簀 子 를 장방형으로 짠 방패이다. 弘 安 의 役 에서 江 南 軍 은 직업 군인일 뿐만 아니라, 愚 童 訓 에서 이번에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장차 거주하기 위한 재로로서 생활의 도구를 갖추고, 경작을 위해 호미 가래까지도 가지고 가게 해야만 한다. 라고 말하고 있듯이 이민 선단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대다수가 그런 일반 민중으로부터 구성된 14만 명은 대부분이 鷹 島 주변의 바다에서 익사하였고, 바다 위는 대나무 가지를 뿌려 놓은것과 다를 바 없이, 시신이 서로 겹쳐져 마치 섬과 같았다. 라는 情 景 을 묘사하 고 있다( 愚 童 訓 ). 3. 불교와 무역 몽골 내습 사료의 상당수는 불교색이 진한 일본중세의 문화 상황을 시작으로 한 승려가 남긴
26 2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텍스트이다. 특히, 日 蓮 의 경우, 立 正 安 国 論 의 예언 이래, 대몽골 관계의 추이가 스트레이트 하게 종교적 언설에 반영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많이 남아있는 소식류가 상당한 정보를 가져다준 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보이는 대외적 반응은 다른 승려나 일반인과는 대조적으로 그 자 체가 이문화 접촉의 특이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전근대의 전쟁에서는 근현대와는 달리 국가 간의 긴장이 문화적 경제적 교류의 단절에 반드시 직결되지 않고, 전쟁 상태와 무역이 반드시 양립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文 永 弘 安 두 차례의 役 사이였던 1278년, 쿠빌라이가 日 本 国 人 市 舶 으로 무역을 허가한 것은 그 한 사례이다( 元 史, 世 祖 本 紀 ). 또, 1276년 南 宋 의 수도 臨 安 ( 杭 州 )의 함락이라는 대사건이 臨 安 을 포함한 강남 지역에 근본적인 사회변동을 가져온 것처럼 은 보이지 않는다. 과연, 弘 安 의 役 후에 공백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지나자 전쟁 상태의 계속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강남간 무역선의 왕래는 개전 전보다 번창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관 점으로부터 불교와 무역을 거론해보도록 하겠다. 日 蓮 의 독특함 日 蓮 에 들어가기 전에 몽골 내습에 눈에 띈 반응을 나타낸 다른 한 명의 승려 東 巌 慧 安 에 대해 언급해 두겠다. 洛 外 의 臨 済 宗 正 伝 寺 住 持 였던 東 巌 이 1271년 9월 15일에 八 幡 大 士 六 十 余 州 一 切 神 等 에게 바친 원문( 正 伝 寺 文 書 )은 뒤쪽에 모든 세상의 끝에서 끝까지 우리나라는 모든 나라들 중에 뛰어난 나라 이라고 하는 和 歌 가 기록되어 있어, 패전 전에는 황국 정신의 발 로로서 칭송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 원문의 高 麗 は 半 ば 蒙 古 に 違 背 し 本 朝 に 随 順 す 라고 하는 일절로부터 그가 삼별초 의 첩장을 보고 있었으며, 그러한 반몽 행동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모처럼의 알아차림도 神 功 皇 后 와 그의 子 八 幡 神 로의 열렬한 기원을 통해서 二 国 화합하여, 衣 冠 이 일치 한다. 두 번의 牒 使 는 고려인이다. 명확하게 의심할 바가 없다. 라고 하는 바와 같이 고려를 몽골 과 동일한 적이라고 보는 전통적인 관점으로 흘러가버린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의 지식 계층에 공감된 것으로 중국과의 교제가 깊은 臨 済 僧 - 東 巌 의 嗣 法 師 는 渡 来 僧 兀 庵 임-도 예외는 아니었 다. 9월 21일에 조정에서 논의된 口 宣 案 에도 西 蕃 ( 高 麗 )의 사신이 와서 北 狄 ( 蒙 古 )의 陰 謀 를 알 렸다. 라는 글이 있지만( 吉 続 記 ), 그러한 인식이 외교 판단에 반영된 행적은 없다. 日 蓮 은 1260년에 立 正 安 国 論 을 막부에 제시하고, 법화경에 전적으로 귀의하지 않으면 他 国 侵 逼 難 이 발생한다고 예언하고 있었지만, 빠르게도 5년 후에 그것이 몽골의 위협으로서 현실 화함으로써 한층 더 자기의 사명에 확신을 가졌다. 經 文 에 있는 바와 같이, 그 나라로부터 이
27 몽골 내습과 異文化 접촉 25 나라를 공격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중에 日蓮이라는 한 사람이 마침내 그 西戎의 악행을 누르는 사람이고, 동시에 이것을 알고 있다. 라고 호언하고 있다. 그에게는 막부 내에 친한 정보 제공자(아마도 신자)가 있었던 것 같고, 민간의 종교자이지만 민첩하게 몽골 관계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부는 천태종 이외의 제종파를 과격하게 배격하는 日蓮 일파를 대외적 위협이 한창인 가운데 결속을 교란하는 불온 분자로 간주하여 그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탄압을 가했다. 삼별초의 첩장을 접한 막부는 1271년 9월 13일, 九州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御家人, 또는 대관의 하향을 명해 이국의 방어와 영내 악당의 진압을 명했지만, 유명한 龍口法難 이 일어난 것은 그 전날이었다. 日蓮 일파의 언 동은 악당에게 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졌던 것이다[川添, 2008]. 日蓮은 이러한 막부의 謗法 이 계속되는 한 몽골의 침략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상황을 蒙古国は 天の御使として法華経の行者をあたむ人人を罰せらるゝか 라고 해석했다( 異 体同心事 ). 막부가 몽골의 사자를 베었던 것에 대해도, 日本国의 적으로서 念仏 真言 禅 律 등의 法師는 베지 않고, 죄 없는 蒙古 사신의 머리를 베는 것이야말로 불편을 초래하는 것이 다. 라고 엄격하게 비판하고 있다( 蒙古使御書 ). 蒙古 의 의미를 이와 같이 이해한 日蓮은 신이 준 시련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파악 한 귀중한 텍스트를 남겼다. 去文永十一年 太歳甲戌 十月に, 蒙古国より筑紫によせて有しに, 対馬の者かためて有し に, 摠馬尉 宗助国 逃けれは, 百姓等は, 男をは或は殺し, 或は生取にし, 女をは或は取集て, 手をとをして船に結付, 或は生取にす 一人も助かる者なし 壱岐によせても又如是( 一谷入 道殿御書 ) 当時つくしへむかへハ, とゝまるめこゆくをとこ, はなるゝときハかわをはくかこと く, かをとかをとをとりあわせ, 目と目とをあわせてなけきしか, 次第にはなれて, ゆいの はま, いなふら, こしこへ, さかわ, はこねさか, 一日二日すくるほとに, あゆみくとをさか るあゆみを, かわも山もへたて, 雲もへたつれハ, うちそうものハなみたなり, ともなう ものハなけきなり, いかにかなしかるらんかとなけかんほとに, もうこのつわものせめ きたらハ, 山か海もいけとりか, ふねの内かかうらいかにて, うきめにあハん( 富木尼御前 御書 ) 日蓮의 눈에는 謗法 으로 한패가 된 일본의 하늘과 땅의 신은 완전히 무력했다. 文永의 役에 서 筥崎 八幡宮이 탄 것을 그 나라의 大王이 이 나라의 신에게 승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라 고 판단해 의무를 완수할 수 없었던 八幡神을 大科의 神 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川添, 2008].
28 2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앞에서 언급한 선종의 東 巌 이나, 좀 더 유명한 律 宗 의 叡 尊 이 일본의 수호신인 八 幡 神 에게 열성 을 바치고, 법력으로 몽골에 대항하려 했던 것에 비해, 日 蓮 은 국가적 정통파와는 대척적인 입장 에 서있었다. 그만큼 弘 安 의 役 의 결말은 그에게 있어 뜻밖의 것이었을 것이다. 불안해하고 있 던 제자로부터 그 의미에 대해 질문을 받자, 此 別 一 門 大 事 也, 惣 日 本 国 凶 事 也. いつもの 事 な れは, 秋 風 に 纔 水, 敵 船 賊 船 なんとの 破 損 仕 て 候 を, 大 将 軍 生 取 たりなんと 申, 祈 成 就 の 由 を 申 候 け に 候 也. 又 蒙 古 の 大 王 の 頸 の 参 て 候 かと 問 給 へし 라고 대답했지만, 역시 강변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하여 消 息 으로부터 몽골에 대한 언급은 사라져 1282년에 사망하게 된다. 최후의 遣 使 와 五 山 文 化 의 여명 弘 安 의 役 후에도 쿠빌라이는 일본 정벌을 포기하지 않고, 반복해서 전쟁 준비를 명했지만, 국내외의 악조건이 겹쳐져 실행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움직임의 방법은 전쟁 일변 만이 아니었다. 弘 安 의 役 후 얼마 되지 않은 1283년, 国 信 使 愚 渓 如 智 王 君 治 에게 보낸 日 本 国 앞으로의 詔 ( 善 隣 国 宝 記, 巻 上 )에는 和 好 の 外 に 余 善 無 く, 戦 争 の 外 に 余 悪 無 し 라고 있다. 일찍이 일본이 사절을 잡아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묻기 위해 해군을 보냈다. 교전 중에 사자를 보냈는데, 일본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우리 군에 대항했다 라고 하는 주장은 당연한 결과로서 화호의 요구를 말만의 감언으로 정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무변일변도의 일본 외교의 경직상이 부각된다. 그러나 이 해와 다음 해의 2번 시도된 교섭은 일본의 중앙까지 이르 지 못하고 끝났다. 1294년에 쿠빌라이가 죽어, 뒤를 이어받은 손자 테무르가 98년 국교 수립을 요구하는 사절을 일본에 보낸 것은 쿠빌라이의 경연 두 가지 중 화호노선에 준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지명되었던 것이 舟 山 列 島 에 있는 宝 陀 寺 ( 普 陀 山 ) 住 持 一 山 一 寧 으로 사신을 보내기에 앞서 妙 慈 弘 済 禅 師 江 浙 釈 教 総 統 이라고 하는 직함이 부여되었다. 사절의 送 達 은 우연히 慶 元 ( 寧 波 )에 입항한 상선에 맡겨졌다. 普 陀 山 은 慶 元 으로부터 일본으로 향하는 항로상에 있으며, 開 山 의 恵 萼 은 9세기 중엽에 활동한 일본인이다. 불교와 민간 무역에 의지한 국가 외교였지만, 이것을 마 지막으로 원이 일본에 외교 사절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一 山 은 1247년의 태생으로 明 州 ( 寧 波 )와 杭 州 의 여러 사원에서 天 台 律 禅 을 폭넓게 배워, 마침내 선종 오대산 2위의 天 童 寺 에서 簡 翁 居 敬 에게 嗣 法 했다. 불교 이외에도, 문학 書 주자학 등에 통달한 올 라운드의 문화인이었다[ 西 尾, 1999a]. 1299년 일본에 이른 一 山 을 막부에서는 처형하라는 논의도 있었지만, 沙 門 은 福 田 이다. 有 道 의 士 는 万 物 에 관심이 없다. 元 国 에서는
29 몽골 내습과 異 文 化 접촉 27 元 의 福 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福 이다. 라고 하는 관점으로부터 北 条 貞 時 의 결단으로 伊 豆 의 修 禅 寺 에 幽 閉 되었다. 이윽고 그 유폐도 풀려 도래승이 거주하는 것이 한나의 관례가 되었 던 建 長 寺 의 住 持 로 지내게 되었다. 1317년에 71세에 사망할 때까지 円 覚 寺 南 禅 寺 에서도 거주 했으며, 北 条 得 宗 家 나 後 宇 多 院 의 崇 敬 을 받았다. 특히, 後 宇 多 院 는 1319년에 一 山 의 頂 相 ( 肖 像 画 )에 스스로 宋 地 万 人 傑, 本 朝 一 国 師 라고 賛 을 가했다고 한다( 一 山 和 尚 行 記 ). 一 山 에게 嗣 法 한 일본 승 雪 村 友 梅 ( )가 있다[ 今 谷, 1994]. 雪 村 은 1307년부터 23 년간 元 에 체재하여 동시대 중국 문화를 흡수했다. 일본의 초기 五 山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元 재에 있을 때의 시문집으로 岷 峨 集, 귀국 후의 작품집으로 宝 覚 真 空 禅 師 語 録 이 있다. 一 山 에서부터 출발한 법계는 커다란 문파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嗣 法 이 이루어지지 않은 場 에서 그가 준 문화적 영향은 절대적이다. 虎 関 師 錬 ( )은 一 山 으로부터 일본 고승의 사적에 대한 질문을 받았지만 즉답하지 못하였는데, 僧 伝 集 의 형태를 취하는 日 本 仏 教 史 元 亨 釈 書 를 저술했다. 夢 窓 疎 石 ( )는 一 山 을 그리워해 京 都 로부터 鎌 倉 으로 물러나, 建 長 寺 入 寺 를 지원하여 偈 頌 (불교적 漢 詩 )의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 후 夢 窓 派 는 室 町 幕 府 朝 廷 의 外 護 아래에서 임제종의 최대 세력을 차지하게 된다. 龍 山 徳 見 ( )은 一 山 이 円 覚 寺 에 있었을 때 역시 게송의 시험으로 수석을 잡았다. 1305년부터 45년간이나 元 에 체재하여 귀국 후 많은 문필승려를 길렀다. 작품집에 黄 龍 十 世 録 이 있다. 一 山 은 스스로가 주지를 지내고 있는 절에 수행승을 받을 때, 偈 頌 을 작성케 하여 중국어로 朗 詠 시켰다. 寺 內 의 일상생활에서도 어느 정도의 중국어 능력이나 중국 문화의 소양이 요구되었 다. 학예의 방면에서 그가 일본의 선종사회에게 준 영향은 지극히 커서 日 本 五 山 문학의 祖 로 평가된다. 西 尾 賢 隆 은 우리나라의 禪 家 가 폭넓게 독서인으로서 중국의 사대부에 필적하는 소양 을 가지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은 一 山 에 의한 偈 頌 의 시험이었다고 해 과언은 아니다 라고 지 적하고 있다[ 西 尾, 1999a]. 왜구 사건과 무역통제 弘 安 의 役 이후, 日 元 간의 상선 왕래는 당분간 끊어지고 있었지만, ****년에 부활하였고, 이후 14 세기 전반에는 송대 이상으로 번창하게 되었다. 상선을 이용해 도해한 선승들에 관련된 사료로부터 그 모습을 복원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집중해 寺 社 造 営 料 唐 船, 즉 寺 社 의 조영비 용을 무역 이윤에 의해 벌어들이려고 하는 勸 進 의 선박이 중국에 보내졌지만, 그 실태는 日 元 간을 왕래하는 중국 상인 경영의 무역 선박에 대해서 일본 중국 일본의 1회 항해에 한해서 일
30 2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본의 정치권력이 부여한 타이틀에 지나지 않았다[ 村 井, 2005]. 1309년에 慶 元 에서 일본 상인과 役 人 이 충돌해 域 內 가 대부분 소실되버리는 왜구 사건이 일어난 이래, 元 측의 왜구 를 이유로 하는 倭 船 에 대한 입항규제가 단속적으로 행해졌다[ 榎 本, 2007].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무역 확대의 요인이 존재했지만,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무역 규 제가 강해지고 있었다. 거기에 몽골 내습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1328년 겨울, 福 州 長 楽 港 에 일본에서 온 무역선가 있었는데, 다음 해에 일본으로 도항하여 2년 후 関 東 大 仏 造 営 料 唐 船 의 간판을 내걸게 된다. 福 州 에 일본으로부터의 배가 들어가는 것은 異 例 이지만, 그 배경에는 년 무렵에 慶 元 에서 왜구 사건이 발생해 당국이 일본으로부터의 선박에 대한 慶 元 입항을 금지하고 있던 사실이 있었다. 게다가 1342년 겨울에 慶 元 에 입항한 天 竜 寺 船 의 경우로부터는 倭 船 규제의 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종래, 天 竜 寺 船 은 큰 이익을 얻어 귀국한 것만이 강조되 어 왔지만, 실은 慶 元 에서 고난에 휩쓸리고 있었던 것이다. 1320년 이래 慶 元 의 방위를 담당한 鍾 万 戸 는 년 무렵에 慶 元 으로 일어난 왜구 를 진 압하고, 그 이후에 경원을 관할하는 浙 東 道 都 元 帥 는 倭 船 의 교역 유통을 금지하고 있었다. 鍾 万 戸 는 이 금지령에 근거해 天 龍 寺 船 을 취급했다. 무역 책임자 至 本 은 賊 船 이 아니라고 변명했지 만, 교섭은 난항을 겪었다. 해를 넘겨 간신히 무역은 인정되었지만, 선승들의 상륙은 더 이상 용 납되지 않았다. 渡 海 僧 愚 中 周 及 은 한 명의 중국 상인의 협력을 얻어, 작은 배로 慶 元 을 그냥 지나쳐 저명한 선승이 있는 절에 숨었지만, 이런 성공은 오히려 예외였다. 榎 本 渉 [2007]이 발견 한 抄 物 史 料 愚 中 周 及 年 譜 抄 로부터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 天 龍 寺 船 에 편승해 求 法 을 목표로 한 승려의 수는 60여인 이었다.2그 중 상륙에 성공한 것은 愚 中 의 일행 11명뿐 이었다. 3 渡 来 僧 清 拙 正 澄 의 제자들 17명은 밀입국하려다가 경비병에게 잡혀, 화가 난 鍾 万 戸 에 의해 몰살되었다. 4 天 龍 寺 船 에 잔류하고 있던 30여인의 승려들은 이것을 듣고 전원 일본으 로 귀국했다. 유사한 상황은 일본 측의 창구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12세기~13세기 전반의 博 多 에서는 중국 상인이 在 蕃 貿 易 을 경영하면서 다채로운 사회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런데 13세기 후 반이 되자, 그러한 동향이 사료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在 蕃 의 쇠퇴와 무역선 왕래 의 증가는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는 것 같다. 弘 安 의 役 직후, 막부는 타국으로부터 처음 들어 오는 異 国 人 등에 대해서는 制 止 를 가해야만 한다. 라고 하는 법령을 발했다. 새롭게 온 외국인 에 대한 배제에 의해, 博 多 의 중국인 거류지는 쇠퇴의 일로를 가게 되었고, 일본 거주가 어려워 진 중국 상인은 항상 무역선을 작동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몽골 내습을 경계로 博 多 에는 차츰 공권력의 지배가 침투해 갔다. 天 龍 寺 船 의
31 몽골 내습과 異 文 化 접촉 29 도항에 즈음하여, 博 多 의 公 府, 官 司 가 승선자의 선정에 일정한 관여를 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342년 中 巌 円 月 는 재차의 중국 도항을 계획하여 博 多 에 이르렀지만, 관아의 관리가 문 서를 내려 배에 승선하는 것을 금하였다. 때문에 다시 출발할 수 없었다.( 中 巌 月 和 尚 自 歴 譜 ). 1350년, 博 多 의 息 浜 에 龍 山 徳 見 이하 18명의 일본인 승려와 선주 이하 11명의 중국인을 실은 宋 船 이 착안했다. 대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九 州 探 題 一 色 直 氏 귀국승려의 명부를 더해 무로 마치 막부에 보고했다( 園 太 暦 ). 이러한 예로부터 鎌 倉 幕 府 의 관직명이 출입국 관리 기능을 다 하기 위해서 도시 博 多 호의 규제력을 강화시켜 나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맺음말 중세의 일본인에게 몽골 내습은 보기 드물게 보는 이문화 접촉의 경험이었다. 그것은 일본인 의 대외 의식에 큰 흔적을 남겼다. 다만 그것은 <다른 것>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방향이 아니 라, 일본을 타국보다 뛰어난 신성공간으로서 <다른 것>에의 멸시와 배제를 동반하는 神 國 思 想 의 정착이라고 하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신이 나라를 지킨다 라고 하는 언설도, 敵 에 관한 그 어떤 이해를 근거로 해 자기를 재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공허 한 국가 자랑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멸시관의 깊이에 대해서는 일본이 신라를 조공국으로서 따르게 하는 역사적 기점으로 여겨져 온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전설의 변화로부터 엿볼 수가 있다. 그 원조인 일본서기 에서 정벌의 동기는 財 寶 에 대한 욕망으로 여겨졌고, 또 신라를 굴복시켜 馬 飼 로 삼았다 라고 쓰여 있다. 이 것이 몽골 내습을 거친 鎌 倉 말기의 愚 童 訓 이 되자, 정벌의 동기는 복수가 되어-따라서 그 전 단계에 신라의 일본 침공이 창작된다.- 馬 飼 의 이야기는 황후가 활이 끝에 있는 角 으로 바위에 신라국의 대왕은 일본의 개다 라고 써 붙였다는 이야기로 바뀐다[ 金, 1999]. 愚 童 訓 에는 삼한정벌에서 황후를 수행한 사람으로서 전국 각지 신들의 이름이 상당수 나타 난다. 그들은 모두 弓 箭 甲 冑 를 두르고 정벌로 향해 군인이었던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몽골 전 투도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었던 것과, 적어도 동일한 정도로 신과 신의 싸움이었다. 따라서 기도 라고 하는 전투 행위에 대해서 神 領 寄 進 라고 하는 恩 賞 이 요구되었다. 대외전쟁이라고 하는 희 유의 경험도 국내 전투의 논리로 파악되어 인식의 변혁에는 연결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몽골 내습은 민중의 의식에 무엇을 남겼을까. 1269년에 대마도까지 와서 돌아간 몽 골 사신은 塔 二 郎 弥 二 郎 이라고 하는 두 사람의 島 民 을 데리고 돌아갔다. 燕 京 으로 보내진 두 사람에게 쿠빌라이는 스스로 너의 나라가 중국에 朝 覲 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 짐이 너의
32 30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나라의 내조를 원하는 것은 너희들을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것뿐이 다. 라고 말을 걸었고, 장려한 궁전을 들이켜 본 두 사람은 天堂 仏刹이 있다고 하는 것은 정 말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라고 아뢰었다(뺷高麗史뺸, 元宗世家 10년 7월 甲子条). 京 鎌倉은 물 론, 博多마저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는 서민의 超絶体験은 어딘지 모르게 환타스틱한 취지가 있다. 물론 이것이 일본인의 의식에 어떠한 흔적을 남겼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체험을 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에 두어도 좋을 것이다. 한편, 민중이 이적의 침략으로부터 받은 공포는 正體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의 무쿠리 코쿠리 (蒙古 高句麗) 라고 하는 말에 남았다. 井伏鱒二의 소설 黒い雨 에는 사람들이 広島의 원폭구 름을 무쿠리 코쿠리의 구름 이라고 불렀다는 묘사가 있다[田中, 1982]. 또, 宮城県 仙台市에는 모쿠리 코쿠리 碑 라고 불리는 중세의 板碑 있어, 이것을 깎은 가루를 삼키면 백일해에 효과가 있다고 말해지고 있다. 정체 모르는 위력을 가지는 것에 매달려 역병 등의 위협에 대항하려는 심성은 드문 일이 아니다. <참고문헌> 荒木和憲, 2008, 文永7年2月日付大宰府守護所牒の復元 日本 高麗外交文書論の一齣 (뺷年報太宰府学뺸 2) 伊藤幸司, 2002, 蒙古襲来をめぐる円爾と南浦紹明 (뺷都府楼뺸33) 今谷 明, 1994, 뺷元朝 中国渡航記 雪村友梅の数奇な運命뺸(宝島社) 榎本 渉, 2007, 뺷東アジア海域と日中交流 9-14世紀뺸(吉川弘文館) 太田 彩, 2000, 뺷絵巻 蒙古襲来絵詞 日本の美術414 뺸(至文堂) 太田彌一郎, 1995, 石刻史料, 賛皇復県記 にみえる南宋密使瓊林について 元使趙良弼との邂逅 (뺷東北大学東洋史論集뺸6) 川添昭二, 2008, 蒙古襲来史料としての日蓮遺文 (뺷九州史学뺸 150) 金 光哲, 1999, 뺷中近世における朝鮮観の創出뺸(校倉書房) 佐伯弘次, 2003, 뺷日本の中世9モンゴル襲来の衝撃뺸(中央公論新社) 佐藤鉄太郎, 2005, 뺷蒙古襲来絵詞と竹崎季長の研究뺸(錦正社) 杉山正明, 2003, モンゴル時代のアフロ ユーラシアと日本 (近藤成一編뺷日本の時代史9モンゴ ルの襲来뺸吉川弘文館) 朱雀信城, 2008, 至元8年9月25日付趙良弼書状について (뺷年報太宰府学뺸 2) 田中健夫, 1982, ムクリコクリ (同뺷対外関係と文化交流뺸思文閣出版 初出 1967) 張 東翼, 2005, 1269年, 大蒙古国 中書省の牒と日本側の対応 (뺷史学雑誌뺸 114-8) 西尾賢隆, 1999a, 元朝国信使寧一山 (同뺷中世の日中交流と禅宗뺸吉川弘文館 初出1990)
33 몽골 내습과 異 文 化 접촉 31 西 尾 賢 隆, 1999b, モンゴル 襲 来 前 夜 の 日 元 交 渉 の 一 面 - 趙 良 弼 と 大 応 - ( 同 中 世 の 日 中 交 流 と 禅 宗 吉 川 弘 文 館 初 出 1999) 旗 田 巍, 1965, 元 寇 - 蒙 古 帝 国 の 内 部 事 情 - ( 中 公 新 書 ) 藤 本 正 行, 2003, 鎧 をまとう 人 びと- 合 戦 甲 冑 絵 画 の 手 びき ( 吉 川 弘 文 館 ) 村 井 章 介, 1988, 高 麗 三 別 抄 の 内 乱 と 蒙 古 襲 来 前 夜 の 日 本 ( 同 アジアのなかの 中 世 日 本 校 倉 書 房 初 出 1982) 村 井 章 介, 2001, 北 条 時 宗 と 蒙 古 襲 来 - 時 代 世 界 個 人 を 読 む- (NHKブックス) 村 井 章 介, 2003, 分 裂 する 王 権 と 社 会 ( 中 央 公 論 新 社 ) 村 井 章 介, 200a, 東 アジアのなかの 日 本 文 化 ( 放 送 大 学 教 育 振 興 会 ) 村 井 章 介, 2005b, 寺 社 造 営 料 唐 船 を 見 直 す- 貿 易 文 化 交 流 沈 船 - ( 歴 史 学 研 究 会 編 港 町 の 世 界 史 1 港 町 と 海 域 世 界 青 木 書 店 ) 山 本 光 朗, 2001, 元 使 趙 良 弼 について ( 北 海 道 学 芸 大 学 史 学 会 史 流 40) 吉 田 光 邦, 1975, 蒙 古 襲 来 絵 詞 に 於 ける 武 器 について ( 新 修 日 本 絵 巻 物 全 集 10, 角 川 書 店 ) 李 領, 1999, 元 寇 ]と 日 本 高 麗 関 係 ( 同 倭 寇 と 日 麗 関 係 史,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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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13 世 紀 以 前 의 麗 日 關 係 李 在 範 ( 京 畿 大 學 校 人 文 學 部 史 學 專 攻 ) 1. 서론 13 世 紀 以 前 의 麗 日 關 係 를 전체적으로 어떤 特 徵 的 상황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時 期 別 로 差 別 化 하여 말하기도 어렵다. 1) 그 까닭은 이 時 期 에 관한 硏 究 도 不 進 했지만, 實 際 로 交 流 關 係 를 밝힐만한 資 料 가 充 分 하지 않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實 際 로 交 流 關 係 가 活 潑 하지 않았기 때문에 傳 해지는 資 料 가 그것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主 張 이 妥 當 하게 들릴 그런 分 野 이다. 이 時 期 에 兩 國 間 의 關 係 가 疎 遠 할 수 밖에 없었던 理 由 는 여럿 있겠으나, 우선 當 時 의 東 아 시아 國 際 環 境 과 關 聯 이 있다고 할 것이다. 高 麗 가 建 國 되던 918 年 頃 의 國 際 情 勢 는 東 아시아 各 國 이 對 外 的 인 問 題 보다는 自 國 의 混 亂 收 拾 에 優 先 的 으로 置 重 할 수 밖에 없었던 處 地 였다. 高 麗 로서는 後 三 國 의 分 裂 을 一 旦 統 一 하여 急 한 狀 態 는 마무리하였다고 하지만 地 方 에서 勃 發 하는 豪 族 들의 反 撥 과 王 室 內 에서 展 開 되는 王 位 爭 奪 戰 은 國 家 을 安 定 이라고 할 수 만은 없게 만들었다. 이어서 高 麗 의 門 閥 貴 族 들간의 勢 力 다툼도 高 麗 의 總 力 을 國 際 的 으로 돌리기에는 適 合 하지 않는 與 件 이었다. 한편 高 麗 의 周 邊 國 에서 가장 많은 影 響 을 주었던 中 國 의 狀 態 도 그다지 有 利 하게 돌아가지 1) 森 克 己 는 10 世 紀 는 8-9 世 紀 의 政 治 中 心 적인 對 外 關 係 에서 經 濟 中 心 의 對 外 關 係 로 변하기 시작 하는 대전환기로 보고, 이 時 期 의 對 外 關 係 를 消 極 的 孤 立 主 義 또는 閉 鎖 主 義 로 보고 있다. 80 年 代 後 半 부터는 石 上 英 一 을 中 心 으로 한 學 者 들은 이 時 期 를 積 極 的 孤 立 主 義 로 보는 등 一 連 의 試 圖 가 이루어졌다. 李 炳 魯 는 이러한 變 換 의 時 期 를 9세기로 앞당겨 보기도 한다( 李 炳 魯, 11 世 紀 韓 日 兩 國 의 對 外 交 涉 에 關 한 一 考 察, 大 丘 史 學 제59집, 1-2쪽).
36 3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는 않았다. 高 麗 建 國 期 의 中 國 의 사정은 이른바 唐 末 五 代 의 時 期 로 여러 王 朝 가 交 替 되고 있었 던 混 亂 期 였다. 이 時 期 에 高 麗 는 日 本 보다도 中 國 의 여러 나라와의 關 係 에 힘쓰면서 한편으로 는 宋 을 무시할 수도 없었으므로 中 國 과의 여러 나라와 多 角 的 인 關 係 를 摸 索 할 수 없었으므로, 相 對 的 으로 日 本 과는 커다란 戰 爭 등의 威 脅 이 없었으므로 疎 忽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高 麗 로서는 中 國 이 契 丹 族 에 의하여 遼 가 성립되면서, 大 規 模 의 高 麗 侵 入 을 敢 行 해 오자 이에 대한 對 備 로 다른 나라와의 關 係 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實 際 로 13 世 紀 以 前 까지 高 麗 의 對 中 國 關 係 는 상당히 不 安 한 形 便 이었다. 契 丹 族 의 遼 가 세차례의 大 規 模 侵 略 戰 爭 을 敢 行 하였고, 그 뒤를 이어 女 眞 族 이 金 을 세워 高 麗 에 壓 迫 을 可 하기도 하였 다. 이러한 東 아시아 國 際 情 勢 속에서 高 麗 는 大 陸 과의 關 係 改 善 에 많은 努 力 을 기울일 수 밖 에 없는 處 地 였다. 한편 日 本 에서는 醍 醐 天 皇 의 延 喜 연간으로 이미 遣 唐 使 가 廢 止 되어 中 國 과 의 國 交 가 斷 絶 된 狀 態 였다. 그 뒤로 宋 과의 많은 關 係 를 갖으려고 努 力 하였던 時 期 이다. 그것은 어떻든 高 麗 前 期 의 韓 日 關 係 에 관한 硏 究 는 日 本 의 硏 究 가 주를 이루었다. 最 近 에 國 內 에서 日 本 史 料 가 紹 介 되면서 一 連 의 硏 究 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아직 滿 足 할만한 狀 態 는 아 니다. 그나마 多 幸 인 것은 日 本 에 있는 資 料 들이 國 內 에 紹 介 되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程 度 이다. 勿 論 資 料 集 이라는 性 格 自 體 가 限 界 가 있는 것은 分 明 하지만, 그렇더라도 全 體 를 涉 獵 할 수 있는 機 會 를 갖게 된 것은 매우 多 幸 스러운 일이다. 2) 本 考 는 이러한 國 內 에서의 資 料 集 刊 行 과 關 聯 하여 高 麗 前 期 의 韓 日 關 係 를 全 體 的 으로 眺 望 해 본 結 果 이다. 以 前 에는 韓 國 에서의 高 麗 史 關 係 者 들이 主 로 利 用 하였던 것은 高 麗 史 를 비롯한 韓 國 의 文 獻 들이었다. 그러다보니 自 然 스럽게 韓 日 關 係 사는 自 國 史 中 心 으로 흐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韓 日 關 係 사의 主 流 는 倭 寇 가 되고 이를 討 伐 한 民 族 抗 爭 이 한동안 浮 刻 된 論 點 이었다. 그러므로 高 麗 와 日 本 은 倭 寇 로 象 徵 되는 關 係 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倭 寇 以 前 의 韓 日 關 係 史 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日 本 資 料 를 取 하게 되면 또 다른 眼 目 에서의 韓 日 關 係 史 를 眺 望 할 수 있게 된다. 본고에서는 旣 刊 行 된 日 本 文 獻 속의 韓 日 關 係 사 資 料 를 包 含 하여 旣 發 表 된 硏 究 成 果 를 涉 獵 하여 13 世 紀 以 前 의 韓 日 關 係 史 의 全 貌 를 살펴 보려고 한다. 2) 본고의 高 麗 前 期 韓 日 關 係 에 관해서 기존의 많은 硏 究 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일일이 列 擧 하기에는 紙 面 이 너무 不 足 하다. 必 要 한 경우에는 각주나 본문에서 인용하는 정 도에서 감사를 표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張 東 翼 교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장동익교수의 日 本 古 中 世 高 麗 資 料 硏 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는 原 文 資 料 의 꼼꼼한 소개는 물론, 資 料 內 容 까지 전달하여 이 分 野 에 큰 업적을 쌓았음은 물론 필자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日 本 古 中 世 文 獻 속의 韓 日 關 係 史 料 集 成 (김기섭 등, 혜안, 2005)도 커다란 參 考 가 되었다.
37 13世紀 以前의 麗日關係 35 關係史를 說明하는데 時期的으로 區分하는 것도 하나의 方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는 高麗와 日本과의 關係를 類型別로 分類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예컨대 國家와 國家間의 關係, 民間과의 交易關係, 文化的 交流 등으로 區分하여 13世紀以前 韓日關係의 大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高麗와 日本의 國家대 國家 간의 關係 13世紀 以前의 高麗와 日本과의 關係를 한마디로 整理하기는 어렵다. 먼저 史料上의 問題가 있고, 다음으로 解釋上의 問題가 있다. 高麗史는 高麗의 사정에 유리하게, 日本은 日本의 事情 에 有利하게 敍述하였기 때문이다. 본 장에서는 史料에 나타난 高麗와 日本과의 關係를 類型별 로 분류하여 보고, 그 內容을 근거로 13世紀 以前의 高麗와 日本과의 關係를 설정해 보고자 한 다. 가장 먼저 高麗해 보아야 할 事項이 國家對國家의 關係인 外交關係이다. 즉 使臣의 交換을 通하여 韓日間의 公式的인 交流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國家대 國家間의 公的 關係인 使臣의 交換은 關係史에서 가장 重要한 內容이 될 것이다. 國 家間의 位相, 그리고 國家間의 交流의 內譯 등은 關係史의 核心的인 要所라고 할 수 있을 것이 다. 우리나라와 日本의 關係資料를 살펴보면 다음의 <表 1>과 같다.3) <표 1> 高麗와 日本의 國家間의 공식關係 連番 年度 關聯事實 典據 1 922年(景明王6, 延喜 22) 2 쉐1月 13日, 耽羅島를 往來하던 新羅 선박이 對馬島 下縣郡에 漂着, 島守 坂上經國이 擬通事 長岑望通 / 扶桑略記, 延長 7年 5月 17日. 檢非違使 秦滋景 등으로 하여금 後百濟 前奏로 送還 929年(敬順王3, 시킴. 延長7) 쉐3月 25日, 檢非違使 秦滋景이 對馬島 도착. 全州王 (後百濟王) 甄萱이 日本과 通交를 希望하였으나 挫 / 扶桑略記 延長7年 5月 17日. 折된 事實을 알리다. 甄萱이 長岑望通을 남겨두고 秦滋景만 돌아와 通交의 뜻을 전하다. 쉐6月5日, 日本朝廷이 對馬島에 到着한 後百濟王 甄萱 / 扶桑略記, 延喜 22年 6月 5日, 延長 의 使臣 輝巖을 돌려보내라는 命令書(관부)를 大宰 7年 5月 21日 / 뺷本朝文粹뺸12, 大宰 府에 내림. 府답新羅반牒 3) 본고에 수록된 <표>의 內容은 張東翼 교수가 전게 資料集에서 韓日 兩國의 交流關係를 整理해 놓은 內容(15 47쪽)을 간략하게 다시 정리한 것이다.
38 3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月 17 日, 全 州 王 의 使 臣 張 彦 澄 등 20인이 對 馬 島 에 도착. 對 馬 島 司 가 이들을 구류하고 太 政 官 에게 / 扶 桑 略 記 延 長 7 年 5 月 17 日 보고함 5 月 21 日, 太 政 官 이 大 宰 府 에 관부를 내려 張 彦 澄 / 扶 桑 略 記 延 長 7 年 5 月 21 日 / 異 國 등을 歸 還 시킴. 甄 萱 은 新 羅 의 부하이므로 外 交 인 牒 狀 記 정하지 않음. 937 年 ( 太 祖 20, 8 月 5 日, 高 麗 가 보낸 牒 을 日 本 의 左 右 大 臣 이하 열 / 日 本 紀 略 承 平 7 年 8 月 5 日. 承 平 7) 람. 2 月 15 日 攝 政 藤 原 忠 平 이 高 麗 의 牒 을 左 少 辨 藏 人 939 年 ( 太 祖 22, 天 慶 2) 940 年 ( 太 祖 23, 天 慶 3) 972 年 ( 光 宗 23, 天 祿 3) 974 年 ( 光 宗 25, 天 延 2) 997 年 ( 成 宗 16, 長 德 3) 1019 年 ( 顯 宗 10, 寬 仁 3) 1020 年 ( 顯 宗 11, 寬 仁 4) 1051 年 ( 文 宗 5, 永 承 6) 1056 年 ( 文 宗 10, 천희 4) / 貞 信 公 記 抄 天 慶 2 年 2 月 15 日 大 江 朝 綱 에게 보냄. 3 月 11 日 大 宰 府 가 高 麗 의 廣 評 省 에 보내는 答 書 [ 返 / 日 本 紀 略 天 慶 2 年 3 月 11 日 / 帥 牒 ]와 함께 使 臣 團 을 돌려 보냄. 記 承 曆 4 年 閏 8 月 5 日, 25 日 / 貞 信 公 記 抄 天 慶 3 年 6 月 21 日, 23 6 月 21 日 이래 日 本 朝 廷 에서 高 麗 의 牒 을 檢 討 하고 日, 24 日 / 帥 記 承 曆 4 年 閏 8 月 5 日, 이에 대해 의논함. 25 日 9 月 23 日, 大 宰 府 가 高 麗 의 南 京 ( 原 ) 府 使 咸 吉 兢 이 / 日 本 紀 略 天 祿 3 年 9 月 23 日 ; 親 牒 을 가지고 對 馬 島 에 도착한 것을 日 本 朝 廷 에 報 信 卿 記 天 祿 3 年 10 月 7 日. 告, 다음달 7 日 日 本 朝 廷 에 전달. 10 月 15 日, 大 宰 府 가 高 麗 의 金 海 府 使 李 淳 達 이 牒 / 親 信 卿 記 天 祿 3 年 10 月 15 日. 을 가지고 對 馬 島 에 도착한 것을 日 本 朝 廷 에 報 告. 10 月 20 日, 日 本 朝 廷 에서 高 麗 의 牒 에 대해 의논함. / 百 練 抄 天 祿 3 年 10 月 20 日. 閏 10 月 30 日, 日 本 朝 廷 의 高 麗 國 交 易 使 ( 高 麗 貨 物 / 日 本 紀 略 天 延 2 年 閏 10 月 30 日 使 )가 對 馬 島 에 派 遣 되어 高 麗 의 産 物 을 購 入 해 감. ; 親 信 卿 記 天 延 2 年 閏 10 月 30 日. 5 月, 高 麗 의 牒 3 通 ( 受 信 處 는 日 本 國 對 馬 島 司 對 / 異 國 牒 狀 記 長 德 3 年. 馬 島 ) 日 本 에 도착함. / 小 右 記 長 德 3 年 6 月 12 日, 13 日 ; 6 月 12 日 -13 日, 日 本 의 公 卿 들이 高 麗 의 牒 에 日 本 百 練 抄 長 德 3 年 6 月 13 日 ; 水 左 記 을 侮 辱 하는 文 句 가 있다고 하여 答 書 를 보내지 않 承 曆 4 年 9 月 4 日 ; 帥 記 承 曆 4 年 9 고, 要 害 地 를 警 戒 하게 함. 月 2 日, 3 日 ; 師 帥 記 貞 治 6 年 5 月 9 日. 4 月 29 日, 高 麗 의 鎭 溟 船 兵 都 府 署 가 海 賊 船 을 捕 獲 하여 日 本 人 259 人 을 救 出 함. 9 月 19 日 이래 日 本 朝 廷 이 高 麗 가 女 眞 族 에게 피로 된 日 本 人 送 還 과 함께 派 遣 한 鄭 子 良 이 가져 온 牒 을 의논. 12 月 30 日, 大 宰 府 가 日 本 朝 廷 에 高 麗 의 使 臣 에 관 한 일기를 바침. 高 麗 인 30인이 乘 船 한 船 泊 2척이 對 馬 島 에서 출발하여 축전국에 표착하였다고 함. / 小 右 記 寬 仁 3 年 9 月 19 日, 22 日 23 日 ; 左 經 記 寬 仁 3 年 9 月 22 日 / 異 國 牒 狀 記 / 小 右 記 寬 仁 3 年 12 月 30 日. 2 月 이래 女 眞 族 에 의해 披 露 된 日 本 人 을 送 還 하기 / 左 經 記 寬 仁 4 月 11 日, 8 月 25 日 ; 위해 來 日 한 高 麗 의 使 臣 인 鄭 子 良 의 待 接 과 答 書 作 日 本 紀 略 寬 仁 4 年 2 月 16 日, 4 月 成 에 대한 의논을 함. 11 日 ; 百 練 抄 寬 仁 4 年 2 月 16 日. 7 月 10 日 日 本 朝 廷 이 高 麗 金 州 가 商 船 을 통해 牒 을 보낸 것을 의논 함. 10 月 1 日, 日 本 국의 使 臣 藤 原 賴 忠 등 30인이 金 州 에 도착함. / 百 練 抄 永 承 6 年 7 月 10 日 ; 異 國 牒 狀 記 ; 水 左 記 承 曆 4 年 9 月 4 日 ; 帥 記 承 曆 4 年 閏 8 月 25 日, 9 月 2 日. / 高 麗 史 文 宗 10 年 10 月 己 酉.
39 13世紀 以前의 麗日關係 쉐2月 5日 大宰府가 이미 받아 있던 高麗 禮賓省의 牒 을 解狀과 함께 太政官에게 보냄. 쉐4月 19日 日本 朝廷에서 禮賓省의 牒에 대한 議論이 이루어져 醫師를 派遣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짐. 쉐10月 2日 대정관의 명령서[관부]를 大宰府에 내려서 1080年(文宗34, 高麗가 要請한 醫師를 派遣하지 않는 것, 高麗의 예 承曆 4) 물을 돌려 보내는 것, 大宰府의 答書[반첩]는 사자를 선발하여 보낼 것, 그리고 王則貞을 법에 회부하여 처벌하는 것 등을 전함. 쉐11月 3日 大江朝綱이 源俊房과 의논하여答書의 자구 를 수정하고 關白 藤原師實에게 보고하여 최종본을 완성한 후 이것을 大宰府에 보냄. 1081年(文宗35, 쉐5月 2日 日本 朝廷이 大宰府가 高麗에 보낼答書[반 永保 1) 牒]에 대해 신청한 것을 의논함. 1147年(毅宗1, 쉐8月13日 日本都綱 黃仲文 등 21인 高麗에 도착함. 久安 3) 1156年-1165年( 쉐對馬島의 寬仁이 牒을 동남해도부서에 보내옴에 따 毅宗 19, 永萬 라 도부서가 이를 朝廷에 보고하자, 도부서의 이름으 1) 로答書[공문]를 보내게 함. /朝野群載 20, 太宰府解. /水左記 承曆 4年 4月 19日. / 師帥記 貞治 6年 5月 9日. / 水左記 承曆 4年 11月 3日 ; 朝野群 載 20 太宰府牒 ; 本朝續文粹 11 太宰 府牒. /帥記 永保 1年 5月 2日 ; 本朝續文粹 11 太宰府解. / 高麗史 毅宗 1年 8月甲辰. / 高麗墓誌銘集成 李文鐸墓誌銘. <表 1>의 內容은 몇가지 類型으로 區分해 볼 수 있다. 高麗의 使臣이 日本에 간 境遇와 日 本의 使臣이 高麗에 온 境遇이다. 그리고 高麗의 國家的 使節이 直接 朝廷에 간 境遇와 高麗의 牒을 對馬島에 전하고 對馬島에서 다시 朝廷에 전한 方法 등이다. 그리고 高麗의 地方官의 이름 으로 보내진 첩의 주체에 대한 것도 밝혀져야 할 것이다. 또한 高麗에서 日本조정으로의 傳達過 程 등도 밝혀져야 할 것이다. 먼저 위의 <표 1>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高麗와 日本과의 正式 通交가 高麗의 後三國 統一 以後부터라는 事實이며, 그리고 상당한 시간의 간격은 있지만 高麗와 日本의 공식적인 외 교關係는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高麗가 후삼국을 통일하기 以前에는 단독으로 직접 日本과 통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高 麗의 建國이 918年이지만, 936年 高麗가 後三國을 統一하기 前까지는 高麗의 使節은 日本에 갈 수가 없었고, 南海岸 一帶를 掌握했던 後百濟의 使節이 日本과 往來하였던 事實을 알 수 있다. (1과 2) 그러면 高麗는 동해를 이용하여 日本과 통교할 수는 없었을까? 이 부분은 高麗의 도읍인 송악과 동해안의 지리적인 조건이 高麗되어야 함은 물론이며, 또 당시에 동해안을 이용한 渤海 와 日本의 使節交換이 活潑했던 것도 이유의 하나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4) 4) 이 무렵 日本과 渤海와의 公式使節 交換은 상당히 자주 施行되었다. 앞으로의 硏究의 하나로서 渤 海와 日本, 그리고 韓半島와의 關係를 單位로 하는 硏究도 必要할 것이다.
40 3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高 麗 의 公 式 使 節 에 의한 牒 이 傳 達 되고 使 臣 團 이 처음 派 遣 된 것은 937 年, 939 年, 940 年 의 순으로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使 節 의 派 遣 은 日 本 측에서 拒 絶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그러나 그 뒤로도 政 府 次 元 의 正 常 的 인 通 交 關 係 는 계속하여 이루어져 왔다. 使 臣 이 직접 조정에 들어 갔었는지에 대한 것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高 麗 에서 첩이 조정에 보고되는 예는 적지 않다. 이 時 期 에 문제가 되는 것은 高 麗 초의 공식 使 節 을 日 本 에서 거절하였다는 점이다. 이 사실을 두고 대체로 日 本 의 平 安 時 代 外 交 의 閉 鎖 性 과 硬 直 性 에서 원인을 찾았던 것이 일반적인 日 本 학계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石 上 英 一 6)은 그러한 現 象 의 이유를 한반도의 주변사정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는 日 本 이 周 邊 世 界 에 대하여 無 知 하였거나, 無 關 心 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시 韓 半 島 의 混 亂 과 動 搖 가 日 本 에까지 미칠지도 모른다는 憂 慮 에서 이를 避 하기 위한 日 本 의 意 圖 的 인 積 極 的 孤 立 政 策 이라고 하였다. 그 뒤 石 上 의 主 張 은 渡 邊 誠 에 의해 日 本 이 周 邊 國 을 無 視 하지 않으면서도 適 切 하게 對 應 한 것이라는 主 張 7)이 더해지면서 硏 究 의 방향을 상당히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南 基 鶴 은 日 本 학계 의 主 張 과는 다르게 高 麗 가 日 本 에 使 臣 을 보낸 것은 高 麗 가 上 國 이라는 大 國 意 識 의 發 露 라고 推 定 하였다. 그리고 朝 貢 이나 이것과 비슷한 史 料 的 表 現 은 日 本 의 意 圖 的 인 造 作 이라고 主 張 하였다. 8) 또한 李 炳 魯 도 高 麗 의 국서에 聖 旨 와 같은 單 語 를 使 用 하여 日 本 의 비위를 거스른 것 은 高 麗 가 自 身 의 正 體 性 을 誇 示 하려 한 것이라고 主 張 하였다. 이와 같이 國 家 대 國 家 間 의 交 流 에 대해서 兩 國 의 學 者 들은 自 己 式 의 主 張 을 하고 있다. 事 件 의 역사적 배경이나 의미는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麗 日 關 係 에서 國 家 間 공식적 關 係 가 단절 없이 지속되고 있었다는 증거는 972 年 에 高 麗 에서 使 臣 을 보낸 것으로 알 수 있다. 이해에 두 번의 牒 이 高 麗 에서 對 馬 島 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때 高 麗 에서 牒 을 가지고 간 사람은 地 方 官 인 南 京 ( 原 ) 府 使 와 金 海 府 使 이다. 9) 이들은 日 本 의 朝 廷 에까지 가지는 못한듯 하다. 그러나 이 牒 이 日 本 의 朝 廷 에 傳 達 되었던 것은 分 明 하다. 10) 5) 拒 絶 의 理 由 에 대하여 한국과 日 本 의 견해가 다르다. 日 本 側 은 後 百 濟 와 高 麗 를 蕃 國 으로 보고 있 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硏 究 에서는 後 百 濟 가 日 本 에 보낸 使 節 은 日 本 과 新 羅 의 聯 合 을 막게 하려는 意 圖 였으며, 高 麗 使 臣 을 보낸 것은 韓 半 島 의 統 一 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李 炳 魯, 11 世 紀 韓 日 兩 國 의 對 外 交 涉 에 關 한 一 考 察, 大 丘 史 學 59집, 94쪽.) 6) 石 上 英 一, 日 本 古 代 10 世 紀 の 外 交, 學 生 社, 東 アジアにおける 日 本 古 代 史 講 座 7 7) 平 安 貴 族 の 對 外 意 識 と 異 國 牒 狀 問 題, 歷 史 學 硏 究 823, ) 高 麗 と 日 本 の 相 互 認 識, 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 歷 史 的 前 提 に 關 する 學 際 的 硏 究, 荒 野 泰 典 ( 硏 究 代 表 ) 平 成 年 科 學 硏 究 費 補 助 金 成 果 報 告 書, 森 平 雅 彦 의 原 稿 에서 引 用. 9) 張 東 翼 은 南 京 으로, 다른 硏 究 者 들은 대체로 南 原 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소개된 모양은 南 凉 으 로 되어 있다. 10) 森 平 雅 彦, 日 麗 貿 易, 大 庭 康 時 佐 伯 弘 次 菅 波 正 人 田 上 勇 一 郞 編, 中 世 都 市 博 多 を 掘 る 海 鳥 社.
41 13 世 紀 以 前 의 麗 日 關 係 39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高 麗 의 첩을 보낸 인물이나 기구의 문제이다. 高 麗 의 첩이 日 本 에 전달되는 경우 남경 부사나 김해 부사가 발송자로 되어 있거나, 지방의 도부서가 발송자 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어떻든 13 世 紀 以 前 의 高 麗 와 日 本 의 공식적인 國 家 交 流 는 그 방법이 使 臣 이었거나, 아니면 첩을 보냈거나 수단의 차이는 있었지만 계속하여 지속되고 있 었다. 交 流 의 방식이나 內 容 에 대해서는 여러 見 解 가 있을 수 있으나, 비록 回 數 는 많지 않다고 하여도 高 麗 와 日 本 의 國 家 間 使 節 의 交 換 은 그 密 度 에 있어서는 상당히 깊은 關 係 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이 地 方 官 의 性 格 에 대해서도 주목되었다. 이 지방 豪 族 의 對 外 活 動 에 있어서의 독자성 과 連 續 性 의 문제였다. 신라말의 일부 豪 族 의 경우는 獨 自 的 으로 中 國 과 연결하였던 적도 있다. 그러므로 이 時 期 에 남원이나 김해와 같은 중앙에서는 비교적 원거리인 지방 대호족 세력 가운 데는 獨 自 的 으로 對 外 活 動 을 行 할 可 能 性 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직함이 공통적으로 府 使 라는 점에서 공식적 交 流 임에는 틀림이 없다. 974 年 에 日 本 朝 廷 에서 高 麗 國 交 易 使 가 對 馬 島 에 派 遣 되어 高 麗 의 物 品 을 購 入 해 간 事 實 도 상설인가 아닌가하는 점은 高 麗 의 여지로 남겨 두더라도 國 家 的 공적 交 流 의 사례로 볼 수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이러한 高 麗 와 日 本 간의 公 式 的 인 交 易 에 관한 內 容 은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兩 國 간의 國 家 的 公 式 的 關 係 에서 가장 신경을 쓰게 되는 점은 兩 國 간의 國 家 的 위상의 문제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자주 거론되는 것이 첩의 內 容 과 격식의 문제이다. 997 年 의 高 麗 에서 보낸 첩의 內 容 과 격식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 첩이 문제가 되어 高 麗 인들이 日 本 에서 추방당한 事 件 이 일어났던 것이다. 日 本 에서는 高 麗 의 牒 狀 에 日 本 을 無 視 하는 內 容 이 있 다고 하여, 日 本 朝 廷 이 高 麗 의 國 書 에 答 을 하지 않을 정도로 兩 國 關 係 가 惡 化 된 적도 있었다. 이 997 年 의 高 麗 牒 狀 事 件 의 狀 況 解 釋 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한편 1019 年 에는 高 麗 에 의해 女 眞 의 海 賊 船 에 披 露 된 日 本 人 을 救 出 하여 日 本 에 送 還 한 事 件 이 발생하였다. 이때 정자량이 女 眞 海 賊 에게 붙잡힌 日 本 人 을 送 還 시킨 이 事 件 은 高 麗 와 日 本 의 關 係 가 결코 악화된 상태만은 아니었던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시 동해안 일대를 위협하 던 공동의 적인 여진 해적에 대해서는 동병상련하는 협조 關 係 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事 件 은 高 麗 와 日 本 兩 國 關 係 에 일대 전환기가 되었던 것으로 파악하는 경향도 있다. 森 克 己 는 高 麗 측의 호의적인 對 應 이 日 本 의 對 高 麗 姿 勢 를 유연하게 바꾸었고, 그후 잦은 漂 流 民 送 還 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村 井 章 介 는 이 事 件 을 둘러싼 日 本 측의 高 麗 軍 事 力 에 대한 關 心 이 높아지는 데 注 目 하여 高 麗 에 대해 여전히 시의심, 적국 新 羅 와 연결짓는 인식,
42 40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平安貴族의 國際感覺의 退嬰性과 閉鎖性을 强調하고 있다. 石井正敏도 刀伊 事件 후에도 高麗 에 대한 日本의 敵國視는 큰 변화 없이 中央 地方을 묻지 않고 귀족층의 기본적인 인식이었다고 서술하였다. 또 高麗側의 友好姿勢도 南基鶴이 指摘하였듯이 契丹과의 항쟁을 배경으로 하는 방편이었을 可能性이 있었을 것이다.11) 단 山內晉次가 指摘한 것처럼 日本측의 優位意識과 警 戒感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新羅의 境遇와 같이 극단적인 적대시나 분쟁사항은 생기지 않았 다고 할 수 있다.12) 그런데 특기할 것은 이때 日本에 송환할 때도 高麗에서 첩을 보낸 공식적인 使節이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高麗와 日本과는 기본적으로 동동의 위협에는 國家間 의 연대를 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國家의 공식적 關係에서 크게 주목을 끄는 事件이 高麗에서 國王인 文宗의 병을 치료할 醫師를 日本에서 구하였다는 것이다.(13) 이 高麗의 醫師초청은 마침내 日本에서 보내지 않기로 함으로써 끝내 불발되고 말았지만, 日本에서決定을 내릴 때까지의 과정을 보면 상당히 심각하게 논의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의사를 보내야 한다는決定을 내리고, 보내야 할 의사를 구체적으로 거명하기에 이를 정도로 日本에서 진지한 姿勢로 임하고 있었다.13) 兩國 11) 高麗と日本の相互認識, 뺷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歷史的前提に關する學際的硏究뺸, 荒野泰典(硏究 代表) 平成12-14年科學硏究費補助金成果報告書, 森平雅彦의 원고에서 인용. 12) 朝鮮半島漂流民の送還をめぐって 歷史科學122, ) 이와 관련된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쉐2月 5日 大宰府가 이미 받아 있던 高麗 禮賓省의 牒을 解狀과 함께 太政官 에게 보냄. 쉐2月 16日 大宰帥 藤原資仲이 報告한 高麗國皇帝의 牒이 日本 朝廷에 傳達 될 것이 알려짐. 쉐4月 19日 日本 朝廷에서 禮賓省의 牒에 대한 論議 結果 醫師를 派遣하는 것 으로 意見이 모아짐. 쉐8月 7日 藏人辨(右少辨) 藤原伊家가 禮賓省의 牒에 대해 議論하도록 命한 宣旨를 大納言 源俊房에게 傳함. 쉐閏 8月 2日 大納言 源俊房이 朝廷에서 高麗가 醫師를 要請한 것을 言及함. 쉐閏 8月 5日 日本 朝廷에서 高麗의 牒에 대해 의논하고 醫師를 派遣할 것인 가, 派遣한다면 누구로 할 것인가,答書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을 논의함. 쉐閏 8月 8日 大納言 源俊房이 高麗가 醫師를 요청한 것에 대한公卿들의 평의 의 결과를 藏人辨 藤原伊家에게 전함. 쉐閏 8月 11日 藤原伊家가 大納言 源俊房에게 왕즉정을 심문했던 記錄을 전 함. 쉐閏 8月 14日 日本 朝廷에서 宋 황제가 보낸 예물에 대한 대처 및 高麗의 醫 師 要請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후자의 境遇는 丹波雅忠과 의논하는 것이 어 떨까 하는 의견이 제시됨. /朝野群載 20, 太宰府解. / 水左記 承曆 4年 4月 19日. /水左記 承曆 4年 4月 19日. / 水左記 承曆 4年 8月 7日 / 水左記 承曆 4年 閏8月 2 日. / 水左記 承曆 4年 閏8月 5 日 ; 帥記 承曆 4年 閏8月 5 日 ; 百練抄 承曆 4年 閏8月 5日. / 水左記 承曆 4年 閏8月 8 日. / 水左記 承曆 4年 閏8月 13 日. / 水左記 承曆 4年 閏8月 14 日 ; 帥記 承曆 4年 閏8月 14 日.
43 13世紀 以前의 麗日關係 41 간의 關係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事件이라고 여겨진다. 이 무렵 中國의 醫官들도 高 麗에 오고 있지만14), 國王의 生命을 擔當할 醫師를 日本에도 의뢰하여 구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의학기술의 問題가 아니라 國家間의 우호의 關係를 가늠해 볼 수 있는 事件으로 특기할만하다. 이 醫師초청事件의 거절에 대하여 日本에서는 日本의 의사가 文宗의 병을 고치지 못하면 수치 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高麗의 첩에 성지와 같은 단어가 사용되는 등 高麗의 대국意識이 文書의 形式과 內容에서 보인다는 것이 직접적인 의사 파견 거부의 이유였다. 그리고 이 첩을 가져온 왕즉정에 대해서 처벌을 하기까지 한다. 결국 이事件은 高麗와 日本과의 國家間 자존심 내위는 우위 關係에 대한 지나친 의식이 초래한 결과였다. 高麗의 醫師초청은 실패로 끝나게 되어 日本 은 그 뒤 高麗의 팔관회 조하례의 참가자로서 초청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主張도 나왔을 정도로 이 事件은 國家의 공식적 事件으로서 의미가 큰 것이었다.15) 그 밖에도 이 事件과 관련하여 日 本에서의 거절 이유 로 여러 見解가 나왔으나,16) 日本에서의 거절 자체가 그 以後의 麗日關係에 直接적으로 어떤 影響을 미쳤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資料는 없다.17) / 水左記 承曆 4年 閏8月 23 쉐閏 8月 22日 關白 藤原師實이 사람을 보내어 丹波雅忠에게 자문을 구하니, 日 ; 帥記 承曆 4年 閏8月 22 丹波雅忠이 醫師를 派遣한다면 惟宗俊通이 적합할 것이라고 회답함. 日 쉐閏8月 24日 藤原師實이 醫師를 派遣하지 않을 것을決定하고, 이에 대한答狀 / 水左記 承曆 4年 閏8月 24日 을 大江匡房으로 하여금 起草하게 함. ; 帥記 承曆 4年 閏8月 25日. 쉐9月 2日 藤原師實이 源經信을 불러 大江匡房이 지은答書를 보여 줌. / 帥記 承曆 4年 9月 2日. 쉐9月 3日 藤原師實이 源經信 大江匡房을 불러答書를 檢討함. / 水左記 承曆 4年 9月 3日 ; 帥記 ; 承曆 4年 9月 3日. 쉐9月 4日公卿들이 藤原師實의 집에 모여答書에 대해 논의함. / 水左記 承曆 4年 9月 4日 ; 帥記 承曆 4年 9月 4日. 쉐9月 6日 大江匡房이 源俊房에게 高麗 牒의 전례와 다른 점을 전함. / 水左記 承曆 4年 9月 6日 쉐9月 12日 大江匡房이 源俊房에게答書의 초안을 보고하고, 源俊房의 지시에 / 水左記 承曆 4年 9月 12日. 따라 內容 중의 殊俗을 蕃王으로 고침. 쉐9月 17日 藤原師實이公卿들을 초청하여答書를 보여 줌. / 水左記 承曆 4年 9月 17日. 쉐9月 18日 大江匡房이 源俊房에게答書를 전하고, 源俊房이 이를 前筑後守 俊 /水左記 承曆 4年 9月 18日. 光으로 하여금 청서케 함. 쉐10月 2日 太政官의 명령서[관부]를 大宰府에 내려서 高麗가 要請한 醫師를 派遣하지 않는 것, 高麗의 禮物을 돌려 보내는 것, 大宰府의 答書[반첩]는 사 / 師帥記 貞治 6年 5月 9日. 자를 선발하여 보낼 것, 그리고 王則貞을 법에 회부하여 처벌하는 것 등을 전함. / 水左記 承曆 4年 11月 3日 쉐11月 3日 大江匡房이 源俊房과 의논하여答書의 자구를 수정하고 關白 藤原 ; 朝野群載 20 太宰府牒 ; 本 師實에게 보고하여 최종본을 완성한 후 이것을 大宰府에 보냄. 朝續文粹 11 太宰府牒. 14) 宋에서 醫官 王愉 徐先을 보냄.(高麗史 卷9 文宗世家 26年 6月 庚戌.) 15) 奧村周司, 醫師要請事件にみる高麗文宗朝の對日姿勢, 朝鮮學報 ) 渡邊誠, 平安貴族の對外意識と異國牒狀問題, 歷史學硏究823, 2007.
44 42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日本에서 高麗로 牒이 온 境遇는 1156年에 보인다. 이때 高麗에 牒을 가져온 사람은 對馬島 의 寬仁이었다. 이때 이 牒을 수령한 것은 高麗의 東南海都府署였다. 이 牒은 高麗 朝廷에 보고 되었고, 高麗 朝廷에서는 都府署에서 答書를 보내도록 措處하고 있다. 그 절차는 日本朝廷 對 馬 東南海都府署 高麗朝廷의 순이었을 것이다. 高麗와 日本의 공식적 交流였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高麗와 日本의 13世紀 以前의 國家대 國家間의 關係를 살펴 보았다. 兩國간의 공 식적 交流는 그다지 活潑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高麗에서 女眞人 海賊에게 포로가 되었던 日本 人을 送還한 예나, 高麗에서 醫師초청事件 등이 있지만 兩國간의 關係는 결코 긴밀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완전히 단절된 상태로 있었던 적도 없었다. 물론 지금까지 남아 있는 史料를 근거로 했을 때만 그러하다. 3. 交易關係 高麗와 日本과의 關係에서 注目해야 할 分野가 交易關係이다. 본고에서는 交易의 범위를 공 식적인 國家間의 關係를 제외한 모든 상업적 關係를 말하고자 한다. 물론 이 關係에서도 使臣을 보내거나 첩을 가진다면 交易關係와 달리 취급하여야 하겠지만, 그러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 을 경우에는 交易關係로 취급하고자 한다. 交易關係에 관한 內容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 2>와 같다. <표 2> 高麗와 日本간의 交易關係 연번 1 2 年度 관련事實 전거 쉐7月 5日, 日本人 王則貞 松永年 등 42인 高麗 도착, 각 종 토산물을 바침. 壹岐島勾當官 藤井安國 等 33인 派 / 高麗史 文宗 27年 7月丙午. 1073年(文宗27, 遣하여 方物 바침. 延久 5) 쉐11月 12日, 日本人이 宋 黑水 耽羅人 등과 함께 八關會 / 高麗史 文宗 27年 11月辛亥. 에 참석하여 예물 바침. 1074年(文宗28, 쉐2月 2日 日本國船頭 重利 등 39인이 高麗에 도착, 토산 / 高麗史 文宗 28年 2月 庚午. 17) 高麗史에서는 日本에 의사를 요청한 사실을 찾을 수가 없다. 文宗32年(1078)에 왕이 돌아가는 使節 을 통하여 글월로써 감사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자기가 風痹症으로 앓는다는 것을 말하고 의사와 약재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는 內容이 있는데, 日本에 첩을 보냈다는 內容은 보이지 않는다. 혹 王 則貞 개인과 관련된 어떤 일을 모사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高麗史에는 日本에 첩 이 도착하던 해에 薩摩州에서 方物을 바쳤다는 記錄이 있는 것을 보면 王則貞의 실력도 실력이지 만, 高麗에서 日本에 의료진을 요청하였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1079年에 이미 약재 1백종과 합문통사사인 王舜封 등 88인을 보내왔다.
45 13 世 紀 以 前 의 麗 日 關 係 延 久 6) 물 바침. 閏 4 月 5 日 日 本 商 人 大 江 등 18인이 高 麗 에 도착, 토산 / 高 麗 史 文 宗 29 年 閏 4 月 丙 申. 물 바침 年 ( 文 宗 29, 6 月 22 日 日 本 人 朝 元 時 經 등 12인이 高 麗 에 도착, 토 承 保 2) / 高 麗 史 文 宗 29 年 6 月 壬 子. 산물 바침. 7 月 10 日 日 本 商 人 59인이 高 麗 에 도착함. / 高 麗 史 文 宗 29 年 7 月 庚 午 年 ( 文 宗 30, 10 月 15 日 日 本 國 僧 俗 25인이 高 麗 靈 光 郡 에 도착하여 / 高 麗 史 文 宗 30 年 10 月 戊 戌. 承 保 3) 상경하기를 요청하여 허락받음 年 ( 文 宗 33, 11 月 5 日 日 本 商 客 藤 原 등이 高 麗 의 興 王 寺 에 法 螺 / 高 麗 史 文 宗 33 年 11 月 己 巳. 承 曆 3) 海 藻 등을 시납함. 閏 9 月 11 日 日 本 國 살마주가 使 臣 을 高 麗 에 派 遣 하여 / 高 麗 史 文 宗 34 年 閏 9 月 庚 子 ; 1080 年 方 物 을 바침. 高 麗 使 節 遼 文 宗 34 年 閏 9 月 年 ( 文 宗 36, 11 月 19 日 對 馬 島 가 使 臣 을 高 麗 에 派 遣 하여 方 物 바 / 高 麗 史 文 宗 36 年 1 月 丙 戌. 永 保 2) 침 年 ( 宣 宗 1, 6 月 20 日 日 本 筑 前 州 의 商 客 信 通 등이 수은 250근을 / 高 麗 史 宣 宗 1 年 6 月 戊 子. 應 德 1) 바침 年 ( 宣 宗 2, 2 月 13 日 對 馬 島 勾 當 官 이 使 臣 을 高 麗 에 派 遣 하여 柑 / 高 麗 史 宣 宗 2 年 2 月 丁 丑. 應 德 2) 橘 바침 年 ( 宣 宗 3, 3 月 22 日 對 馬 島 勾 當 官 이 使 臣 을 高 麗 에 派 遣 하여 方 / 高 麗 史 宣 宗 3 年 3 月 己 卯. 應 德 3) 物 바침. 3 月 20 日 日 本 商 人 重 元 親 宗 등 32인 高 麗 에 方 物 바 / 高 麗 史 宣 宗 4 年 3 月 壬 申 年 ( 宣 宗 4, 침. 應 德 4 ; 寬 治 1) 7 月 21 日 對 馬 島 元 平 等 40인 高 麗 에 각종 토산물 바 / 高 麗 史 宣 宗 4 年 7 月 庚 午. 침 年 ( 宣 宗 6, 8 月 19 日 日 本 大 宰 府 商 人 高 麗 에 각종 토산물 바침. / 高 麗 史 宣 宗 6 年 8 月 丙 辰. 寬 治 3) 1116 年 ( 睿 宗 11, 2 月 2 日 日 本 이 柑 子 를 바침. / 高 麗 史 睿 宗 11 年 2 月 丙 寅. 永 久 4) 1159 年 ( 毅 宗 13, 8 月 2 日 日 本 朝 廷 이 高 麗 商 人 에 대해서 의논함. / 百 練 抄 平 治 1 年 8 月 2 日. 平 治 1) 1243 年 ( 高 宗 30, 9 月 29 日 金 州 防 禦 官 이 日 本 國 人 이 方 物 을 바치고 高 麗 / 高 麗 史 高 宗 30 年 9 月 壬 申. 寬 元 1) 의 표풍인을 쇄환한 것을 보고함 年 ( 高 宗 31, 寬 元 2) 2 月 2 日 이 時 期 以 前 에 前 濟 州 副 使 盧 孝 貞 判 官 李 珏 이 표류해 온 日 本 商 船 의 화물을 압수했다가 이 때 발 / 高 麗 史 高 宗 31 年 2 月 癸 酉. 각되어 유배됨. 위의 內 容 을 보면 高 麗 와 日 本 과의 交 易 關 係 가 매우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사례는 많 지 않지만, 계층적으로나 形 態 에 있어서 여러 모양이 나타난다. 위의 예를 보면 高 麗 에 오는 日 本 人 들 交 易 者 만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根 據 가 되는 出 典 이 高 麗 史 이다. 왜 이 時 期 에 갑자기 高 麗 史 에만 日 本 에서 오는 通 交 者 들이 많아지게 되었는지는 잘 說 明 할 수가 없다. 이 時 期 의 交 易 의 유형을 보면 商 人 이 바치는 경우, 對 馬 島 나 壹 岐 島 의 구당관이 와서 바치 는 경우, 日 本 이 바치는 경우 등이 있다. 日 本 인들 가운데는 對 馬 島 나 壹 岐 島 의 구당관, 商 人 등이 보이며, 高 麗 에서는 日 本 에 보냈다는 記 錄 은 잘 보이지 않는다. 日 本 의 史 料 가운데에는
46 4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高 麗 와의 關 係 를 남기고 있는 유형이 일기류가 많은 데 비하여, 高 麗 에서는 관찬사서에서 內 容 들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 交 易 關 係 통교자들은 갑자기 11 世 紀 부터 高 麗 史 에 집중되어 나타 나고 있다. 위의 표에서 보면 高 麗 商 人 들에 대하여 日 本 조정에서 의논했다고 하는 사실은 高 麗 商 人 도 日 本 에 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高 麗 商 人 의 존재를 日 本 의 資 料 에서 찾기는 쉽지 가 않다. 이처럼 交 易 의 擔 當 者 들이 11 世 紀 후반에 갑자기 표면화되고, 12 世 紀 에 들어서면 다시 급속 히 자취를 감추는 현상에 대해 日 本 商 人 들이 당시에는 自 力 으로 中 國 에 도항하는 데에는 기술 적으로 곤란하였기 때문에 우선 高 麗 로 진출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12 世 紀 以 後 가 되면 中 國 史 料 에 日 本 商 人 이 나타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발상은 마치 倭 寇 의 이동이 前 期 에는 高 麗 를 침범하다가, 후기에는 명나라로 진출하고 더 나아가 동아 시아의 해양민족이 되었다는 식과 아주 흡사하다. 이러한 발상은 조선은 대륙 진출을 위한 하나 의 교두보라고 하는 비하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한편 高 麗 에 渡 航 한 日 本 人 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大 宰 府 의 貿 易 管 理 體 制 가 瓦 解 되어 莊 園 에서 密 貿 易 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持 論 을 前 提 로 하고, 구주의 장원영주, 혹은 성 장해 온 博 多 의 商 人 이 해외 貿 易 에 착수한 것이며, 개개에 의한 사적인 物 品 헌상( 私 獻 )의 形 式 을 취하였다고 파악하였다. 18) 그리고 日 本 에서 高 麗 측에 바란 것은 中 國 산품이며, 19) 日 本 의 수은 나전 유황 등이 高 麗 에 의해 宋 으로 유입되고, 宋 의 물품이 高 麗 를 경유하여 日 本 으로 건너오고, 日 本 의 水 銀 이 宋 에서 高 麗 로 들어간다고 하는 물류의 三 國 連 鎖 關 係 를 指 摘 하기도 한다. 그러 나 森 克 己 의 見 解 에 對 해서는 疑 問 도 提 示 되고 있다. 우선 莊 園 內 密 貿 易 說 에 對 해서는 11 世 紀 段 階 에서는 大 宰 府 의 貿 易 管 理 가 기능을 하고 있었다는 指 摘 이 있고, 20) 莊 園 의 對 外 交 易 主 體 로 서의 力 量, 특히 스스로 海 外 에 進 出 하는 能 力 에 대해서 愼 重 하게 評 價 할 必 要 가 있다는 지적도 하고 있다. 21) 무역의 형식에 대하여 山 內 晉 次 는 奧 村 周 司 가 指 摘 한 八 關 會 的 秩 序 와 22) 연결시켜 이해하 18) 森 克 己, 日 宋 と 高 麗 との 私 獻 貿 易, 朝 鮮 學 報 34, ) 森 克 己, 日 本 高 麗 內 港 の 宋 商 人, 朝 鮮 學 報 9, ) 山 內 晉 次, 奈 良 平 安 期 の 日 本 とアジア, 吉 川 弘 文 館, ) 또 당시의 日 宋 貿 易 은 宋 의 海 上 에 의해 主 導 되고 있었고, 그 때문에 12 世 紀 以 後 의 中 國 史 料 에 日 本 商 人 이 나타난 것은 힘 關 係 의 變 化 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注 目 되었으나, 榎 木 涉 은 이 日 本 商 人 의 實 體 는 宋 商 이며, 宋 商 이 日 宋 貿 易 을 主 導 하는 狀 況 은 12 世 紀 에도 變 하지 않는다고 하였 다. 榎 木 涉, 宋 代 の 日 本 商 人 の 再 檢 討, 史 學 雜 誌 110-2, ) 奧 村 周 司, 高 麗 における 八 關 會 的 秩 序 と 國 際 關 係, 朝 鮮 史 硏 究 會 論 文 集 16,1979.과 高 麗 の 外 交 姿 勢 と 國 家 意 識 - 仲 冬 八 關 會 儀 および 迎 北 朝 詔 使 儀 1を 中 心 として, 歷 史 學 硏 究 別 冊 特 輯, 1982.
47 13 世 紀 以 前 의 麗 日 關 係 45 고자 한다. 高 麗 의 國 家 的 제례인 八 關 會 에서의 國 王 조하례에는 宋 商 女 眞 耽 羅 등 이역사람들 이 참례하고 있고, 高 麗 王 을 中 心 으로 하는 王 權 秩 序 가 表 現 되었는데, 11 世 紀 後 半 에는 그곳에서 日 本 으로부터의 通 交 者 가 참가했던 境 遇 도 있었다. 高 麗 의 입장에서는 日 本 도 이러한 政 治 秩 序 에 포섭되는 존재였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醫 師 招 請 事 件 은 日 本 에 대한 高 麗 의 大 國 意 識 이 文 書 形 式 에 반영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 對 日 通 交 가 실패함에 따라 日 本 政 府 와 의 關 係 가 재인식되고 그 以 後 에 성립하였다고 보여지는 八 關 會 에 日 本 이 참가자로써 등록되지 않았을 可 能 性 이 指 摘 되기도 하였다. 日 麗 通 交 의 經 路 에 대해서 山 內 晉 次 는 貿 易 의 盛 行 과 相 反 되게 官 廳 을 通 한 漂 流 民 의 積 極 的 인 送 還 이 이루어진 것에 注 目 하여, 大 宰 府 - 對 馬 라인이 창구가 되어 금주로의 送 還 이 이루어 졌고, 高 麗 에서는 金 州 의 東 南 海 船 兵 都 府 署 에 의해 中 央 으로 보내졌다고 하였다. 향후 日 本 과의 交 易 이나 外 交 절충에 있어 金 州 나 東 南 海 船 兵 都 府 署 의 장으로써의 性 格 에 대해서, 최근 活 潑 하 게 전개되고 있는 세계 각지의 항시론의 성과를 답습하면서, 또 조선 前 期 의 三 浦 形 成 의 前 史 라 고 하는 점을 강조하면서 本 格 的 인 檢 討 를 追 加 할 必 要 가 있을 것으로 展 望 하고 있다. 23) 12 世 紀 에 들어서면 高 麗 - 日 本 간의 通 交 와 관련된 史 料 는 현저히 줄어든다. 이러한 關 係 記 事 의 變 化 는 事 實 의 有 無 그 自 體 를 意 味 하는 것은 아니나 傾 向 性 을 反 映 한다고 評 價 되고 있다. 日 本 측의 要 因 에 대해서는 日 本 商 人 이 高 麗 의 政 治 混 亂 에 따른 危 險 을 받아, 技 術 的 으로 可 能 해진 對 宋 進 出 로 轉 換 한 것으로 보았다. 高 麗 內 外 의 動 搖 를 중요하게 여기는 硏 究 者 도 있다. 24) 元 來 高 麗 貿 易 이 薄 利 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日 宋 貿 易 의 發 展 에 의한 利 潤 밸런스의 變 化 때문이라고 하기도 한다. 25) 또 高 麗 측 要 因 에 대해서도 前 述 과 같이 雙 方 의 經 濟 隔 差 를 念 慮 한 高 麗 政 府 가 對 日 貿 易 을 축소하였다는 見 解 가 있다. 26)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高 麗 의 혼란이나 經 濟 隔 差 가 貿 易 衰 退 의 直 接 적 要 因 이 아니라 高 麗 北 方 情 勢 가 不 安 定 해지고( 女 眞 의 대두), 日 遼 貿 易 船 으로 推 定 되는 日 本 의 괴선박이 王 都 근해에 출현하자 이를 경계하여 日 本 상객의 상 경을 금하였고, 또 醫 師 초청교섭이 악화되고부터 日 本 에 대한 응대가 중시되지 않게 되었기 때 문에 對 日 政 策 이 금주에서의 래항자 접대에 머무르는 소극 방향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라는 主 張 이 있다.. 27) 이와같이 民 間 의 交 易 에 대해서도 兩 國 의 硏 究 成 果 는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특 23) 山 內 晉 次, 朝 鮮 半 島 漂 流 民 の 送 還 をめぐって, 歷 史 科 學 ) 田 村 洋 行, 高 麗 における 倭 寇 濫 觴 期 以 前 の 日 麗 通 交, 經 濟 經 營 論 集 28-1, ) 三 浦 圭 一, 十 世 紀 - 十 三 世 紀 の 東 アジア, 講 座 日 本 史 2, 東 京 大 學 出 版 會, ) 大 山 喬 平, 中 世 の 日 本 と 東 アジア, 講 座 日 本 史 3- 中 世 1, 東 京 大 學 出 版 會 ) 李 領, 院 政 期 の 日 本 高 麗 交 流 に 關 する 一 考 察, 이에 대하여 濱 中 昇 ( 書 評 : 李 領 著 倭 寇 と 日 麗 關 係 史, 歷 史 評 論 603, 2000)와 橋 本 雄,( 書 評 : 倭 寇 と 日 麗 關 係 史, 歷 史 學 硏 究 758, 2008.)의 史 料 讀 解 批 判 과 反 論 이 있었다.
48 46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기할만한 것은 日本의 麗日關係 硏究는 여 일 송 등 다양한 國家와 다각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는 점이다. 그만큼 많은 연구성果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民間의 交易 및 交流關係에서 흥미있는 사실은 12世紀말 源平抗爭중에 藤原親光이 對馬에서 高麗로 망명하였다고 하는 일화에 관한 것이다. 川添昭一28)은 11世紀 이래 계속된 高 麗와의 밀접한 關係가 배경에 있다고 파악하였다. 13世紀 전반의 史料에는 韓半島 남안지역에서 對馬島인이 高麗의 통제의 틀 밖에서 活潑히 活動하고 있었던 점이 엿보이는 內容도 주목하며, 政府記錄에는 보이지 않지만地方 民間에서는 그 以前부터 통교가 계속되어 왔을 것으로 추정하 기도 한다. 4. 文化的 交流 13世紀 以前 高麗와 日本의 文化的 側面에서의 關係는 어떠했을까? 實際로 日本에는 한반도 에서 건너간 유물이 굉장히 많이 있다. 그리고 그 유물들의 수준도 아주 우수한 것들이 많다. 그 러나 이 유물들이 제작된 時期는 13世紀 以前이더라도 日本으로 간 時期는 언제인지 정확히 알 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들의 出處나 건너간 經緯를 明確히 알 수 없는 現在로서는 그 分野를 여기서 다루는 것은 無理라고 생각이 든다. 本稿에서는 文獻上으로 紹介된 가운데 13世紀以前에 있었던 文化的 交流만 살펴보고자 한 다. 이 時期의 문화 交流 현상에 관해 살펴 보면 다음의 <표 4>와 같다. <표 4> 高麗와 日本과의 文化的 交流 연번 年度 관련事實 쉐4月 3日, 이해에 百濟國(高麗)의 皇后가 宋의 商人 990(成宗9, 周文德 楊仁紹를 通해 攝津國의 勝尾寺에 觀世音 永祚 2) 菩薩像 金鼓 金鐘 等을 寄贈함. 쉐10月 下旬 藥師寺의 僧侶 大房이 大宰府에서 宋의 1095年(獻宗1, 商人 柳裕에게 高麗에서 간행된 뺷極樂要書뺸 뺷彌陀 嘉保 2) 行願相應經典章疎뺸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함. 쉐3月 23日 宋의 商人 柳裕에 의해 高麗에서 간행된 1097年(肅宗2, 뺷彌陀極樂書뺸 등 13부 20권이 日本에 전해지고, 이 永長 2) 것이 같은 해 5月 23日 興福社 淨名院에 도착함. 1103年(肅宗8, 쉐2月 11日 高麗에서 刊行된 뺷華嚴經隨疏演義鈔뺸가 康和 5) 播磨國 性海寺에서 筆寫됨. 전거 / 應頂山勝尾寺緣起記 下 ; 元亨釋 書 28. / 阿彌陀經通贊疏 下의 題記(叡山文 庫 所藏) / 阿彌陀經通贊疏 下의 刊記[奧書] (叡山文庫 所藏) / 華嚴經隨疏演義鈔의 識語(東大寺 尊勝院 所藏) 28) 川添昭一, 鎌倉初期の對外關係と博多, 箭內健次編 鎖國日本と國際交流 上, 吉川弘文館, 1988.
49 13 世 紀 以 前 의 麗 日 關 係 年 ( 肅 宗 10, 長 治 2) 1120 年 ( 睿 宗 15, 保 安 1) 1216 年 ( 高 宗 3, 建 保 4) 1224 年 ( 高 宗 11, 貞 應 3) 1234 年 ( 高 宗 21, 文 曆 1) 年 ( 高 宗 34, 寶 治 1) 年 ( 高 宗 38, 建 長 3) 年 ( 元 宗 卽 位 年, 正 元 1) 1260 年 ( 元 宗 1, 中 統 1, 文 應 1) / 釋 摩 訶 衍 通 玄 鈔 및 釋 摩 訶 衍 論 贊 5 月 중순 大 宰 帥 藤 原 季 中 이 이 時 期 以 前 에 仁 和 玄 疏 의 刊 記 [ 奧 書 ]( 高 野 山 金 剛 峰 寺 寺 의 二 品 親 王 覺 行 의 命 을 받아 使 臣 을 高 麗 에 派 寶 龜 院 所 藏 ) ; 釋 摩 訶 衍 通 玄 鈔 ( 叡 山 遣 하여 釋 摩 訶 衍 論 通 玄 鈔 4권, 釋 摩 訶 衍 論 贊 玄 文 庫 所 藏 ) ; 釋 摩 訶 衍 論 贊 玄 疏 ( 仁 和 䟽 5권을 要 請 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이들 책이 日 寺 所 藏 ) ; 釋 摩 訶 衍 論 贊 玄 疏 ( 眞 福 寺 本 에 到 着 함. 所 藏 ) ; 釋 摩 訶 衍 論 贊 玄 疏 奏 ( 東 北 大 所 藏 ) ; 東 寺 王 代 記 ( 堀 河 院 長 治 2 年 ) 7 月 5 日, 8 日 日 本 僧 侶 俊 源 이 大 宰 府 에서 일찍이 僧 侶 覺 樹 가 宋 의 商 人 莊 承 蘇 景 等 을 통해 高 麗 / 弘 贊 法 華 傳 ( 東 大 寺 圖 書 館 所 藏 ) 에서 가져온 聖 敎 수백권 중에서 弘 贊 法 華 傳 을 筆 寫 함. 2 月 6 日 日 本 國 의 僧 侶 가 高 麗 에 와서 佛 法 을 求 / 高 麗 史 高 宗 3 年 2 月 己 丑. 함. 10 月 日 本 의 僧 侶 道 元 이 宋 의 慶 元 府 에서 高 麗 의 僧 侶 智 玄 景 雲 을 만남. / 正 法 眼 藏 12, 袈 裟 功 德. 이 해에 高 麗 國 王 이 日 本 의 貢 船 을 통해 圓 爾 弁 圓 / 聖 一 國 師 年 譜 文 曆 1 年 ; 元 亨 釋 書 에게 法 語 를 要 請 하자, 그가 顯 密 法 門 곧 佛 敎 의 敎 7, 慧 日 山 辨 圓. 學 을 條 列 하여 대답하였다고 함. 이 해에 高 麗 의 僧 侶 了 然 法 明 이 宋 의 徑 山 無 準 師 範 을 찾아갔다가 商 船 을 따라 日 本 으로 건너가 京 / 日 本 洞 上 聯 燈 錄 1, 了 然 法 明. 都 鎌 倉 地 域 을 遊 歷 함. 3 月 18 日 日 本 에 건너간 高 麗 의 僧 侶 了 然 法 明 이 出 雨 國 善 見 村 의 玉 泉 寺 를 開 創 하고 이어서 北 越 / 日 本 洞 上 聯 燈 錄 1, 了 然 法 明. ( 越 前 地 域 )에 머물고 있던 道 元 을 訪 問 하여 그의 佛 法 을 繼 承 하였음. 이 해에 日 本 의 僧 侶 가 高 麗 巨 濟 島 의 僧 侶 洪 辯 을 찾아와 法 華 經 을 구하여 大 宰 府 崇 福 寺 에 備 置 함. / 法 華 靈 驗 傳 下. 이 해에 高 麗 의 使 臣 團 을 따라 大 宰 府 崇 福 寺 에 건 너가서 法 華 經 을 살펴 보았던 高 麗 의 僧 侶 [ 道 人 ] 法 / 法 華 靈 驗 傳 下. 行 이 돌아옴. 위의 內 容 을 보면 13 世 紀 以 前 의 高 麗 와 日 本 의 文 化 的 交 流 는 거의 佛 敎 關 係 로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史 料 의 性 格 도 偏 向 的 이다. 交 易 關 係 는 資 料 의 出 處 가 高 麗 史 였는데, 佛 敎 關 係 는 日 本 史 料 일색으로 보인다. 그런데 日 本 史 料 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偏 頗 的 으로 記 述 하였을 可 能 性 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위의 內 容 으로 兩 國 의 문화 交 流 를 보면 몇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兩 國 의 關 係 에 송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문화를 보급 하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우호적 關 係 에서 交 流 가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高 麗 에서 日 本 에 불법을 구하러 가기도 하고, 日 本 에서 高 麗 에 불서를 요청하기도 한다. 때로 송을 거쳐 高 麗 와 日 本 의 佛 敎 에 관한 정보를 얻는 사례가 보이기도 한다. 高 麗 와 日 本 의 승려가 함께 日 本 을 여행하는 것도 흥미롭다. 위의 內 容 가운데 興 味 로운 것이 990 年 의 內 容 이다. 이 內 容 은 10 世 紀 에 송을 매개로 한 高
50 4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麗 와 佛 敎 의 關 係 을 알려 주고 있다. 이는 攝 津 勝 尾 寺 緣 起 의 정력원년(990) 內 容 이다. 이에 따 르면 百 濟 國 皇 后 가 송의 商 人 周 文 德 楊 仁 紹 를 통해 涉 津 國 의 勝 尾 寺 에 觀 世 音 菩 薩 像 金 鼓 金 鐘 等 을 寄 贈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事 實 이라면 宋 商 을 두고 麗 日 通 交 가 10 世 紀 에 행하여졌 던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原 美 和 子 29)는 이 說 話 에 보이는 宋 商 은 실재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만, 說 話 自 體 는 周 邊 住 民 과의 摩 擦 을 收 拾 하는 方 便 으로써 長 谷 寺 의 觀 音 靈 驗 談 ( 異 域 에서 온 佛 像 이 靈 力 을 發 揮 한다는 說 )을 基 礎 로 13 世 紀 中 伴 에 創 出 된 虛 構 라고 한다. 그렇다면 高 麗 와 日 本 의 思 想 的 交 流 가 12 世 紀 부터 본격화하였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1247 年 의 高 麗 의 僧 侶 了 然 法 明 이 宋 의 徑 山 無 準 師 範 을 찾아 갔다가, 상선을 따라 日 本 으로 건너간 事 例 가 있다. 이를 보면 비교적 자유롭게 승려의 日 本 출입이 묘사되고 있다. 이런 境 遇 밀입국으로 처리되지 않을 정도로 사상계에서는 交 流 가 비교적 원활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實 際 로 民 間 에 서의 交 流 가 活 潑 하였던 점을 보면 이보다 앞서 記 錄 에 나타나는 것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사상적 交 流 가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백제국황후 의 사실은 믿을 수 없지 만, 이를 근거로 高 麗 等 異 域 의 珍 寶 를 宋 商 이 가져왔다고 하는 모티브가 實 際 歷 史 狀 況 을 背 景 으로 하고 있을 可 能 性 도 排 除 할 수 없다고 하였다. 5. 軍 事 적 갈등 高 麗 와 日 本 과의 關 係 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기준의 하나가 되는 것이 무력적 충돌이다. 다시 말하면 國 家 勸 力 의 물리적 충돌인 군사적 關 係 를 찾아 볼 수 있다. 현전하는 史 料 에 보이는 13 世 紀 以 前 의 高 麗 와 日 本 과의 군사적 關 係 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리고 그 충돌의 정도고 심하다 고 볼 수는 없다. 關 係 史 料 들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연번 年 度 관련 事 實 전거 年 ( 光 宗 5, 1 月 25 日 新 羅 ( 高 麗 )가 日 本 을 攻 擊 하려 한다는 風 聞 / 길기 승치 5 年 (양화 1) 3 月 6 日. 天 曆 8) 이 있어 藤 原 朝 忠 을 大 宰 大 貳 로 任 命 함 1014 年 ( 顯 宗 5, 3 月 12 日 日 本 이 新 羅 ( 高 麗 )와 전투를 행함. /신황정통록 중, 장화 3 年 3 月 12 日 ) 長 和 3) 1019 年 ( 顯 宗 10, 寬 仁 3) / 小 右 記 寬 仁 3 年 4 月 17 日, 18 日, 2 3 月 28 日 이래 女 眞 族 인 刀 伊 가 對 馬 島 壹 岐 島 筑 前 0 日, 21 日, 24 日, 25 日, 26 日, 27 日, 5 國 怡 土 郡 等 의 地 域 을 攻 擊 하였다고 한다. 이들의 月 1 日, 3 日, 4 日, 24 日, 6 月 29 日, 8 侵 入 에 關 聯 되었던 高 麗 關 係 記 事 도 收 錄 되어 있음. 月 3 日 등 ; 扶 桑 略 記 寬 仁 3 年 4 月 8 29) 原 美 和 子, 勝 尾 寺 緣 起 に 見 える 宋 海 商 について, 學 習 院 史 學
51 13 世 紀 以 前 의 麗 日 關 係 日, 18 日 ; 日 本 紀 略 寬 仁 3 年 4 月 17 日, 18 日, 21 日, 25 日, 27 日, 5 月 26 日 ; 百 練 抄 寬 仁 3 年 4 月 18 日 年 ( 毅 宗 6, 이 해에 日 本 肥 前 國 宇 野 廚 內 小 値 賀 嶋 의 辨 濟 使 인 / 靑 方 文 書 安 定 이년삼월십삼일부관 仁 平 2) 是 包 가 高 麗 의 船 舶 을 攻 擊 함. 동재어장안 年 ( 高 宗 5 月 22 日 倭 人 이 金 州 를 侵 犯 함. / 高 麗 史 高 宗 10 年 5 月 甲 子. 10, 貞 應 2) 1225 年 ( 高 宗 12, 4 月 8 日 왜선 2수가 경상도 연해지역을 침구하다가 高 / 高 麗 史 高 宗 12 年 4 月 戊 戌. 元 仁 2) 麗 군에 의해 나포됨 年 ( 高 宗 13, 嘉 祿 2) 1227 年 ( 高 宗 14, 嘉 祿 3) 1 月 27 日 왜인이 경상도 연해지역을 침구하다가 거제 현령 진룡갑에 의해 격파당함. / 高 麗 史 高 宗 13 年 1 月 癸 未 6 月 1 日 왜인이 금주에 침구함. / 高 麗 史 高 宗 13 年 6 月 甲 申. 10 月 16 日 對 馬 島 와 高 麗 가 싸웠다는 풍문이 있음. / 明 月 記 嘉 祿 2 年 10 月 16 日. 10 月 17 日 宋 포당이 10여 척의 병선을 이끌고 高 麗 의 별도를 공격하여 민가를 약탈하였다는 풍문이 있음. / 明 月 記 嘉 祿 2 年 10 月 17 日. 12 月 7 日 등원정가가 구조교실로부터 高 麗 의 공격이 / 明 月 記 嘉 祿 2 年 12 月 7 日. 있을 것이라는 풍문을 전해 들음. 12 月 27 日 비후 壹 岐 의 민들이 高 麗 에 침입했다는 풍 / 民 經 記 嘉 祿 2 年 12 月 27 日 문이 있음. 2 月 전라주도안찰사가 승존 등 20인을 派 遣 하여 大 宰 府 에 牒 을 보내 지난해 6 月 에 있었던 倭 寇 의 침입을 / 五 妻 鏡 嘉 祿 3 年 5 月 14 日. 힐난함. 2 月 18 日 이래 日 本 朝 廷 에서 高 麗 의 牒 에 대한 의논 / 明 月 記 嘉 祿 3 年 2 月 18 日, 4 月 13 이 이루어짐. 日. 5 月 1 日 이 時 期 以 前 에 高 麗 의 전라주도 안찰사가 使 臣 을 派 遣 하여 大 宰 府 총관에게 牒 을 보내 倭 寇 의 침 입에 대해 항의함. 이에 對 應 하여 대재소이 무등자뢰 / 民 經 記 嘉 祿 3 年 5 月 1 日, 15 日 ; 百 가 使 臣 단의 면전에서 악도 90인을 처형하고 가만히 練 抄 嘉 祿 3 年 7 月 21 日. 答 書 를 보내는 동시에 牒 의 정본을 관동에 보내고, 사 본을 관백 등원(구조)가실에게 보냄. / 五 妻 鏡 嘉 祿 3 年 5 月 14 日 ; 鎌 倉 年 5 月 14 日 高 麗 의 牒 이 겸창막부에 도착함. 代 記 嘉 祿 3 年 5 月 14 日. 7 月 18 日, 21 日 日 本 朝 廷 에서 高 麗 의 牒 에 대해 의 / 民 經 記 嘉 祿 3 年 7 月 18 日, 21 日 ; 논함. 百 練 抄 嘉 祿 3 年 7 月 21 日. 8 月 12 日 高 麗 가 재차 牒 을 보낸다는 항설이 있음. / 明 月 記 嘉 祿 3 年 8 月 12 日. 高 麗 와 日 本 의 13 世 紀 以 前 까지의 軍 事 的 긴장은 거의 없었다고 하여도 좋을 것 같다. 韓 半 島 와 日 本 과의 軍 事 的 긴장은 역사적으로 볼 때 크게 두 類 型 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대륙에 서 열도로의 침공이거나, 열도에서 대륙으로의 침공이다. 그 가운데서도 역사적으로(이 時 期 뿐만 이 아니라) 한국과 日 本 의 군사적 갈등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日 本 의 膨 脹 主 義 에 있었다. 日 本 이 팽창하게 되면 거의 中 國 을 영토화하려는 政 策 으로 표현되었다. 그런데 13 世 紀 의 日 本 에서는 그러한 팽창주의가 나타나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52 5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위의 內 容 에서도 13 世 紀 에 들어서 高 麗 와 日 本 간의 긴장 關 係 가 발생하는 것은 이른바 초기 倭 寇 라고 하는 性 格 의 침구 집단의 발생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위의 사례에서 보다시피 군사적 갈등이라고 할만한 사례가 적기도 하거니와 1223 年 5 月 의 왜인이 금주를 침범한 事 件 이 발생하 기 以 前 까지는 물리적 충돌이라고 할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좋을 것 같다. 그리 고 1223 年 이후부터의 군사적 갈등은 이른바 초기 倭 寇 의 활동이므로 13기 以 前 의 일반적인 麗 日 關 係 의 현상으로는 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러한 초기 倭 寇 적 性 格 의 관련기사를 배제한다면 13 世 紀 以 前 의 高 麗 와 日 本 과의 군사적 갈등은 거의 없었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위에서 1019 年 의 刀 伊 와 관련된 內 容 은 오 히려 高 麗 에서 여진의 해적으로부터 日 本 인을 구하여 송환한 사실이 있게 되어, 이를 계기로 兩 國 간의 關 係 는 더욱 돈독해졌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이 事 件 에 대해서는 國 家 間 의 交 流 分 野 에 서 이미 약간의 언급을 하였다. 6. 漂 流 民 의 送 還 및 방문( 民 間 인의 交 流 ) 13 世 紀 以 前 高 麗 와 日 本 과의 關 係 에서 가장 잦은 記 錄 이 나타나는 것은 民 間 에서의 交 流 이 다. 民 間 에서의 交 流 라고 하면 여러 形 態 가 있겠으나, 그 가운데 漂 流 民 의 送 還 이 가장 많다. 漂 流 民 의 送 還 은 그 자체가 國 家 勸 力 이나 地 方 의 행정단위부서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표류 그 자체는 公 式 的 인 事 件 이 아니라 民 間 에서의 活 動 에서 부차적으로 수행된 일이므로 이 事 實 을 통하여 民 間 에서의 活 動 이 어떠한 形 態 로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 는 漂 流 民 에 대한 처우를 통하여 兩 國 의 우호 關 係 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漂 流 民 의 送 還 과 관련된 內 容 들은 대개 다음의 <표>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연번 年 度 관련 事 實 전거 年 ( 太 祖 25, 11 月 15 日 出 雲 國 司 가 新 羅 舟 7척이 隱 岐 國 에 寄 着 / 日 本 紀 略 天 慶 5 年 11 月 15 日 天 慶 5) 했다는 것을 日 本 朝 廷 에 보고함 年 ( 成 宗 3, / 小 右 記 目 錄, 永 觀 2 年 4 月 3 日, 21 4 月 3 日 高 麗 船 이 筑 前 國 早 良 郡 에 도착함. 永 觀 2) 日 年 ( 成 宗 5, -5 月 19 日 日 本 朝 廷 이 石 見 國 에 도착한 高 麗 國 人 에게 小 右 記 長 德 2 年 5 月 19 日 長 德 2) 식량을 주어 귀국시키도록 함 年 ( 穆 宗 1, 2 月 大 宰 府 가 高 麗 國 人 을 내쫓았다고 하는데, 이는 / 百 練 抄 長 德 4 年 2 月. 長 德 4) 南 蠻 人 의 착오로 판단됨 年 ( 穆 宗 2, 10 月 日 本 國 人 道 要 彌 刀 等 20호가 高 麗 에 내투해 / 高 麗 史 穆 宗 2 年 10 月. 長 保 1) 옴.
53 13 世 紀 以 前 의 麗 日 關 係 年 ( 穆 宗 5, 長 保 4) 6 月 27 日 日 本 朝 廷 이 가혹한 政 治 를 피해 日 本 으로 / 小 右 記 目 錄, 長 保 4 年 6 月 27 日 ; 건너와 살기를 要 請 한 高 麗 人 에 대해 의논함. 百 練 抄 長 保 4 年 6 月 27 日. 7 月 16 日 大 宰 府 에 도착한 高 麗 표류인 4인 및 이주 를 희망한 高 麗 人 [참래 高 麗 인] 20인에 대해 日 本 國 王 / 權 記 長 保 4 年 7 月 16 日. 이 2통의 文 書 [선지]를 내림 年 ( 穆 宗 7, 3 月 7 日 日 本 朝 廷 이 因 幡 國 에 도착한 于 陵 嶋 人 折 / 權 記 長 保 6 年 3 月 7 日 ; 本 朝 麗 藻 長 保 6) 兢 悅 등 11인에 대해 의논함. 下 ; 千 載 和 歌 集 年 ( 顯 宗 3, 8 月 3 日 日 本 國 人 潘 多 等 35인이 高 麗 에 내투해 옴. / 高 麗 史 顯 宗 3 年 8 月 戊 戌. 寬 弘 9) 1019 年 ( 顯 宗 10, 寬 仁 3) 5 月 29 日 高 麗 의 康 州 人 未 斤 達 이 筑 前 國 志 摩 郡 에 표착하여 온 것을 구금하고 신문함. / 小 右 記 寬 仁 3 年 6 月 21 日 年 ( 顯 宗 20, 7 月 28 日 日 本 에 표류했던 耽 羅 인 정일 등 7인이 귀 / 高 麗 史 顯 宗 20 年 7 月 乙 酉. 長 元 2) 환함 年 ( 顯 宗 22, 2 月 19 日 이래 1 年 전 日 本 에 표류해 온 耽 羅 인 8인 / 小 右 記 長 元 4 年 2 月 19 日, 24 日, 2 長 元 4) 을 귀화시킴. 6 日 年 ( 靖 宗 3, 3 月 對 馬 島 가 대우국에 표착했던 高 麗 인을 귀국시킨 / 日 本 紀 略 長 元 7 年 3 月 某 日. 長 元 7) 것을 日 本 朝 廷 에 보고함 年 ( 靖 宗 2, 7 月 16 日 日 本 이 표류한 高 麗 인 謙 俊 등 11인을 귀환 / 高 麗 史 靖 宗 2 年 7 月 壬 辰. 長 元 9) 시킴 年 ( 靖 宗 5, 5 月 10 日 日 本 人 남녀 26인이 내투해 옴. 長 曆 30) / 高 麗 史 靖 宗 5 年 5 月 庚 子. 3 月 1 日 高 麗 人 을 아버지로 하는 大 宰 府 의 舞 師 우두 年 ( 文 宗 2, 永 承 3) 1049 年 ( 文 宗 3, 永 承 4) 1051 年 ( 文 宗 5, 永 承 6) 年 ( 文 宗 10, 天 喜 4) 年 ( 文 宗 14, 康 平 3) 年 ( 文 宗 26, 延 久 4) 年 ( 文 宗 30, 承 保 3) 年 ( 文 宗 32, 承 曆 2) 年 ( 文 宗 36, 永 保 2) 年 ( 宣 宗 10, 寬 治 7) / 貊 氏 系 圖 머리[ 舞 師 首 ]인 滋 井 好 行 ( 貊 好 行, )이 죽음. 5 月 2 日 大 宰 府 가 日 本 朝 廷 에 新 羅 曆 ( 高 麗 曆 )을 구 하여 바침. 11 月 29 日 對 馬 島 官 이 首 領 明 任 으로 하여금 표류한 金 孝 等 20인을 金 州 로 送 還 함. 7 月 11 日 對 馬 島 가 使 臣 을 派 遣 하여 도망한 죄인 良 漢 등 3인을 送 還 해 옴. 10 月 1 日 日 本 국의 使 臣 藤 原 賴 忠 等 30인이 金 州 에 도착함. / 百 練 抄 永 承 3 年 5 月 2 日 ; 扶 桑 略 記 永 承 3 年 5 月 2 日. / 高 麗 史 文 宗 3 年 11 月 戊 午. / 高 麗 史 文 宗 5 年 7 月 己 未. / 高 麗 史 文 宗 10 年 10 月 己 酉. 7 月 27 日 對 馬 島 가 표류한 位 孝 男 을 送 還 해 옴. / 高 麗 史 文 宗 14 年 7 月 癸 丑. 3 月 20 日 求 法 僧 成 尋 일행의 선박이 耽 羅 島 부근을 / 參 天 台 五 臺 山 記 1. 통과함. 10 月 15 日 日 本 국 僧 俗 25인이 高 麗 영광군에 도착하 / 高 麗 史 文 宗 30 年 10 月 戊 戌. 여 상경하기를 요청하여 허락받음. 9 月 1 日 日 本 국이 표류한 耽 羅 인 高 礪 등 18인을 送 / 高 麗 史 文 宗 32 年 9 月 癸 酉. 還 해 옴. 9 月 14 日 延 曆 使 의 僧 侶 戒 覺 이 宋 商 劉 琨 의 배를 타 고 耽 羅 島 부근을 통과함. / 戒 覺, 渡 宋 記 7 月 8 日 高 麗 의 연평도 巡 檢 軍 이 海 賊 船 1척을 나포 하였는데, 이에는 宋 人 12명, 倭 人 19명이 승선하고 / 高 麗 史 宣 宗 10 年 7 月 癸 未. 있었으며 각종 화물이 실려 있었음.
54 5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年 ( 睿 宗 3, 嘉 承 3) 年 ( 毅 宗 14, 永 曆 1) 年 ( 明 宗 15, 元 曆 2) 年 ( 高 宗 10, 貞 應 2) 2 月 9 日 日 本 朝 廷 에서 唐 人 高 麗 人 이 日 本 에 도착 / 中 右 記 嘉 承 3 年 2 月 9 日. 하는 일에 대해 의논함. 4 月 28 日 日 本 朝 廷 이 對 馬 島 사를 통해 高 麗 의 김해 부가 對 馬 島 民 을 구금하였다는 事 實 을 보고 받고서 / 百 練 抄 永 曆 1 年 4 月 28 日. 여러 分 野 의 전문가 [제도, 제도박사]로 하여금 의견 을 개진[ 勘 申 ]케 함. 12 月 17 日 日 本 朝 廷 이 高 麗 가 對 馬 島 의 商 人 을 구 / 山 槐 記 永 曆 1 年 12 月 17 日 ; 百 練 류한 것을 의논함. 抄 永 曆 1 年 12 月 17 日. 3 月 4 日 對 馬 守 藤 原 親 光 이 平 氏 의 난을 피해 가족 / 玉 葉 文 治 2 年 2 月 24 日 ; 五 妻 鏡 및 부하를 이끌고 高 麗 에 망명함. 元 曆 2 年 5 月 23 日, 6 月 14 日. 6 月 14 日 對 馬 守 藤 原 親 光 이 高 麗 로부터 對 馬 島 에 / 玉 葉 文 治 2 年 2 月 24 日 ; 五 妻 鏡 귀환함. 元 曆 2 年 6 月 14 日. 겨울 高 麗 人 이 越 後 國 寺 泊 浦 에 표착함. / 五 妻 鏡 貞 應 3 年 2 月 29 日 ; 百 練 抄 貞 應 3 年 4 月 11 日 年 ( 高 宗 11, 貞 應 3) 2 月 29 日 3개월전 越 後 國 에 표착한 高 麗 人 이 소지했 던 弓 箭 을 비롯한 각종 물건들을 越 後 守 護 北 條 朝 時 / 五 妻 鏡 貞 應 3 年 2 月 29 日. 가 압수하여 幕 府 將 軍 源 賴 經 에게 보냄 年 ( 高 宗 19, 貞 永 1) 年 ( 高 宗 30, 寬 元 1) 年 ( 高 宗 31, 寬 元 2) 年 ( 元 宗 4, 弘 長 3) 閏 9 月 17 日 이 以 前 에 肥 前 國 唐 津 에 위치한 鏡 神 寺 의 住 人 이 高 麗 건너가 노략질한 事 件 이 있었는데, / 五 妻 鏡 貞 永 1 年 閏 9 月 17 日. 이날 幕 府 가 범인의 구류 및 승선 장물 등의 처리에 대해 守 護 所 에 명령을 내림. 9 月 29 日 金 州 防 禦 官 이 日 本 國 人 이 方 物 을 바치고 / 高 麗 史 高 宗 30 年 9 月 壬 申. 高 麗 의 표풍인을 쇄환한 것을 보고함. 2 月 2 日 이 時 期 以 前 에 前 濟 州 副 使 盧 孝 貞 判 官 李 珏 이 표류해 온 日 本 상선의 화물을 압수했다가 이 / 高 麗 史 高 宗 31 年 2 月 癸 酉. 때 발각되어 유배됨. 6 月 이 달에 日 本 의 官 船 大 使 如 眞 등이 宋 에 들어가 려다가 開 也 召 島, 群 山 島 楸 子 島 등에 표류해 왔고, 大 宰 府 少 卿 殿 白 의 商 船 이 宋 에서 日 本 으로 귀국하 / 高 麗 史 元 宗 4 年 6 月. 다가 宣 州 加 次 島 에 표착하였는데, 이들 모두를 귀국 시킴. 7 月 27 日 日 本 상선이 龜 州 艾 島 에 표착하자 귀국시 킴. / 高 麗 史 元 宗 4 年 7 月 乙 巳. 高 麗 와 日 本 의 民 間 간의 交 流 라고 하였으나, 여기에는 兩 國 이 民 間 인을 어떻게 취급하였는가 하는 점도 포함하였다. 때로는 극히 드물지만 조정 당국이 처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 분은 지방관들에 의하여 표착민들이 자기들의 나라로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표착민에 대하여 兩 國 이 일정하게 어떤 조례나 규약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그런데 漂 流 民 送 還 이나 交 易 을 둘러싼 점점으로써 부상한 것이 對 馬 이다. 山 內 晉 次 30)는 對 馬 와 高 麗 와의 사이에서 빈번 밀접한 人 的 交 流 가 이루어졌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는데, 日 本 側
55 13世紀 以前의 麗日關係 53 史料에는 당시 高麗와 交易한 것은 오로지 對馬島인이었다고 하는 記錄도 있다. 거기에서 佐伯 弘次31)는 日麗貿易의 주요한 擔當者로써 對馬에 注目하여 土地의 生産을 中心으로 한 交易形 態를 指摘하고 있으나, 對馬의 銀 採掘에 高麗 人夫가 關與하였을 可能性도 考慮하고 있다. 7. 進奉關係 高麗와 日本과의 公式的인 關係로 進奉關係가 나온다. 많은 기사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13 世紀가 되면 高麗와 對馬와의 關係에서 進奉의 關係가 나타나고 있다. 이와 관련된 內容을 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연번 年度 관련事實 전거 쉐1月 14日 對馬島의 使臣 명뢰 등 40인이 금주 남해에 도 / 平戶記 延應 2年 4月 17日. 착하여 원포 2,000牒, 흑鮑 2,000果, 녹피 30매를 進奉함. 1206年(熙宗2, 元久3) -2月 高麗의 금주방어사가 日本의 對馬島에 牒을 보내 명 뢰 등이 바친 牒이 進奉의 예를 갖추지 못했음을 꾸짖고, 이를 돌려 보냄. 쉐2月 전라주도안찰사가 승존 등 20인을 派遣하여 大宰府 에 牒을 보내 지난해 6月에 있었던 倭寇의 침입을 힐난 함. 쉐2月 18日 이래 日本 朝廷에서 高麗의 牒에 대한 의논이 이루어짐. 쉐5月 1日 이時期 以前에 高麗의 전라주도 안찰사가 使臣 을 派遣하여 大宰府 총관에게 牒을 보내 倭寇의 침입에 1227年(高宗14, 대해 항의함. 이에 對應하여 대재소이 무등자뢰가 使臣 단의 면전에서 악도 90인을 처형하고 가만히答書를 보내 嘉祿3) 는 동시에 牒의 정본을 관동에 보내고, 사본을 관백 등원 (구조)가실에게 보냄. /平戶記 延應 2年 4月 17日. / 五妻鏡 嘉祿 3年 5月 14日. / 明月記 嘉祿 3年 2月 18日, 4月 13日. /民經記 嘉祿 3年 5月 1日, 15日 ; 百練抄 嘉祿 3年 7月 21日. / 五妻鏡 嘉祿 3年 5月 14日 ; 鎌 倉年代記 嘉祿 3年 5月 14日. / 民經記 嘉祿 3年 7月 18日, 21 쉐7月 18日, 21日 日本 朝廷에서 高麗의 牒에 대해 의논함. 日 ; 百練抄 嘉祿 3年 7月 21日. 쉐8月 12日 高麗가 재차 牒을 보낸다는 항설이 있음. / 明月記 嘉祿 3年 8月 12日. 1259年(元宗 쉐7月 28日 監門衛錄事 韓景允 權知直史館 洪貯를 日本에 / 高麗史 元宗 卽位年 7月 庚午. 卽位年, 正元1) 派遣하여 倭寇의 禁止를 要請함. 쉐5月 14日 高麗의 牒이 鎌倉幕府에 도착함. 進奉 年(元宗4, 쉐4月 5日 大官署丞 洪貯 詹事府錄事 郭王府를 日本에 派 / 高麗史 元宗4年 2月 癸酉. 弘長3) 遣하여 倭寇가 金州 熊神縣의 勿島에 침입하여 공선을 30) 山內晉次, 奈良平安期の日本とアジア, 吉川弘文館, ) 佐伯弘次, 國境の中世交涉史, 海と列島文化3 玄界灘の島, 小學館, 1990.
56 54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노략질한 것을 힐문함. 쉐6月 이 달에 日本의 官船大使 如眞 등이 宋에 들어가려 다가 開也召島, 群山島 楸子島 등에 표류해 왔고, 大宰府 少卿 殿白의 商船이 宋에서 日本으로 귀국하다가 宣州 加次島에 표착하였는데, 이들 모두를 귀국시킴. 쉐7月 27日 日本 상선이 龜州 艾島에 표착하자 귀국시킴. 쉐8月 1日 洪貯 郭王府 등이 對馬島로부터 배상을 받아 귀 국함. 쉐9月 高麗의 使臣團이 牒을 가지고 하카타[博多]에 도착 함. / 高麗史 元宗 4年 6月. / 高麗史 元宗 4年 7月 乙巳. / 高麗史 元宗 4年 8月 戊申. / 靑方文書, 肥前國在聽 解案. 13世紀 전반에는 日本에서 高麗로의 進奉 이 史料에서 확인되는 時期이다. 그리고 초기倭寇 가 麗日간關係에서 나타나는 時期이기도 하다. 이 進奉 에 관해서는 朝貢과 동일한 것으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日本의 高麗通交 전반에 걸친 것으로 파악하였던 적이 있다. 그리고 13世紀에 進奉이 史料에 나타난 것은 高麗가 交易을 축소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며, 그 처사에 반대하여 日本에서 나타난 대응이 倭寇32)의 발생 이라고 연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進奉은 겸창막부가 民間의 자유貿易을 허락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進奉은 그 以前 時期부터의 私獻貿易의 계 승으로 對馬에 의해 행해진 것이며, 倭寇의 발생은 이때 日本商人이 철수하면서 나타난 현상이 라는 지적도 있다.33) 現在 進奉에 대해서는 進奉의 日本측의 주체, 전대 貿易과의 연속성, 제도, 관례 등의 性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따라 설이 나뉜다. 근년에는 주체를 對馬로 보는 傾向이 강하며, 大宰府 의 관여나 인지도 추정되고 있다. 기본적인 논점은 進奉이 어떤 특정 시점의 狀況을 일반화한 한 것이냐, 아니면 통상적인 의례였느냐에 쟁점이 있다. 進奉 이라는 용어는 아래 에서 위 에 대한 진헌을 意味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그런데 이 용어가 13世紀의 麗日關係에서 高麗 資料 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그리하여 이데 대한 일정한 정론에 이르기에는 다소 시간이 必要한 시점 이라고 하겠다. 단지 進奉이 13世紀以前 麗日關係 전반을 대변할 수 있는 關係가 아니라는 점만 32) 13世紀전반부에 倭寇의 존재가 보인다. 倭寇는 일반적으로 14世紀후반부에 일어난 역사적 事件 내 지 행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資料에서는 이미 廣開土王陵碑文에 고유명사화한 倭寇 라는 단어가 있다. 이러한 적대적 의미의 용어가 상당히 이른 時期에 생성되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日本과 고구려 사이에 적대적 關係가 있었다는 또 다른 의미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에 廣開 土王陵碑文에 나오는 왜나 倭寇의 표현에 대하여 다각적으로 해석을 싣하고 있지만, 그 용어들이 상징하는 일종의 거부반응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본고에서는 倭寇의 문제는 다루지 않 고 進奉 과의 관련된 內容만 간략히 취급하겠다. 33) 森克己, 海路による東方貿易の展開, 東洋學術硏究
57 13世紀 以前의 麗日關係 55 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8. 結論 13世紀 以前의 麗日關係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 關聯資料도 소략할뿐만 아니라 硏 究者도 많지 않다. 단지 그나마 일부 硏究자들이 없는 資料나마 치밀한 분석과 解釋을 유도하여 現在에 이르고 있다. 麗日關係사에 있어서 硏究자의 수나 硏究성과는 日本이 韓國에 비해 압도 적이다. 따라서 關聯資料에 대한 解釋도 日本의 것에 있어서 훨씬 더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한일관계사뿐만이 아니라 關係史에서 警戒視 되는 점은 자국사적 관점에서의 접근이다.34) 그 러나 한편으로는 關係사는 가장 자국사의 입장에서 다가가야 하는 分野일 수도 있다. 韓日關係 史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도 脫民族主義 歷史觀을 主張하며, 동아시아사로의 지향을 강하게 主張하는 예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변국의 民族主義化를 가벼이 해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中國의 東北工程이나 티베트, 신강事件 등은 역사의 문제에 있어서도 정도 깊은 걱정거 리를 제공한다. 역사학의 만남이 바로 政治, 經濟, 군사 등의 현실문제로 바뀌어가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 다. 다시 말하자면, 생각이나 관심이 물질세계를 바로 변화실킬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나 무형의 요소들은 물질세계를 바꾸기에는 매우 많은 시간을 必要로 한다. 그보다는 당 장의 經濟的 利害關係, 領土의 紛爭과 같은 要所들이 오히려 當代 歷史觀의 變化에 큰 影響을 미친다. 따라서 많은 歷史的 苦悶들이 時時刻刻 變하는 國際情勢 속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 들의 기조를 유지할 수 있을까하는 데에는 많은 아쉬움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지금까지 논의한 13世紀以前의 麗日關係를 정리하면서 본 발표를 마 치고자 한다. 13世紀以前의 麗日關係는 文獻에 나타난 史料上으로 볼 때 全分野에 걸쳐서 交流 가 活潑했다고 할 수는 없다. 政治的으로도 냉냉하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우호적인 사례라고 한 다면, 高麗가 여진의 해적에게 억류된 日本인을 송환해 보낸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불발 에 그쳤지만, 高麗에서 日本에 의사를 초청한 정도의 일은 그나마 우호적 關係라고 설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무력적으로 대립했던 적도 없다. 高麗가 침공한다든지, 兩國이 접전을 했다든지 하는 기사들이 극히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단지 13世紀후반으로 가면서 몽고 의 日本침공 의도가 표면화되면서는 분위기가 달라진다. 물론 이보다 앞서 對馬와의 進奉關係가 34) 大國意識이라는 주제가 나오게 된 것도 이러한 경향에서일 것이다. 李炳魯는 日本측에서 後百濟와 高麗에서 보낸 蕃國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에 강하게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58 56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어지러워지면서 초기倭寇가 발생하지만, 본격적인 적대關係는 몽고가 개입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한편 사상적인 關係에서는 상당한 交流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高麗의 승려가 상선을 타고 와서 日本의 中心지를 유유히 둘러 보았다는 記錄은 兩國의 이 分野의 關係 가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것을 意味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中國에서 만났던 高麗의 승려를 記錄한 日本 승려의 일기에서도 이들 간의 交流는 일단 원만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兩國이 民間에 대한 處遇도 일단은 自國으로 돌려 보내고 있는 것도 알 수 있 다. 그러나 여전히 이 時期의 硏究에 커다란 어려움이 있는 것은 史料의 문제이다. 이 時期의 史 料가 특정한 資料에서 특정한 時期에 集中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신뢰도가 減少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日本에서 高麗에 많은 方物을 가져오는 時期는 高麗 文宗때에 集中的으로 나오는 史料 에 의하여 알 수 있다. 다른 文獻에서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를 高麗의 八關會的 秩序에 포함시켜 理解하려는 傾向도 있지만, 그나마도 충분한 설명은 아닌 것 같다. 또 日本에 佛敎가 전래된 경위는 日本의 資料를 통해서만이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史料가 얼마나 보편적인 것인가 하는데 대하여 아쉬움이 있다. 이러한 資料와 硏究成果의 열악함 속에서도 韓日關係史의 次元에서 13世紀以前의 麗日關係 를 딱이 特徵 짓자면, 兩國은 독자적인 세계에서 자신들의 正體性을 摸索하는 가운데 相互 依存 的으로 持續的인 발전을 이루어 나가려고 했던 時期라고 할 수 있다.35) 35) 본고 작성에 森平雅彦敎授의 論考를 참고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2008년도 6월6일부터 8일까지 東京에서 가졌던 韓日歷史共同硏究委員會에서 發表한 森平雅彦교수의 10-13世紀 前半에 있어서의 日麗關係史의 諸問題-硏究動向을 中心으로- 에서 많은 部分의 情報룰 취하였고, 本考의 內容의 一部는 森平雅彦교수의 見解나 整理를 옮겨 왔다. 그러나 앞의 論考를 森平雅彦敎授가 未 定原稿이므로 轉載 引用 再配布를 嚴禁 한다고 하여 本考에서脚註 處理하지를 못한 點이 遺憾이다.
59 13세기 전반에 있어서 麗蒙交涉의 한 단면 몽골 官人과의 왕복문서를 중심으로 모리히라 마사히코(森平雅彦) 큐슈대학 1. 머리말 고려가 1231년부터 본격화된 몽골제국의 침략에 대하여 30년 가까이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 그러나 교전과 함께 다른 한편에서는 외교노력에 의한 사태 의 해결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은 같은 몽골에 대하여 강경자세 일변도였던 일본 등과 비교하여2) 흥미 깊은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과 역사적 의의를 정면에서 추구했던 연구는 그 예가 거의 없는 듯하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다양한 접근법을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 이 글에서는 고려가 몽골 官人 (將帥 書記官 외에 여기서는 몽골 황족을 포함한다)과 교환했던 외교문서의 양식에 대하여 고찰 한다. 종래에 주목받지 못했던 그 사실관계와 역사적인 문맥을 검토하는 것으로써 對元講和 이 전에 있어서 여몽관계의 일단을 알아보고자 한다. 1) 池內, 1963 ; 김재홍, 1963 ; Henthon, 1963 ; 旗田, 1965 ; 姜晋哲, 1974 ; 柳在城 蔡漢國, 1988 ; 尹龍爀, 1991 ; 윤용혁 1994, 참조 2) 다만 최전선의 대응 책임자의 동향에 관해서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 至元 8년(1271)에 元使 趙 良弼이 來日했을 때 太宰府 西守護所는 使者 26명을 보냈다고 한다(뺷元史뺸 권208, 日本傳).
60 58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2. 문서 형식의 검토 李奎報의 뺷東國李相國集뺸, 뺷東文選뺸, 뺷高麗史뺸에는 對元講和 이전에 고려가 몽골의 장수와 서기관 또는 황족에게 송부했던 문서에 관한 기록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表> 참조. 이하 관계 문서를 정리번호에 따라 문서01 과 같이 부르겠다.) 먼저 발신 명의와 書式에 대하여 확인해 보자. (1) 발신 명의 문서01 02는 고려에 갑자기 쳐들어 온 거란 집단을 쫓아서 1218년에 비로소 모습을 나타냈 던 몽골군 장수에게 보낸 문서이며, 錄文의 타이틀과 附記에 의하면 尙書省(尙書都省)이 발신 명 의이다. 1811년에 사망한 李文鐸의 墓誌銘에는 對馬에서 보낸 牒 에 尙書省이 答信을 보내려 고 했으며, 邊吏 에 대하여 파격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중지했다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필요 에 따라 尙書省이 외국에 문서를 보내는 사태는 원래부터 상정되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상기 이외에 실례는 확인할 수 없으며, 고려의 관부가 외국의 관부 관인과 문서를 주고받을 때는 중 앙의 禮賓省과 按察使 防禦使 등의 지방 담당관을 발신 명의로 하는 牒(統屬關係가 없는 관청 사이에 사용)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 對馬의 사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의 상급관 청인 尙書省이 직접 문서를 발행하는 것은 그만큼 안건과 교섭 상대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첫 대면인 몽골 장수에게 尙書省 명의로 응대했던 일은 미지의 교섭 상대를 중시하는 이례적인 표 현이며, 환언하면 신중한 경계자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서07 12는 왕족 淮安公 侹을 발신 명의인으로 한다는 것이 錄文 타이틀에 기록되어 있다. 전자는 그가 몽골에 파견되었을 때 道中保護에 대한 禮狀이며, 후자는 몽골의 장수 唐古가 令 公 앞으로 보낸 金線을 당사자인 權臣 崔怡가 수령하지 않고 淮安公 명의로 답장을 작성했던 것이다.4) 이 경우는 모두 사적인 성격이 강한 書狀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대하여 다음 문서는 발신 명의가 고려왕(당시는 高宗)이라는 사실을 비교적 명료하게 알 수 있는 사례이다. 먼저 문서06은 國銜 (국가로서의 자격) 문서가 나 라는 1인칭으로 기록되 어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왕조를 대표하는 국왕의 명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國銜行 인 3) 森平, 2007, 쪽, 참조. 4) 뺷高麗史뺸 권129, 崔忠獻傳附 崔怡傳 ; 뺷高麗史節要뺸 권16, 高宗 9년 5월.
61 13세기 전반에 있어서 麗 蒙 交 涉 의 한 단면 59 문서05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 문서17에는 所 論 予 及 崔 令 公 出 來 事 ([몽골측이] 논하는바 나와 崔 令 公 출두에 관한 문제)라 고 되어 있으며, 몽골로부터 권신 崔 怡 와 함께 출두하라고 명령을 받은 나 가 高 宗 이라는 사실 은 명백하다. 문서21도 나 라는 1인칭으로 기록되는 한편, 遣 親 弟 新 安 公 代 我 身 (친동생 新 安 公 을 보내 나를 대신한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왕의 동생 新 安 公 의 형인 高 宗 명의로 작성되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하게 나 라는 1인칭으로 기록되었고, 親 弟 新 安 公 이라는 문장이 보 이는 문서22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서13에서는 몽골의 공격 통고에 대한 고려 백성의 동요를 설명하고, 予 亦 不 能 無 懼 (나 역 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했으며, 고려가 達 魯 花 赤 (몽골의 감시관)을 살해한 사건 에 관한 견책에 대하여 予 亦 一 一 不 能 知 之 (나도 [상세한 상황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회답 하고 있다. 또 문서18에서 나 는 大 官 人 을 보내 글을 皇 帝 闕 下 에게 올린다 ( 遣 以 大 官 人, 奉 書 于 皇 帝 闕 下 )라고 적고, 다시 문서20에서 나 는 사신을 보내 토지의 사소한 물산을 皇 帝 闕 下 에 게 바친다 ( 以 土 地 輕 薄 所 産, 遣 使 介 奉 進 于 皇 帝 闕 下 )라고 적었다. 이들 나 는 왕조의 통치에 책임을 지고, 국가를 대표하여 몽골과 교섭하며, 遣 使 進 獻 을 행 하는 주체이며 바로 국왕 자신이다. 문서11에서 몽골의 지시를 有 司 에 명하여 실시했다고 언 급한 것도 국왕의 행위일 것이다. 문서 도 나 라는 1인칭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발신 명의는 국왕이었다고 이해하여도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문서25 27은 국왕문서였다는 것 이 高 麗 史 世 家 地 의 글에 명기되어 있다. 이와 같이 발신 명의가 錄 文 의 타이틀과 附 記 에 명시되지 않은 외교문서는, 실제로는 국왕 명의의 문서였다는 것이 확인 추정되는 케이스가 많으며, 거꾸로 국왕 명의가 아닌 것이 확인 추정된 것은 없다. 문서 처럼 국왕 명의 이외의 외교문서를 옮겨 적는 경우, 통상은 발 신 명의가 錄 文 타이틀 등에 명시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발신 명의가 부기되지 않고, 또한 문서 내용에 판단재료가 발견되지 않는 문서 ~ 도 국왕 명의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書 式 문서01에 관해서는 尙 書 省 牒 이라는 기재가 있으며, 統 屬 關 係 가 없는 관청 간에 이용하는 牒 이 사용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편찬사료 地 의 글의 서술이며, 官 文 書 를 나타 내는 일반명사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다. 한편, 문서02에서는 錄 問 의 문언에서 대등관계에서의
62 60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書簡文인 致書(서두가 某謹致書(于)某 가 된다)5)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서01의 牒 도 실체는 致書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당초에는 牒 또는 별도의 서식을 사용하면서, 나중에 致書 로 변경했다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칭기스 칸(Činggis Qan)의 동생인 카사르(Qasar)의 아들 예그(Yegü)대왕에게 국왕 명의로 보 낸 (내지는 보낸 것으로 보이는) 문서24~26(26에서는 官人에게 보낸 것도 포함한다)도 부분적인 錄文에서는 서식을 판명할 수 없지만, 뺷高麗史뺸 地의 글에서는 이들의 발송을 致書 로 서술하 고 있다. 그러나 고려왕에 대한 金나라 황제의 詔諭 와,6) 머리말 부분에 高麗國王昛謹奉書于 日本國王殿下 라고 적은 1292년의 對日國書7)처럼 명백하게 致書가 아닌 외교문서의 발송에 관 하여 뺷高麗史뺸 地의 글에서는 致書 로 표현한 케이스가 있다.8) 편찬사료의 地에서 문언으로 서식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뺷高麗史뺸에 보이는 다른 사례(문서27~29)는 단순히 書 라고 되어 있을 뿐이고, 書狀 일반을 지칭하는 경우와 구별이 곤란하며, 역시 서식을 뜻하는 術 語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한편, 전체의 절반이 약간 못되는 문서04 08~18에 관해서는 右啓 내지 某啓 (淮安公 명 의의 문서07 12)로 서두를 달고, 不宣 再 謹啓 등으로 끝을 맺는 서식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중국에서 말하는 啓에 해당한다. 고려가 참고했던 唐의 제도에서 啓는 황태자(실제로는 황태자 이외의 왕도 포함)와 官府의 長에 대한 上申文으로 규정되어 있지만9), 일반 官人들끼리 의 上行文書로서, 또한 私人 간에 공손한 뜻을 표시하는 길흉의 인사와 일상의 안부를 묻는 경 우, 기타의 서간문으로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10). 외교에서의 사용은 隋나라 말기에 唐 高祖 李淵이 처음 자립하던 당시에 突厥의 可汗에 대하여 사용했던 예 및 渤海王이 일본에 대하여 사용했던 예가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공손한 뜻을 나타내는 개인 간의 통신문으로서 啓의 성격 을 응용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渤海에 관해서는 일본에 대하여 臣禮를 피하면서도 辭를 천하게 여기고 우호관계를 맺으려는 의도를 지적할 수 있다11). 宋 司馬光의 뺷溫公書儀뺸 권1 私書에서는 私文書에 있어서 啓事(사물을 진술할 때 쓰는 글)의 서식으로서 啓의 한 형식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는 割註). 5) 6) 7) 8) 9) 10) 11) 致書에 관해서는 中村, 1991, 299~330쪽 ; 中村, 1996, 153~162쪽 ; 中西, 2005 참조. 뺷高麗史뺸 권14, 睿宗 14년 2월 정유. 일본 金澤文庫와 東京大學史料編纂所에 복사본이 남아 있다(錄文은 竹內, 1982, 298~300쪽). 金澤文庫의 對日國書에 관해서는 뺷高麗史뺸 권30, 忠烈王 18년 10월 경인조에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에서 국왕에 대한 上申文을 啓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추이를 이어받은 것이다. 堀, 1998, 243~246쪽 참조. 堀, 1998, 246~250쪽. 또한 石井, 2001a ; 石井, 2001b, 551~556쪽 참조.
63 13세기 전반에 있어서 麗蒙交涉의 한 단면 61 具位姓 某 右某啓 [述事云云] 謹奉啓事陳聞 [陳賀陳謝隨時] 伏惟 尊慈俯賜 鑑念不宣謹啓 月 日 具位姓 某 啓上 <表>에 올린 문서의 錄文에서 右啓 라고 쓴 것은 아마도 冒頭의 具位姓 某 가 빠진 것으 로 보인다. 다음 행의 右某啓 에서 某 도 빠진 것이 되지만, 후술하는 1267년의 啓式 對日國 書에서는 冒頭에 高麗國王王 禃 으로 되어 있으며, 2행째에 右啓 로 적었다. 교전기의 대몽골 문서 중에 右啓 라고 쓴 것은 모두 王文書일까? 그와 같이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1267년의 케이스와 마찬가지로 高麗國王姓諱 右啓 ( 는 改行을 의미한다)로 적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冒頭를 某啓 로 기록한 것은 淮安公 명의의 문서뿐이지만, 唐代의 啓에서는 일반적인 표기법이며, 예를 들면 渤海의 對日文書 속에서 武藝啓 등으로 적고 있다. 뺷溫公書儀뺸 私書에 서는 時候啓狀(時候의 인사장)과 別簡(첨부장?) 手簡(일반적인 서간)에서 某啓 로 적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平交 稍卑에 대하여 사용하는 케이스도 보인다. 국왕의 啓와 人臣의 啓에서 冒 頭가 다른 것은 國王의 啓가 왕조를 대표하는 國書임에 비하여12), 淮安公의 啓는 전술한 것처럼 사적인 禮狀이라는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뺷溫公書儀뺸에서 啓事 와 기타의 某啓 형식의 용법 구분이 혹은 이 차이에 대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右啓 로 적는 啓는 현재까지 唐 代에는 확인할 수 없는 모양이다. 3. 사용 書式의 역사적 문맥 啓라는 書式은 뺷東文選뺸과 뺷東國李相國集뺸에 수록된 文書錄文을 통하여 고려 국내에서도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3). 현시점에서는 용법에 관하여 중국과의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 전기에는 宋 遼 金 등 冊封 종주국과 이에 준하는 대륙왕조의 황제 이외의 외국 정부 관계자에 대하여 국왕이 친서를 송부하는 행위 자체가 드문 현상이다14). 12) 國書란 반드시 군주 간에 교환하는 문서만은 아니다. 뺷高麗史뺸 권7, 文宗 9년 7월 정사조에 의하면, 거란의 東京留守에 대한 고려왕의 친서도 國書 로 부르고 있다. 13) 林椿, 代李湛之寄権御史敦礼書 荅朴仁碩書 (뺷東文選뺸 권58) ; 同 与皇甫若水書, 上李学士書 与皇甫若水書 与趙亦楽書 同前書 与洪校書書 (同書 권59) ; 李奎報 与金秀才懐英書 (뺷東 国李相国集뺸 권26) ; 同 軍中荅安処士置民手書 又寄安処士 (뺷東国李相国集뺸 권26; 뺷東文選뺸 巻59). 14) 宋 強至 뺷祠部集뺸 권28에 수록된 代史館王相公答高麗王王徽書 과 又代参政馮諫議答高麗王書
64 62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또한 실제로 외교에 있어서 啓의 사용이 그다지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唐末부터동아시아에 서는 어떤 군주가 군신관계에 있지 않은 외국 군주 등에게 문서를 보내는 경우 致書를 사용하는 케이스가 눈에 띈다15). 몽골 교전기의 고려왕도 遼東에 독자 정권을 구축하고 있던 蒲鮮萬奴에 게 高麗國王某謹廻書于東夏國王殿下 라는 冒頭句의 書狀을 보내고 있다16). 이것은 蒲鮮萬奴 가 보낸 書狀에 대한 회답이기 때문에 謹廻書 가 된 것이지만 사실상 致書이다. 더군다나 官文 書이든 私文書이든 啓는 기본적으로 상대를 위에 두는 정중한 서식이다. 대등한 관계에서 사용 하는 致書와는 성격이 다르다. 아마도 그것은 외교문서에서도 마찬가지이며, 金 초기의 외교문서 를 모은 뺷大金弔伐錄뺸의 기록에 의하면, 南宋의 高宗은 金軍 元帥에게 처음에는 大宋皇帝 를 자처하는 致書를 사용했지만, 열세에 놓이게 되자 宋康王趙構 라는 호칭을 쓰기에 이르러서 마 침내 啓를 사용하게 되었다17). 한편, 1218년에 몽골군이 처음으로 고려에 들어왔을 때, 고려정부는 몽골 지휘관에게 尙書都 省 명의의 致書를 사용했다. 그런데 그 후 동일한 몽골 장수에게 국왕 명의의 啓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고려의 관청이 平行文書를 사용했던 대상에 대하여 군주가 上行文書를 사용한 것이 되 는데, 이것은 양국 관계가 크게 변화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1218년 단계에서는 거란 집단을 공동 토벌하는 우군으로서 접촉했지만, 1231년 이후는 몽골의 대규모 침공을 당하는 와 중에서의 절충이었다. 즉 南宋의 高宗이 金에게 행했던 것처럼, 위급 존망의 시기를 맞이한 고려 는 국왕 자신이 스스로 문서의 격을 낮추어 교섭에 임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사태의 타개를 도 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고려의 위기의식이 이례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啓의 사용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문서04에서 고려왕은 칭기즈 칸(Činggis Qan)의 막내동생 테무게 오치긴(Temüge Otčigi n)에게도 啓를 사용하고 있다. 동일한 오치긴에 대한 문서03에서 어떤 書式이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몽골과의 개전 이전부터 啓를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칭기스 근친의 황족이므 로 몽골 官人에 대한 것보다는 啓의 사용도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동격의 왕 이라는 입 장이므로 致書를 사용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러나 당시 오치긴은 서방 원정중인 칭기스의 대 리인으로서 몽골고원을 통치하는 책임자였다. 그를 皇太弟 로 부르는 고려측도 그 위세를 충분 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몽골고원 동쪽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고, 더군다나 동방으로 세력 는 宋의 高官에 대하여 高麗王의 親書가 송부된 것을 알 수 있는 예이다. 또 書式은 不明이지만 契丹의 東京留守에 대하여 致書 (書式은 不明)한 예도 있다(뺷高麗史뺸 권7 文宗 9년 7월 丁巳條). 15) 中西 2005, 참조. 16) 뺷東文選뺸 권61, 回東夏国書. 17) 井黒 2008, 참조.
65 13세기 전반에 있어서 麗蒙交涉의 한 단면 63 확대를 꾀하고 있던 오치긴은 그 무렵 공물 요구를 반복해서 고려 정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 었다. 1225년에 고려 국경에서 조난을 당하여 양국 관계가 결렬되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든 著古 与는 오치긴의 휘하에서 파견된 인물이다. 그와 같은 강압적인 皇太弟 와의 절충에 임하여 신 중하게 문서의 격을 낮춘 국왕문서를 사용했던 것은 고려 나름의 예민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문서24~26의 예그대왕에 대한 致書 에 대해서도 다소의 추론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이 뺷高麗史뺸의 用字 그 자체로 致書라면, 과거에 몽골 官人에 대하여 啓를 사용하면서, 格 上의 몽골 皇族에게는 거꾸로 平行文書를 사용한 것이 된다. 그러나 고통스런 전황이 거듭되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역시 致書 는 서식을 의미하는 術語가 아니며, 실 제로는 모종의 上行文書가 사용되었을 확률이 크다고 생각한다. 오치긴의 예에서 유추하면 그것 은 啓였을지도 모른다. 명백하게 啓인 문서09의 발송에 관하여 뺷高麗史뺸 23 高宗世家 19년 4월 임술조의 地文에서는 致書 라고 서술하기도 한다. 몽골 官人에 대한 국왕문서 중에 서식을 알 수 없는 ~ 도 어쩌면 모두 啓였는지도 모른다. 다만 書 의 형식에도 奉 書 獻書 등 보다 정중한 서식도 있으므로 그것들이 사용됐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을 것 이다. 이 부분은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추측은 삼가겠다. 고려에 있어서 啓式 외교문서는 의외로 이른 시기부터 존재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일본 平安貴族 藤原實資의 일기 뺷小右記뺸 長德 3년(997) 6월 12 13일에 의하면 이 해에 高麗 國牒三通 이 일본에 왔는데, 각각 日本國 對馬島司 對馬島가 수신인이며, 이들 문서는 高麗國 啓牒 으로 총칭되기도 한다. 啓 와 牒 이 각각 서식을 뜻하는 말이라면, 적어도 日本 이 수 신인인 문서류는 啓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은 일본 측이 宋의 모략을 의심하는 등 발신인의 정체에 수상한 점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 고려 정부에서 문서를 발송했을 가능성은 있다. 그렇다 면 외교에 啓를 사용하는 선례는 이미 고려 초기에 존재했고, 그것은 국왕 명의의 문서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10세기의 고려에는 渤海 멸망을 전후하여 세자 大光顯을 비롯한 다수의 遺民이 유입된 일이다. 唐代에 啓式 외교문서의 사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현 재로서는 渤海 뿐이다. 渤海에서 축적되어 온 대일 외교의 노하우가 고려에 전해졌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997년에 고려가 일본으로 上行 형식의 國書를 보냈다면, 그 배경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발송 직전에 고려가 처음으로 거란의 대규모 침략을 받았던 일이다. 북으로 부터의 위협을 받은 고려 정부가 대일관계의 호전을 도모한 것이라면, 굳이 啓를 사용한 것도 부자연스런 일은 아니다18). 마치 唐 新羅와 대치하고 있던 渤海 武王이 日本에 啓를 보냈던 때 18) 南基鶴, 2003, 312쪽에서는 997년 고려에서 보낸 문서에 일본 측이 경계심을 보인 것에 대하여 고 려의 大國意識이 드러났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만일 國書에 啓를 사용했다면 적어도 서식의
66 64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이 된다. 하지만 그 후 13세기 전반까지 200년 이상 고려의 啓式 외교문서는 확인할 수 없다. 10세기에 있어서 啓式 國書의 存否는 별론으로 하고, 몽골 官人에 대한 啓의 사용에 제도상의 연속성이 있는지 여부는 가볍게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고려의 啓式 외교문서를 최후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274년에 원 고려군이 일본을 침략했던 甲戌의 役(일본사에서 이른바 文永의 役)에 앞서서, 일본에 대하여 원과의 통교를 권고할 목적으 로 작성된 至元 4년(1267) 일자의 일본국왕 앞으로 보낸 元宗國書이다. 원본은 없지만, 일본 東 大寺 소장의 뺷調伏異朝怨敵抄뺸에 그 당시 元 世祖 쿠빌라이(Qubilai)의 國書와 高麗使 潘阜 일 행의 書狀을 복사한 것이 남아 있다19). 주요부의 텍스트는 뺷高麗史뺸 뺷高麗史節要뺸에도 전하며, 2차적인 錄文은 江戶時代의 일본에서 편찬한 외교문서집 뺷異國出契뺸(內閣文庫 소장)에도 수록 되지만, 同時代性이 높고, 首末을 비롯한 제반 형식이 보다 원형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뺷調伏異 朝怨敵抄뺸의 복사본이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문서는 冒頭에 高麗國王王 禃 / 右啓 云云으로 되어 있으며, 結辭에는 覆 / 日本國王左右 / 至元四年九月日 啓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는 改行), 틀림없는 啓이다. 다만 고려왕이 동일한 王 인 일본 군주에 대하여 上行文書를 사용한 것은 조금 이해하기 어 려우며, 蒲鮮万奴와 마찬가지로 致書를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전술한 것처럼 10 세기에 전례가 있으며, 그것을 모방했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두 개의 사건에 250년 이상의 시간 차가 있다는 것, 10세기 이후 양국 정부의 관계가 매우 소원하다는 것, 또한 고려가 국가 체제를 정비해 가는 과정에서 海東天子 20)와 八關會적 질서 21)라는 自尊의 자세를 형성해 갔던 것 을 고려하면 당장 수긍하기는 어렵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함께 일본에 보냈던 元의 國書와의 균형과, 元의 對日 招諭에 대한 高麗의 태도를 아울러서 생각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의 論旨에 서는 벗어나기 때문에 다른 기회에 고찰하려고 생각한다. 4. 高麗史料로 본 몽골 官人의 문서 몽골 官人이 고려에 보낸 문서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제1차 침략군을 지휘했 던 撒禮塔이 1231년에 보낸 2통의 書狀이다22). 몽골제국에서 편찬한 白話風의 漢語를 사용하여 19) 20) 21) 22) 측면에서는 다른 것이 된다. 뺷調伏異朝怨敵抄뺸의 텍스트에 관해서는 平岡, 1959 所載의 影印 참조. 盧明鎬, 참조. 奥村, 1979, 참조. 뺷高麗史뺸 권23, 高宗 18년 12월 임자, 갑술. 이 문서의 試釈에 村上, 1960과 Ledyard, 1963이 있다.
67 13세기 전반에 있어서 麗蒙交涉의 한 단면 65 몽골文을 直譯調로 옮긴 특수문체, 소위 몽골文 直譯體 白話風 한문23)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런 종류의 문서로는 최초의 사례이며, 달리 유례가 없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문서학적 성격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연구에 맡겨야 하겠지만, 첫머리의 天底氣力. 天道將來底言語. 所得 不秋底人, 有眼瞎了, 有手沒了, 有脚子瘸了 (하늘의 힘. 하늘이 한 말. 따르지 않는 자는 눈이 있 다면 멀 것이며, 손이 있다면 없어질 것이며, 다리가 있다면 병에 걸려 버려라) 등은 몽골 명령문 특유의 권한 부여 와 威嚇文言 의 요소에 해당한다24). 이와 같은 하늘의 권위의 주장과 협박 문구 는 몽골에서는 거의 정형화된 표현이다. 그러나 쿠빌라이(Qubilai)國書25)의 至用兵, 夫孰 所好 (兵을 쓰기에 이르면 누가 좋아할 것인가)에 대한 일본의 반응에도 보이는 것처럼, 문화가 다른 외국에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마찰을 일으키기 쉽다. 고려쪽의 수용 자세는 기록에 없 지만,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는 것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밖에 몽골 官人의 문서가 전면적으로 기록된 예는 없지만, 다음과 같이 고려측 문서에서 인용한 부분이 있으며, 역시 몽골문 직역체 白話風 한문으로 쓴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26). 문서03 不曾發遣女孩兒及會漢兒言語人, 亦不進奉諸般要底物 문서08 你國選揀人戶, 赴開州館及宣城山脚底, 住坐種田 문서13 你者巧言語, 說得我出去後, 却行返變了, 入海裏住去 不中的人宋立章 許公才, 那兩箇 來的說謊, 走得來. 你每信那人言語呵, 返了也 達魯花赤交死, 則死. 留下來, 如今你每拿縛者 你本心投拝, 出來迎我, 不投拝, 軍馬出來, 与我廝殺者 [ママ] 이상은 문서의 主文인데, 冒頭 형식에 관해서는 문서22의 錄文 附記에 來書云, 福蔭裏, 統 領蒙古糺漢大軍征討高麗唐古抜都魯言語, 道与高麗王 (來書에서 말한다. 福廕 아래로. 統領蒙古 糺漢大軍征討高麗唐古抜都魯의 말. 高麗王에게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아무개의 말. 아무개에 게 道与한다 는 표현은 초기의 몽골 명령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형태이지만, 福廕裏 라는 冒 頭 문구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福廕 에 관하여 언급하려면 어떤 福廕 인지를 보여주지 않으며 안 된다. 이것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고려측의 문서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문언이다. 23) 24) 25) 26) 몽골문 직역체에 관한 최신 연구성과에 舩田, 2007이 있다. 몽골 명령문의 서식에 관해서는 松川, 1995 참조. 뺷調伏異朝怨敵抄뺸 수록. 이것은 발령자가 몽골인이기 때문이며, 耶律楚材 등 漢文化人이 발령한 문서가 있다면(미확인) 아마 도 통상의 한문을 사용했을 것이다.
68 66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 ] ママ 문서21 孟夏漸熱, 伏惟, 長生天氣力 蒙古大朝國四海皇帝福蔭裏 大官人閣下, 起居千福 [ ] ママ 문서22 夏序方廻, 伏惟, 長生天氣力 蒙古大朝國皇帝福蔭裏 帥府大官人閣下, 茂膺千福 두 문서 모두[ママ]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신자에 대하여 인사를 한 부분인데, 長生天氣力. 蒙 古大朝國皇帝福蔭裏 (영원한 하늘의 힘 아래로. 蒙古大朝國皇帝의 威福 아래로)라는 문언이 수 신처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원래 이것은 몽골 명령문에서 권한 부여 를 의미하는 문장 첫머 22의 작성에 앞서서 고려에 보낸 몽골 측의 문서 첫 리의 상투적인 표현이다27). 아마도 문서21[ママ] 머리에는 長生天氣力. 蒙古大朝國皇帝福蔭 裏. 某官某言語 등으로 적은 것을 고려측이 오해하 [ママ] 여 長生天氣力. 蒙古大朝國皇帝福蔭裏 를 발령자인 官人을 수식하는 어구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서22에 앞서는 書狀 에[ママ]관한 기록이 남아있을 때는 단순한 실수인지, 참조한 문서 원 본 내지 錄文의 결손 때문에 福蔭裏 앞부분이 탈락된 것으로 생각된다. 몽골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다면 이처럼 문서에 國號를 붙일 필요는 없었으며, 蒙古大朝國皇 帝 라는 호칭은 외국을 대상으로 하는 문서이기 때문에 붙인 용어이다. 최근에 몽골제국에 관하 여 大朝 라는 칭호가 주목되며28), 大朝 大朝國 大朝蒙古國 으로 표기한 중국 사료의 용 례가 소개되었는데, 蒙古大朝國 이라는 표현은 고려 사료에서 새롭게 판명한 것이다29). 문서21에서는 蒙古大朝國四海皇帝 라는 칭호도 주목된다. 1246년에 로마 교황 인노센트 4 세(Innocentius Ⅳ) 앞으로 보낸 定宗 구유크(Güyüg) 國書의 印璽銘에는 황제의 호칭이 monggo l-un ulus-un dalay-in qan (몽골국의 바다의 황제)로 기록되었다30). 이 dalay-in 의 漢譯이 四海 일 것이다. 문서21은 太宗 오고타이(Ögödei) 때의 문서인데, 四海皇帝 라는 칭호가 오고타이 와 구유크에 관하여 확인된 것이 된다. 몽골제국에 관하여 유라시아의 극동(朝鮮)과 극서(유럽)의 사료가 훌륭하게 부합하는 한 가지 사례이다31). 高麗에 보낸 문서에 대해서는 몽골문 정본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으며32), 고려가 몽골에 보냈던 國書에 몽골 측에서 보냈던 문서에 관하여 以文字之各殊, 憑譯解而乃識 (문자 몽골어 möngke tengri-yin küčün-dur. yeke mongγol ulus-un qaγan-u suu-dur의 직역. 于采芑, 2006 참조. 蒙古大朝国 이라는 표현은 뺷高麗史뺸 권23, 高宗 18년 12월 갑술조에 수록된 문서에도 보인다. Pelliot 1923, pl. 몽골황제 중에서도 칭기스와 구유크는 qan으로 부른다. 李承休의 뺷賓王録뺸에 묘사된 원의 궁중 향연 모습이 마르코 폴로 뺷東方見聞録뺸의 기록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森平, 2004, 78~79쪽). 32) 宮, 2006, 204~205쪽. 27) 28) 29) 30) 31)
69 13세기 전반에 있어서 麗蒙交涉의 한 단면 67 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번역으로 이해했다)33)는 것이 한 가지 근거가 된다. 다만 오고타이 때 몽골의 국정을 기록한 뺷黑韃事略뺸에는 行於漢人 契丹 女眞諸亡國者, 只用漢字 (漢人 契丹 女 眞 모두 망국으로 갔다. 문서는 한자만을 사용한다)라고도 했기 때문에, 몽골문 직역체로 기록된 모든 외교문서에 몽골어 정본이 있었다고 간주하는 것도 경솔한 생각일 것이다. 5. 맺음말을 대신하여 이 글에서는 여몽 교전기에 고려가 몽골 官人에 대하여 사용했던 문서 형식에 관하여 검토하 고, 그 역사적 성격을 고찰하였다. 아울러 고려측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몽골 측 문서의 내용 형식에 관해서도 약간 언급하였다. 감히 대담한 추측을 덧붙인 부분도 있으며, 하나의 試論에 불 과하지만 諸賢의 叱正을 바란다. <표> 고려에서 몽골 官人에게 발송한 문서 번호 名 義 尙書省 哈眞 발송처 尙書都省 蒙古兵馬元帥 年 次 起草者 書 式 1218 牒 某月日右謹致書 1219 李奎報 于某官幕下 惶 恐惶恐 1220 李奎報 兪升旦 右啓 謹啓 1232 李奎報 1232 李奎報 1232 李奎報 03 蒙古皇太弟(오치긴) 大王(오치긴) 國銜行 閣下(사르타크) 國銜行 荅児巨元帥(탕구트) 荅児巨元帥(탕구트) 08 蒙古國元帥 1232 李奎報 右啓 09 撒里打官人(사르타크) 1232 李奎報 右啓 河西元帥(탕구트) 某官 淮安公 河西元帥(탕구트) 蒙古官人 沙打官人(사르타크) 晋卿丞相(耶律楚材) 沙打里(사르타크) 蒙古大官人 李奎報 李奎報 李奎報 李奎報 李奎報 李奎報 李奎報 李奎報 33) 뺷東国李相国集뺸 권28, 蒙古国使賚廻上皇帝表. 右啓 右啓 不宣謹啓 右啓 不宣謹啓 右啓 右啓 右啓 右啓 不宣謹啓 右啓 不宣謹啓 出 典 節要 高宗5/12 蒙古兵馬元帥幕送酒菓書 (東61;李28) 蒙古国使賷上皇大弟書 (東61; 李28) 同前書(東61) 回東夏国書에 대한 것 国銜行荅蒙古書 (李28; 東61) 同前荅児巨元帥状 李28 淮安公荅同前元帥状 李28 送蒙古国元帥書 李28;東61;高19/3/甲 午 送撒里打官人書 李28;東61;高19/4/壬 戌 送河西元帥書 李28; 東61 送某官状 李28; 東61 淮安公荅河西元帥書 李28; 東61 荅蒙古官人書 李28; 東61;高19/9 荅沙打官人書 李28;東61;高19/11 送晋卿丞相書 李28; 東61 荅沙打里書 李28; 東61; 高19/11 送蒙古大官人書(李28;東61;高19/12
70 6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18 蒙 古 大 官 人 1232 李 奎 報 右 啓 荅 蒙 古 大 官 人 書 ( 李 28; 東 61; 高 19/12) 19 唐 古 官 人 (탕구트) 1238 李 奎 報 送 唐 古 官 人 書 ( 李 28; 東 61) 20 晋 卿 丞 相 ( 耶 律 楚 材 ) 1238 李 奎 報 送 晋 卿 丞 相 書 ( 李 28; 東 61) 21 中 山 称 海 ( 粘 合 重 山 칭 카이) 1240 金 敞 与 中 山 称 海 両 官 人 書 ( 東 61) 22 唐 古 官 人 (탕구트) 1240 朴 暄 荅 唐 古 官 人 書 ( 東 62) 23 呉 悦 官 人 1240 李 蔵 用 与 呉 悦 官 人 書 ( 東 62) 24 也 窟 (예그) 1253 致 書 高 40/8/ 己 未 25 高 麗 王 也 窟 (예그) 1253 致 書 高 40/9/ 戊 寅 26 也 窟 阿 毋 侃 呉 悦 王 万 戸 洪 福 源 1253 致 書 高 40/11/ 戊 寅 27 高 麗 王 也 窟 (예그) 1253 書 高 40/11/ 戊 戌 28 胡 花 官 人 1253 書 高 40/11/ 戊 戌 29 車 羅 大 (쟈라이르타이) 1256 書 高 43/4/ 乙 亥 注 ) 李 : 東 国 李 相 国 集, 東 : 東 文 選, 高 : 高 麗 史 高 宗 世 家 ( 数 字 와 干 支 는 연월일), 節 要 : 高 麗 史 節 要 는 編 纂 史 料 地 의 글에서 당해 문서에 관한 표현. 참고문헌 井 墨 忍, 2008, 金 初 の 外 交 文 書 樣 式 と 國 際 關 係 - 大 金 弔 伐 錄 の 檢 討 を 中 心 に 國 際 シンポジウム 10~14 世 紀 東 アジアの 外 交 交 流 史 料 予 稿 集 池 內 宏, 1963, 蒙 古 の 高 麗 征 伐 同 著 滿 鮮 史 硏 究 中 世 第 3 冊, 吉 川 弘 文 館 石 井 正 敏, 2001a, 神 龜 四 年, 渤 海 の 日 本 通 交 開 始 とその 事 情 - 第 一 回 渤 海 國 書 の 檢 討 同 著 日 本 渤 海 關 係 史 の 硏 究 吉 川 弘 文 館 石 井 正 敏, 2001b, 古 代 東 アジアの 外 交 と 文 書 - 日 本 と 新 羅 渤 海 の 例 を 中 心 に 同 著 日 本 渤 海 關 係 史 の 硏 究 吉 川 弘 文 館 奧 村 周 司, 1979, 高 麗 における 八 關 會 的 秩 序 と 國 際 環 境 朝 鮮 史 硏 究 論 文 集 16 中 西 朝 美, 2005, 五 代 北 宋 における 國 書 の 形 式 について- 致 書 文 書 の 使 用 狀 況 を 中 心 に 九 州 大 學 東 洋 史 論 集 33 中 村 裕 一, 1991, 唐 代 制 勅 硏 究 汲 古 書 院 中 村 裕 一, 1996, 唐 代 公 文 書 硏 究 汲 古 書 院 旗 田 巍, 1965, 元 寇 - 蒙 古 帝 國 の 內 部 事 情 中 央 公 論 社 平 岡 定 海, 1959, 東 大 寺 宗 性 上 人 の 硏 究 幷 史 料 ( 中 ) 日 本 學 術 振 興 會 舩 田 善 之, 2007, 蒙 文 直 譯 體 の 成 立 をめぐって-モンゴル 政 權 における 公 文 書 飜 譯 システムの 端 緖 大 東 文 化 フォ-ラム 13 堀 敏 一, 1998, 渤 海 日 本 間 の 國 書 をめぐって 同 著 東 アジアのなかの 古 代 日 本 硏 文 出 版 松 川 節, 1995, 大 元 ウルス 命 令 文 の 書 式 待 兼 山 論 叢 ( 史 學 篇 ) 29 宮 紀 子, 2006, モンゴルが 遺 した 飜 譯 言 語 - 舊 本 老 乞 大 の 發 見 によせて 同 著 モンゴル 時 代 の 出 版 文 化 名 古 屋 大 學 出 版 會 森 平 雅 彦, 2004, 賓 王 錄 にみる 至 元 十 年 の 遣 元 高 麗 使 東 洋 史 硏 究 63-2
71 13세기 전반에 있어서 麗 蒙 交 涉 의 한 단면 69 森 平 雅 彦, 2007, 牒 と 咨 のあいだ- 高 麗 王 と 元 中 書 章 の 往 復 文 書 史 淵 144 村 上 正 二, 1960, 蒙 古 來 牒 の 飜 譯 朝 鮮 學 報 17 姜 晋 哲, 1964, 蒙 古 의 侵 入 에 대한 抗 爭 한국사7- 武 臣 政 權 과 對 蒙 抗 爭 국사편찬위원회 김재홍, 1963, 원 침략자를 반대한 고려 인민의 투쟁 과학원출판사 南 基 鶴, 2003, 高 麗 と 日 本 の 相 互 認 識 グロ-バリゼ-ションの 歷 史 的 前 提 に 關 する 學 際 的 硏 究 平 成 12~14 年 度 科 硏 費 補 助 金 ( 基 盤 硏 究 A2) 硏 究 成 果 報 告 書, 村 井 章 介 譯 ( 原 載 : 日 本 歷 史 硏 究 11, 2000 年 ) 盧 明 鎬, 1997, 東 明 王 篇 과 李 奎 報 의 多 元 的 天 下 觀 震 檀 學 報 83, 1997 年 盧 明 鎬, 1999, 高 麗 時 代 의 多 元 的 天 下 觀 과 海 東 天 子 韓 國 史 硏 究 105, 1999 年 柳 在 城 ( 執 筆 ) 蔡 漢 國 ( 主 幹 ) 1988 對 蒙 抗 爭 史 國 防 部 戰 史 編 纂 委 員 會 尹 龍 爀, 1991, 高 麗 對 蒙 抗 爭 史 硏 究 一 志 社 윤용혁, 1994,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한국사20-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于 采 芑, 2006, 蒙 古 汗 國 國 號 大 朝 考 赫 時 遠 羅 賢 佑 烏 蘭 編 天 驕 偉 業 - 成 吉 思 汗 与 蒙 古 汗 國 硏 究 紀 念 文 集 社 會 科 學 文 獻 出 版 社 Henthorn, W.E Korea: The Mongol Invasions, E.J.Brill. Ledyard, G Two Mongol Documents from The Koryo sa,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Pelliot, P Les Mongols et la Papauté, Revue de l'orient Chrétien, 3esér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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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삼별초와 여일관계 尹 龍 爀 (공주대학교 교수) 머 리 말 고려시대 국가적 차원에서의 일본과의 관계는 다른 시대에 비할 때 전반적으로 소원한 관계 가 유지되던 시기이다. 이것은 이 시기 정치적 외교적 측면에서 정부 차원 상호간의 필요성이 그만큼 높지 않았던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13세기에는 몽고의 전란으로 고려의 영토는 피폐되 고 정권과 왕조의 명운이 걸린 절대 절명의 조건 가운데 씨름하고 있었지만, 전란에 처한 대륙의 정세 속에서 일본은 봉건적 체제 가운데 안주함으로써 동아시아 교류의 환경은 활발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13세기 일본의 고려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제기된 것은 몽고의 압박에 의한 새로 운 정세의 조성 때문이었다. 장기적인 침략전 끝에 일단 복속을 표방한 고려를 앞세워 몽고는 일본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고 이같은 몽고의 대일 招 誘 작업에 고려는 그 嚮 導 로 동원되었다. 본고에서는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진도와 제주도를 거점으로 몽고, 고려 연합세력에 저항 하였던 삼별초와 일본과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 삼별초와 일본이 상호 어떤 구체 적인 외교적 관계를 형성한 것은 아니다. 1271년 일본에 파견된 삼별초의 사신도 일본 조정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거점으로 삼았던 진도가 함락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경우 에는 대외관계를 전개할만한 체계를 갖추지 못함으로써 삼별초는 하나의 정치집단으로서 적극적 인 외교적 방안을 구사하지 못한 채 그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반몽의 전선을 새로 형성 한 삼별초 세력이 반몽 항전의 새로운 돌파구로서 일본과의 연합전선 구축을 도모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특히 이러한 기도의 일환으로 보내진 외교문서 관련의 자료가 약간이나마 남아 있다는 점도 흥미 있는 일이다. 4년에 걸치는 삼별초의 봉기와 항전은 실패로 결말 되었지만, 몽고의 대일 征 役 에 일정한 차
74 72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질을 빚었고 결과적으로 일본에 대한 몽고군의 공격은 순조롭지 않은 경과를 보이게 되었다. 이 러한 점에서 삼별초와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 이외에 삼별초의 항전이 야기한 정세의 변수를 주 목하는 것도 필요한 일일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우선 삼별초 항전이 갖는 동아시 아 戰局에의 영향 및 대일 관계의 측면을 검토하고, 나아가 삼별초의 대일 외교 관련 문서인 高 麗牒狀不審條條 의 문건을 대일관계의 측면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삼별초가 13세기 후반 동아시아 전국에 미친 영향을 좀더 입체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한다. 한편 최근 오키나와 출 토의 고려기와와 삼별초 세력과의 관련성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도 본고에서 함께 언급하고자 한 다. 1. 고려 삼별초와 대몽항쟁 고려에서 삼별초 봉기가 야기된 시점은 1170년(원종 11) 6월 1일이다. 몽고군이 고려에 침입 을 개시하고 최씨정권이 이에 불복하여 저항을 시작한 1231년(고종 18)으로부터 40년만의 일이 다. 이 40년 기간 고려는 최씨정권의 집정자 崔瑀 崔沆 崔竩를 거쳐, 金俊과 林衍, 林惟茂에 이 르기까지 여러 차례 내부의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 그러나 집정자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몽고에 대하여 항전을 고수하는 정책노선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인집정자의 교체가 정권의 성격에 큰 변화를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인정권은 효과적인 저항을 위하여 침략 이듬해인 1232 년 왕도 개경에 가까운 도서인 강화도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결과적으로 고려는 1231년부터 125 9년까지 몽고군에 의하여 6차(11회)에 걸친 침략을 되풀이 받으면서 장기적인 저항전을 지속할 수 있었다. 1270년 삼별초의 봉기는 원종의 개경 환도 결정 및 무인정권의 붕괴라는 정치적 변 동 상황에서 야기된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삼별초는 고려 무인정권하 집정자 최우에 의하여 야별초라는 이름 으로 조직된 고려의 군사조직이다. 그 시기는 몽고군의 침입 직전인 1230년(고종 17)1) 경이다. 별초 라는 말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들은 정예군으로 선발된 조직이었으며, 무인정권이라는 정치 적 상황 하에서 만들어진 조직이었던 만큼 친정권적 성격과 기반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몽고군 의 대대적 침략이 시작되자 삼별초는 고려의 가장 강력한 군사집단으로 부각되었으며, 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그 규모 역시 확장되었다. 야별초가 삼별초 라는 조직으로 바뀌는 것 또한 이러 1) 야별초의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김당택, 최씨정권과 그 군사적 기반 뺷고려무인정권연구뺸, 새문사, 1987, 쪽 ; 윤용혁, 삼별초의 봉기와 남천에 관하여 뺷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뺸, 일지사, 2000, 131쪽.
75 삼별초와 여일관계 73 한 조직 확대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는 몽고군의 침입 직전에 무인정권에 의하여 설치 되고 1270년 무인정권의 붕괴와 동시에 정부에 의하여 해산 조치가 내려진 무력 집단이라는 점 에서 대몽항쟁기 무인정권과 관련한 가장 상징적인 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별초의 이같은 성격으로 말미암아 무인정권이 붕괴하고 고려정부가 몽고에 복속한 여건 속 에서 삼별초 존립의 근거는 완전히 상실된 셈이다. 그러나 강력한 군사력의 보유가 문제였다. 개 경정부가 삼별초의 해체를 명하고 나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삼별초가 보유하고 있는 군 사력은 완전한 굴복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점에서 본다면 1270년 삼별초의 봉기는 고려가 몽고 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복속으로 전환함에 따른 필연적으로 맞게 된 정치적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삼별초는 몽고에 대한 복속이라는 변화된 상황에 대항하는 고려 최후의 세력으로 남 게 되는 것이다. 삼별초에 대해서 몇 가지 언급을 먼저 하고자 한다. 첫째는 삼별초에 대한 역사적 평가 문제 이다. 삼별초 항전은 근대사학의 관점에 의하여 민족 항전의 대표적 사례라는 평가를 받아 왔 다.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근년 이같은 민족항전 으로서의 평가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역사에서의 민족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과 함께 삼별초 항전의 역사적 의의를 민족항전 이 아닌 민의 항쟁 에서 찾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3) 그리고 이에서 더 나아가 삼별초에 대한 비판적, 부정적 시각도 제기되었다. 삼별초 는 특정 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도리어 이들이 반민족적 집단이었고 그리고 그 행동은 민족 이 아 닌 정권을 보위 하려는 행동이었다는 견해가 이에 속한다.4) 삼별초에 대한 이같은 양극적 평가 는 역사적 사건을 과거로서 보다는 지나치게 현재적 상황에 대입하여 해석한데서 오는 시각이라 2) 왕조체제에 대한 단순한 반란으로 인식되어온 삼별초의 항전을 외세에 대한 자주적 반몽항전의 사 례로서 그 의미를 적극 부여한 것은 일제하 김상기의 공헌이었다(김상기, 삼별초와 그의 란에 就하 야 뺷진단학보뺸 , ; 뺷동방문화교류사논고뺸, 을유문화사, 1948). 이후 삼별초는 대외항전의 대표적 사건 혹은 고려 대몽항쟁의 하이라이트로서 그 의미가 강조되었다. 한편으로 19 70년대 군사정권에 뿌리를 둔 정치현실의 맥락에서 삼별초의 항전은 국난 극복 의 대표적 사례로서 강조되기도 하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민족주의의 맥락에서 구성된 해방 이후의 한국 역사에서 삼별초의 항전이 일정한 역사적 의미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공통적이었다. 3) 삼별초의 항전 이 갖는 의미는 삼별초의 강인한 민족정신 등으로 설명될 것이 아니라, 고려 지배 층과 몽골의 결탁에 반대하는 일반민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데 있다고 하였다. 이익주, 고려 후기 몽골침입과 민중항쟁의 성격 뺷역사비평뺸 24, 1994, 269쪽. 4) 1970년대 군사 독재정권 아래에서 어용학자들은 무신정권을 민족적이고 진취적인 정치세력으로 높 이 평가하고, 삼별초군의 활동을 국난극복 의 사례로 꼽았다. 군사독재정권의 민족주의적인 정통성 을 확보하려는 역사조작의 한 예였다. 이이화, 뺷몽골의 침략과 30년 항쟁뺸(한국사 이야기 7), 한길 사, 1999, 쪽.
76 74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고 생각된다. 특히 이들이 고려 장기 항전의 오랜 정치적 기반이었고 봉기시 반몽 구국 을 직접 적으로 주창한 점에서도, 민족항전 으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5) 삼별초 항전을 일방적으로 미화하는 것은 문제이다. 그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신화 만들기 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의도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폄하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소한 삼별초에 의한 반몽 항전의 역사적 사실과 그 의의 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삼별초의 역사적 의의를 민의 항전 에서 추구하는 것은 의 미 있는 견해이지만, 그것을 반드시 민족항전 과 배치되는 영역으로 축소 해석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하는 생각이다. 6) 2. 여일관계와 삼별초 삼별초의 여일 관계와 관련하여 우선 몽고의 고려에 대한 助軍 요구와 몽고측 사신의 일본 파견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몽고의 조군 요구는 처음에는 명확히 일본을 겨냥한 것은 아니 었지만 몽사의 일본 파견 추이에 상응하여 일본에의 군사적 공격으로 진전되어간 사안이었다. 몽고의 대일 견사는 1266년에 처음 시도된 이후, 2차 1267년, 3차 1268년, 4차 1269년, 5차 1271년, 6차 1272년, 7차 1273년 등, 여원 연합군의 일본침입(1274)에 이르기 까지 거의 해마다 이루어졌다.7) 1266년 1273년까지의 추이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8) 5) 삼별초의 민족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일찍이 村井 교수에 의해서도 주목된 바 있다. 반몽 보국 이라 는 삼별초의 격문은 삼별초의 강한 민족의식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村 井章介, 高麗 三別抄の叛亂と蒙古襲來前夜の日本 뺷中世日本뺸, 校倉書房, 1988, 쪽 참조. 6) 삼별초의 역사적 평가 문제에 대해서는 기왕에 발표된 필자의 삼별초 대몽항전을 보는 여러 시각 (뺷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뺸, 일지사, 2000)을 함께 참조 요망. 또 김일우 이정란은 삼별초 대몽항쟁 의 주도층과 그 의미 (뺷제주도사연구뺸, 11, 2002, 25-27쪽)에서, 삼별초 항쟁이 갖는 역사적 성격을 민중적 성격과 항몽적 성격의 양면에서 평가해야 하고 삼별초를 포함한 고려의 장기항전이, 원의 간 섭기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독립성 유지에 기여하였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한편 필자는 근년 삼별 초에 대한 평가 문제를 포함하여 고려 장기항전의 요인, 전쟁시의 강화도 문제, 대몽항전 유적에 관 한 문제 등 고려 대몽항전 전반과 관련한 논의점을 추출하여 정리한 바 있다. Yoon Yong-hyuk, The Focal Issues in the Historical Study of the Koryo s Resistance against Mongol,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10, 2006 참고. 7) 원의 견사는 大德 3년(1299) 11차까지 진행되었다. 이에 대한 전반적 설명은 김위현, 여 원 일본 정벌군의 출정과 여원관계 뺷국사관논총뺸, 9, 1989, 4-10쪽. 8) 뺷고려사뺸, 뺷원고려기사뺸, 뺷원사뺸 등 참고. 일본측 자료는 장동익, 뺷일본 고중세 고려자료 연구뺸, 서 울대출판부, 2004를 참고함.
77 삼별초와 여일관계 75 次 數 연도 遣 使 명단 견사의 경과 국서의 내용 결 과 (몽고) 黑 的 (병부시랑), 11월 파견, 거제도에서 殷 弘 (예부시랑) 출항 직전 기상을 핑계 (고려) 宋 君 斐 (추밀원부 로 포기 사), 金 贊 (시어사) (고려) 潘 阜 (기거사인), 李 挺 (서장관) 몽제와 고려 국서 전달, 태재부에서 5개월 대기, 경도에는 가지 못함 (몽고) 黑 的, 殷 弘 외 6 인 12월 파견, 1269년 3월 (고려) 申 思 佺 (지문하성 귀국시 대마도의 일본포 사), 陳 子 厚 (예부시랑), 로 2명( 塔 二 郞, 彌 二 郞 ) 潘 阜 외 1인 대동 도합 70여 명 ( 고려) 金 有 成, 高 柔 (몽고) 趙 良 弼 (고려) 徐 稱 (별장) 일행 100여 명 고려 사신 (몽고) 趙 良 弼 <표> 몽고의 對 日 招 誘 견사( ) 7월 왜 포로를 송환한다 는 명분으로 파견. 대마 도에서 보낸 편지는 태 재부, 막부를 거쳐 경도 에 보냄. 대마도를 거쳐 태재부에서 체재 9월, 대마도 거치지 않고 19일 규슈 今 津 도착, 태 재부로 직행, 국서를 경 도로 보냄 2월 13일 원종이 일본 국왕에게 서신을 보내 초유함 4월 일본 파견 원에 보낸 사신단 호송 귀국케 함 3월 태재부에서 경도에 는 들어가지 못하고 돌 아옴 (몽고국서) 일본의 복속을 궈유하며 용병의 가능성도 간접적으로 암시 (고려국서) 몽고의 의도가 우호관계 수립이라는 것으 로 일본 설득 (원 중서성의 첩장)일본의 내속 요구 및 무력 사용 가능성도 언급 거제도에서 포기 국서에 대한 회답을 받 지 못함. 몽고 및 고려국 서 동대사에 전함 대일본 군사력 투입 가 능성 시사(10월) 일본은 거절의 답장을 작성 하였으나 보내지는 않음. 일본사신 12명을 원에 들여보냈으나 원 세조가 접견 거부(조작된 사신) 조양필이 휴대한 서장이 남아 있음 내용 불명확 1268년 고려 반부를 통하여 일본에 전달한 국서가 무위로 끝나자 몽고는 고려에 요구하였던 송 정벌에 대한 助 軍 요구, 군사 1만, 선박 1천 척의 작업을 감독하는 한편, 경우에 따라서는 이 를 일본에 투입할 것도 고려하게 된다. 몽고의 고려에 대한 조군 요구는 처음에는 일본보다 대남송전을 전제로 추진되었다. 1268년
78 76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원종 9) 3월 于也孫脫 등이 전한 세조 쿠빌라이의 조서에서 대송전을 앞두고 고려에 대해 군사 와 병선 조달에 대한 준비, 군량의 저축을 주문한 것이 그것이다. 그해(1268) 6월(을사) 몽고는 吾都止를 파견하여 병선의 수와 군대 인원수를 점검하고 8월 대장군 崔東秀는 몽고에 입조하여 助軍을 위한 군사 1만의 확보 및 병선 1천 척 건조를 시작했다고 보고하였다. 10월에는 위 사항 을 점검하기 위해 몽고로부터 脫朶兒, 王國昌, 劉傑 등 14명이 입국하였는데 휴대한 몽제의 조 서에는 이들 사신의 지시에 의하여 배를 건조할 것이며, 군대와 선박을 잘 정돈하여 남송이든 일본이든 사용할 수 있도록 대비할 것, 흑산도와 일본 간의 길을 탐색하도록 지시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왕국창, 유걸 등은 고려 도착 즉시 흑산도 현지를 점검하였고, 흑산도에서 돌아 온 유걸은 다시 造船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서해도로 나갔다고 한다.9) 이 무렵 몽고는 남송에 대한 공격이 우선적 과제였기 때문에 고려의 助軍 문제는 일본보다 남송에 대하여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1268년(원종 9) 10월 쿠빌라이는 도원수 阿朮(아출), 劉 整 등에 7만의 군으로 양자강 북의 요새 襄陽을 포위 공격케 함으로써 남송에 대한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하였다.10) 그러나 남송 공격을 위한 고려의 조군은 실행되지 않았다. 아마 고려에서 의 발진과 대남송전에의 투입이 실제 효율성이 크지 않다는 판단이었을 수 있고, 거기에 1270년 삼별초의 봉기는 고려의 대송 조군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하였다. 고려정부가 개경으로 환도 하고 삼별초가 진도에 대치하고 있던 1270년 12월 원 세조의 조서는 고려가 造船 및 징병 명령 을 승낙하고서도 성과가 없는 것을 질책하면서, 남송이건 일본이건 유사시에 대비하여 병마와 군선, 식량을 빨리 준비하도록 다시 지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11) 군선의 조선 문제는 여전히 미 완의 단계에 있었으며, 고려군을 남송으로 보낼지 일본으로 보낼지도 결정되어 있지 않는 단계 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보면 고려의 대규모 군선 조성과 1274년 일본침략에의 참여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 이었던 것이며, 다만 1270년 삼별초의 반몽 봉기와 저항이라는 새로운 상황 전개로 인하여 그 일정이 얼마간 지연되었던 셈이다. 고려의 조선작업과 관련하여 이 시기 주목되는 사실의 하나는 1272년 3월 전함병량도감의 설 치이다. 명칭상 이것은 대규모 군선과 군량을 확보하려는 기구의 신설인데, 단기적으로는 제주 삼별초에 대한 대공세를 위한 준비였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일본정벌까지를 염두에 둔 기구였다 고 생각된다. 이 무렵 일본 招諭에 대한 문제가 점차 구체화되고 있었고 이 도감의 설치가 여원 관계의 일환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12) 특히 1271년 9월 일본에 파견되었던 元使 趙良弼 9) 뺷고려사뺸 권26, 원종 8년. 10) ドーソン 뺷蒙古史뺸, 三田史學會, 1933, 쪽. 11) 뺷고려사뺸 권27, 원종 11년 12월.
79 삼별초와 여일관계 77 은 11월을 기한으로 여전히 회답이 없으면 병선을 보내겠다 는 통첩을 보내기까지 하였다.13) 이같은 추이는 고려를 앞세운 차후의 군사적 행보가 이제 남송이 아닌 일본을 향하고 있음을 확 인하는 것이며, 특히 조양필의 제5차 견사를 계기로 일본에 대한 군사적 조치가 불가피하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다만 진도 함몰 이후 제주도를 거점으로 여전히 남서해 연안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하지 않은 삼별초의 존재로 인하여 일본에 대한 군사적 조치 시기는 더 늦추어질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이상에서 보는 것처럼 대외정벌을 위한 고려의 助軍 및 造船에 관한 문제는 삼별초 봉기 이 전부터 제기되었으나 삼별초의 봉기라는 고려의 정치 상황으로 인하여 지연되었다. 1266년부터 개시된 몽고의 대일 초유, 1268년 남송전의 본격적 재개 등의 진전을 감안하면. 1270년 삼별초 의 봉기가 없었을 경우라면 대략 1271년 경에는 대일 무력 공격이 시도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삼별초 봉기에 의하여 대략 2년 정도 연합군의 대일 공격 시점이 지연된 것이라고 필자 는 생각한다. 1270년 삼별초 봉기의 해에 대일 초유의 견사가 1년을 거르게 되었던 것에서도 그 러한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14) 이에 대해 村井 교수는 삼별초의 봉기로 인한 대일 征役 저지 요인을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 몽고의 둔전군 및 일본 원정에 사용할 함선에 대한 삼별초의 공격, 몽고(원) 둔전군에 공급될 貢賦가 경상, 전라지역에서 정상적으로 공급되지 못한 점, 일본원정에 투입하려던 둔전군을 삼별초 진압에 轉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 등이 그것 이다.15) 그러나 다른 한편 진도와 제주도에서의 삼별초와의 해전 경험은 그 다음해 일본침입과 관련하여 몽고군에게는 하나의 좋은 연습 기회 를 제공한 셈이라는 평가도 있다. 대일 초유 과정에서는 제1차 여원군의 일본침입 전년인 1273년까지 4회에 걸쳐 매년 초유 사절이 파견되었다. 앞의 표에서 보는 것처럼 그 가운데 1270년 한 해만 사절 파견이 거르고 다 시 속개되고 있는데, 이 같은 1년의 休止는 삼별초의 봉기로 인하여 남부 연안 일대가 진도 거점 삼별초의 세력권에 포함된 복잡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삼별초의 대일 연합전선 추구는 기 본적으로는 여원관계의 역사성과 지리적 인접성에 의하여 제안될 수 있었던 것이기는 하다. 그 12) 戰艦兵糧都監과 함께 鈿函造成都監이 설치되었는데 후자는 원 황후의 대장경 보관을 위한 용품 제 작을 위한 것이었다(뺷고려사뺸 권27, 원종 13년 갑진). 13) 此上以來十一月可爲期 猶爲無音者 可艤兵船云云 (뺷吉續記뺸 문영 8년 10월 24일). 14) 삼별초 봉기가 여몽군의 일본 침입을 지연 시켰다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동의가 전제되어 있다. 일 찍이 旗田 巍는 이점을 지적하여 이 항전이 없었다면 몽고는 더 일찍 일본을 습격했을 것이다. 일 본원정을 위한 둔전군은 삼별초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삼별초 토벌에 轉用될 수 밖에 없었 다. (중략) 객관적으로 보면 삼별초의 란은 몽고의 일본 침입을 지연시키고 방위 준비를 갖출 시간을 준 것 이라고 단정 하였다(旗田 巍, 뺷元寇뺸, 中央公論社, 106쪽). 15) 村井章介, 高麗 三別抄の叛亂と蒙古襲來前夜の日本 뺷中世日本뺸, 校倉書房, 1988, 쪽.
80 78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러나 동시에 이처럼 수년 전부터 추진해온 일본에의 초유, 그리고 대일 정역을 염두에 둔 군선의 준비 등 일련의 상황이 삼별초로 하여금 여원연합세력에 대한 열세를 보완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일본과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모색하게 되는 계기를 자연스럽게 조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고려의 대일본 초유 과정 및 이후의 사태 진전에서 확인되는 사실의 하나는 고려와 일본을 하나의 동일범주로 파악하는 일본의 입장이다. 심지어 개경정부와 삼별초에 대해서도 이를 구분 하는 의식이 없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16) 3. 삼별초의 일본과의 연대 시도 1270년 6월 1일, 강화도의 삼별초는 몽고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한 원종의 고려정부에 반 기를 들고 봉기하였다. 이들은 몽고에 복속한 개경정부를 전면 부정하고, 새로 조직한 그들의 정 부야발로 고려의 정통정부라는 인식이었다. 이들은 봉기 직후 강화도로부터 진도로 이동, 용장성 을 구심점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개경정부와의 대결을 기도하였다. 이들은 구 후백제 지역과 남부 해안지역을 아우르는 연안 해양세력권 구축을 통하여 개경정부와의 대결을 기도 하 였다. 한편 몽고의 압력에 대응하는 방편으로 일본과의 공동전선 연대를 의도하여 나름대로의 세력 구축을 도모하려 하였다. 몽고에의 대항을 위한 일본과의 국제적 연대 라는 이 같은 착안은 어디에서 가능했던 것일 까. 삼별초가 강화도를 포기하고 진도로 남천 하였을 때 서남해 연안의 도서만으로 여몽연합군 의 공세를 방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진도 이외의 배후기지 확보가 우선적인 관건이고, 다음으로 남송 혹은 일본과의 연결을 모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였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1266년 이래 이미 진행되고 있던 대일본 초유에 의하여 몽고의 압력 하에 놓여진 일본의 입지에 대하여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17) 삼별초의 대일 교섭에 대해서 그 가능성을 가장 먼저 논의한 것은 根本 誠씨이다.18) 뺷吉續記뺸 16) 남기학, 몽고침입과 중세 일본의 대외관계 뺷아시아문화뺸 12,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474 쪽. 17) 삼별초가 일본과의 관계를 구상한 것은 몽고의 난폭한 침략과 지배에 저항하는 싸움, 장기에 걸치 는 억압을 견디어 온 경험에서 온 의식 과 삼별초가 남해안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점차 일본의 존재를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 것 이라 한 언급(村井章介, 高麗 三別抄の叛亂と蒙古襲來前 夜の日本 )에 대하여, 이영은 고려의 일본에 대한 항상적 외교관계 에 기반한 것이라 하였다(103104쪽).
81 삼별초와 여일관계 79 의 문영 8년 9월의 고려첩장 에 대한 해석이 그것이다.19) 그리고 이것은 고려첩장 불심조조 문서의 발견에 의하여 사실로서 확인되었다. 이에 의하면 진도정부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 대몽 항전에 있어 공동의 보조와 협조를 타진하게 된 것은 원종 12년(1271)의 일이다. 진도에서 보낸 편지는 진도정부가 몽고군에 의해 무너진 한참 뒤인 9월 초에야 가마쿠라(鎌倉) 막부를 거쳐 쿄 토(京都)의 조정에 전달되었다. 이 서신을 가져온 사신은 아마 7월 말 이전에 하카다 부근에 도 착했을 것이라 추측되고 있는데, 진도에서의 출발을 진도에 대한 대공세가 이루어진 5월 15일 이전으로 본다고 한다면 하카다(博多) 혹은 다자이후(太宰府) 도착은 대략 5, 6월경의 일이어야 한다. 진도정부가 일본에 보낸 편지 내용에 대해서는 뺷吉續記뺸의 동년 9월 4일조에 몽고가 일본을 치게 될 것임을 먼저 경고하고 아울러 식량과 병력으로 협조해 줄 것을 구체적으로 요청하는 내 용이 있다.20) 그런데 동경대학 사료편찬소의 보관문서인 高麗牒狀不審條條 는 이때 진도정부 에서 보낸 편지의 내용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인 지식을 전하고 있다. 이 문서가 진도의 삼별초가 보낸 편지 그 자체는 아니지만, 편지의 주요 내용을 언급하고 있어 삼별초의 일본에 대한 희망과 당시 진도정부의 내부사정에 대하여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 다. 高麗牒狀不審條條 一. 以前狀(文永五年) 揚蒙古之德 今度狀(文永八年) 韋毳者無遠慮 云云 如何 一. 文永五年狀 書年號 今度不書年號事 一. 以前狀 歸蒙古之德 成君臣之禮云云 今狀 遷宅江華近四十年 被髮左衽 聖賢所惡 仍又遷都珍 島事 一. 今度狀 端ニハ 不從成戰之思也 奧ニハ 爲蒙被使云云 前後相違 如何 一. 漂風人護送事 一. 屯金海府之兵 先二十許人 送日本國事 18) 根本 誠, 文永の役までの日蒙外交 特に蒙古の遣使と日本の態度 뺷軍事史學뺸 5, 1966, 58-60쪽. 19) 일본에 전해진 고려첩장 에 대한 논의는 뺷吉續記뺸의 문영 8년(1271) 9월 2일부터 시작되고 있다. 관련 기록은 장동익, 뺷일본 고중세 고려자료 연구뺸, 쪽에서 볼 수 있다. 장동익에 의하면 뺷吉 續記뺸는 가마쿠라 시기의 인물인 藤原經長( )이 1167년부터 1302년까지의 일기체의 기록 으로서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관련 기록 9건이 포함되어 있다(張東翼, 뺷일본 고중세 고려자료 연 구뺸, 143쪽). 20) 件牒狀趣 蒙古兵可來責日本 又乞糴 此外乞救兵歟 就狀了見區分 (뺷吉續記뺸, 문영8년 9월 5일). 장 동익, 뺷일본 고중세 고려자료 연구뺸, 139쪽.
82 80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一. 我本朝統合三韓事 一. 安寧社稷待天時事 一. 請胡騎數萬兵事 一. 達冕旒許垂寬宥事 一. 奉贅事 一. 貴朝遣使問訊事 진도 삼별초정부가 보낸 편지에는 첫째, 몽고에 대한 비난, 반몽 의지가 명백히 나타나 있다. 가령 제1조에서 몽고를 韋毳(위취) (짐승의 가죽)라는 말로, 3조에서 몽고풍속(문화)을 被髮左 衽 (오랑캐의 습속)이라는 문자로 지칭한 것 등은 공식적 외교문서로서는 매우 강렬한 반몽 의 지의 표현들이다. 둘째, 당시 삼별초 정부는 진도정부야말로 정통의 고려 정부임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 된다. 이 때문에 본 문서의 제목은 高麗牒狀 이며, 강화도에서의 40년 항전이후 항몽 전통을 계 승하여 진도로 천도하였음을 제3조에서 밝히고 있다. 셋째, 진도정부와 일본과의 공동적 운명 내지 진도정부의 일본에 대한 배려가 강조되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특별히 몽고 침략의 위기적 상황을 일본과 공동으로 타개해 나갈 것을 소망하는 삼별초정부의 기대가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情況을 직접 보게 하기 위하여 사절의 파견을 일 본에 요청한 것으로 보아, 진도정부는 일본과의 반몽 항전을 위한 일종의 공동전선을 희망하였 던 것임을 알 수 있다.21) 고려첩장 문서의 이상과 같은 맥락은 일본과의 공동운명을 강조함으로써 진도정부가 일본의 구체적 지원 가능성을 타진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삼별초 진도정부의 對日 사신 파견은 공동 대처를 주장하는 입장으로서 군량, 병력 등의 실질적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일정한 목적이 있었다. 실제 진도정부가 식량의 결핍을 우려하고 있었던 사실은 원종 12년 몽고측의 진도에 대 한 첩보에 의하여 확인되는 사실이다. 진도정부는 몽고군의 대규모 공세를 목전에 두고 병력면 에서도 상대적인 열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일본과의 연대를 타개책으로 시도하였 던 것이라 하겠다.22) 삼별초 정부의 반몽 연대 제의에 대한 일본측의 반응은 애매한 것이었다. 일본은 고려 국내 21) 石井正敏, 文永八年來日の高麗使について 뺷東京大學史料編纂所報뺸 12, 1978 ; 柳永哲, 高麗牒 狀不審條條의 재검토 뺷한국중세사연구뺸 1, 石井의 논문은 필자가 삼별초의 대일 통교사료 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한 바 있다(뺷史鄕뺸 2, 공주사대 역사교육과, 1985). 22) 삼별초 문서를 포함한 진도 삼별초 전반에 대해서는 윤용혁, 삼별초 진도정부의 수립과 전개 삼 별초의 진도항전 (뺷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뺸, 일지사, 2000) 참고.
83 삼별초와 여일관계 81 정세의 최근의 변동에 대해서 거의 사전 지식이 없었고, 따라서 진도에서 보낸 편지의 진의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허황한 논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은 몽고의 침입 위협이 점차 현실화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체적인 대비책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 삼별초 첩장 관련 자료에 대해서는 石井 씨의 소개와 해석 이래 여러 번의 검토가 있 었지만, 삼별초의 대일관계를 엿볼 수 있는 기본 자료라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자료에 대한 논의 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문건 중 특히 당시의 대일관계상 직접 연관되는 것은 4, 5, 6번째의 문구 이기 때문에 여기에 한정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4번째 문구에서부터 보기로 한다. 一. 今度狀 端ニハ 不從成戰之思也 奧ニハ 爲蒙被使云云 前後相違 如何 우선 문자 판독의 면에서는 思 를 由 로 보는 의견이 제기되었다.23) 문건의 해석에서는 不 從成戰之思也 에 대하여 따르지 않으면 싸움이 일어난다 또는 몽고의 일본 공격에 따르지 않 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 하다는 해석된 바 있다. 그러나 爲蒙被使 에 대 해서는 앞의 문장과 그 내용이 어떻게 연결되어 前後가 相違 한 것인지 잘 파악되지 않는다고 하였다.24) 그후 김윤곤은 위 문장의 내용을 삼별초 정부에 일본이 군량과 원병을 보내라, 이 명령에 쫓지 않으면 일본과 몽고의 싸움이 벌어지게 될 것이고, 일본은 몽고에 부림을 당하게 될 것 이다. 25)라고 정리하였다. 여기에서는 不從 의 주체를 일본으로 설정하고 그 내용은 삼별 초에 대한 일본의 不從 을 가정하고, 爲蒙被使 의 주체 역사 일본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에 대 하여 류영철은 부종성전 의 주체는 삼별초, 위몽피사 의 주체는 개경정부라는 전제하에서 위 의 문건을 (항복 출륙환도 등 몽고의 요구를) 따르지 않은 것이 (삼별초와 몽고 개경정부 간) 전 쟁이 이루어진 이유이다, 그리고 爲蒙被使 는 (개경정부가) 몽고의 부림 당하는 바 되었다 고 해석하였다. 일본 입장에서는 고려가 항복하였다고도 하고 몽고와 一戰을 決하게 되었다고도 하 니 혼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26) 한편 이영 씨도 류영철과 유사한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27) 불심조조 의 문서 내용은 대체로 원래 첩장 내용의 순서에 따라 메모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문건은 앞 부분에 위치한 것으로서, 대략 지금까지의 경과 설명과 관련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3) 24) 25) 26) 27) 柳永哲, 고려첩장불심조조 의 재검토 뺷한국중세사연구뺸, 1994, 쪽. 石井正敏, 文永八年來日の高麗使について, 5쪽 김윤곤, 삼별초의 대몽항전과 지방 군현민 뺷동양문화뺸 21 22합, 1981, 4-5쪽. 류영철, 고려첩장불심조조 의 재검토 뺷한국중세사연구뺸, 李領, 元寇 と日本 高麗關係 뺷倭寇日麗關係史뺸, 東京大學出版會, 1999, 103쪽.
84 82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따라서 미래형의 요구보다는 과거형의 설명 내용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몽 고의 요구에 응하지 않아서 우리(삼별초)는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고, 반면 개경측은 몽고에 복속 되어 부림을 당하게 되었다는 류영철의 설명이 설득력이 있다. 이것은 첩장 가운데 1270년을 전 후한 고려에서의 정세 변동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만 이에 대하 여 일본 측에서는 개경정부에 대한 삼별초의 신정부 수립 등 당시 고려의 정세 변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 했던 탓으로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때문에 전쟁을 하게 되 었다는 것은 무엇이고, 복속되어 부림 당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인지 전후가 맞지 않다는 혼동 을 야기한 것이다. 이같은 일본 측의 혼선과 불명확한 인식은 불심조조 에서만이 아니라 한편으 로 뺷吉續記뺸 기록 가운데서도 나타나 있다.28) 고려에서 야기된 일련의 정세 변화를 일본에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따라서의 첩장의 文面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一. 漂風人護送事 일본측의 표풍인을 삼별초가 호송했다는 내용인데, 해석상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원 종 년간(1263년, 원종 4년 6, 7월) 고려 연해에서 일본측의 선박이 조난을 당하고 漂風人들이 고려측에 의하여 본국에 호송된 사례들이 다음과 같이 보고 되고 있다.29) - 6월, 일본 官船大使 如眞 등이 불법을 배우려 송으로 가던 중 바람을 만나 승, 속 합하여 230인이 開也召島에 닿고, 265인은 군산도와 추자도에 머물렀다. - 太宰府 少卿殿의 상선에 탔던 78명이 송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다가 바람을 만나 배를 잃고 小船으 로 宣州 加次島에 정박하게 되었으므로, 전라도 안찰사에게 명하여 식량과 배를 주고 본국에 호송 해 주었다.(6월) - 7월(을사) 일본 상선 30인이 바람으로 표류하여 龜州의 艾島에 머무르므로 식량을 주어 (본국으로) 호송하였다. 이에 의하여 당시 고려 연안 해로에서 일본 선박의 해난사고가 종종 발생하고 이에 따른 표 풍인의 호송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선박들은 모두 남송과 왕래하던 일본의 28) 당시의 조정에서는 외교문서를 정확히 읽고 상대측의 입장과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評定은 일본의 국가로서의 외죠적 대응을 策定하는 중요한 회의라 기보다는 高辻長成, 日野資宣, 藤原茂範 등 儒者들이 한문 독해 능력을 다투는 場이 되고버리고 있 다. (村井章介, 高麗 三別抄の叛亂と蒙古襲來前夜の日本 뺷中世日本뺸, 校倉書房, 1988, 167쪽). 29) 뺷고려사뺸 원종 6월, 7월.
85 삼별초와 여일관계 83 선박이며, 표류 혹은 정박 지점이 개야소도(서천, 현재는 군산시 개야도), 군산도(군산 선유도), 추자도, 가차도(평북 선천), 애도(평북 구성, 현재는 정주) 등 거의 서해 연안 남북 전역에 걸치고 있어 당시 일본의 대송 왕래가 강남으로의 직항로와 함께 한반도 연해를 북상하여 중국 연해를 돌아 남하하는 연안 항로가 여전히 이용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 과정에서 종종의 해난사고 가 서해 연안에서 야기되었고, 이들 표풍인을 돌려보내는 일이 있었음을 말해준다.30) 1270년 삼별초 봉기 이후 서남해 연안을 삼별초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 서해 연안 표풍인 문제가 삼별초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류영철은 이 표풍인의 호송이 구태여 불심조 조 에서 언급되었던 이유는, 당시 삼별초에 의한 표풍인 호송사 에 대한 사실을 막부에서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 하였다.31) 太宰府의 少卿殿 상선의 경우처럼, 당시 일본은 지방 영주, 혹은 사원이 주체가 되어 직접 상선을 파견하고 교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제반의 사실을 일본 정부 혹은 업무 담당자가 상세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 다. 다만 불심조조 에서 표풍인 이라 한, 이 표풍인의 성격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1270년 삼별 초 봉기 이후는 서해 연안이 일종의 전시 상태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에, 문제의 표풍인 은 순수 한 표풍인이었다기 보다는 남해와 서해 연안을 장악하고 있던 삼별초에 의하여 항해도중 구류된 집단일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삼별초는 잠재적 연합세력인 일본과의 通好를 여는 방 안으로 이들을 본국에 호송하였고, 따라서 일본측에의 첩장에서도 이 점을 특히 강조하여 언급 하였을 것이다. 불심조조 에서 표풍인 호송사 라고 언급한 부분은 이러한 맥락에서 읽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된다. 一. 屯金海府之兵 先二十許人 送日本國事 김해부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중 먼저 20여 명을 일본에 보냈다 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무엇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屯金海府之兵 의 정체에 관한 문제이다. 이에 대해 石井 씨는 이들이 몽고군 병사로서, 일본으로 가는 조양필 일행의 정보를 전하기 위하여 일본에 보내진 병사라고 해석 하였다. 1271년 9월 19일 규슈의 今津에 도착한 당시 원사 趙良弼 일행의 사신단의 규모는 100여 인 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32) 이 문서에서 100명이 아닌 20여 명 이라 한 것은 30) 60년 후인 1323년 寧波(明州)를 출발하여 博多를 향하던 무역선이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 도, 혹시는 이 선박이 강남과 일본열도의 직항로가 아닌 고려 서해 연안해로를 이용 중이었던 것인 지 모른다. 31) 류영철, 앞의 고려첩장불심조조 의 재검토, 쪽.
86 84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그만큼 삼별초 측의 부정확한 정보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것이다.33) 40여 명의 元使 조양필 일행 이 고려에 당도한 것은 같은 해(1271) 정월(기묘일)의 일이었다. 忽林赤 王國昌 洪茶丘 등이 동 행하였는데, 조양필 이외의 이들 휘하의 군사는 조양필이 일본에서 돌아올 때까지 금주(김해) 등 지의 해변에서 대기하도록 조치하였다.34) 이는 원사 일행에 대하여 야기될 수 있는 만일의 사태 를 대비함과 동시에 이를 예방하기 위한 압력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 파견되는 몽고 사신 조양필 선발대로서의 몽고병사가 금번 삼별초의 사행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김윤곤은 이 김해부의 병사를 몽고병 이라 한 해석을 부정하고, 이 20명 군사가 포로된 왜구 일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에 대해 류영철 도 이 일본에 보내진 20명 병사가 김해를 침입했다가 포로된 왜구이며, 원종 12년(1271) 4월 삼 별초가 금주를 습격했을 때 이를 탈취한 것이며, 이들 탈취한 왜구를 삼별초가 일본 본국에 돌려 보낸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 경우 屯金海府之兵 의 屯 의 의미가 문제인데, 여기에서의 둔 은 억류의 의미이며, 일본에 대한 외교적 의례로서 김해에 억류되어 있던 왜구들을 김해부의 둔병으로 표현한 것 이라는 것이다.35) 이영 씨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1271년 3, 4월의 금주 일대에 대한 삼별초의 대대적 공략을 주목하고 있다. 즉 이 시기가 대일본 첩장의 작성 및 발송시기에 해당한다는 점 때문인데, 그는 첩장의 작성 시기를 원 세조의 조서를 진도에 가져온 박천주의 귀경 이후로부터 삼별초가 장흥 부 등을 공격하여 남해 연안에 대한 공세를 본격화하는 2월 계묘일 사이로 추정하였다.36) 아울 러 삼별초의 첩장이 보내진 후라고 할 수 있는 1271년 5월 조양필은 아직 개경에 머물러 있고, 조양필이 일본을 다녀올 동안 금주에 대기해 있어야 할 홍다구는 삼별초의 거점 진도 공격전에 투입되어 있는 사실을 지적하였다.37) 조양필이 개경을 출발하는 것이 8월, 이들이 筑前國 今津 에 도착한 것이 9월 19일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기록을 원사 조양필과 직접 연관시키는 것은 아 무래도 어려운 일이 된다. 문자적으로 보아 김해부의 군사는 김해부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 이다. 류영철 등은 둔 을 억 류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였으나 이는 역시 무리한 감이 있다. 이 때문에 김해부의 군사 는 금주 주둔의 몽고군으로 처음 해석되었던 것이다. 이제 이들 김해부 주둔의 군사 가 몽고군 32) 33) 34) 35) 36) 37) 뺷五代帝王物語뺸, (續群書類從完成會本 3) 石井 논문에서 재인용. 石井正敏, 文永八年來日の高麗使について. 뺷고려사뺸 권27, 원종 12년 정월 기묘. 류영철, 고려첩장불심조조 의 재검토, 쪽. 李領, 여몽 연합군의 일본침공과 여일관계 뺷일본역사연구뺸 9, 1999, 65-67쪽. 뺷고려사뺸 권27, 원종 12년 5월 정축 및 경인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李領, 위의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과 여일관계, 70-71쪽.
87 삼별초와 여일관계 85 도 왜구도 아니라면, 이 김해부의 병사가 삼별초의 군사일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영은 1271년 4, 5월 금주 일대에서의 왕성한 삼별초의 군사 활동이 남해도에 거점을 둔 유존혁 부대 에 의한 것이었다고 추정하였다. 유존혁의 부대는 전통적인 고려 일본의 우호관계에 근거하여 일 본과의 연대를 도모하기 위하여 김해 일대에 진출하였으나, 여몽연합군의 대공세를 앞둔 시점에 서의 삼별초의 이같은 병력 분산이 진도 삼별초의 실패에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는 의견을 이 영 씨는 개진한 바 있다.38) 진도 삼별초의 군사적 실패의 한 원인을 남해도 거점의 군사력 분산으로 돌리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진도 자체가 연안의 작은 섬으로서 여기에만 병력을 집중하는 것이 반드시 전략적으로 효과적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삼별초는 제주도에 배후를 설정하고 완도, 남해도 등 연안 여러 섬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 같은 지 역 거점의 설정이 전략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지만, 불심조조 에서 언급한 김해부의 병사 는 아마 삼별초의 군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즉 대일 사신단의 파견을 위한 삼별 초의 사전 단계 조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것이 반드시 유존혁 휘하의 군사였을지는 역시 확인할 수 없으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일이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검토를 요하는 부분 이다. 一. 安寧社稷待天時事 이우성은 이에 대해 天時가 돌아오면 사직이 다시 안정될 것이라는 소신을 피력 한 것이라 고 하였다.39) 즉 향후 정국에 대한 삼별초의 자신감과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는 의견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류영철은 사직의 안녕이 천시를 기다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다급하다 고 해석 하였다.40) 이 해석과 반드시 배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필자는 이 구절을 사직을 안녕케 하는 것은 하늘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즉 사직의 안녕은 오직 하늘에 달려 있다 는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 혹은 위기 의식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이 보다 는, 자신의 운명이 오직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것으로서, 거대한 여몽연합군과 군사적으로 대결중 인 삼별초 정부의 장엄한 결의의 표명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같은 삼별초의 운명이 한편으 38) 李領, 앞의 여몽 연합군의 일본침공과 여일관계, 74쪽 참조. 한편 진도정부의 급속한 몰락 배경, 김해부 주둔 병사 의 유존혁과의 연관 가능성에 대해서 배상현도 이와 유사한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배상현, 삼별초의 남해항쟁 뺷역사와 경계뺸 57, 2005, 105쪽 및 111쪽 참조. 39) 이우성, 삼별초의 천도 항몽운동과 대일통첩 뺷한국의 역사상뺸, 창작과비평사, 1982, 185쪽. 40) 류영철, 앞의 고려첩장불심조조 의 재검토, 171쪽.
88 86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로 일본의 운명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함으로써 삼별초와 일본의 공동 운명체임을 강조한 것 이 아닐까 한다. 고려 정통정부를 자임하는 삼별초 정부의 수립을 알지 못하는 막부에서는, 이 같은 삼별초의 위기의식과 결연한 정세 판단과 각오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一. 請胡騎數萬兵事 이에 대하여 류영철 교수는 請軍의 주체는 개경정부이고, 胡騎 數萬 은 몽고군이라 하였다. 즉 개경정부가 대규모 몽고군을 끌어들인 사실을 의미한다고 하였다.41) 이에 대하여 배상현은 이것이 일본군 수만을 요청한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42) 문자적으로 볼 때 역시 호기 는 몽고군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류영철의 견해대로 개경정부가 청군의 주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고려정부와 연합한 대규모 몽고군의 진입이 예정되어 있는 사정을 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시 삼별초 정부와 고려정부에 대한 혼선에서 이해의 혼란이 야기된 것이라 생각된다. 삼별초는 이같은 사태가 자신들에 대한 위기인 동시에 향후에 일본에 대한 압박으로 옮겨질 것임을 예고하였을 것이다. 삼별초의 대일 첩장은 일본과의 연대에 의하여 공동 대항한다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위기시의 배후 피란지 확보를 도모한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 고 생각된다. 당시 삼별초는 제주를 배후기지로서 확보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제주 이후의 배후 기지로서 일본 열도의 유용성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 이상의 내용을 정리 요약하고자 한다. 삼별초의 첩장에서는 몽고에 의한 고려의 복속 및 저간의 정세 변동과 관련한 간단한 상황 전달이 있었고 서남해 상에서 확보한 일본 상인 혹은 표풍인의 송환을 통하여 삼별초에 대한 우호적 관심을 끌어내려 하였다. 아울러 김해부 주둔의 삼별초 군사(20인 규모)를 먼저 파견하여 금번 일본에 대한 견사를 준비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도 측에서는 혹 일본 측이 제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을 상정하고, 필 요하다면 진도에 대한 현지 확인도 환영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조정은 전반적으 로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국제적 인식조차 결여되어 첩장 문구의 정확한 의미 파 악조차 하지 못한 채 이를 묻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개경 측의 고려정부와 삼별초 정부 간의 구분조차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려와 일본의 외교적 상호 관계가 소원했던 시대적 배경 이 첩장의 처리에서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삼별초의 첩장 접수를 계기로 41) 류영철, 위의 논문, 171쪽. 42) 호기 의 호 가 오랑캐 의 지칭이 아니고 戈戟 을 의미하기도 하다는 점에서 호기 는 잘 무장된 기병 을 요청한 것이라는 것이다. 배상현, 삼별초의 남해항쟁 뺷역사와 경계뺸 57, 2005, 105쪽.
89 삼별초와 여일관계 87 일본은 몽고의 위협을 현실적 상황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고 큐슈 방어전에 대한 대비를 구 체적으로 시작하게 된다.43) 4. 오키나와와 삼별초 한국에서는 2007년 국립제주박물관에서의 오키나와 특별전을 계기로 오키나와 출토의 이른 바 계유명 기와가 삼별초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논의가 흥미를 끌고 있다. 특히 출품된 자료 중에는 계유명 기와 이외에 삼별초의 거점이었던 진도 용장성 출토의 것과 매우 흡사한 연화문 와당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오키나와 출토의 고려계 기와는 9종류 32형식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양태를 보이고 있 다.44) 그 가운데 특별히 癸酉年 高麗瓦匠造 명문 기와는 제작자의 신원 및 제작 시기를 밝힌 기년명 때문에 일찍부터 주목 되어왔다. 5백년 고려 역사 가운데 이 계유년이 구체적으로 어느 연대를 지칭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1153년, 1273년, 1333년, 1393년 등이 제시되었으나, 그동안 의 논의를 통하여 대략 고려 원종 14년(1273)과 조선 태조 2년(1393)의 두 가지 설이 주로 논란 이 되어 왔다.45) 우선 1273년 설은 우라소에성(浦添城)을 근거로 中山에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 것이 유구왕국 英祖王의 치세라는 판단에 의거한 것이다.46) 여기에 세키구치(關口廣次)는 계유년 명문와와 14 세기 전반 카츠렌성(勝連城 本丸터) 출토 古瓦와의 기술상의 연속성 내지 계승성을 고려하는 관 점에서 영조왕의 1273년 설을 지지하였고47), 오가와(大川 淸) 역시 1273년 제작의 이 기와가 43) 조정에서 삼별초의 첩장에 대한 논의 직후라 할 수 있는 9월 13일 막부에서 큐슈에 영지를 가진 동국의 御家人들에게 자신이 직접 내려가든가 대관을 급히 내려 보내도록 명하고, 이듬해 문영 9년 (1272) 정월에는 큐슈의 御家人으로 하여금 연안을 경비하도록 守護에게 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는 남기학, 중세 일본의 외교와 전쟁 뺷동양사학연구뺸 80, 2002, 205쪽 참고. 44) 수막새 4종, 암막새 10종, 수키와 2종, 암키와 5종, 有段式 수키와 5종, 서까래 기와 1종, 귀면와 1종, 마루기와 1종 등이 그것이다. 이들 고려계 기와는 오키나와에 도래한 고려 장인에 의하여 처음 제작된 후 기술적 계승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上原 靜, 오키나와제도의 고려계 기와 뺷탐라와 유구왕국뺸, 국립제주박물관, 2007, 212쪽 참조. 45) 1153년 설은 田邊泰 巖谷不二, 뺷琉球建築뺸, 1935, 49쪽 ; 新城德祐, 뺷琉球歷史年表뺸, 1960 등에 언 급되어 있으나, 근년에는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1333년 설은 고고학적 공반유물과의 관계 등에 의 하여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고 있지는 않다. 46) 松本雅明, 뺷沖繩の歷史と文化-國家の成立を中心として뺸, 近藤出版社, 1971, 89쪽. 47) 關口廣次, 沖繩における造瓦技術の變遷とその間の事情 勝連城本丸跡出土古瓦を中心として 뺷考古 學雜誌뺸, 62-3, 1976.
90 88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유구왕국에 있어서 기와 제작의 시초라는 관점을 강조한 바 있다.48) 이상과 같은 1273년 설에 대하여 1393년 설은 뺷고려사뺸에 창왕 원년(1389)에야 비로소 琉球 고려 간 교섭의 기록이 처음 등장하고 있다는 점, 뺷조선왕조실록뺸에 보여지는 琉球 왕의 고려에 의 망명 등 고려 말 조선 초에 있어서 양국 교섭을 중시하여 문제의 계유년이 1393년이라는 입 장을 취하였다.49) 西谷 正 교수는 규슈대 소장의 또 다른 계유명 및 大天 명문와 자료를 소개 하는 한편 기와의 연대에 대해서는 1393년 설에 기울고 있지만 그러나 그 이전으로 소급할 가능 성도 배제하지 않았다.50) 한편 계묘년 고려 기와에 대한 일본에서의 다양한 연대관에 비하여, 국내에서는 이형구,51) 최 규성이 이 계묘년 고려기와를 삼별초와 연결하여 1273년 설을 강조한 바와 같이 거의 1273년 설이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점이다. 1273년은 고려 원종 14년에 해당하는데, 이 는 제주도 항파두리를 거점으로 한 삼별초가 여원연합군에 의하여 완전 진압 당한 해이다. 즉 연합군에 쫓긴 제주 삼별초의 일부가 제주를 탈출, 국내 연안 혹은 해외로 빠져나갔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고, 그 경우 오키나와 유구왕조로의 귀부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는 전제이 다. 이러한 국내의 연대관에 비추어, 제주박물관의 특별전에 출품된 자료중 우라소에성의 연화문 수막새기와는 용장성에서 출토한 수막새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은행 알을 연상시키는 9잎의 연꽃잎이 중심문양으로 전개되고 중앙에는 뭉툭한 자방이 자리 잡았는데 자방과 연꽃 사이에 돌선대의 테두리를 둘렸다. 9엽의 연꽃 외곽으로는 2조의 선대를 두르고 선 대 사이에 30여 알의 주문을 장식한 형태이다. 와당의 크기는 단축 장축 21.0cm이다.52) 이 고려 와당이 국내에서 소개되는 것이 국내에서는 처음이거니와, 특히 그것이 삼별초의 거점 이었던 진도 용장성 출토와와 흡사하다는 것은 오키나와 고려와의 1273년 제작설과 맞물려 크게 흥미를 일으킬만한 것이었다. 오키나와 우라소에 요오도레 출토의 것을 용장성 출토 와당과 세밀히 비교한다면 양자가 동 48) 大川 淸, 琉球古瓦調査抄報 琉球政府文化財保護委員會 뺷文化財要覽뺸, 1962, 쪽). 49) 三島 格, 琉球の高麗瓦など 뺷鏡山猛先生古稀記念古文化論攷뺸, 1980, 쪽. 50) 西谷 正, 高麗 朝鮮 兩王朝と琉球の交流 その考古學的硏究序說 뺷九州文化史硏究所紀要뺸 26, 九 州大, 이 논문은 필자가 전문을 번역하여 충청문화재연구원 뺷금강고고뺸 4, 2007에 게재하였 다. 51) 아마 이 시기에 제주도에서 연합군에 항거하던 삼별초와 그 가솔들이 유구 쪽으로 피난해 가지 않 았는가 생각된다. 이때 내류한 고려인들이 유구의 도성 조영사업에 참여하여 건축과 제와에 종사하 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형구, 앞의 논문, 531쪽). 52) 국립제주박물관, 뺷탐라와 유구왕국뺸, 2007, 쪽 사진자료와 설명.
91 삼별초와 여일관계 89 일한 것은 아니다. 우선 용장성의 것이 8엽인데 대하여 오키나와 기와는 연꽃이 9엽이라는 점, 꽃잎의 형태가 용장성의 것이 좀더 둥근 느낌을 주고, 외곽의 연주문도 용장성 쪽이 좀더 정리된 느낌을 준다는 점 등의 차이점들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자료가 상당히 유 사한 것이라는 점은 특기할만하다. 1271년 삼별초의 잔여 세력이 진도에서 제주로 이동할 때, 잔여 세력의 일부가 제주도가 아 닌 제3의 지역으로 분산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는 일이다. 1273년 제주도에서의 경우는 진도에 비하여 보다 많은 수의 島外 분산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제주도에서 탈주한 삼 별초 잔여세력은 다시 고려의 남, 서 연안의 도서로 회귀하여 목숨을 부지한 경우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 보다 안전이 보장될 수 있는 일본 열도 방면으로의 필사적 탈주 가능성도 충분히 상정 할 수 있는 일이다. 1274년 일본이 여몽연합군을 침입을 받고난 이후 큐슈에서는 연합군의 공격 대상이 되는 하 카다(후쿠오카) 해안 일대에 20km 길이의 대규모 장성, 이른바 元寇防壘를 구축하였다.53) 해안 에 석축의 장성을 쌓아 적을 막는다는 큐슈의 이 아이디어는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당시로 서 이같은 석축의 관방 시설은 일본으로서 퍽 생소한 예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1차 일본 원정 직전 여원군은 삼별초의 최후 거점 제주도를 함락한 바 있고, 이 제주도에는 해안을 둘러싼 장성 이 삼별초의 방어 설비로서 구축되어 있었다. 제주도의 연안을 석축으로 둘러쌓았다는 이른바 環海長城 의 존재가 그것이다.54) 현재 남겨진 제주도의 환해장성 유적은 왜구 등에 대한 필요 때문에 후대의 보축이 끊임없이 진행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 유적의 일부가 아직 제주도 에 남겨져 있다. 몽고군의 침략을 석축의 방루에 의하여 저지한다는 원구방루 의 아이디어가 제 주도 연해를 석축으로 둘러친 환해장성과 동일한 발상이라는 것은 양자의 연관관계를 암시하는 것이고, 동시에 제주도 삼별초 세력의 일부가 큐슈에 상륙함으로써 제공된 아이디어일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현 단계에서의 문제의 핵심은 한국과 오키나와 양 지역 고려기와에 대한 보다 광범하고 정밀 한 검토를 진행하는 것이며, 특히 造瓦의 기술적 측면이 세밀히 점검될 필요가 있다. 용장성, 항 파두성 등 진도와 제주도의 항몽 유적은 오키나와 고려 기와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 유적이 갖는 의미는 단순한 전쟁사 혹은 민족항쟁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중세 동아시아 교류의 국제적 측면이며, 따라서 앞으로의 지속적 검토가 중요 53) 원구방루의 조사와 연구에 대한 개요는 川添昭二, 뺷蒙古襲來硏究史論뺸, 雄山閣, 1977에 시기별로 연구사가 정리되어 있고, 지구별 현장 중심의 개황은 柳田純孝 등, 뺷元寇と博多 寫眞で讀む蒙古襲 來뺸, 西日本新聞社, 2001, 27-52쪽이 좋은 참고가 된다. 54) 강창언, 제주도의 환해장성 연구 뺷탐라문화뺸 11, 1991.
92 9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하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다. 맺는 말 본고는 1270년 강화도에서 봉기하여 진도, 제주도를 전전하며 1273년까지 활동하였던 삼별 초에 대하여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삼별초의 대일 관계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는 1271년 진도 삼별초가 일본에 보낸 첩장관련 자료( 高 麗 牒 狀 不 審 條 條 )이다. 이에 의하면 당시 고려는 첩장을 통하여 몽고에 대 한 복속 및 저간의 정세 변동과 관련한 간단한 상황 전달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삼별초는 서 남해애 대한 제해권을 기반으로 확보한 일본 상인과 표풍인의 송환을 통하여 삼별초에 대한 우 호적 관심을 끌어내려 하였다. 아울러 김해부 주둔의 삼별초 군사(20인 규모)를 먼저 파견하여 금번 일본에 대한 견사를 준비하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진도측에서는 혹 일본측이 제반 상 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을 상정하고, 필요하다면 진도에 대한 현지 확인도 환영한다 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조정은 전반적으로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국제 적 인식조차 결여되어 첩장 문구의 정확한 의미 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이를 묻어버리고 말았다. 고려와 일본의 외교적 상호 관계가 소원했던 시대적 배경이 첩장의 처리에서 그대로 반영된 셈 이다. 여몽연합군은 삼별초 진압 이후인 1274년에 일본에의 정역에 나섰지만, 만일 삼별초의 봉기 가 없었다면 몽고는 더 일찍, 적어도 1-2년을 당겨 일본에 대해 무력적 방법에 의한 압박에 나섰 을 것이다. 삼별초 봉기 이전의 대일 招 諭 과정에서는 1266년부터 제1차 여원군의 일본침입 전 년인 1273년까지 4회에 걸쳐 매년 사절이 파견되었다. 그 가운데 1270년 한 해만 사절 파견을 거르고 있는데, 이 같은 1년의 休 止 는 삼별초의 봉기로 인하여 남부 연안 일대가 진도 거점 삼별 초의 세력권에 포함된 복잡한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삼별초의 대일 연합전선 추구는 기본적으로는 여원관계의 역사성과 지리적 인접성에 의하여 제안될 수 있었던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처럼 수년 전부터 추진해온 일본에의 초유, 그리고 대일 정역을 염두에 둔 군선의 준비 등 일련의 상황이 삼별초로 하여금 일본과의 연대를 구체적으로 모색하게 되는 계기를 조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애서는 삼별초와 관련하여, 癸 酉 年 高 麗 瓦 匠 造 라는 글자가 찍힌 오키나와 출토와가 삼 별초와의 관련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언급하였다. 기와의 계유년이 1273년일 가 능성이 있고, 특히 용장성의 것과 흡사한 와당의 존재는 이 문제의 기와가 제주도 혹은 진도 삼
93 삼별초와 여일관계 91 별초와 연결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다만 이 점이 사실로서 확인되기 위해서는 향후 더욱 많은 연구와 광범한 자료 검토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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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蒙 古 의 日 本 侵 略 과 日 本 의 對 應 - 高 麗 와 日 本 의 관계에 유의하여- 南 基 鶴 머리말 13세기 말 蒙 古 (1271년 이후 국호를 大 元 으로 바꾸지만 본고에서는 편의상 蒙 古 로 칭하며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元 이라 칭함)의 일본 침략은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연계된 국제적 사 건이었다. 이 전쟁은 蒙 古 南 宋 高 麗 日 本 각국의 국내사정과 각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흐름 에 연동되어 발발하였고, 그에 따라 동아시아의 국제정국은 크게 요동쳤다. 남송은 바야흐로 세 계제국으로 발돋움하려는 몽고에 의해 멸망당했으며, 몽고에 복속한 고려는 두 차례나 일본 침 략에 강제 동원되었다. 일본은 역사상 未 曾 有 의 대외적 위기를 맞이하여 국가의 존망을 걸고 그 대응에 고심하였다. 본고는 몽고의 침략에 대하여 일본이 外 交 上 軍 事 上 으로 어떻게 대응하였는가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몽고의 의도와 정책, 몽고에 의해 동원된(혹은 동원될 처 지에 놓인) 고려의 입장과 대책, 그리고 일본의 대응방식과 그것을 규정하고 있는 국내사정을 두 루 고찰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본고는 특히 고려와 일본의 관계에 유의하고자 한다. 한편의 당사자인 고려는 일본을 초유하려는 몽고와 일본의 사이에서 어떤 입장에 놓였으며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고려는 일본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일본은 몽고와 고려의 외교교섭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또한, 몽고의 일본 침략 전쟁과 관련하여 고려가 수행 한 역할은 무엇이며, 일본은 몽고와 고려에 대하여 어떠한 군사행동을 취했는가? 전쟁을 겪으면 서 고려와 일본은 상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식했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몽고의 일본 침략에 대한 일본의 대응의 성격은 물론, 이 시기의 고려와 일본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96 94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분석 대상이다. 지금까지 한국 학계에서는 고려의 對蒙古抗爭에 역점을 두는 반면, 元의 干涉期 고려와 일본 의 관계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편, 근년 일본 학계에서는 몽고의 침략에 대응한 국내 정치사 분석이 중심이고, 국제관계라고 해도 일본과 대륙의 관계에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 러진다. 이 시기 고려와 일본의 관계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균형 잡힌 이해는 앞으로의 과제라고 하겠다. 1. 蒙古의 日本 招諭와 日本의 對應 1) 蒙古의 日本 招諭의 전개 蒙古는 제1, 2차 일본 침략을 전후하여 지속적으로 일본과의 外交交涉을 시도하였다. 사실, 蒙古의 일본에 대한 정책은 外交交涉(=日本招諭)과 武力解決(=日本遠征)의 두 축으로 전개되 었다. 이 양면 정책은 상황의 전개에 따라 비중이 바뀌긴 했지만, 蒙古가 일본에 대해 함께 사용 한 기본정책이었다. 蒙古는 군사적 수단 못지 않게, 아니 그것에 앞서서 가능하다면 외교적 수단 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하에서는 우선 蒙古의 對日交涉 의 전개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도록 한다. 1274년 제1차 일본 침략 이전 蒙古는 모두 6회( 未到着, , , , , )에 걸쳐 일본 초유를 시도하고 있다. 1268년 1월에 도착한 최초의 蒙古國書는 大蒙古國 皇帝 가 日本國王 앞으로 보내는 형식으로, 高麗가 蒙古에 來朝 한 것을 알리고 고려와 인접 한 小國 日本이 蒙古에 通好 =朝貢할 것을 요구하면서, 말미에는 兵力을 사용하는 것을 누 가 좋아할 것인가 라고 군사적 위협을 비추고 있었다.1) 이 국서는 元代의 평가에 따르면, 일본을 臣下로서 내려다보고 있지 않으며 사뭇 정중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2) 國書의 문면상 蒙古는 일본과의 원만한 교섭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단계에서 蒙古의 日本 招諭의 의도에 대해서는 南宋 征伐의 일환이었다는 데에 대체로 견해가 일치되어 있다. 蒙古는 남송의 襄陽城 공격( )을 전후하여 日本 招諭를 시도하 1) 至元3年(1266) 8月 蒙古國牒案, 뺷鎌倉遺文뺸 13卷 9564號. 2) 國書의 末尾에는 不宣 으로 맺고 있는데, 元代의 뺷國朝文類뺸(卷41, 征伐, 日本)에 의하면 不宣 은 臣下로 여기지 않음을 말한다 고 하고, 이 國書 전반에 대해서 文體가 정성스럽고 謙讓의 의사가 簡冊에 넘친다 라고 평하고 있다.
97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95 고 있으며, 그 목적은 海上으로 연결된 남송과 일본의 통교관계를 끊어 남송을 고립시키기 위함 이었다. 수 차의 사신 파견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의 회답이 없자 蒙古의 쿠빌라이는 1270년 11 월, 일본 원정 준비에 착수하여 고려에 屯田兵을 파견하고 있다.3) 하지만 마침 고려에서 일어난 三別抄의 반란( )으로 인해 그 실행이 불가능했으며, 1273년 4월 삼별초를 평정함으로 써 저해요인이 사라지자 전열을 정비, 그 이듬해에 일본 침략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4) 1274년은 5년간에 걸친 襄陽城 공략이 성공한 직후이자 바야흐로 蒙古가 남송의 본토에 본격적으로 침공 하려는 시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제1차 일본 침략은 실은 같은 해에 일제히 개시되었던 남송에 대한 全面 進攻作戰의 일환이었다. 즉 일본의 군사적 정복이 목적이 아니라, 남송에 대한 총공격 의 측면 작전으로서 남송과 일본의 관계를 차단하기 위한 武力示威 내지 武力偵察이었다.5) 이때 의 원정군은 蒙古人 漢人(舊金朝人) 高麗人 등으로 구성된 3만 수 천의 병력6)으로, 九州 博多에 서의 전투 다음날 기상악화도 겹쳐 그대로 철수하고 있다. 제1차 침략 이후 蒙古는 1275년 4월과 1279년 6월 2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 초유를 다시 시도하고 있다. 蒙古는 실제의 군사적 위협에 의한 일본의 태도 변화를 기대했을 것이다. 1275년의 사신은 일본과의 전투후 고려에 귀환한 1274년 11월에서 불과 세 달 후인 1275년 2월 에 결정되었고, 1279년의 사신으로는 蒙古에 항복한 남송의 사신과 일본인 유학승을 함께 파견 하는 등 남송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일본측의 태도 변화를 꾀하고 있다. 蒙古는 사신 일행이 다음 해 1280년 4월까지 돌아와 일본의 태도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린 후에 출병 여부를 결정할 예정 이었다. 그러나 일본측은 2회의 사신 일행을 모두 참수하였고, 그 사실은 뒤늦게 蒙古側에 알려 져 2차 침략의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한다.7) 1281년 蒙古의 제2차 일본 침략은 남송 정벌이 성공한 후, 日本側의 사신 처형 소식이 전해 진 가운데 추진된 것이었다. 원정군은 蒙古 漢人 高麗 이외에 항복한 南宋의 군사를 포함하여 14만이나 되는 대규모 병력8)으로 1차에 비해 약 5배에 달했으며, 일본에 屯田軍을 설치할 계획 3) 旗田巍, 뺷元寇 蒙古帝國の內部事情뺸, 中央公論社, 1965, 90-91쪽. 4) 村井章介, 高麗 三別抄の叛亂と蒙古襲來前夜の日本, 同 뺷アジアのなかの中世日本뺸, 校倉書房, 1988, 쪽. 5) 杉山正明, 뺷大モンゴルの世界 陸と海の巨大帝國뺸, 角川書店, 1992, 쪽. 石井進, 뺷鎌倉びとの 声を聞く뺸, 日本放送出版協會, 2000, 56-57쪽. 6) 뺷元史뺸 뺷高麗史뺸 등의 사료와 여러 관련 연구들은 원정군의 규모에 대하여 각각 상이하게 기술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전투요원만 약 2만 6천(蒙漢軍 2만, 高麗軍 약 6천), 고려의 사공 梢工 수부 水手 6,700의 총 3만 2천~3만 3천이 동원되었다고 본다. 그 이외에 元으로부터 별도로 사공 수부가 공급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池內宏, 뺷元寇の新硏究뺸, 東京, 東洋文庫, 1931, 126~127쪽 참 조). 현재로서는 不明이다. 7) 相田二郞, 뺷蒙古襲來の硏究 增補版뺸, 吉川弘文館, 1982, 24-27쪽 참조.
98 96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이었음에 비추어 蒙古는 일본(적어도 그 일부 지역)에 대한 군사적 정복 지배까지 고려한 듯하 다.9) 蒙古의 쿠빌라이는 1266년 당시 일본에 대해서 不臣 의 朝貢國으로서의 국교 개시를 요구 했지만 일본의 無回答으로 인해 무력행사로 이어졌고, 사신의 처형에 의해 1279년 중국통일 후 에는 정복에 의한 屬領化를 노리거나 적어도 君臣關係의 설정을 의도했다고 보인다.10) 대대적인 제2차 일본 침략이 태풍으로 인해 실패한 이후에도 쿠빌라이가 1282년, 년, 년에 걸쳐 제3차 일본 침략을 집요하게 기도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11) 그러나 쿠빌라이는 오로지 무력해결에만 의존했던 것은 아니며, 종래대로 수 차례 사신을 보내어 일본 의 초유를 꾀하고 있다. 제2차 일본 침략 후 蒙古의 일본에 대한 사신 파견은 1283년 8월의 如 智 王君治, 1284년 5월의 如智 王積翁, 1292년 10월의 고려사신 金有成 郭麟, 1299년 3월의 禪僧 一山一寧 등 총 4회에 달한다. 또한 1292년 7월, 귀국하는 日本商船에 기탁한 燕公楠의 첩장을 포함하면 蒙古는 모두 5회의 일본 초유를 꾀한 셈이다. 이 가운데 처음 2회는 일본에 도 착하지 않았고, 燕公楠의 첩장은 무시되었으며, 金有成은 억류되었고, 마지막 一山一寧도 마찬 가지로 일본에 억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쿠빌라이는 제3차 일본 침략의 기도가 중국 강남 각지의 반란, 베트남의 저항, 蒙古帝國 내부 의 사정으로 인해 계속 좌절되면서 일본을 군사적으로 정복 지배하겠다는 의지를 버리고 외교교 섭 쪽에 보다 중점을 옮겨갔던 것 같다12).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한 후에도 蒙古는 1299년, 成 宗이 국서를 보내 일본 초유를 시도하고 있다. 이때의 蒙古國書는 書式上 쿠빌라이가 최초로 보 낸 국서와 유사하며, 先皇의 遺意 를 받들어 일본에 대하여 通問 을 요구한다는 취지이다.13) 쿠빌라이가 처음 의도했던 것과 동일하게 성종도 일본이 不臣 의 조공국이 되는 형태로 원만히 8) 고려에서 출진한 東路軍은 약 4만(高麗軍 1만, 高麗의 水手 약 1만 7천, 蒙漢軍 1만 수 천), 중국에 서 출진한 江南軍은 10만이었다. 특히 江南軍 10만을 태운 3,500척의 大艦隊는 外海를 항해한 함대 로서는 인류사상 최초의 超大型 함대였다고 알려진다. 9) 日本遠征軍의 모습이나 당시의 전황이 상세하게 묘사된 뺷八幡愚童訓뺸(甲本)에는,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고 하여 거주에 필요한 생활용구와 경작하기 위한 쟁기 괭이까지 가지고 왔다 고 기 술되어 있다(뺷日本思想大系뺸 20 뺷寺社緣起뺸, 岩波書店, 1975, 190쪽). 10) 中村榮孝, 十三 四世紀の東亞情勢とモンゴル襲來, 뺷岩波講座 日本歷史뺸 6 中世2, 1963, 42쪽. 11) 旗田巍, 뺷元寇뺸, 쪽 참조. 12) 1292년 8월에 고려의 세자가 입조했을 때, 쿠빌라이는 그 자리에서 일본 침략에 대해서 의견을 묻고 있으나, 이번의 침략 준비는 종전과 달리 고려에만 명령했을 뿐 중국 내부에서 행한 흔적이 없다(旗 田巍, 뺷元寇뺸, 167쪽). 중국인의 반항을 경계한 탓도 있겠지만, 침략의 목적이 적어도 이 단계에 이 르면 일본의 來服을 촉구하는 데 있었음을 강력히 추측케 한다. 13) 첫머리에 大元皇帝 致書于日本國王 이라 하고 말미에 不宣 이라 적고 있다(大德3年(1299) 3月 元 國王書狀寫, 뺷鎌倉遺文뺸 第25卷 19324號).
99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97 국교를 맺을 것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한 해 전인 1298년, 성종은 일본 침략의 건의에 대해서 지금은 때가 아니다 라고 기각했었는데,14) 실제 그 후 성종이 일본 침략을 준비한 흔적 은 없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쿠빌라이의 晩年 혹은 성종 즉위 후 蒙古의 외교교섭에 대해서 일본이 냉정하고 사려깊게 대처했더라면, 일본은 臣事 이든 不臣 이든 蒙古의 朝貢國이 되는 것으로 그치고, 사실상 실현될 가능성이 적었던 침략의 압박과 위기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러나 막부는 멸망에 이르기까지 외교교섭을 거부하고, 蒙古에 대한 방어체제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은 그 피해가 비교적 경미했음에도 불구하고, 蒙古의 사신들을 처형 혹은 억류하 는 경직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15) 이 점은 蒙古의 침략군을 끝내 물리친 안남(安南 : 베트남 중부 북부)과 점성(占城 : 베트남 남부의 참파 champa)이 나중에는 스스로 쿠빌라이 정권에 入朝 하여 종속관계를 맺은 사실16)과 대조적이다. 그런 편이 蒙古의 끊임없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 음은 물론, 정치적 경제적으로 이로운 점이 많았던 것이다.17) 일단 入朝하면 쿠빌라이는 다시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2) 高麗 朝廷과 三別抄의 對日交涉 1266년 11월, 쿠빌라이는 일본 초유를 위해 蒙古의 사신 黑的을 고려에 파견하면서 일본으로 의 길 안내를 명하였다.18) 이에 고려는 다음해 1월 宋君斐 金贊 등을 黑的과 동행하도록 했는 데, 그들은 巨濟島에 이르러 바람과 파도가 험한 것을 이유로 開京으로 귀환해 버린다. 그러자 고려 국왕 元宗은 黑的이 본국에 돌아가는 길에 宋君斐를 함께 쿠빌라이에게 파견하여 對馬島 의 풍속이 頑迷하고 禮儀가 없기 때문에 사신의 渡日이 위험한 것, 그리고 일본은 본디 小邦 과 일찍이 通交한 일이 없고, 다만 對馬島人이 때때로 무역 때문에 金州를 왕래할 뿐이다 고 보 고하였다.19) 그러나 이는 쿠빌라이의 큰 노여움을 사서 고려는 이후 일본 초유의 사명을 직접 14) 뺷元史뺸 卷208, 外夷列傳 日本傳, 大德2年(1298). 15)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도 元의 使臣을 살해 혹은 억류하거나 모욕을 가했지만, 일본과 같이 그 후 에도 스스로 외교수단을 강구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片倉穰, 蒙古の膨脹とアジアの 抵抗, 荒野泰典 石井正敏 村井章介 編, 뺷日本史뺸 Ⅳ, 東京大學出版會, 1992, 101쪽). 16) 杉山正明, 뺷大モンゴルの世界뺸, 쪽. 17) Morris Rossabi, Khubilai Khan, His Life and Tim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8, p.218. 杉山正 明, 뺷大モンゴルの世界뺸, 256쪽. 18) 뺷高麗史뺸 卷26, 元宗世家 元宗7年(1266) 11月 癸丑條. 19) 同, 元宗7年(1266) 11月 丙辰條, 元宗8년(1267) 1月條.
100 9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짊어지게 된다. 1267년 8월, 黑 的 일행이 쿠빌라이의 명령을 담은 詔 書 를 가지고 재차 고려에 오자 20) 宰 相 李 藏 用 은 黑 的 에게 서신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선 舊 來 의 중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 일본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때때로 相 通 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찍이 중국에 職 貢 한 일이 없었고, 중국도 또한 오면 이 를 慰 撫 하고 가면 관계를 끊었다. 이를 얻어도 王 化 에 이익이 없고 버려도 皇 威 에 손상이 없다 고 생각하여 일본을 방치해 두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隋 文 帝 때의 예를 들어 일본은 교만하 고 명분을 알지 못하는 나라이므로 일본에 국서를 송달하는 것에 대해서 보내지 않는 것이 득 책이다 고 권고한다. 결론적으로 李 藏 用 은 바다 멀리 있는 것 을 믿고 蒙 古 에 入 朝 하지 않는 일본을 내버려두고, 세월을 기약하고 일본이 하는 것을 두고 보다가, 중국에 오면 內 附 를 권하 고 오지 않으면 度 外 에 두어서 일본이 어리석게 외딴 곳에서 혼자 살게 내버려 둘 것 을 제언하 고 있다. 21) 이것에 대해서 高 麗 史 에서는 ( 李 ) 藏 用 은 일본이 畢 竟 오지 않아 장차 우리나라에 累 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은밀히 黑 的 을 설득하여 그 일(일본 초유)을 중단토록 한 것 이라고 평하고 있 다. 고려의 累 란 바로 蒙 古 의 일본 원정에 고려가 동원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그 사태를 우 려하여 국서를 보내지 않는 것이 得 策 이라고 黑 的 에게 力 說 한 것이었다. 이장용의 일본 인식은 전술한 元 宗 의 그것과 동일하다. 元 宗 은 또한 1271년 3월 쿠빌라이에게 올린 표문 속에서 그 (일본) 풍속이 頑 疾 하고 깊은 사려가 없다 22) 라고 말하고 있다. 고려 국왕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일본은 한낱 島 夷 일 뿐이다 23) 고 한 忠 烈 王 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고려가 당초부터 쿠빌라이에 대한 비협력적인 태도를 취한 배후에 이와 같은 고려 조정의 일 본 인식이 개재해 있던 것은, 일본 초유를 위한 고려의 對 日 交 涉 자세를 통해 반증된다. 1268년 1월, 일본에 파견된 고려 사신 潘 阜 는 九 州 의 大 宰 府 앞으로 서신을 보내, 고려와 일본의 관계가 예부터 敦 睦 했던 것을 들고 그 오랜 우호 관계를 위해 이전 蒙 古 使 臣 ( 黑 的 )의 渡 日 을 막았던 것 을 貴 國 을 향한 我 國 의 뜻 의 반영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그 황제 국서의 의미는 귀국과 通 好 하는 것 이외에 결코 다른 말이 없다 고 하고, 蒙 古 國 書 와 高 麗 國 王 書 를 직접 日 本 國 王 에게 전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가 지참한 高 麗 國 王 書 에서는 蒙 古 皇 帝 의 日 本 通 好 요구는 貢 獻 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無 外 의 이름을 天 下 에 드높이기 위할 따름이다 고 하면서 一 介 의 使 臣 을 파견하여 가보게 할 것 을 권하고 있다 24). 20) 同, 元 宗 8 年 (1267) 8 月 丙 辰 條. 21) 高 麗 史 卷 102, 列 傳 15, 李 藏 用. 22) 高 麗 史 卷 27, 元 宗 世 家 元 宗 12 年 (1271) 3 月 條. 23) 高 麗 史 卷 28,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4 年 (1278) 7 月 甲 申 條.
101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99 고려 국왕의 국서와 고려 사신의 書狀은 고려와 일본 양국의 우호 관계와 그에 입각한 일본 에의 배려를 강조하고, 蒙古國書에 대해 예상되는 일본의 의혹과 반발을 무마하여 蒙古의 조공 요구에 응하도록 일본을 설득하는 데 진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려의 자세는 전술한 일본 인식, 즉 교만하고 명분을 알지 못한다 혹은 풍속이 완질하고 깊은 사려가 없다 는 日本= 小夷 島夷 觀과 모순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인식이 근저에 있었기 때문에 용어 사 용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일본과의 외교교섭에 심혈을 기울여 임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蒙古 使臣의 渡日과 蒙古國書의 送付를 어떻게든 막으려 했지만, 쿠빌라이의 명에 의해 일본 초유의 사명을 짊어지게 된 고려는 전쟁의 사태를 未然에 방지하기 위해 일본에 대한 외교적 설득 내지 회유로 전환했던 것이다. 蒙古國書는 朝貢인가 아니면 戰爭인가라는 兩者擇一을 일본에 강요하고 있었고, 고려가 일본 에 대해서 위와 같이 蒙古의 의도를 설명한 것은 蒙古國書에 대한 강한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이 었다. 고려 조정은 기본적으로 島夷 日本이 유연한 국제적 현실감각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 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한 고려 나름의 외교적 노력은 결국 결실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潘阜 일행은 大宰府의 냉담한 대우를 받고 그대로 귀국하였고,25) 日本側은 후술하듯이 蒙古國書가 禮를 결여했다 고 하여 返牒조차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蒙古의 일본 침략 사태를 원치 않는 고려 조정의 입장은 고려가 兵站基地로서 떠안게 될 무 거운 부담이 예상되었던 것에 의한다. 그렇지만 일단 일본 원정이 불가피해지면, 고려는 가급적 부담을 경감시키려 하거나 혹은 그 부담의 댓가로서 원정군 안에서의 자국의 지위 향상에 힘쓰 게 마련이다. 제1차 일본 침략 이듬해인 1275년, 2차 원정에 응할 수 없는 고려의 곤궁한 상태를 호소했던 忠烈王이 1278년, 돌연 일본 원정을 자청하고26), 1280년에는 軍糧 兵力 水手 등 軍備부담의 한 계를 역설하는 한편 고려의 장군 金方慶이 元師府에 참여하여 公事를 주관할 수 있도록 요청한 것27)은 그 단적인 예이다. 제1차 원정 당시 소극적으로 회피하려 했던 고려가 제2차 원정에서는 元의 일본 원정 의지를 도와 일본을 元에 복종시켜 자국의 소모를 줄이려 했다는 주장이 있지 만,28) 그 배후에는 蒙古의 제2차 원정이 필연시되고 고려의 부담도 피할 수 없게 된 상황이 있었 24) 至元五年(1268) 正月日 高麗國牒狀案, 뺷鎌倉遺文뺸 13卷 9845號. 1292년 金有成이 일본에 가져온 고려국서에서도 귀국은 멀리 海外에 있으니 다만 사신을 보내 入朝만 한다면 결코 어떠한 후환도 없을 것이니 잘 참작하기 바란다 고 하여 기본적으로 동일한 취지를 담고 있다(뺷高麗史뺸 卷30, 忠 烈王世家 忠烈王 18年(1292) 10月 庚寅條). 25) 뺷高麗史뺸 卷26, 元宗世家 元宗9年(1268) 7月 丁卯條. 26) 뺷高麗史뺸 卷28, 忠烈王世家 忠烈王4年(1278) 7月 甲申條. 27) 뺷高麗史뺸 卷29, 忠烈王世家 忠烈王6年(1280) 11月 己酉條.
102 100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던 것이다.29) 더욱이 이러한 고려의 태도 변화를 두고서 고려에게 심각했던 倭寇 문제를 元의 힘을 빌어 해결하려 했다는 해석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30), 찬성할 수 없다. 倭寇의 피해가 한층 심각해 지는 1320년대 이후, 나아가 본격적인 倭寇로 전개되는 1350년대 이후에 고려가 蒙古의 일본 원정을 바란 흔적은 전혀 없는 데다가 고려는 어디까지나 和親的 입장을 취하며 외교 절충에 의 한 倭寇 문제의 해결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보아 일본 원정의 최대 피해자는 고려 였으며, 그 피해는 13세기 당시의 왜구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의 막심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한편, 고려 조정의 입장이 본래 蒙古와 일본과의 전쟁을 회피하는 데 있었다면, 그와는 반대 로 일본과 연대하여 蒙古에 대한 抗戰을 기도하는 고려 국내의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고려 武 臣政權의 중추로서 對蒙古抗戰의 중심이었던 三別抄이다. 근년 일본에서 발견된 高麗牒狀不審 條條 라는 古文書에 의해 알려지듯이, 삼별초는 1271년 5월 珍島 함락 직전, 일본에 대하여 군 사 원조와 연대 투쟁을 호소하기 위해 通牒하였다.31) 통첩에 임하여 일본에 표류민을 호송하거 나 예물을 보내는 등 友好的 儀禮的 조치를 취한 것도 공통의 敵에 대한 同盟關係 결성의 한 포석이었다. 조정이 예부터의 우호관계를 내걸고 蒙古에 入朝하도록 외교적 설득에 힘썼다면, 진도의 삼별초 정부는 동일하게 일본과의 우호를 표시하면서 對蒙古抗戰을 위한 군사 동맹을 기 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삼별초는 조정과 다를 바 없는 고려의 정통왕조로서 자임하고 있으며, 또한 1260년대에 倭寇 와 적대한 경험이 있고 왜구의 피해가 많았던 南海地域 민간의 지지를 얻고 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을 夷狄 혹은 寇賊으로 보는 관념에서 탈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별초는 아마도 對蒙古 連帶鬪爭을 전개하는 데 有用한 오랑캐로서 거칠고 倭寇로서 海戰에 능숙한 국가로서 일본을 기대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고려 정부와 삼별초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채, 고려와 蒙古를 한 통속의 28) 中村榮孝, 文永 弘安兩役間の國際政局 日本 モンゴル間の高麗 뺷日鮮關係史の硏究뺸 上, 東 京, 吉川弘文館, 1965, 72쪽 이하, 川添昭二, 中世における日本と東アジア (上) 뺷福岡大學總合硏究 所報뺸 147, 1992, 87쪽. 29) 1278년에 충렬왕이 상주문을 올린 배경에는, 이전에 명령받았던 화살의 제조가 1277년 1월에 끝난 상태에서 2차 일본 원정을 피할 수 없다는 왕의 판단과 함께, 당시 고려의 남쪽 반을 元에 귀속시키 려 하던 洪茶丘의 책동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池內宏, 뺷元寇の新硏究뺸, 200~201쪽 참조). 30) 川添昭二, 中世における日本と東アジア (上), ) 石井正敏, 文永八年來日の高麗使について 三別抄の日本通交史料の紹介 뺷東京大學史料編纂所 報뺸 12, 1978 ; 村井章介, 高麗 三別抄の叛亂と蒙古襲來前夜の日本, 164~166쪽.
103 蒙 古 의 日 本 侵 略 과 日 本 의 對 應 101 적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32) 삼별초의 통첩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확인되지 않지 만 아마도 정부 당국자는 이를 무시했을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건전한 양국 관계 발전의 가 능성이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몽고의 일본 침략 이전에 외교적 해결을 꾀한 조정의 시도이든, 반대로 군사적 동맹을 모색한 삼별초의 시도이든, 일본의 대응 여하에 따라서 고려와 일본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향 후 동아시아 속에서 양국관계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것임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일본 은 고려 조정의 설득에 임할 만큼 유연한 국제적 감각을 지니고 있지 못했으며, 또한 삼별초와 함께 연대투쟁을 전개할 만큼 고려의 국내사정을 파악하지도 못했고 적극적인 방어 전략을 세울 능력도 결여하고 있었다. 3) 일본의 대응 일본은 蒙 古 가 두 차례 침략을 전후하여 방법을 바꾸어가면서 줄기차게 시도했던 외교교섭을 모두 무시하였고, 전쟁의 사태를 피하기 위한 고려의 권유와 설득에도 불응하였으며, 일체의 외 교적 대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蒙 古 에의 연대 투쟁을 호소하는 삼별초의 통첩에 대해서도 묵묵 부답이었다. 일본은 외교상 無 對 應 으로 일관하였던 셈이다. 그 배후에는 어떠한 국내사정이 있 었던 것일까? 일본 국내에서는 蒙 古 의 강대한 세력과 대륙에서의 침략전쟁에 대해서 적어도 蒙 古 國 書 가 到 來 한 당시에는 대체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蒙 古 國 書 가 도래하자 公 家 武 家 가 보인 당혹과 위기감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이 일은 국가의 珍 事 이자 大 事 이다. 만인이 경탄할 수밖에 없 다 33) 든가 이것(첩장)을 보고 公 家 와 武 家 가 크게 놀라 返 牒 을 보내야 할지 아닐지, 牒 使 를 목 베어야 할지 아닐지 諸 道 의 의견서와 公 卿 의 僉 議 가 분분하였다 34) 는 말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 다. 民 間 에서도 당시 天 下 無 雙 의 놀라운 일은 다만 이 일뿐이다 35) 라고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 이고 있었다. 10세기 이후 오랜 동안 주변 국가와 국교를 맺지 않고, 국제적 긴장상태에 놓인 일이 거의 없었던 일본으로서는 외교적이든 군사적이든 국가 존망의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새로 운 상황에 직면한 것이었다. 鎌 倉 幕 府 는 九 州 의 大 宰 府 로부터 보내온 蒙 古 國 書 를 高 麗 國 書 와 함께 京 都 朝 廷 의 後 嵯 峨 32) 文 永 8 年 (1271) 9 月 15 日 祈 願 文, 鎌 倉 遺 文 第 14 卷 號. 33) 深 心 院 關 白 記 文 永 5 年 (1268) 2 月 8 日 條 ( 大 日 本 古 記 錄 深 心 院 關 白 記, 岩 波 書 店, 1996). 34) 八 幡 遇 童 訓, 伏 敵 編 卷 1, 15쪽. 35) 至 元 5 年 (1268) 正 月 日 高 麗 國 牒 狀 案, 鎌 倉 遺 文 第 13 卷 9845 號.
104 102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上皇에게 올리는 동시에, 1268년 2월 蒙古에 대한 경계령을 西國地方의 御家人들에게 내리고 있다.36) 여기에 원칙상 조정이 外交權을 장악하고 대외적으로 國王 天皇 으로서 일본을 대표 하고 있던 것, 그리고 幕府가 日本國의 守護를 본래적인 職務로 하는 軍事權門37)으로서 경계태 세를 갖추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막부는 경계령에서 蒙古人이 凶心을 품고 本朝를 엿보려 고 牒使를 보낸 것이다 38)고 말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 幕府가 애당초 蒙古國書의 到來를 侵略 의 前兆로 받아들였다는 견해39)가 있지만, 이런 경우 당연히 취할 수 있는 경계태세로 보는 것 이 합당할 것이다. 한편, 蒙古國書에 처음 접한 公家貴族들은 後嵯峨上皇이 주재하는 院評定에서 返牒의 有無 를 둘러싼 논의를 거듭한 끝에 蒙古國書가 禮를 缺하고 있어서 회답하지 않는다 40)고 결정하 였다. 그런데 이러한 조정의 방침은 1269년 9월 제 4회 사신이 온 것을 계기로 바뀐다. 조정은 이번에는 返牒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 취지는 종래 중국과의 通好가 中絶되었기 때문에 蒙古 의 通好 요구에 응하기 어렵다는 것과 함께, 蒙古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그 不義를 호소한다는 것이었다.41) 菅原長成가 기초한 文永 7년(1270) 정월 일자의 贈蒙古國中書省牒 은 日本國太政 官으로부터 蒙古의 中書省 앞으로 보내는 형식으로, 귀국과는 일찍이 인물의 교통이 없었으니 본조가 어찌 好惡가 있겠는가. 由緖를 돌아보지 않고 凶器를 사용하려고 하니 和風이 다시 불어 도 疑氷이 여전히 두텁다. 어찌 帝德仁義의 경지를 칭하면서 民庶殺傷의 근원을 열려고 하는 가 42)라는 道義的 비판의 색채를 띤 것도 그 때문이었다. 조정은 이러한 返牒을 작성하여 막부 에 보냈으나 막부는 이것을 억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여기서 조정은 왜 返牒을 보내려 했고, 막 부는 왜 그것을 억류했는가가 검토 대상이 된다. 조정의 返牒 은 실은 어떻게든 蒙古와의 전쟁을 회피하려는 公家側 의도의 발로였다 년 9월 제 5회 사신 趙良弼이 일본에 와서 회답을 요구하며 오는 11월을 기한으로 여전히 회답 이 없으면 兵船을 보내겠다 는 最後通牒을 발했을 때, 조정측은 사태가 몹시 급하게 되었다. 일이 종국에 이르렀으니 탄식할 만하다 라고 당황해하며 막부가 억류했던 예전의 返牒 초안을 36) 龍肅, 뺷蒙古襲來뺸, 至文堂, 1959, 27-31쪽. 37) 黑田俊雄, 中世の國家と天皇, 뺷岩波講座 日本歷史뺸 6 中世2, 1963 (同, 뺷日本中世の國家と宗敎뺸, 岩波書店, 1975, 수록). 38) 文永5年(1268) 2月 27日 關東御敎書, 追加法 436(佐藤進一 池內義資編, 뺷中世法制史料集뺸 第1卷, 岩波書店, 1955, 227쪽). 39) 川添昭二, 뺷蒙古襲來硏究史論뺸, 雄山閣出版, 1977, 27쪽. 40) 뺷深心院關白記뺸 文永5年(1268) 2月 8日, 10日, 14日, 17日, 19日, 25日, 26日條 및 뺷鎭西要略뺸 文 永5年條, 뺷伏敵編뺸 卷1, 31쪽. 41) 蒙古來使記錄, 뺷鎌倉遺文뺸 第14卷 10380號. 42) 贈蒙古國中書省牒, 뺷本朝文集뺸 67, 뺷伏敵編뺸 卷1, 39쪽.
105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103 약간 수정하여 서둘러 보내려 하고 있다.43) 1269년 말 조정이 返牒을 보내기로 한 것도 동년 2월 對馬島에 도착한 제3회 사신들과 島民과의 충돌,44) 그때 잡아간 島民 2인을 송환하면서 회 답을 요구하는 등 蒙古의 거듭된 尋問 45)에 따라서 對外的 危機意識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조정은 蒙古의 통호 요구는 완곡히 거절하면서도, 전쟁 사태를 미연에 막기 위해 외교적 수단을 강구한 것이었다. 조정은 이와 동시에 고려에 대해서도 大宰府守護所牒 을 보내려 하였는데, 거기에서는 지난 번 사신과 對馬島民과의 충돌 사건에 대해서 오히려 정중히 사과하고, 使行의 어려움에 대해 동 정을 표하며 식량을 제공하고자 한다는 등 매우 宥和的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46) 일본 국내에 서 이 返牒을 和親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47)은 단순한 誤傳이 아니라, 이 返牒이 외교적 평 화적인 문제해결을 지향했던 것에 기인한다. 요컨대 조정측은 몽고 고려와의 외교교섭을 통해 전쟁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며, 返牒에 대한 蒙古側의 반응을 살피려 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막부는 왜 조정이 보내려 한 返牒을 억류했던 것일까? 조정의 返牒 방침에 대한 막 부의 조치에 대해서는, 사정을 설명하지 않고 결국 (蒙古)牒狀의 体가 無禮하므로 返牒할 필요 가 없다 고 하여 사신을 그대로 돌려보냈다고 전해진다.48)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막부가 牒狀의 体 를 문제삼고 있는 점이다. 이것을 전통적인 國際意識이나 慣習에 의한 태도49)로 보는 것은, 그러한 意識의 張本인 조정이 返牒을 택한 것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없다. 또한 軍事 警察을 담 당하는 정권으로서의 武斷的 劃一的 태도50)의 반영으로 보는 것은 막부의 狀況認識을 度外視 하는 武人體質論的 평가에 가깝다. 그밖에 당시 南宋側으로부터의 情報나 民族主義的인 중국 禪僧들의 宗敎思想의 영향을 지적하는 견해51)도 있으나, 朝廷側도 그러한 情報와 思想을 접한 흔적이 있다52). 따라서 이 문제는 일본의 政治體制 즉 朝廷과 幕府의 관계 및 幕府權力의 성격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뺷吉續記뺸 文永8年(1271) 10月 24日條. 뺷五代帝王物語뺸 龜山, 뺷新校 群書類從뺸 第2卷. 뺷師守記뺸 貞治6年(1367) 5月 9日條 ; 뺷史料纂集 師守記뺸 第9. 贈高麗國牒, 뺷本朝文集뺸 67, 뺷伏敵編뺸 卷1, 39-40쪽. 조정의 반첩 에 대해서 이번에는 반첩을 보내며, 또한 화친을 해야 한다고 한다 (文永7年(1270) 5 月 26日 東嚴慧安敬白文, 뺷鎌倉遺文뺸 第14卷 10630號)라는 巷說이 퍼진 것도, 기본적으로는 반첩 이 외교적 평화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던 것에 한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뺷五代帝王物語뺸 龜山. 田中建夫, 東アジア通交關係の形成 뺷岩波講座 世界歷史뺸 9, 岩波書店, 1970, 543쪽. 村井章介, 高麗 三別抄の叛亂と蒙古襲來前夜の日本, 168쪽. 川添昭二, 뺷中世九州の政治と文化뺸, 文獻出版, 1981, 쪽. 京都의 正傳禪寺 주지인 東嚴慧安은, 蒙古國은 性情이 교만합니다. (중략) 삼가 敵國의 원래 의도 를 생각컨대, 일본의 군병을 몰아 여러 나라의 국토를 항복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는 의견서를 조정 관계자로 보이는 인물에게 제출하고 있다(東嚴慧安意見狀, 뺷鎌倉遺文뺸 第14卷 10559號).
106 104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을 통해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蒙古國書는 어디까지나 日本國王 인 天皇 앞으로 보내진 것이고, 막부가 그것을 조정에 上 奏하여 중대한 國際事件에 대한 대응을 (설령 형식적이라고 해도) 맡긴 것은 朝廷(天皇)의 存在 意義가 대외적 위기 속에서 확인된 것을 뜻한다. 조정의 返牒 은 국가 통치권자로서의 당연한 권한의 발동이고, 국가의 重大事를 스스로 담당하려는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 로는 막부에 의해 억류되었지만, 조정이 막부의 의사와는 별도로, 아니 그것에 反하면서까지 返 牒 을 보내려 한 것은 對外問題를 계기로 하여 조정의 爲政者意識이 높아진 것을 보여주는 것이 다.53) 대외적 위기상황하에서의 조정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 방침이 어떻든 外交面에서 막부의 主導 權을 제약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만일 返牒을 계기로 蒙古의 사신과 첩장이 도래하여 조정과 蒙古의 접촉이 활발해지게 된다면 막부가 고립화될 우려도 있다. 그 때문에 막부는 조정의 외교 권 발동을 억제하고, 牒狀이 무례하므로 返牒할 필요가 없다 는 식의 大義名分에 입각한 강경 한 정책을 택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 名分論的 强硬策은 조정의 返牒 즉 外交權의 發動 을 억지하는 데 정당성을 제공하고, 軍事權門인 막부가 武力에 의한 國家守護를 내세워 外交上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유효했을 것이다. 蒙古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요구하는 입장의 논리적 귀 결이,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武家에게 賦課하십시오. 武家는 朝家의 第一의 重寶입 니다 54)라는 말처럼, 바로 막부에 의한 國政의 主導였던 것이다. 한편, 당시 幕府權力의 최고 실력자가 北條氏의 家督인 北條時宗이었다는 사실도 이 강경책 의 배경의 하나로 주목된다. 이미 時宗의 生父인 北條時賴의 시대부터 막부의 실질적 최고권력 은 執權 이라는 公職에 있는 것이 아니라, 北條氏 本家의 長인 得宗 (도쿠소)로 옮겨지고 있었 다.55) 그러나 北條氏는 본래 막부의 御家人과 同列의 身分으로, 得宗는 將軍이 갖는 御家人 支 配의 正統性을 결여하고 있었다.56) 따라서 외국으로부터의 위협에 대하여 군사적 대결을 피하려 53) 조정에 대한 막부의 힘의 우위를 결정지은 1221년 承久의 亂 이후, 특히 1246년 宮騷動을 계기로 하여 조정은 막부의 강한 간섭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그 결과 탄생한 것이 後嵯峨上皇이 주재하는 院評定制였다. 그 후 後嵯峨院政下의 조정은 內外의 重大事에 관해서 막부의 의향에 따랐다고 지적 되고 있다(上横手雅敬, 鎌倉幕府と公家政権, 岩波講座 뺷日本歴史5 中世1뺸, 岩波書店, 1975, 쪽 및 網野善彦, 뺷蒙古襲来뺸, 小学館, 1974, 48-51쪽). 그러나 蒙古國書의 到來라는 종래에 없던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여 조정이 나름대로 주체적인 움직임을 보인 것이 주목된다. 54) 東嚴慧安意見狀, 뺷鎌倉遺文뺸 第14卷 10559號. 55) 村井章介, 執權政治の變質, 뺷日本史硏究뺸 261, 1984, 17쪽. 56) 幕府體制의 頂点인 將軍이 되기 위해서는 身分的 尊貴性을 갖추어만 했지만, 北條氏는 小國 伊豆의 在廳官人 출신이라는 낮은 신분이었다(同上, 27-28쪽).
107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105 한다면 지배의 정통성을 결여하고 있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대항세력의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 을 우려했을 것이다. 여기서 막부의 得宗權力은 大義名分에 입각한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막부가 일본과 蒙古와의 교섭 자체를 거부하고, 牒狀의 無禮 를 명목으로 蒙古에 대한 戰爭 不辭라는 강경책을 택한 데에는 이상과 같은 일본 국내의 정치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보 인다. 제1차 침략 이후 1275년 9월, 동년 4월에 도착한 蒙古의 사신을 막부가 참수한 것도 동일 하게 이해할 수 있다. 막부의 사신 참수는 영원히 和親하지 않고 通問하지 않는다 57) 혹은 일 본을 엿보는 것을 막고 침략하지 못하게 한다 58)는 명분에서였다. 이 조치는 막부의 得宗權力이 蒙古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國內外에 보인 것59)인 동시에, 蒙古와의 외교교섭 자체가 불필요하 다는 막부의 의사표시이기도 했다. 조정이 이때의 첩장을 상주받은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나 지 난 후의 일이었다.60) 1279년 6월, 멸망한 남송의 옛 신하 출신의 牒使가 도착했을 때에도 막부 는 형식상 첩장을 조정에 상주했지만, 조정의 評定를 기다리지 않고 역시 막부 독단으로 처형하 였다.61) 조정의 외교권은 이 단계에서 사실상 부인되어 아예 외교적 대응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조정은 막부의 독단적인 조치에 무력할 뿐, 그 후 反牒不可 라는 先例에 따라 막부의 정책에 순응하는 길밖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62) 2. 蒙古의 日本 侵略과 高麗 日本 1) 고려의 군사전략적 위치 몽고의 일본 침략은 일본의 가장 인접한 국가이자 몽고에 복속한 고려의 軍事基地化를 초래 57) 뺷關東評定傳뺸 建治1年(1275), 뺷群書類從뺸 第4輯 補任部. 58) 뺷鎌倉年代記裏書뺸 建治1年(1275), 뺷增補 續史料大成뺸 ) 江戶 시대의 뺷大日本史贊藪뺸에서는, 時宗가 이때의 元의 使臣을 목베어 일본의 威武 를 선양하고 외국을 두렵게 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다고 평하고 있다(同, 卷4, 日本國粹全書刊行會, 1916, 293 쪽). 60) 뺷師守記뺸 貞治 1年(1362) 5月 9日條, 뺷增補 續史料大成뺸 ) 뺷北條九代記뺸 下, 弘安2年(1279)條, 뺷續群書類從뺸 第29輯 上 ; 뺷勘仲記뺸 弘安2年 7月 29日條, 뺷增 補 史料大成뺸 34 ; 相田二郞, 뺷蒙古襲來の硏究 增補版뺸, 26-27쪽. 62) 1292년 7월, 고려의 사신 金有成이 가져온 고려국서에 대하여 조정의 後深草上皇은 실로 고려국왕의 문체가 무례하고 기괴하다 는 반응을 보이고, 대책으로서 이전에 결정한 취지와 다를 바 없다 는 선 례 중시에 머물러 있었다(正應 5年(1292) 12月 10日 後深草上皇書狀, 뺷鎌倉遺文뺸 第23卷 18066號).
108 106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하였다. 고려는 몽고의 일본 원정을 위한 戰艦, 軍糧, 兵力 등을 보급해야 하는 兵站基地로 전락 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가 우려했던 사태가 현실이 되어 엄청난 부담을 가져왔음은 고려측 사료 곳곳에서 확인된다. 1271년 1월, 몽고는 일본에 사신 趙良弼을 파견할 단계부터 몽고의 군대를 金州(金海)에 주둔 시키면서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고 戰艦을 金州에 집결시킬 것을 명하고 있었다.63) 또한 같은 해 3월에는 屯田經略司를 鳳州(黃海道 鳳山)에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農牛 3,000두와 둔전 에 필요한 農具 種子 秣粮 및 가을까지의 軍糧을 보급할 것을 요구하였다.64) 屯田軍의 설치에 이어서 1272년 2월에는 戰艦兵糧都監이 설치되어65) 고려는 바야흐로 본격적인 보급기지 체제하 에 놓이게 된다. 1273년 4월 耽羅의 삼별초가 멸망한 이듬해 고려는 1274년 1월부터 5월까지 諸道에서 造船 인원 30,500명을 징발하여 大船 300척을 포함한 총 900척을 급속히 건조, 완공하 였다.66) 제1차 원정에 동원된 고려군은 약 6,000명, 사공 수부 등은 6,700명이었으며, 고려가 그 동안 부담한 군량미는 양곡이 乏絶 67)될 정도였다. 이 전쟁의 수행으로 고려가 겪은 부담은 127 5년 1월, 만약 다시 일본 정벌을 일으킨다면 거기에 소용되는 전함들과 군량을 小邦은 공급할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나라가 파멸되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68)라고 쿠빌라이에게 호소한 충 렬왕의 말에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제2차 일본 원정에 따른 보급기지로서 고려의 부담은 1차보다 더욱 막중한 것이었다. 고려는 전함 900척, 군사 10,000명, 사공 水夫 17,000명, 군량 최소 10만석 이상69)을 공급하였다. 여기 에 말의 사료, 무기, 각종 군수품까지 조달해야만 했다. 고려는 두 차례의 원정에 따른 전함의 뺷高麗史뺸 卷27, 元宗世家 元宗12年(1271) 1月 己卯條. 同3月 丙寅條. 뺷東國通鑑뺸 卷36, 元宗13年(1272) 2月條. 뺷高麗史뺸 卷27, 元宗世家 元宗15年(1274) 1月條, 同6月 辛酉條. 제1차 원정군에 대하여 고려가 공급한 군량은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수 년에 걸친 원정 준비 기간 고려가 공급한 군량은 庚午年(1270)부터 지금까지 5년 동안에 군량을 공급하여 왔기 때 문에 벌써 양곡이 乏絶된 지 오래 되었다 는 말처럼 막대한 것이었다. 고려는 1274년 2월, 근년에 군인, 군마의 식량과 사료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어서 官員들과 백성들에게서 거둔 것은 이루 헤아 릴 수 없다 고 하면서 식량 공급의 어려움을 호소하였는데, 이에 元은 同年 4월 쌀 2만석을 보내 군량에 보충하게 하고 양곡 값으로 비단을 보내도록 하였다(뺷高麗史뺸 卷27, 元宗世家 元宗15年(1 274) 2月 甲子條, 同4月 甲子條). 太田弘毅의 지적대로, 여기서 말하는 2만석이 실제로 漕運되었다 고 해도 결국 양식의 준비는 고려가 부담해야 했을 것이다(太田弘毅, 뺷蒙古襲来 その軍事史的研 究 뺸, 錦正社, 1997, 91쪽). 68) 뺷高麗史뺸 卷28, 忠烈王世家 忠烈王1年(1275) 1月 庚辰條. 69) 제2차 원정 당시 고려가 공급한 군량에 대해서는 10만석(뺷元史뺸 世祖本紀 ), 11만석(뺷高麗史뺸 忠 烈王世家 ), 혹은 12만 3천 5백 60여석(뺷東國通鑑뺸 忠烈王8年) 등 諸史料에 상이하게 기록되어 있다. 63) 64) 65) 66) 67)
109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107 건조로 하천과 바다 연변의 재목을 거의 다 벌채하여 더 이상 전함의 건조가 불가능한 상태였 다.70) 十八年辛巳年(1281) 官軍이 일본을 정벌할 때 모든 전함, 식량을 비롯하여 군졸과 사공 수부, 기타 일체의 물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있는 힘을 다하여 공급하였다 71)는 충렬왕의 말은 정치적 言辭임을 고려하더라도 고려가 짊어졌던 부담의 막중함을 가히 짐작케 한다. 그 후에도 쿠빌라이의 제3차 일본 원정의 기도가 있을 때마다 고려는 전함의 수리 건조, 군량 의 준비, 兵器의 제작, 軍士와 水夫의 징발 등을 요구받았음은 물론이다72). 몽고는 고려 이외에 中國 江南과 東京(遼陽)에도 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을 명하였지만, 1285년 11월 江南의 江淮米 10 0만석을 고려의 合浦(馬山)에까지 운반 저장하도록 명한 것73)에 드러나듯이, 고려야말로 일본 원정을 위한 第一의 병참기지였던 것이다. 고려는 몽고의 일본 원정을 위한 보급기지 내지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한편, 역으로 일본으로부터의 침공에 대한 방어기지로서의 역할도 떠맡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몽고 의 일본 원정 이전부터 고려와 일본 사이에 조성된 군사적 긴장 속에서 고려는 일본으로부터의 침공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269년 5월, 慶尙道 按察使가 濟州島人이 일본에 표류했다 가 돌아와 말하기를 일본이 兵船을 갖추어 장차 우리를 침범하려 한다고 한다 라고 보고하자 고 려조정은 삼별초를 파견하여 연해를 경비하도록 하는 한편, 築城과 糧食의 備蓄을 명하고 일본 에 가까운 彰善縣(南海)에 있던 國史를 珍島에 옮기게 하고 있다.74) 일본측의 몽고 침입에 대한 경계태세가 잘못 전해진 것이긴 하지만, 고려로서는 세 달 전 黑的 일행이 對馬島民과 충돌하여 島民 2명을 사로잡아 귀환한 사건과 연관지어 일본의 군사 동향을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전쟁이 실제로 발발한 이후에는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더욱 방비를 강화하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제1차 일본 원정 직후 合浦에는 몽고군으로 구성된 鎭戍軍이 설치되어 1278년 고려군으로 대체될 때까지 주둔하였다. 아마도 우려되는 일본의 침공에 대비한 조치였을 것이다.75) 70) 뺷高麗史뺸 卷31, 忠烈王世家 忠烈王20年(1294) 1月 癸酉條. 71) 同, 忠烈王23年(1295) 10月 丙申條. 72) 뺷高麗史뺸 卷29, 忠烈王世家 忠烈王9年(1283) 3月 庚午條 ; 同卷30, 忠烈王世家 忠烈王11年(1285) 12月 辛丑條 ; 同12月 甲寅條 丁卯條 ; 뺷東國通鑑뺸 卷38, 忠烈王9年(1283) 3月條. 73) 뺷元史뺸 卷13, 世祖本紀 至元22年(1285) 11月 癸巳條. 또한, 元은 아마도 쿠빌라이의 사망 직전인 1293년, 일본 정벌을 위하여 江南米 10만석을 운반하여 江華島에 비축해 두고 있었다(뺷高麗史뺸 卷 31, 忠烈王世家 忠烈王20年(1294) 12月 庚寅條). 74) 뺷高麗史뺸 卷26, 元宗世家 元宗10年(1269) 5月 丙午條. 75) 1278년 7월, 고려의 忠烈王은 合浦鎭戍軍은 남겨두어 倭寇에 대비하여 주기 바랍니다 라고 청하였 는데, 쿠빌라이는 구태여 남겨둘 필요가 있겠는가? 그대 백성들에게 害가 되지 않겠는가? 그대가 스스로 그대 나라 사람을 써서 鎭戍하도록 하라. 倭寇는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다. 라고 답하고 있
110 108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1280년 5월 倭賊이 固城 漆浦 및 合浦에 침입하여 어부를 잡아가는 사건이 발생하자 고려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군사를 보내 수비하게 하는 한편, 몽고에 大將軍을 파견하여 이 사건을 보고 하고 있다.76) 몽고는 이때 고려의 軍卒로써 倭賊을 방어할 것을 명하였지만, 일본 원정에 즈음하 여 1281년 6월 본국에서 騎兵 300명을 보내 合浦를 지키게 하였다.77) 원정이 실패한 직후인 12 81년 10월, 몽고는 忠烈王과 征東行省의 요청을 받아들여 日本과 마주보는 要衝 인 慶尙道 金 州 合浦 等地와 全羅道에 鎭邊萬戶府를 설치하였다.78) 다음해 1282년 1월에는, 일본의 고려 연 안 침구 사건과 관련한 충렬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몽고는 본국에서 군사 500명을 金州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79) 곧이어 2월 몽고는 蒙 漢軍 1,400명을 보내 耽羅島의 防備를 강화하였으 며,80) 4월에는 군사 340명을 보내 合浦를 지키게 하고 60명은 王京을 지키게 하여 불의의 변고 (不慮) 에 대비케 하였다.81)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몽고와 고려가 일본으로부터의 逆攻에 대비 하여 金州 合浦 등을 비롯한 고려 要害와 首都 開京, 그리고 일본과 중국의 江南地方을 연결하 는 海上 要衝인 耽羅島의 防備를 강화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몽고 본국도 일본의 보복을 우 려하여 1281년 11월, 일본 원정에서 돌아온 군사들로 하여금 慶元(寧波) 上海 澉浦 등 江南地方 의 沿海를 鎭戍하게 하고 있었다.82) 1, 2차 일본 원정의 發進基地가 되었던 고려의 合浦는 행정상 金州의 관할구역 안에 있는 要 害地였다.83) 금주는 늦어도 11세기 중엽부터 1266년에 폐지되기 전까지 일본인 무역상인을 접 대하는 館舍가 있을 정도로 고려 내에서 일본인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對日交涉 거점이었다.84) 76) 77) 78) 79) 80) 81) 82) 83) 다(뺷高麗史뺸 卷28, 忠烈王世家 忠烈王4年(1278) 7月 戊戌條). 후술하는 2차 원정 직후의 동향을 함께 고려하면, 몽고군은 아마도 1차 원정 직후 요해지역 합포에 수 년간 주둔하여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뺷高麗史뺸 卷29, 忠烈王世家 忠烈王6년(1280) 5月 癸卯條. 同, 忠烈王7年(1281) 6月 丙戌條. 뺷元史뺸 卷99, 兵志, 鎭戍에는 至元十八年(1281) 十月 高麗王并行省皆言 金州, 合浦, 固城, 全羅州等處 沿海上下 與日本正當衝要 宜設立鎮邊萬戶府屯鎮 從之 라고 보인다. 뺷元史뺸 卷208, 外夷列傳 高麗傳, 至元19年(1282) 正月條. 뺷元高麗記事뺸에는, 至元19年 정월 15일 蒙古軍 100명으로 高麗의 金州를 鎭戍하였다 라고 보인다. 뺷東國通鑑뺸卷38, 忠烈王8年(1282) 2月條. 이미 몽고는 원정 실패 직후인 1281년 9월, 耽羅의 鎭戍 軍을 증원하고 고려에게 그 戰具를 공급하도록 명하였다(뺷元史뺸 卷11, 世祖本紀 至元18年(1281) 9月 癸酉條). 당시 耽羅는 몽고의 직할지로서 다루하치 總管府의 지배하에 있었다. 뺷高麗史뺸卷29, 忠烈王世家 忠烈王8년(1282) 4月 戊戌條. 뺷元史뺸 卷99, 兵志. 鎭戍, 至元 十八年(1281)十一月條. 뺷高麗史뺸 卷57, 志11, 地理2, 慶尙道 金州條에 의하면, 金州에는 義安郡 咸安郡의 2郡과 漆園縣 熊 神縣 合浦縣의 3縣이 속해 있었다. 또한 뺷新增東國輿地勝覽뺸 卷32 昌原都護府 에는, 合浦의 形勝 에 관하여 합포는 큰 진이다. 범이 웅크린 듯, 용이 도사린 듯하다(合浦巨鎭, 虎踞龍盤) 라고 기술 되어 있다. 合浦는 조선시대에 慶尙右道 兵馬節度使의 本營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111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109 금주가 平和時에 일본인의 해상 왕래가 가장 활발한 인접 지역85)이었던 만큼 戰時에는 일본과 의 군사적 대치가 가장 첨예한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몽고와 고려가 攻守兩面의 군사 요해로 서 合浦와 金州를 중시했던 까닭이다. 2차 원정 실패 직후에 慶尙道의 合浦 等地와 全羅道에 설치된 鎭邊萬戶府는 日本을 控制하 는 86) 것이 주요 목표였다. 1301년 7월 몽고는 고려의 요청에 따라, 前年에 설치되었던 耽羅總 管府를 폐지하고 고려에 예속시켜 萬戶府를 설치하기에 이른다.87) 이들 세 곳의 萬戶府는 몽고 군의 일시적인 주둔88)을 제외하고 평시에는 고려군으로 충당되며 征東行省의 관할하에 놓였다. 본래 제2차 일본 원정을 위해 1280년 8월에 설치되었던 征東行省은 원정의 실패 후 몇 차례 置 廢를 거듭하다가 이윽고 防倭(=對日本防禦)機關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89). 征 東行省이 일본 원정을 위한 군사령부 역할을 했을 초기에는 江南軍의 蒙古人 총사령관이 장관 을 맡았지만 그 후에는 고려국왕이 장관이었다. 1302년 遼東行省이 征東行省을 병합하려고 획책했을 때, 고려의 忠烈王은 小邦은 원나라 의 가장 먼 변강에 있는 중요한 지대이며 아직도 귀순하지 않은 日本國에 인접하고 있습니다. 至元18年(1281) 大軍이 바다를 건너 출정한 후 至元20年(1283) 世祖皇帝의 聖旨를 받들어 본인 이 行征東省事의 職을 맡아 邊面을 威鎭하였고, 현재의 慶尙道 合浦 等地와 全羅道 두 곳의 鎭 邊萬戶府를 管領해 왔습니다. 그리하여 本國(高麗)의 軍官 軍人을 징발해서 현재 合浦 加德 東 萊 蔚州 竹林 巨濟 角山 內禮梁 등의 요해 지대와 耽羅 등지에 파견 배치하고 烽燧를 설치하 84) 南基鶴, 고려와 일본의 상호인식, 뺷日本歷史硏究뺸 11, 2000, 81-82쪽. 85) 일본으로부터의 고려표류민 송환도 日本 各地 大宰府 對馬島 金州 東南海(船兵)都部署라는 官 廳간의 루트로 처리되고 있었다(山內晉次, 古代における朝鮮半島漂流民の送還をめぐって 뺷歷史科 學뺸 122, 1990, 40쪽.) 13세기에 들어 金州에 倭寇가 발생한 것도 이곳이 對馬島를 비롯한 九州 지 역민들이 가장 활발히 오가는 지역이었음을 반증한다. 86) 뺷元史뺸 卷208, 外夷列傳 高麗傳, 至元18年(1281) 11月條. 87) 뺷高麗史뺸 卷32, 忠烈王世家 忠烈王27年(1301) 5月 庚戌條. 88) 1287년 3월에는 合浦를 수비하던 몽고의 군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다(뺷高麗史뺸 卷30, 忠烈王 世家 忠烈王13年(1287) 3月 庚申條). 89) 쿠빌라이의 사망을 계기로 원정 논의가 중단된 후 征東行省은 1299년에 再設置되어 고려를 관할영 역으로 하는 元의 지방기관으로 성격이 전환되며, 이후 元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내정을 감 시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에 대하여 高柄翊은 征東 자체가 중지된 이후에 도 征東行省은 명의상 형식상으로 존재하였으며, 일시적으로 元朝의 관리를 요직에 임명하여 高麗 內政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한 적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고려의 元帝國內에서의 1行省으로서의 지위를 확정하는 데 존재의의가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征東行省의 군사기구로서의 주요 임무는 征東 에서 控制日本 즉 防倭로 바뀌었다고 한다(高柄翊, 麗代 征東行省의 硏究, 同 뺷東亞交涉 史의 硏究뺸, 서울大學校出版部, 1970, 쪽 참조).
112 110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고 船兵을 숨겨두고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감시 순찰하여 日本國 賊軍에 對備하는 일을 주관하 여 왔는 바 지금까지 실수한 적이 없습니다. 일찍이 日本의 賊人을 포획한 일이 있으며, 이것을 원나라의 中書省과 樞密院에 공문으로 보고도 하였습니다. 라고 征東行省의 임무와 일본에 대한 고려의 경비태세의 萬全을 강조한 후, 이전과 같이 行征東省事를 맡아보게 해서 東方 極 邊의 未服屬國 日本 方面을 威鎭하는 일을 전담케 해주신다면 邊關事務가 크게 잘못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상주하였다.90) 여기서 일본에 대한 威鎭 (警戒 對備)를 主任務로 하는 軍 事機關으로서의 征東行省의 존재의의를 잘 살필 수 있다. 또한 이때 고려가 병합 반대의 이유로 내세운 것이 일본에 대한 효과적인 警備였다91)는 점에서 몽고의 對日防禦基地로서의 고려의 위 치가 잘 드러나 있다. 몽고의 정부도 제3차 일본 원정을 기도하는 한편에서 항상 일본의 보복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은, 1292년 10월 무역을 위해 慶元에 입항한 日本船으로부터 武器가 발견되 자 異圖가 있을까 두려워 곧바로 都元帥府를 세워 海道를 防備하게 한 조치92)에서 엿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고려는 군사전략상 몽고의 일본 원정을 위한 병참 보급기지에 그치지 않고, 몽 고의 對日防禦基地로서의 위치에도 놓이게 되었다. 고려의 입장에서는 일본 원정의 부담만이 아 닌 對日防禦의 부담까지 짊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몽고로서는 자신의 東藩 93)인 고려국으로 하 여금 몽고와 대치하고 있는 일본을 威鎭 控制 하도록 하였고, 고려는 일본의 침공으로부터 자 국을 방위하기 위해서라도 이 역할을 스스로 떠맡지 않을 수 없었다.94) 90) 뺷高麗史뺸 卷32, 忠烈王世家 忠烈王 28年(1302)條. 91) 위의 上表에서는 東京으로부터 開京까지는 1500餘里요, 開京으로부터 合浦까지는 다시 1400餘里 이니 만약 海外에 약간이라도 警戒할 일이 생기면 報告往來에 千里도 멀다하거늘 하물며 3千里 밖 이 되니 어찌 되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다. 92) 뺷元史뺸 卷17, 世祖本紀 至元29年 (1292) 10月 戊子條. 93) 1330년 윤7월, 고려의 忠肅王은 고려의 국가를 부정하고 元帝國의 內地로 만들려는 획책을 듣고 원나라 太師 右丞相에게 서한을 보내, 고려국은 우리의 동쪽 번병 東藩 이다 는 至元3년(1266) 일본을 초유한 몽고국서의 문장을 인용하여 반박하고 있다(뺷高麗史뺸 卷36, 忠肅王世家 忠肅王17 年(1330) 閏7月 庚寅條 ). 고려가 원나라의 東藩 임은 세조 쿠빌라이 이래 양국의 기본관계로서 줄 곧 인정되어 온 것이었다. 94) 1332년 6월 고려의 신하들은 忠惠王의 復位 문제에 관한 상서문 속에서, 왕이 부재한 상태에서 는 아직도 귀순하지 않은 이웃 海倭의 變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말하고 있다(뺷高麗史뺸 卷3 6, 忠惠王世家 忠惠王2年(1332) 6月 壬辰條). 왕의 복위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문맥이기는 하지만, 고려가 여전히 일본에 대한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13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111 2) 일본의 異國征伐 계획 고려가 일본으로부터의 침공을 우려했던 것은 결코 杞憂가 아니었다. 이하에서는 일본 쪽에 시야를 돌려, 당시 異國征伐 이라 불린 高麗 侵攻 계획의 경과와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 다. 이것은 몽고의 침략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대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인 동시에, 고려 와 일본 양국관계의 전개를 살피는 데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의 하나이다. 1274년 10월 5일, 고려의 合浦를 출발한 제1차 일본원정군은 對馬島 一岐島를 점령하고 10 월 20일 마침내 九州 博多에 상륙하였다. 일본의 무사들이 이에 응전하였지만, 결과는 일본측의 苦戰, 일본군은 大宰府 방면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정군이 蒙古人 女眞人 漢人 高麗 人 등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혼성부대이면서도 통일적인 지휘체계하에 조직적인 集團戰法을 구 사하고, 독을 바른 짧은 화살과 鐵砲(뎃포) 같은 火藥武器까지 동원하여 重裝備의 個人戰으로 맞선 일본군을 패퇴시켰음은 뺷八幡愚童訓뺸에 잘 묘사되어 있다.95) 個人騎馬戰을 위주로 한 국 내전쟁과는 다른 대규모의 대외전쟁이었다는 점에서, 개별 무사단을 집합시켜 놓은 정도의 일본 군의 지휘체계의 불일치 비효율이야로 최대의 약점으로 작용하였다.96) 기상악화도 겹쳐 다음날 원정군이 물러간 후 막부는 몽고의 再侵에 대비하여 연안 경비를한 층 강화하였다. 이른바 異國警固番役 을 정비하여 다음해 1275년 2월에는 春夏秋冬 각 3개월씩 을 守護의 지휘하에 九州 各國의 御家人이 교대로 경비하는 체제를 만들었다.97) 같은 해 4월, 몽고의 사신 杜世忠 일행이 長門國 室津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막부는 5월 周防 安藝兩國의 御 家人을 長門國 경비에 동원하고 備後의 御家人을 추가, 4개국으로 편성하여 침입에 대비케 하였 다.98) 그런데 막부는 이 사신 일행을 8월에 關東으로 소환, 9월 7일 鎌倉의 滝の口에서 참수하 고는 곧이어 異國征伐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이 계획은 늦어도 같은 해 11월 이전에는 세워졌 던 것이 확인된다.99) 이렇게 막부는 몽고의 再侵에 대비하여 경비체제를 정비 강화하다가 사신 의 처형이라는 강경책에 뒤이어 異國 을 征伐 한다는 攻勢로 선회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異國 은 침략의 장본인 蒙固가 아니라 침략에 동원된 인접국 高麗를 가리킨다. 95) 뺷八幡愚童訓뺸(甲本), 뺷日本思想大系뺸 20 뺷寺社緣起뺸, 쪽. 96) 南基鶴, 중세 일본의 외교와 전쟁 몽골의 일본 침략을 소재로 뺷東洋史學硏究뺸 80, 2002, 쪽. 97) 文永12年(1275 2月 4日 少弐経資書状案, 뺷鎌倉遺文뺸 第15巻 11805号. 98) 建治元年(1275 5月 12日 関東御教書案, 뺷鎌倉遺文뺸 第16巻 11910号, 建治元年(1275 5月 20日 関東御教書案, 同, 11913号. 또한 이 무렵 異國警固番役의 방식도 변경되어 3개월씩 연1회에서 1개 월씩 연3회로 바뀌었다(建治元年(1275 6月 5日 豊後大守護友頼泰書下, 同, 11923号). 99) 뺷帝王編年記뺸 巻26, 九州探題.
114 112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이 계획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해 1276년 3월경을 실행 시기로 하고, 鎭西(=九州)의 군사 력을 중심적으로 동원하되 부족할 경우에 山陰 山陽 南海道 등 西國 연안지대의 地頭御家人 및 本所一圓地의 사공 梶取 수부 水手 를 징발한다는 것이었다.100) 그리고 실제로 1276년 3 월을 전후한 시기에 九州의 守護 또는 守護代가 총책임자 大宰少貳經資의 지휘에 따라 御家 人 非御家人을 불문하고 동원을 독촉하는 등 정벌 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관련사료 인 뺷北條九代記뺸에서는 이것을 警固事 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있고,101) 또 막부가 실행 시기에 맞추어 高麗를 향해 출진하는 자를 제외한 九州의 무사들에게 異國警固石築地 를 築造하게 하 고 있는 점102)에 비추어, 異國征伐 은 원래 고려에 대한 全面 侵攻이 아니라 異國警固 와 함께 추진된 局地的 侵攻 기도였다고 보인다. 막부는 1276년 3월 앞으로 한 두 달은 각별히 異國警 固를 태만히 해서는 안 된다 103)라고, 異國征伐 을 준비하는 한편에서 異國警固 를 엄중히 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막부는 왜 異國警固 에 그치지 않고 異國征伐 까지 敢行하려고 했던 것일까? 異 國征伐 에 대하여 몽고의 일본 공략기지이자 병참기지인 고려에 대한 반격이나 보복 공격이라는 군사전략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고,104) 거기에 깔린 대외태도로서 고려의 弱體를 틈탄 冒 險的 侵略主義 105)를 지적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종래까지 몽고의 사신들을 돌려보내 100) 建治元年( 月 8日 関東御教書案, 뺷鎌倉遺文뺸 第16巻 12170号. 村井章介는 安藝 1國에서 1 00척을 넘는 선박이 守護에 의해 징발되었던 점에서 異國征伐 을 위한 군사동원은 상당한 규모였 다고 지적하고 있다(村井章介, 뺷北条時宗と蒙古襲来 時代 世界 個人を読む뺸, 日本放送出版協会, 20 01, 쪽). 101) 뺷北条九代記뺸下 建治元年條에는, 警固事에 대하여 결정하였다. 鎭西에 유능한 守護들을 임명하여 海邊 지역에 파견하였다. 京都大番役을 중지하였다. 在京人을 두었다. 公家와 武家가 국가행사의 비 용을 줄이고 검약을 행하였으며 民庶를 번거롭지 않게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軍旅의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고 기술되어 있다. 102) 建治2年(1276 3月 5日 大友頼泰書下, 뺷鎌倉遺文뺸 第16巻 12252号, 建治2年 3月 11日 持蓮請文, 同, 12262号 등. 103) 建治2年(1276 3月 8日 北条宗頼書状(川添昭二, 뺷注解 元寇防塁編年史料 異国警固番役史料の研 究 뺸, 福岡市教育委員会, 1971, 쪽). 104) 한 예로 中村榮孝는 적극적인 防衛政策으로서 바다를 건너 반격하는 이국정벌 계획으로 이해하고 있다(同, 十三 四世紀の東亞情勢とモンゴル襲來, 37쪽). 한편, 막부가 몽고의 再侵에 대비하기 위 해 西國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위한 지역에 산재하는 병력을 단기간에 博多灣 주변에 동원할 필요에 서 異國征伐을 名目으로 西國御家人에게 동원령을 내린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安田元久編, 뺷古 文書の語る日本史3 鎌倉뺸, 筑摩書房, 1990, 226쪽). 이것은 정벌 을 위한 준비로서는 지극히 소략했 던 점이나 막부의 군사력의 열세에 주목한 견해로서, 鎌倉幕府가 진정으로 고려에 침공할 것을 생각 하고 있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현존 사료들은 고려 침공 준비가 현지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것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에 본고는 이국정벌을 단순한 명목 이었다고는 보지 않는 입장이다.
115 蒙 古 의 日 本 侵 略 과 日 本 의 對 應 113 고 방어태세를 일관해 오던 막부가 돌연 사신의 처형과 外 敵 에의 공격이라는 극단적인 강경책을 택한 데에는 그 나름의 국내사정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將 軍 과 御 家 人 사이의 御 恩 - 奉 公 의 상호관계에 입각한 幕 府 主 從 制 의 원리상, 戰 後 에 御 家 人 이 恩 賞 地 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1272년 2월 이래 九 州 御 家 人 들은 과중한 異 國 警 固 의 부담을 짊어졌기에 그 요구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전장터에 출진한 御 家 人 들의 궁 극적인 동기는 요컨대 勳 功 의 賞 이며 자기의 領 主 制 지배의 확대충동이었다. 106)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75년 6월, 九 州 의 肥 後 國 御 家 人 竹 崎 季 長 가 은상의 소송을 위하여 鎌 倉 에 올랐던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季 長 과 같은 무사들이 적지 않았음은 다음해 3월 豊 後 國 御 家 人 田 原 泰 廣 가 鎌 倉 에 직접 상소하려 한 것 107) 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막부는 戰 後 에 새롭게 획득한 영지가 없었고 몽고의 再 侵 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훈공자 이외는 은상 급여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은상을 기대했던 많은 御 家 人 들에게 불만이 생겼 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御 家 人 들의 불만과 경제적 부담은 여러 가지 분쟁 소송을 초래하는 요인 이 되며, 나아가 訴 訟 을 관할 재판하는 鎭 西 守 護 와 御 家 人 사이의 不 和 를 양성했을 것이다. 이 것은 1280년 12월, 근년에 守 護 와 御 家 人 이 토지소송이나 형사소송으로 인해 다수가 不 和 하기 때문에 ( 鎭 西 警 固 에) 주의하지 않는다고 한다 108) 라는 막부의 警 告 에서 엿볼 수 있다. 守 護 와 御 家 人 의 불화는 訴 訟 이외에도 戰 功 軍 忠 의 보고를 둘러싸고 불거지고 있었다. 전술 한 竹 崎 季 長 의 경우도 자신의 戰 功 을 누락시킨 守 護 에 대한 불만이 배후에 있었다. 異 國 警 固 의 독립적 근무를 둘러싼 御 家 人 總 領 과 庶 子 의 대립도 軍 忠 을 막부에 보고할 직책인 守 護 와의 불화를 가져온 또다른 요인이었다. 1276년 윤3월, 豊 後 國 御 家 人 禪 季 는 異 國 警 固 에 관해서는 總 領 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守 護 의 지휘를 따를 것을 청하면서 그 이유로서 막부에 戰 功 을 보고 할 경우 자신의 이름을 名 簿 에 직접 올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109) 이러한 庶 子 의 행동은 總 領 과의 분쟁을 가져오고 守 護 자신도 양자의 대립에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軍 役 부과에 의한 경제적 부담, 恩 賞 의 연기에서 오는 불만, 警 固 番 役 의 근무 방식을 둘러싼 總 領 庶 子 間 의 대립, 그리고 戰 功 軍 忠 을 보고하는 守 護 에 대한 불신 불만 등이 소송의 빈발과 守 護 御 家 人 의 불화를 심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戰 後 恩 賞 問 題 105) 村 井 章 介, 高 麗 三 別 抄 の 叛 亂 と 蒙 古 襲 來 前 夜 の 日 本, 169쪽. 106) 黒 田 俊 雄, 庄 園 制 社 会, 日 本 評 論 社, 1976, 210쪽. 107) 建 治 2 年 (1276) 3 月 8 日 北 条 宗 頼 書 状. 108) 弘 安 3 年 (1280) 12 月 8 日 関 東 御 教 書, 鎌 倉 遺 文 第 19 巻 号. 109) 建 治 2 年 (1276) 閏 3 月 15 日 僧 禪 季 申 狀 案, 鎌 倉 遺 文 第 19 巻 号.
116 114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가 커다란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하는 1275년 이래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守護와 御家人의 불 화는 守護에 의한 御家人의 지휘 통제에 입각한 防禦體制의 동요를 초래한다. 막부는 이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자신의 宿意를 품고 天下大亂을 돌보지 않는 것은 매우 不忠한 일이다 110)고 하여 그것을 억제하려 할 뿐이었다. 1275년 9월 사신의 처형이라는 막부의 강경책은 당시의 국내사정, 특히 最重要防衛地域인 九州의 현지 사정을 고려한다면, 실은 對外危機를 스스로 釀成함으로써 防禦體制의 弛緩을 다 잡으려 한 것이었다. 그에 뒤이은 異國征伐 계획도 단순한 外敵에의 공격에 그치지 않고, 그것 을 축으로 하는 방어체제의 재편 강화를 꾀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막부는 동요하고 있는 방어체 제로 外敵의 침략을 기다리기보다 오히려 공격을 통하여 敵軍에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對外戰 爭의 수행을 轉機로 하는 臨戰體制下에서 국내통제의 강화를 꾀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이 임전 체제하에서 막부는 御家人에 대한 守護의 군사지휘권을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고, 종래 지배권 이 미치지 않았던 本所一圓地의 무사들까지 군사지휘 통제하에 둘 수 있었다.111) 또한 막부는 국내 무사들의 통제를 위하여 得宗權力의 의사를 직접 대변, 관철하는 다수의 유력한 守護(혹은 守護代)들을 西國地方에 파견했던 것이 주목된다.112) 이 계획은 실행상의 곤란함113)에 부딪혀 오래지 않아 중지된 것 같지만, 막부에 의한 국내 무사의 통제 효과는 충분히 가져왔던 것을 부 정할 수 없다. 한편, 異國征伐 이라는 大義名分 자체가 得宗權力의 對蒙古政策에 正當性을 제공한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종래 방어를 고수해 온 막부가 나아가 외적을 공략한다는 공세적인 자세를 명확 히 드러냄으로써, 得宗權力은 막부의 유력 御家人과 조정의 公家側에 대하여 정책 주도의 정당 성을 주장, 획득하려 했다고 보인다. 이러한 대의명분 아래 北條氏 일족이 대거 西國地方의 守護 로 진출하고 있으며, 京都의 本所 領家側의 支配領域에 막부의 지배권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 주 목된다.114). 이 대의명분은 北條一門 守護의 西國 進出에 대한 外樣守護의 불만이나 그 支配圈 110) 同 註) ) 막부는 제1차 몽고의 침략에 처하여 御家人이 아니더라도 군공을 세우면 은상을 수여한다는 긴급조 치를 취한 바 있지만(文永11年(1274) 11月 1日 関東御教書案, 뺷鎌倉遺文뺸 第15巻 11742号), 현존 사료상 실제로 非御家人을 막부의 지휘통제하에 동원하는 것은 1276년 3월 이래의 일이다. 異國警 固는 예외없는 軍役 平均役 이다 (建治3年(1277) 9月 19日 関東御教書, 뺷鎌倉遺文뺸 第17巻 号)는 원칙이 성립한 時點도 전면적인 警固事 가 정해진 1275년말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12) 村井章介, 蒙古襲來と鎭西探題の成立, 쪽. 113) 石築地 造營과의 兩立의 곤란함, 課役 부담의 경감을 바라는 御家人의 의향, 막부에 의해 처음 동원 되는 本所一圓地의 무사 즉 非御家人의 非積極性 등으로 인해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고 보인 다. 114) 村井章介, 蒙古襲來と鎭西探題の成立, 쪽. 南基鶴, 蒙古襲來と鎌倉幕府の對應 對應策の
117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115 을 침해당한 本所領家側의 반발을 억압하기 위해서도 유효했을 것이다. 막부의 異國征伐 계획이 중지된 이후 石築地의 조영이 거의 완성된115) 1277년 6월, 南宋의 멸망이 국내에 전해지고, 1279년 7월에는 한 달 전에 도착한 元使(舊南宋 降將의 사신)를 博多 에서 처형하는 등 대외적 긴장은 더욱 높아가고 있었다. 남송의 멸망에 따른 국제상황의 변화 때문인지 이 시기에 異國征伐 은 계획된 흔적이 없다. 그것이 나타나는 것은 제2차 일본 침략 직후의 일이다. 원정군이 태풍에 의해 괴멸적 피해를 입고 철퇴한 1281년 윤7월초부터 약 한 달 남짓한 시기 에 막부는 또다시 異國征伐 =고려 침공을 계획하였다. 大將은 少貳經資 혹은 大友賴泰이고, 그 들의 관할국으로 보이는 3개국(筑前 豊後 肥前)의 御家人들뿐만 아니라, 적어도 山城 大和의 惡徒 57인을 동원한다는 내용으로, 그 악도들은 8월중에 九州에 내려가도록 명해졌다.116) 이번 의 계획은 前回에 비하여 규모가 작고, 筑前 肥前 등 전투의 중심지가 동원대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이번 계획이 戰勝의 여세를 몰아 侵略國에 보복을 가한다는 大義名分에 입각한 것을 시 사해 준다. 아마도 해당지역 非御家人이나 九州의 타지역 등 서국지방의 무사들은 異國警固 에 동원되고 있었을 것이다. 이 계획도 실행된 흔적은 없지만,117) 단순한 공격에 그치지 않고 막부에 의한 국내통제의 강 화를 기도한 점에서 前回와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1282년 得宗時宗의 叔父 北條時 定가 少貳經資를 대신하여 肥前國 守護에 취임하였고, 그 후 그가 北條氏의 九州支配의 강화에 橋頭堡的 역할을 했던 사실118), 일찍이 1278년 단계부터 막부가 통제하에 두려고 했던 大和의 惡徒119)를 異國征伐 의 대의명분하에 거듭 동원하려 한 것에 드러나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몽고의 제1, 2차 일본 침략 후에 각각 대두한 異國征伐 계획은 고려 침공을 轉機로 삼아 국내무사의 통제를 강화하고, 궁극적으로 北條氏 得宗權力의 직접적인 지휘통제하의 對蒙古防禦體制를 구축하려고 한 것이었다. 고려와 일본 관계에서 보자면, 이 계 性格をめぐって 뺷蒙古襲來と鎌倉幕府뺸, 臨川書店, 1996, 28-31쪽 참조. 115) 1277년 1월, 薩摩守護島津久時는 同国御家人 比志島太郎佐範에게 筥崎役所의 石築地役 근무를 완 료했다는 증명서를 발급하고 있다(建治3년(1277) 1月 27日 島津久時覆勘狀, 뺷鎌倉遺文뺸 第17巻 号). 116) 弘安4年(1281 8月 16日 聖守書状, 뺷鎌倉遺文뺸 第19巻 14422号. 117) 大和 興福寺側의 부정적 태도(뺷勘仲記뺸 弘安5年 10月 16日条 裏文書)에 따른 막부와의 교섭이나, 원정의 실패 후 高麗側의 對日防禦態勢의 정비 등에 의해 실행이 지연, 중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18) 川添昭二, 岩門合戦再論 鎮西における得宗支配の強化と武藤氏 뺷論集日本歴史4 鎌倉政権뺸, 有 精堂, 1976, 254쪽. 119) 1278년 7월 막부는 大和國의 惡徒=寺僧 國民을 동원하려 했고, 興福寺側에서는 國民에 대해서는 응하지만 寺僧에 대해서는 거부한 적이 있다(뺷中臣祐賢記뺸 建治4年(1278) 7月 3日, 同4日条).
118 116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획은 양국이 交戰國으로서 雙方의 침공에 항시 대비해야 하는 正面 對峙 상태에 돌입한 것을 의미한다. 일본에게 이제 고려는 몽고와 완전 일체화한 異國 =外敵 그 자체로서 현실의 침략 대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고려의 일본에 대한 控制 威鎭 은 그만큼 현실성을 지니고 있던 것이기도 하였다. 3) 고려와 일본의 相互認識 몽고의 일본 침략은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의 外侵을 받은 일본인의 對外意識 특히 高麗觀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려가 자신의 의도에 반하여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동원되긴 했지만, 日 本側에서 볼 때 고려는 몽고와 일체화한 敵國 으로 비친 것도 사실이다. 일본은 1275년 몽고의 사신과 함께 온 고려 사신을 처형하고, 제2차 침략 직후 일본군의 포로가 된 원정군 중에서 노예 로 삼은 舊南宋軍을 제외한 몽고인과 고려인을 모두 처형하였다.120) 고려인을 일본의 침략자로 서 몽고인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異國征伐 은 바로 그러한 인식이 바탕에 깔린 고려에의 강한 적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對馬 壹岐 博多 등 北部 九州 地域民들의 몽고 고려에 대한 공 포와 적개심은 당시 사료에 잘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蒙古國의 兵士들은] 백성들을 붙잡아 남자는 죽이거나 포로로 잡고, 여자는 한데 모아 손을 뚫어 배에 메어달거나 포로로 잡아두었 다 121)든가, 고려의 병선 5백척은 壹岐 對馬로부터 올라와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인민들은 이를 견디지 못해 처자식을 데리고 깊은 산에 숨었지만, [고려군이]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몰 려오니 짧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기를 울며울며 죽였다 122)라는 이야기가 떠돌 았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고려를 포함한 원정군의 잔혹한 침략자 이미지 는 당시부터 형성되어 세간에 전해내려 왔다. 후세에 무쿠리 고쿠리(蒙古 高麗) 라는 말이 西日 本 지역에서 공포로 대명사로 사용되었던 것123)도 그러한 사정에 의한다. 몽고의 침략이라는 국가 존망의 위기는 이른바 神國思想을 크게 고양시켰다. 일본은 수 많은 신들이 살고 있는 신성한 국토이며, 神明의 가호가 있기에 외국이 절대 넘볼 수 없다고 하는 사 상이 神風 (가미카제)를 촉발제로 하여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여기에 내재된 신비적 독선적인 自國優越意識을 바탕으로 神功皇后의 三韓 征伐 신화가 想起되고, 급기야 新羅(高麗)의 왕은 120) 121) 122) 123) 뺷國朝文類뺸 卷41, 征伐, 日本 뺷日蓮聖人遺文뺸 建治元年(1275) 5月 8日 一谷入道女房宛書状, 뺷鎌倉遺文뺸 第16巻 11905号. 뺷八幡愚童訓뺸(甲本), 뺷日本思想大系뺸 20 뺷寺社緣起뺸. 田中健夫, ムクリコクリ 뺷日本歴史뺸 228, 1967, 88-89쪽.
119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117 일본의 개[犬]이다 124)라는 식으로 고려를 卑下하는 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고대에는 신명이 가호하기 때문에 諸蕃, 특히 新羅를 지배할 힘이 있다는 대외적 우월의식이 神國思想의 주된 내 용이었으나,125) 이제는 고려를 한낱 畜生으로 취급하는 노골적인 蔑視觀마저 등장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몽고의 침략 이후 일본의 武威 에 대한 관념이 고양되었다는 점이 다. 自己認識의 한 형태로서 외국에 대한 일본의 軍事的 威勢의 自覺과 主張은 武士政權이 수립 된 鎌倉 初期부터 싹트기 시작했지만,126) 몽고의 침략에 의한 대외적 긴장을 계기로 한층 고양 되기에 이르렀다. 蒙古國書의 도래 이후 京都 正傳寺의 禪僧 東嚴慧安은 일본국의 武藝는 다른 나라들보다 뛰어나다. 弓箭이 비할 바 없으며 甲冑는 귀신을 두렵게 한다 127)고 하여 鎌倉幕府 의 武力과 그 威勢에 대한 기대를 표명하고 있었다. 鎌倉末 南北朝期의 儒者 玄惠는 天竺(인 도) 震旦(중국) 日域(일본)의 3국 중에서 일본인은 마음도 강하고 활의 힘이 다른 나라보다 뛰어 나다 128)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구체적으로는 鎌倉幕府)의 武威 가 고양되면서 武威가 엄중하고 文道가 올바르니 四夷가 일어나는 일이 없고 三韓을 바로 服屬시킬 수 있다 129)라는 三韓(高麗)에 대한 武斷的 侵略主義가 생겨났다. 막부가 기도한 異國征伐 이야말로 바로 그 표 현이었다. 한편, 몽고의 일본 침략은 高麗의 日本觀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몽고의 제2차 일 본 침략에 즈음하여 全羅南道 順天都護府에 있는 定慧社(現, 松廣寺)의 禪僧 冲止130)는 일본 원 정의 威容을 稱頌하는 내용의 東征頌 131)을 지었다. 그는 먼저 몽고의 황제 쿠빌라이의 寬德과 恩澤을 칭송한 후, 일본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 어져 있는 것을 믿고 몽고에 來朝하지 않는 것에 대한 問罪로서 東征 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리 고 일본에 대해서는 솥 안의 물고기 무리 鼎魚群 같이 편협하고 고립된 추한 섬나라 오랑 캐 島夷醜 라고 묘사하고 있다. 일본에 대한 멸시의 태도가 역력히 드러나 있다. 124) 뺷太平記뺸 卷39, 神功皇后攻新羅給事. 125) 成澤光, 뺷政治のことば意味の歷史をめぐって뺸, 平凡社, 1984, 168쪽. 126) 南基鶴, 鎌倉時代의 武威 에 대한 일고찰 中世 日本의 自己認識의 한 형태 뺷歷史學報뺸 178, 2003, 쪽. 127) 東嚴慧安意見狀, 뺷鎌倉遺文뺸 第14卷 10559號. 128) 玄惠注, 뺷聖德太子憲法뺸(坂本太郞編, 뺷聖德太子全集뺸 第1卷, 龍吟社, 1942 所收). 129) 宴曲抄 文武 (早川純三郞編, 뺷宴曲十七帖 附謠曲末百番뺸, 國書刊行會, 1912 所收). 130) 冲止(俗名은 魏元凱)는 1244년 科擧에 합격한 인재로서 1254년 出家하기 전까지 官職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 동안에 倭寇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使臣으로서 일본에 갔던 경력이 있다. 그를 官과 전혀 무관한 인물로 볼 수는 없지만, 승려가 되고나서 民間에 몸을 두고 官으로부터 자유로운 종교 인으로서 생활하고 있던 점에서 민간지식인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131) 冲止 著, 秦星圭 譯, 뺷圓鑑國師集뺸, 亞細亞文化社, 1988, 73-75쪽.
120 11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冲 止 는 1280년 東 征 을 위한 戰 艦 을 만들 때 嶺 南 地 方 의 慘 狀 을 목격하고서 嶺 南 의 고통을 말하려 하니 눈물이 앞선다 132) 고 하는 등 민중에 동정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가 원정군의 위용을 칭송하고 있는 것은 二 律 背 反 的 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本 心 은 일본 원정이 불 가피했던 이상 그 사실을 是 認 하면서 민중의 鬱 憤 을 배설하려 했다는 지적 133) 이 있다. 이같은 충지의 입장을 지탱, 조장한 것이 바로 일본에 대한 島 夷 觀 과 倭 寇 觀 였다. 東 征 頌 의 作 詩 와 같은 무렵 그는 원정군의 都 元 帥 인 金 方 慶 에게 올린 祝 壽 에서, 일본을 가리켜 卉 服 혹은 倭 寇 라고 蔑 稱 하고 있다. 134) 즉 夷 狄 과 寇 賊 으로서 일본을 인식,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는 관념은 조정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며, 일본= 倭 寇 觀 은 13세기에 들어 형성되기 시작한 약탈자로서의 일본인 이미지가 점차 강화되어 고려와 일본의 敵 對 關 係 를 배경 으로 더욱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민중의 울분을 발산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고려 邊 民 을 침탈하는 倭 寇 =일본의 토벌에서 찾았던 것이 아닐까? 그에게 있어서 일본은 편협하고 추한 島 夷, 邊 民 을 약탈하는 倭 寇 에 지나지 않았다. 민간에 몸을 두고 민중에 동정적이었던 그의 일본 인식은 민간의 정서를 일부분 대변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13세기 말 몽고의 일본 침략은 고려와 일본 사이에 편견 증오 공포 멸시로 채색된 부 정적인 상호인식을 가져왔던 것이다. 국가간의 전쟁이 가져온 傷 痕 은 양측 모두 깊었고, 상호인 식은 상당한 굴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맺음말에 대신하여 -아시아 속의 고려와 일본- 高 麗 末 의 儒 者 李 齊 賢 은 1323년, 고려를 元 의 內 地 로 만들려는 이른바 立 省 策 動 을 반박하 면서 元 의 中 書 省 에 上 書 했는데, 그 속에서 小 邦 과 日 本 은 바다를 사이에 둔 인접국이여서 우 리가 중국과 화친하여 복을 누리면 그들은 歸 化 가 늦은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요, 우리가 냉대를 받으면 그들은 頑 迷 함에 자만할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135) 라고 기술하고 있다. 立 省 策 은 中 國 ( 元 )의 高 麗 에 대한 냉대로 받아들여져 일본의 귀화를 더욱 어렵게 할 것이므로 그 귀화를 촉구 하기 위해서라도 立 省 策 을 중지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여기에서는 元 帝 國 의 지배질서에 속한 고 려왕조의 名 分 論 的 입장에서 元 에 歸 化 하지 않는 일본을 頑 迷 한 나라로 취급하고 있다. 일찍 132) 同 上, 解 題, 19쪽. 133) 嶺 南 艱 苦 狀 二 十 四 韻 庚 辰 年 造 東 征 戰 艦 時 作, 同 上, 67-69쪽. 134) 都 元 帥 金 侍 中 祝 壽 疏, 同 上, 쪽. 135) 高 麗 史 卷 110, 列 傳 23, 李 齊 賢.
121 蒙古의 日本 侵略과 日本의 對應 119 이 蒙古의 사신이 고려에 왔을 때 宰相 李藏用이 중국의 冊封體制에 의거하여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小夷 島夷 로 규정한 것을 상기하게 된다. 이러한 고려의 日本觀은 중국 즉 元帝國의 冊封體制에 속한 고려와 거기에서 벗어나 있는 일본이라는 양국의 입장이 변하지 않는 한 지속 될 수밖에 없었다. 고려와 일본은 13, 4세기 蒙古帝國의 유라시아대륙 지배-東西統合이라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각각 그것에의 편입과 이탈이라는 상이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에 따라 고려와 일본 각국의 역사 전개도 커다란 갈림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12세기 말 거의 同時期에 성립했던 양국의 武士政權 은 결국 고려의 武臣政權이 몽고의 침략을 받아 1세기만에 소멸되고, 일본의 武家政權은 그 후 에도 존속, 발전해 갔던 것이다. 일본은 蒙古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 속에서 고려를 포함한 아 시아의 여러 국가들과 달리 敵對의 태도를 끝가지 고수하였으니, 그 주체는 바로 동아시아의 例 外的 존재라고 할 武士政權이었다. 몽고제국의 등장과 고려와 일본의 상이한 進路는 양국간의 武力衝突과 심각한 軍事對峙를 수반하였다. 고려의 對日交涉 거점이었던 金州는 그 관할내의 合浦가 일본원정군의 發進基地가 되었고, 고려와 가장 긴밀한 교류지역이었던 北部 九州는 원정군과 일본군의 激戰地가 되고 말 았다. 이후 반세기 이상 양 지역은 상대국에 대해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는 防禦基地로 화했고 通交는 단절되었다. 비교적 평온했던 양국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어 예부터의 제한적인 통교조차 보이지 않고, 지리적인 인접 요인도 작용하여 일본과 대륙 사이보다 더욱 강한 적대적 긴장관계 가 형성, 지속되었다.136) 그러나 다른 한편, 일본은 몽고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 속에서 엄연한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참여하고 있었던 것에 유의해야 한다. 元의 개방적인 무역정책과 일본의 대륙문물에 대한 왕성 한 의욕을 배경으로, 일본은 빠르게도 13세기 말부터 元과의 무역에 나서고 있다. 14세기에 들어 서는 寺院 神社의 造營을 명목으로 이른바 寺社造營料唐船 이라는 일종의 公許貿易船이 막부 에 의해 元에 파견되기에 이른다. 정치 군사적으로는 대립하고 있지만, 일본과 대륙과의 문물 교 류는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훗날 日明間 勘合貿易의 역사적 전제 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일본은 蒙古帝國 지배하의 세계질서 속에서 일정 한 고립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의 적극적 참여라는 二重의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 다고 할 것이다. 136) 南基鶴, 고려와 일본의 상호인식,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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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일본침공 이후의 麗日關係 사에키 코지(佐伯弘次) 머리말 몽골침공에서 전기왜구로 13세기 무렵 동아시아의 정치적 동향을 크게 규제했던 것은 몽골(元)의 동향이다. 고려는 1230 년대 이후 몽골의 격심한 공격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받았는데, 몽골에 굴복한 뒤에는 그 속국으 로서 몽골로부터 강력한 정치적 제약을 받았다. 13세기 후반에 2회에 걸친 몽골의 침공을 받았던 일본은 3회째의 몽골침공에 대비하여 異國 警固番役과 石築地 축조, 異國 항복을 위한 기도, 寺社에 대한 徳政政策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 했다. 결국 3회째의 몽골침공은 실행되지 않았지만 異國警固番役과 石築地 축조는 14세기 무렵 까지 계속되었다. 元의 일본 招諭1)는 1299년까지 계속되었고, 일본과 원 사이에 외교관계가 구 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반면에 일본과 원의 무역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대립하 면서 경제 문화면에서는 깊은 교류가 있는 정경분리의 관계가 오래 계속되었다. 이에 대하여 고 려와 일본 사이는 외교관계는 물론 경제적 교류도 공적으로는 단절된 채로 있었다. 이것이 일본 원과의 관계와 일본 고려관계의 큰 차이점이다. 14세기 중후기가 되면 이러한 관계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 1350년 이후 전기왜구(庚寅 이래 의 왜구)의 활동과 중국에서 명의 건국으로 麗日關係는 물론 동아시아의 국제관계가 크게 변화 하게 되었다. 1) 弘安의 役 이후 元의 日本招諭에 관해서는 池内宏, 뺷元寇の新研究뺸, 東洋文庫, 1931 ; 龍粛, 뺷蒙古 襲來뺸, 至文堂, 1959년 ; 川添昭二, 뺷蒙古襲來研究史論뺸, 雄山閣, 1977년 ; 南基鶴 뺷蒙古襲來と鎌倉幕府뺸 臨川書店, 1996년 ; 佐伯弘次, 뺷日本の中世9モンゴル襲來の衝撃뺸, 中央公論新社, 2003년 등 참조. 또한 전반적으로 対外關係史総合年表編集委員会編, 뺷対外關係史総合年表뺸, 吉川弘文館, 1999년을 참조했다.
124 122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큰 흐름으로는 몽골침공(전쟁) 시대부터 왜구의 활동과 그에 대한 대책, 더 나아가서 명에 의 한 동아시아 세계의 재편과 각국의 대응시대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1. 몽골침공 이후의 麗日 교섭 1) 元使 高麗使의 일본 파견 1281년 원의 제2차 일본원정(弘安의 役) 이후에도 원의 일본 招諭는 계속되었다. 쿠빌라이는 그 후에도 일본원정을 준비했으며, 일본 측도 이를 예상하여 異國 경비와 石築地 수축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다. 세 번의 일본원정(몽골침공)은 양국에게 있어서 조만간 실행되는 현실 문제였 다. 1283년 12월에 일본의 鎌倉幕府는 元이 내년 봄에 침공하니까 異國警固番役을 엄중하게 하 도록 薩摩國의 地頭 御家人과 本所一円地의 주민들에게 명했다. 이듬해 1284년 4월, 원은 日本 國信使 王積翁와 愚渓如智 일행을 일본에 파견했는데, 동행했던 자들이 對馬에서 積翁을 살해 했기 때문에 원의 사절 일행이 되돌아갔다. 1289년부터 90년 사이에 일본의 조정 주변에서 머지않아 몽골이 침공한다 는 소문이 퍼져 조정과 막부는 주요한 寺社에 異國 항복을 위한 기도를 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낭설 이 었으며, 원의 침공은 없었다. 반쿠빌라이파의 몽골 왕족 나얀과 카단이 중국 동북부에서 쿠빌라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고려에까지 파급됐는데, 1291년에 쿠빌라이 쪽의 승리로 끝났다. 그 이듬해인 1292년 5월, 일본 상선이 耽羅에 들렀을 때 상인 2명이 현지인에게 체포되었다. 같은 해 7월, 일본 상선 이 원의 慶元(寧波)에서 귀국하는 길에 원의 지방관 燕公南의 牒狀을 가져왔다.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鎌倉幕府가 異國 항복을 위한 기도를 전국의 一宮(그 지방에서 으뜸가는 神社) 國分寺 (奈良 시대에 평화를 기원하며 전국 각지에 세운 관립 사찰)에서 거행하도록 했던 일로 미루어볼 때, 몽골의 재침을 예견할만한 내용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는 쿠빌라이의 지시를 받고 1292년에 耽羅에서 체포한 일본 상인을 송환한다는 구실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高麗使(宣諭使) 金有成 일행은 동년 10월에 일본으로 건너갔다2). 11월 12일, 鎮西(九州를 말함)의 사자가 京都에 도착하여 몽골牒狀(실제로는 高麗牒狀)의 도래를 보고 2) 高麗使 金有成의 來日과 일본 측의 대응에 관해서는 池内 1931, 龍 1959, 対外關係史総合年表編集 委員会編 1999, 佐伯 2003 등 참조.
125 일본침공 이후의 麗日關係 123 했고, 13일에 六波羅探題의 사자도 동행하여 鎌倉로 향했다. 11월 24일, 鎌倉幕府는 모임을 갖 고 北條兼時 北條時家를 異國打手大將軍 으로 결정했다. 12월 8일, 鎌倉幕府의 사자는 異國牒 狀을 가지고 京都로 올라갔다. 鎮西 六波羅探題(京都) 鎌倉幕府(鎌倉) 朝廷(京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異國牒狀 전달 경로는 文永의 役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12월 10일, 幕 府의 사자는 關東申次西園寺実兼에게 高麗牒狀을 제출했으며, 이후 조정과 院 내부에서 高麗牒 狀에 대한 대책이 검토되었다. 治天君인 後深草法王은 대책에 대하여 지시하고, 이 牒狀을 무 례, 우둔, 기괴 하다고 평가했다. 金有成가 일본에 가져왔던 高麗國書는 뺷高麗史뺸 등에 기록이 있고, 金澤文庫에는 복사본이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일본 상인이 耽羅에서 체포되었고, 쿠빌라이의 명으로 호송된 경위를 설 명했으며, 고려가 원에 복속하여 국가를 보전했지만 宋은 원에 거역하여 나라가 멸망한 일, 황제 쿠빌라이는 덕망이 높다는 등을 설명하고 원에게 사신을 보내 入朝할 것을 재촉하고 있다. 이 國書를 본 조정과 幕府는 寺社에서 異國 항복 기도를 올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幕府는 이 사절의 渡日에 위기감을 느꼈으며, 北條兼時와 北條時家를 異國打手大將軍 에 임명하고 九 州로 향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이듬 해 1293년에 九州의 博多로 갔다. 北條兼時는 北條時宗의 조카이며 得宗과 아주 가까운 관계였고, 당시는 六波羅探題北方이라는 요직에 있었다. 이러한 임명이 元의 재침공을 예상하고 남다른 결의 아래 행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北條時 家는 北條씨의 유력한 일족 名越씨이다. 이들 두 사람의 異國打手大將軍 임명과 九州 부임을 鎮西探題의 성립으로 보는 견해도 유력하다3). 이들 두 사람이 九州로 향하기 직전에 鎌倉幕府는 為異賊警固, 所下遣兼時 時家於鎮西也, 防戰事加評定, 一味同心可運籌策, 且合戰之進退, 宜随 兼時之計 (異賊 방어를 위하여 兼時 時家를 鎮西로 파견하는 바이다. 防戰에 대해서는 評定을 행하고, 일치단결하여 계책을 세워야 한다. 무엇보다 전투의 진퇴는 兼時의 계책에 따라야 한다) 고 薩摩守護 島津忠宗에게 하명하고 있다4). 전쟁에 임하는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지며, 兼時가 首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異國打手大將軍 의 파견을 전후하여 幕府는 關東에 아직 남아 있던 九州에 所領 을 가진 御家人을 九州로 보내고, 아울러서 앞으로 닥칠 異賊과의 전투의 勲功賞을 九州의 御家 人들에게 약속하며 九州 방어를 확고히 하려고 했다. 博多로 내려간 兼時와 時家는 石築地 개축 과 철저한 異國警固番役 근무를 꾀했던 모양이다. 특히 1294년 3월에는 北九州 연안과 도서지 방에서 烽火 연습을 했다. 이 일을 지시했던 문서5)에, 異國 경계가 매우 중요하다. 결코 게을리 3) 예를 들면 村井章介, 뺷アジアのなかの中世日本뺸, 校倉書房, 1998년. 4) 島津家文書 正応 6년 3월 21일 關東下知狀(뺷大日本古文書 島津家文書之一뺸 34호). 5) 來島文書 永仁 2년 3월 6일 北條定宗書下(뺷鎌倉遺文뺸 24권 18499호).
126 124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여 元의 재침공을 예상한 연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元의 재침공 은 없었고, 兼時와 時家는 1295년 4월에 關東으로 돌아갔다. 일본 측의 사료6)에 따르면 1293년 4월에 幕府의 계책으로 異國牒使 를 본국으로 송환했다 고 하는데, 뺷高麗史뺸 列傳 金有成에 의하면 金有成은 일본에 억류된 채 귀국하지 않았고, 1307 년 7월 5일에 일본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어떤 사료가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文永의 役 이후의 元使는 幕府에 의하여 살해당하는 일이 흔했으며, 어쩌면 高麗 使節은 귀국할 수 없었는 지도 모른다. 1298년, 일본의 상선이 元의 明州(慶元)에 도착했다. 이듬 해 이 선박이 귀국할 때 元使(國信 使) 一山一寧이 편승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종래의 元使는 高麗를 경유하여, 高麗의 안내를 전 제로 일본에 파견되는 것이 항례였으며, 慶元에서 海路로, 더군다나 일본의 무역선에 편승하여 일본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禅僧이 正使로 임명된 것도 이례적이었다. 一山一寧은 10월에 鎌倉 에 도착했다. 그 후 一寧은 귀국하지 않고 建長寺 주지가 되는 등 일본의 禅宗界에서 중요한 인 물이 되었다. 이것이 일본을 招諭하는 元의 마지막 사신이었지만 이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2) 일본의 대륙 군사정보의 수집 弘安의 役 직후부터 일본은 元과 高麗의 군사정보 입수에 노력했다는 것이 밝혀졌다7). 즉 1282 년에 일본은 弘安의 役 때 항복한 賈祐라는 南宋의 투항병을 강남에 파견하여 元의 원정계획을 정찰하였다. 일본 상선에 편승하여 원에 입국하는 일본 승려도 정찰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와 같 은 元의 정찰은 아마도 幕府의 주도로 행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南宋의 멸망을 일본에 전한 것은 무역선이었다. 文永의 役 이후에도 元과 일본은 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日元貿易船이 元의 정찰을 떠맡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고려 역시 弘安의 役 직전에 고려의 군사기지가 있는 合浦 주변에서 어부 가 연속적으로 왜 적에게 납치되고 있는 것은 고려의 군사정보를 얻기 위한 정찰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6) 뺷師守記뺸 貞治 6년 5월 9일조. 7) 南 1996, 쪽.
127 일본침공 이후의 麗日關係 세기의 麗日關係 1) 前期倭寇의 활동 전기왜구가 활동하는 1350년 이전에도 왜구의 활동이 있었다. 13세기 전반에 약간 피크를 맞 이한 왜구를 초기왜구라고 부르며, 14세기 무렵이 되면 元에 대한 왜구활동이 행해졌다. 이것은 元寇를 계기로 元 쪽이 일본 상인을 박해하고, 이에 대한 일본 상인의 자위적인 폭력행위가 해적 집단의 발생 전개로 연결됐다는 설8)이 있지만, 최근의 연구9)에서는 이와 같은 일본인의 왜구 행위는 元나라 현지 관리의 일본 상인에 대한 侵漁와 이에 대한 폭동사건이며, 결코 조직적 계 획적인 해적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323년 6월에 倭가 会元의 漕船을 群山島에서 약탈하고, 楸子島에 침입하여 老弱男女를 잡 아간 사건10)이 발생했다. 漕船 습격과 被虜人 약탈은 전기왜구의 특징이기도 하며, 前期倭寇와 연결되는 해적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수이지만 14세기 전반부터 이미 발생하고 있던 점 을 확인하고자 한다. 1350년 2월, 倭가 固城 竹林 巨済에 침입했다11). 合浦千戸 崔禅 등이 이들과 싸워서 3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倭寇의 침입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고 뺷高麗史뺸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 사건 이후 倭寇의 활동이 급격하게 활발해졌고, 한반도를 빈번하게 습격하게 되었다. 倭賊祈穣法席 倭賊防禦使 라는 글이 뺷高麗史뺸에 자주 보이듯이, 애초에 왜구는 高麗 정부에서 倭賊 으로 호칭했던 듯하다. 이와 같은 전기왜구에 관해서는 몇몇 시기구분이 행해지고 있다. 田中健夫씨는 크게 4시기로 나누었다12). 제1기는 1350년 2월 이후의 초기 단계, 제2기는 恭愍王 시대(1352년~74년)로 왜구 활동이 본격화된 시기, 제3기는 왜구활동의 전성기로서 辛禑王(1375년~88년)대에 최고점에 달 한다. 제4기는 왜구세력의 쇠퇴기이며, 고려 恭譲王 시대부터 조선 太祖 定宗 太宗 시기에 해당 한다. 그 구분이 되었던 사건이 1389년 2월의 고려군에 의한 대마도 정벌이었다고 한다. 田村洋幸씨는 크게 나누어 초기 중기 종말기의 3기로, 자세하게는 6기로 시기를 구분하고 있 다13). 빈도가 낮은 초기는 1350년~73년으로, 왜구에 대한 무대책의 시기였던 전반기(1350년~62 8) 9) 10) 11) 12) 森克己, 뺷新訂日宋貿易の研究뺸, 国書刊行会, 榎本, 뺷高麗史뺸 世家, 忠粛王 10년(1323) 6월 丁亥, 동 戊子條. 뺷高麗史뺸 世家, 忠定王 2년 2월조. 田中健夫, 뺷倭寇と勘合貿易뺸 至文堂, 1966, 11-14쪽.
128 12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년)와, 적극적으로 왜인 초빙책을 세우고 자진해서 일본에 왜구 금지책을 요청한 후반기(1364년~ 73년)로 나눈다. 전성기인 중기는 1374년~89년이며, 왜구창궐기인 전반기(1374년~80년)와 점 차 쇠퇴해 가는 후반기(1381년~89년)로 나눈다. 왜구종말기는 1390년~1418년으로, 소규모의 비조직적 왜구와 대규모 선단의 왜구가 뒤섞인 전반기(1390년~1400년)와 소규모화하는 후반기 (1401년~18년)로 나눈다. 양자의 시기구분에서 세세한 연대에 대하여는 차이가 있지만, 1350년 이후 점차 증가하고, 辛 禑 王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며,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에 쇠퇴한다는 흐름은 공통적이다. 일본의 과거의 통설 14) 에서 왜구들의 주요한 목적은 漕 船 창고 등의 습격에 의한 식량 약탈과 사람의 약탈이었다고 한다. 그 근거지의 중심은 對 馬 壹 岐 松 浦 지방의 三 島 지역이며, 발생 의 주요한 원인은 농업생산만으로는 섬 주민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는 三 島 의 경제적 사정이 었다고 한다. 아울러서 고려 조선 측의 외교정책과 왜구 회유정책 등으로 왜구들은 向 化 倭 ( 投 化 倭 )와 使 送 倭 人 興 利 倭 人 등으로 변질되어 갔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1980년대 후반에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던 왜구의 개념을 크게 바꾸는 연구가 뒤 를 이었다. 田 中 健 夫 씨 15) 는 대규모 집단 왜구의 실체를 검토하고, 대량의 인원 선박 마필의 해 상 이동을 고려하면 왜구가 일본인만의 해적집단이라는 생각은 부자연스러우며, 대규모 왜구집 단은 일본과 고려 조선 양국 인민이 연합하여 성립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한편, 高 橋 公 明 씨 16) 는 倭 服 을 입고 倭 語 로 대화하며 각지를 이동하는 제주도 海 民 을 검토하 는 중에, 조선 국내의 상당한 해상세력이 왜구에 관여하고 있으며, 그 기층부분을 제주도 海 民 이 담당했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일본에서는 이들 두 사람의 새로운 견해가 왜구연구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지만, 한편에서는 다양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浜 中 昇 씨 17) 는 이와 같은 田 中 健 夫 씨와 高 橋 公 明 씨의 견해 에 비판을 가했다. 高 麗 史, 高 麗 史 節 要 의 수많은 왜구 기사 속에서 고려의 인민이 거짓으로 왜적이 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두 가지 경우에 불과하며, 倭 人 不 過 一 二 라고 한 1446년의 李 順 蒙 의 말은 근거 사료가 없다는 점, 고려 조선의 禾 尺 才 人 들이 도적행위를 한 기사는 많지 만 그들과 왜인들의 연합을 보여주는 사료가 없다는 점, 제주도 등지의 海 民 을 해적집단으로 조 13) 田 村 洋 幸, 中 世 日 朝 貿 易 の 研 究 제2장, 三 和 書 房, ) 田 中 健 夫, 中 世 海 外 交 渉 史 の 研 究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59, 田 中 1966 등. 15) 田 中 健 夫, 倭 寇 と 東 アジア 通 交 圏 日 本 の 社 会 史 1 岩 波 書 店, ) 高 橋 公 明, 中 世 東 アジア 海 域 における 海 民 と 交 流 - 済 州 島 を 中 心 に- 名 古 屋 大 学 文 学 部 研 究 論 集 史 学 33, ) 浜 中 昇, 高 麗 末 期 倭 寇 集 団 の 民 族 構 成 - 近 年 の 倭 寇 研 究 に 寄 せて- 歴 史 学 研 究 685, 1996.
129 일본침공 이후의 麗 日 關 係 127 직할 수 있을만한 주체가 조선 국내에는 없고, 한반도 남부의 海 民 이 고려 말기의 왜구에 가담했 다고 해도 개별적인 차원에 그쳤다는 점, 왜인 일본인에 의한 대규모 왜구는 가능하다는 점 등 을 지적하고, 한반도 남부의 海 民 이 개별적으로 가담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왜구를 구성했던 것 은 기본적으로 왜인 내지 일본인이라고 했다. 村 井 章 介 씨 18) 는 禾 尺 才 人 들이 왜적으로 위장했던 일은 있지만, 이것은 그들이 왜적과 연합 해서 하나의 집단이 되어 왜구행위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 李 順 蒙 의 말은 국가의 役 을 회피하고 있는 자가 매우 많아서 군대의 수가 부족해졌다는 의미의 문맥을 기초로 기록된 것이며,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田 中 説 을 비판했다. 李 領 씨 19) 는, 庚 寅 年 의 왜구는 足 利 直 冬 의 공세에 당황한 少 貳 頼 尙 이 對 馬 의 군대를 동원하 고 군량미를 얻어서 고려를 공격한 것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왜구는 해적으로 한정할 것이 아니라 악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광범위한 사회적 계층이며, 대다수의 왜구집단은 공권력, 특히 南 朝 쪽과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점, 田 中 健 夫 씨의 禾 尺 才 人 =왜구론에 관해서는 대 규모의 禾 尺 才 人 이 왜구와 연합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사료가 없다는 점, 高 橋 公 明 씨의 제주도인=왜구론에 관해서는 제주도인이 왜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료가 전혀 없다는 점, 왜구 =고려인 주체론을 거론한 李 順 蒙 에 관해서는 왜구에 관한 기사가 傳 聞 에 기초한 것이며, 李 順 蒙 의 인격 성향이 狂 妄 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발언도 믿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상 세분의 견해는 田 中 씨 高 橋 씨의 새로운 견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며, 전기왜구의 주체를 일본인과 고려 조선인의 연합이라거나 고려 조선인으로 보는 견해는 재검토되어야 한다 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舊 說 인 일본인 주체설이 다시 검토되고 있다 20). 다만 庚 寅 年 의 왜구는 少 貳 씨가 파견한 것이라는 李 領 씨의 견해는 일본 학계에서는 부정적이다 21). 한편 중국에서 활동했던 전기왜구는, 元 代 에 관해서는 사료가 드물지만, 1358년 무렵에 해마 다 왜구가 해안에서 가까운 군현을 습격하고 있다 22). 원 말기의 왜구에 관해서는 方 國 珍 등 군 웅의 반란과 관련지어서 연구가 행해지고 있다. 浙 江 연해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方 國 珍 은 그 휘하에 舟 山 列 島 등지의 海 民 이 있었고, 그들이 島 夷, 즉 왜구와 결탁하여 해적활동을 했다는 점, 方 國 珍 과 張 士 誠 이 멸망한 뒤에 휘하의 諸 豪 는 망명하여 島 夷 와 손을 잡았으며, 중국 18) 村 井 章 介, 倭 寇 の 他 民 族 性 をめぐって, 大 隅 和 雄 村 井 章 介 編, 中 世 後 期 における 東 アジアの 国 際 關 係, 山 川 出 版 社, ) 李 領, 倭 寇 と 日 麗 關 係 史 제4장 제5장,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橋 本 雄 米 谷 均, 倭 寇 論 のゆくえ, 桃 木 至 朗 編, 海 域 アジア 史 研 究 入 門, 岩 波 書 店, ) 森 茂 暁, 南 朝 全 史, 講 談 社, 2005, 橋 本 米 谷 ) 榎 本 渉, 東 アジア 海 域 と 日 中 交 流 - 九 ~ 一 四 世 紀 -, 吉 川 弘 文 館, 2007, 쪽.
130 128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연해를 침입했다는 것 등이 지적되고 있다23). 이와 같은 왜구와 중국 연해 지방의 海民이 연합 하여 중국 연해를 침입한 것과 고려를 습격한 것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이 문제가 앞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왜구는 동아시아 전체 지역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며, 동아시아적인 규모에 서 검토해야 할 때가 되었다. 2) 고려의 對日使節 파견과 일본 측의 대응 ①金龍 金逸의 來日(1366년) 왜구의 활성화라는 상황에 직면했던 고려는 왜구금압을 요청하는 사자를 일본에 파견했다 년 9월, 고려의 사자 金龍 일행이 出雲에 도착했다24). 金有成의 파견 이래 실로 70여년만의 사신이다. 일행은 出雲에서 方物을 탈 취당했지만, 이듬해 2월에 상경하여 天龍寺에서 머물렀다. 이 절에서 숙박한 것은 室町幕府의 계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들보다 약간 늦게 고려에서 金逸 이 별도로 도착했고, 역시 天龍寺에 머물렀다. 처음에 京都에서는 몽골 및 고려 사신이 牒狀을 가지고 來朝했다 는 소문이 퍼졌지만, 나중 에 고려의 사자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金龍이 지참했던 牒狀 (외교문서)은 室町幕府를 거쳐 조 정에 전달되었다. 몽골침공 때의 대응과 동일하다. 이 일련의 고려의 외교문서는 현존하고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원의 征東行中書省(고려왕이 장관)이 일본국에 대하여, 至正 10년(1350) 이후 일본의 해적선 다수가 고려를 습격하고 관청을 불태웠으며, 백성을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일본 이 海島에 대하여 엄중히 금압을 가하도록 의뢰하는 것이었다. 또 뺷高麗史뺸에 따르면, 나중에 보낸 金逸의 파견 목적도 일본으로 가서 해적을 금하도록 요청 하기 위해서였다. 조정에서 이 牒狀 에 대한 대응을 협의하고 있을 때, 室町幕府는 고려사신 일행을 후하게 접대했고, 奈良 大佛殿을 관광시키기도 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조정에서 고려에 返牒 을 보내 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하여 室町幕府는 返牒 을 작성하고 각종 선물을 사절에게 주었으 며, 天龍寺 승려를 사신으로 파견하고 일행을 송환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외교를 室町幕府가 23) 奥崎裕司, 方国珍の乱と倭寇, 明代史研究会編, 뺷山根幸夫教授退休記念明代史論叢 上뺸, 汲古書院, 1990, 藤田明良 蘭秀山の乱 と東アジアの海域世界, 뺷歴史学研究뺸 698, 1997, 熊遠報, 倭寇と明 代の 海禁 中国学界の視点から 뺷中世後期における東アジアの国際關係뺸, 1997, 壇上寛 方国 珍海上勢力と元末明初の浙江沿海地域社会, 京都女子大学東洋史研究室編, 뺷東アジア海洋域圏の史 的研究뺸, 京都女子大学, ) 金龍 金逸의 來日에 관해서는 青山公亮, 뺷日麗交渉史の研究뺸 제8장, 明治大学, 1955, 中村栄孝, 뺷太平記뺸に見える高麗人の來朝, 동 뺷日鮮關係史の研究 上뺸, 吉川弘文館, 1965 참조.
131 일본침공 이후의 麗日關係 129 관할하는 선례가 생겨났다. 왜구금압을 요구하는 고려사신의 파견이 일본에 있어서는 외교권의 이동이라는 중요한 전환을 가져왔던 것이다. ②羅興儒의 來日(1375년) 1375년 2월, 고려는 羅興儒를 通信使로서 일본에 파견하였다25). 뺷高麗史列傳뺸에 의하면, 羅 興儒가 日本에 도착하자 일본 측은 興儒를 諜者 로 의심하고 체포하였다. 鄭夢周傳 에 따르 면 夢周가 구금되었던 곳은 博多이며, 博多의 主將(九州探題?)이 구금했다고 기록했다. 고려 출 신의 승려 良柔가 興儒를 보고 사면하도록 요청했다고 한다. 1375년 11월 6일, 室町幕府는 高 麗使之羅興儒以下, 同進物等 을 불러들이기 위하여 播磨守護에게 인부 傳馬를 준비하고 경비를 지시했으며, 통과시키도록 명했다26). 즉 1375년 11월~12월 경, 羅興儒 일행은 京都를 향해서 播磨國 부근을 통과했다. 그 후 이듬해 1276년 5월 3일, 近衛道嗣 앞으로 公家 1인이 倭寇禁止 을 요구하는 高麗國牒狀 을 가져왔다( 愚管記 ). 道嗣는 국가의 중대사이므로 幕府에 상정하도 록 신청했다. 그 후의 상세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羅興儒 일행은 1376년 10월에 귀국했다. 이 때 室町幕府는 승려 良柔를 사자로 고려에 파견했다. 당시 선승 周佐가 기록했던 私信 형식의 외교문서가 뺷高麗史뺸 辛禑傳에 인용되어 있다. 여기에는 우리 서해도의 九州는 乱臣이 할거하 고, 年貢을 바치지 않은 지 20년 이상이나 된다. 서해도의 어리석은 백성이 敵의 틈을 노리고 入寇하였다. 우리가 행한 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조정은 武將을 파견하여 왜구들을 정벌하였고, 그 땅에 깊숙이 들어가서 적과 아군이 전투를 벌였으며, 매일같이 싸웠다. 바라는 바는, 九州를 회복하면 하늘에 맹세하여 海寇를 금지하겠다 는 일본 측의 사정이 기록되어 있다. 왜구의 근거 지인 九州를 완전히 지배하지 못했기 때문에 왜구 금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시 室町幕府 의 사정을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③安吉常의 來日(1377년) 1377년 6월, 고려는 安吉常(吉祥이라고도 함)을 일본으로 보내 禁賊을 요청했다. 뺷高麗史뺸에 는 이때의 國書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安吉常은 일본에서 병사했다고 한다. 東寺領 播磨國 矢 野莊의 이 해의 算用狀에는 高麗人上洛人夫催促使雑事 과 同下向時送夫催促使雑事 가 기록 되어 있다27). 羅興儒 때와 마찬가지로 播磨國 沿道의 장원에 人夫 傳馬 등이 부과되었던 것이 다. 이것은 播磨 1국뿐만 아니라 고려 사신이 지나가는 沿道에는 모두 동일한 賦課가 행해졌다 25) 羅興儒 이후의 遣使에 대해서는 주로 青山 1955, 対外關係史編集委員会編 1999를 참조했다. 26) 東寺百合文書よ函60, 人夫役文書案 뺷相生市史 第8巻 上뺸, 相生市, 1992, 쪽. 27) 対外關係史編集委員会編 1999.
132 13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고 생각할 수 있다. 이 해 8월에 일본은 승려 信 弘 을 고려에 파견하여 왜구금압이 용이하지 않은 사정을 전했다. 信 弘 은 室 町 幕 府 가 아니라 九 州 探 題 今 川 了 俊 이 파견한 使 僧 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28). 了 俊 은 이듬해 6월에 信 弘 에게 군사 69명을 거느리고 왜적을 체포하도록 했다. 7월에 信 弘 은 왜구와 싸워 배 한척을 포획하고, 포로가 된 부녀 20여 명을 구출했다. 11월에 다시 왜적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귀국했다. 4 鄭 夢 周 의 來 日 (1377년) 1377년 9월, 고려는 鄭 夢 周 를 일본에 파견하여 왜구 금압을 요청했다. 高 麗 史 鄭 夢 周 傳 에 의하면, 鄭 夢 周 는 博 多 에서 古 今 交 隣 의 利 害 를 極 陳 하여 主 將 ( 今 川 了 俊?)을 감복시켰다고 한다. 鄭 夢 周 는 일본에서 지은 漢 詩 를 남기고 있다( 圃 隠 先 生 文 集 ). 夢 周 는 이듬해 78년 7월 일본에서 귀국했다. 九 州 探 題 今 川 了 俊 은 周 孟 仁 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동행시켰고, 尹 明 등 수 백 명의 被 虜 人 을 송환하고 三 島 의 왜구 금압을 약속했다. 78년 6월에 東 寺 領 播 磨 國 矢 野 莊 에 守 護 代 로부터 高 麗 人 送 夫 催 促 使 雑 事 가 賦 課 되었던 29) 것은 鄭 夢 周 가 京 都 에서 귀국길에 올랐 던 때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安 吉 常 의 사절 파견 이래 室 町 幕 府 보다 오히려 博 多 의 九 州 探 題 와 교섭하는 것이 중요하게 자리를 잡았다는 느낌이 들며, 사절의 송환도 九 州 探 題 가 행하고 있다. 鄭 夢 周 傳 에 의하면 왜구들이 고려의 여염집 자제를 노예로 삼는 것을 딱하게 여기고, 석방 금을 지불하고 被 虜 人 을 귀국시키기로 했으며, 廷 臣 으로부터 갹출한 자금을 토대로 被 虜 人 이었 던 尹 明 을 博 多 로 파견하여 被 虜 人 백여 명을 송환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被 虜 人 송환이 사절 들의 중요한 사명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5 李 子 庸 韓 國 柱 의 來 日 (1378년) 1378년 10월, 고려는 李 子 庸 韓 國 柱 두 명을 일본에 파견하여 왜구 금지를 요청하고 今 川 了 俊 에게 金 銀 酒 器 등을 선물했다. 이듬해 1379년 5월에 韓 國 柱 는 귀국했다. 大 内 義 弘 은 朴 居 士 에게 병사 186명을 인솔하게 하여 韓 國 柱 와 동행하도록 했다. 같은 해 7월에는 李 子 庸 이 귀국했 다. 今 川 了 俊 은 被 虜 人 230여구를 돌려보내고 槍 등을 헌상했다. 고려의 교섭 상대는 점점 더 西 國 大 名 들 쪽으로 기울었다. 28) 青 山 ) 対 外 關 係 史 編 集 委 員 会 編 1999.
133 일본침공 이후의 麗日關係 131 ⑥尹思忠의 來日(1379년) 1379년 윤5월, 고려는 尹思忠을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일본에서의 활동과 귀국한 연도 등 상 세한 것은 불명이다. 이상과 같이 고려의 왜구 금압 요구에 응했던 것은 외교권을 장악해 갔던 室町幕府가 아니라 今川了俊과 大内義弘이라는 西國의 유력 大名들이었다. 室町幕府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 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서 1381년 8월 6일, 大隅守護 今川了俊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악당들 이 고려로 건너가서 난폭한 짓을 하므로, 엄중하게 제지해야 한다 고 大隅國의 왜구 금압을 명 하고 있다30). 고려의 왜구 금압 요구에 幕府로서도 응하려고 했지만, 실제로 현지에서 금압에 나섰던 것은 守護大名과 지역의 영주들이었다. 今川了俊은 많은 被虜人을 고려 조선에 송환했 고, 그 보답으로 大蔵経을 요구하기도 했다31). 고려 사신이 돈으로 被虜人의 구입 송환을 의도 했던 일이 상징하듯이, 被虜人 송환은 무역상의 우월한 대우와 무역 자체의 확대라는 이점이 있 었다. 맺는말 이상과 같이 고려의 빈번한 외교노력은 西國의 유력 대명을 주목하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의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1380년대가 되면 왜구는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시기에서 한 가지 더 주목되는 것은 三島의 일각, 對馬島主 宗氏의 동향이다. 뺷高麗史뺸에 의하면, 1368년 7월에 對馬島 万戸가 高麗에 사신으로 건너와서 토산물을 헌상했다. 고려는 윤9 월에 講究使를 對馬에 파견, 11월에는 對馬島 万戸 崇宗慶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來朝했으며, 고려는 宗慶에게 쌀 1000석을 주었다. 崇宗慶(宗宗慶)은 원래 宗家의 宗経茂이며, 앞의 對馬島 万戸와 동일인일 것이다. 宗経茂는 이 무렵부터 고려에 사신을 보내 고려와 통교관계를 맺으려 고 했다. 아마도 宗氏는 對馬 근해에서 고려 사신의 호송에도 관여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遣使와 쌀 급여는 다음 시대인 조선에서 宗氏와 조선의 관계와 공통되는 것이며, 중세 의 日朝關係는 14세기 후반의 고려 말기부터 차츰 준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30) 禰寝文書 永徳 원년 8월 6일 室町幕府御教書案, 뺷南北朝遺文九州編뺸 5권 5673호. 31) 川添昭二, 뺷対外關係の史的展開뺸 제5장, 文献出版, 1996.
134
135 토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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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13세기 이전의 麗 日 關 係 발표자 : 李 在 範 토론자 : 榎 本 渉 李 在 範 씨의 논문은 전기 麗 日 關 係 史 의 토픽을 국가 간의 관계ㆍ교역 관계ㆍ문화적 교류ㆍ군 사적 갈등ㆍ표류민 송환ㆍ 進 奉 관계의 여섯 개로 나누어서 개관한 것인데, 한국ㆍ일본 양국의 사료와 연구사를 정리한 폭넓은 시야를 갖추었으며, 식견이 적은 당해 분야에서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잘 정리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논문에 관해서 세 가지 정도로 느낀 점 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이재범씨가 정리한 여섯 항목은 이재범씨의 麗 日 關 係 史 에 대한 이해를 반영한 것인데, 상 호간에 관계가 깊은 항목도 있다. 예를 들어서 표류민ㆍ도망인ㆍ전쟁포로의 송환은 국가와 지방 관 사이에서 종종 행해지고 있는데, 인민을 그가 속하는 국가로 돌려보내든가 귀화인으로 받아 들이는가는 원래 국가적인 통치권ㆍ지배권에 속하는 사항이며(10세기 이후 일본의 실태가 반드 시 그렇게 이행되지는 않았지만), 그와 같은 송환은 종종 국가적인 차원에서 행해졌다. 따라서 표류민 송환이라는 기회가 생기면 국가 간의 교섭도 발생하는 것이 된다. 실제로 이재범씨가 국가 간의 관계로 열거한 것으로는 표류민 송환을 목적으로 한 것이 산견 된다. 예를 들면 997년 고려에서 보낸 牒 狀 송부에 관해서는, 抑 高 麗 使, 大 宰 人 也 라고 했고 ( 小 右 記 長 徳 3/6/13), 이때 일본에서 보낸 太 政 官 符 에는 須 専 國 信, 先 達 大 府. 何 脅 断 綆 漂 流 之 客, 以 為 行 李 라고 되어 있으며( 水 左 記 承 曆 4/9/4), 고려가 大 宰 府 의 표류민을 일본으로 송 환할 때 보낸 牒 狀 임을 알 수 있다. 또 1051년의 高 麗 牒 狀 에 대하여는 高 麗 國 牒 狀 定. 返 上 日 向 國 女 事 ( 百 錬 抄 永 承 6/7/10)라고 하며, 日 向 의 여성을 일본으로 송환했을 때 牒 狀 도 보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 입각할 때, 성과를 내지 못했던 고려 건국 초기의 외교교섭(937~940년)과,
138 136 蒙古의 高麗 日本 侵攻과 韓日關係 국왕의 질병 치료를 위하여 의사 파견을 요청했던 특수한 사례(1080년)를 제외하고, 이재범씨가 麗日 간에 국가 간의 관계로 다룬 것은 모두 표류민ㆍ전쟁포로의 송환으로 한정된다.1) 의도하지 않은 인민의 이동이 양국 간에 일어났을 때 그 해결 과정에서 국가 간의 관계가 문제로 되는 것 이며, 환언하면 그와 같은 우발적인 사건 이외에 국가 차원에서 교섭이 행해지는 일은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재범씨가 거론한 여섯 항목 중에서 국가 간의 관계와 표류민 송환, 특히 11 세기 이전에 관해서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 될 것이다. 표류민을 자국민으로 받아들이 거나 구속하는 선택도 있으니까 표류문제의 하위 레벨에 속하는 하나의 토픽으로서 국가 간의 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상은 이재범씨의 분류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며, 분류라는 작업의 한계를 보이기 위 하여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이재범씨의 논문은 관계 자료의 분류가 주된 목적이며,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알기 쉽게 되었지만, 분류작업은 각 토픽을 병렬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서, 상호 관계 를 보기 거북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국가 간의 관계와 표류문제 외에는 진봉관계와 군사적 갈 등, 교역 관계와 문화적 교류ㆍ진봉 관계 등이 그러하다). 그 선행 작업으로서 이번에는 분류한 각 토픽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재범씨의 논문 앞머 리에서 곤란하다고 한 13세기 이전의 고려와 일본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어떤 특징적인 상황으 로서 말하는 것 도 일정하게 논리를 세워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② 제3장의 교역관계에 관해서는, 주로 일본 상인의 내항에 관한 뺷高麗史뺸의 기사를 거론하 고 있다. 그러나 이것과는 별도로 제4장의 문화적 교류 부분에서 1095~1120년에 宋商人이 고려 에서 佛典을 구입하여 일본으로 가져간 몇몇 기사를 언급하였다. 이러한 것들도 고려와 일본 간 1) 972년에 金海府ㆍ南原府가 파견했던 使者에 대하여, 森平雅彦씨는 이 시점에서 지방관의 파견이 시 작된 것이 아니라, 지방호족이 자주적인 통교를 시도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森平 2008 日麗貿易 뺷中世都市ㆍ博多を掘る뺸 海鳥社). 1056년 日本國使正上位権隷滕原朝臣頼忠 의 金州来航에 관하 여, 그 官位를 正七位権掾 으로 정정할 수 있다면 (掾은 지방관인 國司의 4等官의 네 번째이며, 大掾에 해당하는 관위는 正7位, 少掾에 해당하는 관위는 従7位), 滕原頼忠은 對馬 등 國衙의 在庁官 人일 가능성이 높아지며, 日本國使 로 기록되어 있어도 京都의 조정에서 파견한 使者는 아닌 것이 된다. 1147년 고려에 来航했던 日本都綱黄仲文이 일본의 使者라는 것은 확인할 수 없으며, 현상으 로는 일개 상인의 来航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년의 사례로 되어 있는 李文鐸墓誌銘의 기사 는 對馬가 辺事 에 관하여 東南海都部署에 牒을 보낸 것으로, 東南海都部署는 開城에 이 문제를 전달했지만 辺事 문제로 尚書省에서 返牒을 보낼 수는 없다고 하여 東南海都部署에서 返牒을 보 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을 보는 한, 對馬의 牒으로 취급된 辺事 는 麗日 간의 국가적인 안건 이 아니라 對馬에 관한 안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은 지방관 차원에서 교섭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야 하며, 공적인 성격을 가졌다 해도 국가 간 관계 의 토픽으로 취급할 수는 없을 것이다.
139 13세기 이전의 麗日關係 137 에 물건의 이동이라는 의미에서는 명백히 麗日貿易의 사례가 된다. 宋商人이 麗日貿易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뺷高麗史뺸에 일본 상인 내항기사가 집중되는 1073~ 89년 이후의 시기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단언은 피하고 싶다. 다만 어느 것이 됐든 宋商人으로 보이는 黄仲文이 1147년 고려에 내항하여 日本都綱 으로 호칭되고 있는 것(제2장 표 참조)도 포함해서 생각하면, 일본인의 이름을 가진 상인과 使者 외에 宋商人도 麗日貿易에 관여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 점은 麗日貿易을 아시아사의 중앙에 위치시키기 위 해서도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서 검증하기는 어렵지만, 뺷高麗史뺸에 등장하 는 宋商人 중에 사실은 일본을 경유하여 내항했던 자가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일본상인의 활동 장소가 고려에서부터 宋으로 확대되어 갔다고 보는 森克己의 발상이 조선을 대륙진출의 발판으로 보는 卑下意識에서 왔다고 하는 이재범씨의 의견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이 森克己의 학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무역의 동향과 그 담당자 문제를 고 려ㆍ일본 간으로 시야를 한정하지 말고 추급해 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③ 일본의 佛教 사료에는 高麗의 佛典을 구입한 사실을 전하는 기사 외에도 고려에 관한 기 록이 산견된다. 예를 들면 日宋 교통로 상의 표지ㆍ표착지로서 고려가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2). 1072년의 成尋, 1082년의 戒覚의 사례에 대하여는 이재범씨도 언급하고 있는데(제5장 表), 13세 기 중엽까지의 다른 사례를 보면, 円爾가 1241년 宋의 慶元에서 출항한 도중에 高麗國 耽没羅阿 私山 아래 표착했던 사례(뺷聖一國師年譜뺸), 文栄房(13세기 전반의 入宋 승려 湛海?)가 入宋할 때 악풍을 만나 고려에 표착했던 사례3), 無本覚心이 1254년 宋에서 귀국했을 때 배가 표류하여 아마도 그때 고려에 들렀다는 사례(뺷明極和尚語録뺸)를 들 수 있다. 宋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배가 고려에 표착하는 일이 많았던 것은 京都의 藤原定家가 1226년 에 왜구의 활동을 들었을 때 언급하고 있으며4), 고려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 日宋 간의 왕래 단절 로 이어지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 한편에서 고려와의 통교단절에 대한 위구감에 관하여는 언급 2) 拙稿, 2008, 日宋ㆍ日元交通における高麗 -佛教史料を素材として- 뺷中世港湾都市遺跡の立地ㆍ環境 に關する日韓比較研究뺸 平成15~19年度科学研究費補助金研究成果報告書. 3) 高橋秀栄, 2007, 泉涌寺出身の律僧たち -金沢文庫の聖教を手がかりに- 뺷戒律文化뺸 5. 4) 뺷明月記뺸 嘉禄 2년 10월 16일조. 午時法眼来談. 高麗合戰一定云々. 鎮西凶党号松浦党, 構数十艘兵船, 行彼國之別嶋合戰, 滅亡民 家, 掠収資財所行向, 半分許被殺害, 其残盗取銀器等帰来云々. 為朝廷太奇怪事歟.. 依此事挙國興 兵. 又我朝渡唐之船, 向西之時, 必到着彼國, 帰朝之時, 多随風寄高麗, 流例也. 彼國已為怨敵者, 宋 朝之往反不可輙. 当時唐船一艘寄高麗, 被付火, 不残一人焼死云々. 末世之狂乱至極, 滅亡之時歟. 甚 奇怪事也.
140 13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하지 않았다. 이 시대의 (적어도 중앙의) 일본인에게 있어서 고려의 중요성은 日 宋 간의 교통로 상이라는 지리적인 위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실제로 표류했던 사람에 가까운 입장에서 기록된 것으로, 일본의 불교사료는 귀중하다. 다만 불교사료를 취급할 때는 다른 사료와 마찬가지로 그 성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이재범씨가 일본에서 자유롭게 활동했던 고려 승려의 구체적인 사례로 평가하는 了 然 法 明 이 그러한데, 16세기까지의 사료에서 그를 고려 승려로 다룬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고려 승려가 된 것은 日 本 洞 上 聯 灯 録 에 수록된 伝 에 高 麗 國 人 이라고 되어 있는 것에 근거하는 데, 이 책은 1727년에 성립했으며 충분한 믿음을 갖기에는 주저된다. 한편에서 1808년 序 의 宗 門 略 列 祖 伝 처럼 日 本 洞 上 聯 灯 録 이후에도 了 然 을 일본인으로 명기한 것도 있으며, 후세에도 반드시 了 然 이 고려인이라는 학설이 통용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高 麗 人 說 의 근거는 아마도 1645년에 성립된 玉 泉 寺 縁 起 인데, 了 然 이 개창했던 出 羽 玉 泉 寺 의 由 緒 書 이다. 이것도 성립 년대ㆍ사료의 성격에서 볼 때 역시 믿음을 갖기는 곤란하다. 여기 서 了 然 은 고려인이 아니라 百 済 國 僧 也 라고 하며, 斉 明 天 皇 시대에 일본에 왔고(655-61), 玉 泉 寺 개창은 663년이라고 한다. 모델은 명백히 元 亨 釈 書 에 보이는 백제인 法 明 尼 (656년에 中 臣 鎌 足 의 병을 치료한 비구니)이며, 了 然 法 明 과 法 明 尼 의 法 諱 가 일치하므로 동일인물로 오해했 을 것이다. 그렇다면 了 然 이 고려 승려로 된 것도 百 済 國 僧 이라는 誤 伝 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了 然 法 明 의 평가에 대하여는 유보의 필요를 느끼지만, 종래에 불교사료는 충분히 활 용되지 못했고, 고려관계 사료도 여전히 발굴될 가능성은 있다. 麗 日 關 係 사료집의 발간은 이후 의 연구 진전에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한편에서는 사료 탐방의 의의도 여전히 저하하지 않는다 는 것을 마지막으로 부언해 두고 싶다.
141 13세기 전반에 있어서 麗 蒙 交 涉 의 한 단면 -몽골 官 人 과의 왕복문서를 중심으로- 발표자 : 모리히라 마사히코( 森 平 雅 彦 ) 토론자 : 이 훈 1. 본 논문의 의의 본 논문은 13세기 고려 몽고 교섭의 추이를 외교문서의 양식적 측면에서 검토한 것으로 려 일 간의 외교문서 등과 비교를 통해 고려시대 對 蒙 古, 對 日 本 외교문서가 啓 式 (외교)문서 였음을 조심스레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원본의 부재는 물론, 사본이라 해도 원본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불충분한 상태에서의 문서학적 연구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자극이 될 것 같다. 2. 질문 -사료적 문제 우선 제목의 부제를 보면 고려 측(국왕, 상서성 등)과 몽고 관인과의 왕복문서가 검토대상으 로 되어 있다. 왕복문서라면 보낸 문서에 대해 받은 문서를 1대1로 대응시켜서 상호 검토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표>를 보면 고려 측 문서만 제시되어 있는데, 각 문서에 대응하 는 몽고 측의 외교문서는 없는지? 본 논문에 제시된 사료가 현재 알 수 있는 고려시대 외교문서 의 전부인가?
142 14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방법론적 문제 고려 측의 외교문서에 대해서는 발신인의 명기 방식, 문서를 보낼 때 사용하는 문언, 말미에 사용하는 문언, 연기기재 등이 서식적 측면에서 검토되고 있다. 그런데 몽고 측의 실제 외교문서 로는 1231년 살례탑이 보낸 書 狀 이 유일하다고 하면서, 문체(몽골 文 直 譯 體 白 話 風 한문)만이 소개되어 있을 뿐 서식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서식은 알 수 없는지? 동일한 방법으로 검토가 되어야 할 것 같으며, 이때 서장 이라면 동등한 입장에서 주고받는 書 를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 하다. <표>의 1232년의 고려 측 문서가 啓 인데 몽고 측 문서가 書 라면 이러한 외교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평가의 문제 啓 를 상행문서, 書 를 평행문서 등, 어떤 書 式 으로 보는 것 및 외교관계를 반영하는 것으 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발표자도 주저했듯이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조선시대 조일관계에서 주고받은 문서(서계)를 예로 들면, 동일한 외교상대에게 주는 문서라 해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문언을 사용하고 있었다. 17세기 초 조일관계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마번주가 예조참의에 대해 문서를 보낸다는 뜻의 문언으로 謹 啓 奉 啓 奉 書 啓 書 贈 書 致 書 啓 達 의 7가지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상대 방에 대한 존경의 정도에 따른 차이였다. 즉 13세기 고려몽고 관계에서 외교문서로서 啓 를 선택하느냐, 書 를 선택하느냐는 그때 그때 외교적 자세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기는 해도 외교관계(시스템)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왜냐하면, 외교문서의 서식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양자의 합의에 이르기까지 많은 마찰과 교섭이 예상되는데, 그러한 기록이 남아 있는지? - 啓 식 문서라 해도 문장의 말미에는 不 宣 이라 하여 書 에 보이는 문언 사용. 啓 를 강조하려면 書 의 특징에 대해서 더 소개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상행문서로서 啓 식문서와 咨 식 문서의 차이는?
143 蒙 古 의 日 本 侵 略 과 日 本 의 対 応 - 高 麗 와 日 本 의 関 係 에 留 意 하며- 발표자 : 南 基 鶴 토론자 : 후나타 요시유키( 舩 田 善 之 ) 南 基 鶴 씨의 논문 蒙 古 의 日 本 侵 略 과 日 本 의 対 応 - 高 麗 와 日 本 의 関 係 에 留 意 하며- 는 몽 골의 대일교섭과 침략이라는 미증유의, 더욱이 긴박했던 동아시아의 정치정세에 있어서 고려와 일본이 취했던 대응에 관하여 논한 글이다. 南 基 鶴 씨에게는 労 作 蒙 古 襲 来 と 鎌 倉 幕 府 ( 臨 川 書 店,1998년)이 있다. 南 基 鶴 씨는 이 성과를 기초로 고려ㆍ일본의 입장 및 대응과 고려ㆍ일본의 관계를 고찰하고 새로운 시각과 식견을 제출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의 글에 대한 논평으로는 몽골제국사를 전공하는 연구자가 아니라 일본사 혹 은 고려사를 전공하는 연구자가 원래 적합할 것이다. 논평자의 코멘트는 자연히 몽골제국사의 입장에서 가해지게 되지만, 핵심을 벗어난 논의가 포함될 가능성에 대하여 미리 양해를 구해 두 고, 南 基 鶴 씨의 넓은 아량을 바라는 바이다. 또한 논평자는 수년 동안 큐슈대학 대학원 세미나에 서 사에키 코지( 佐 伯 弘 次 )씨ㆍ모리히라 마사히코( 森 平 雅 彦 )씨와 공동으로 일본ㆍ몽골 관련 자료 집 伏 敵 編 을 강독하고 있다. 이하의 코멘트도 세미나에서 다루었던 논의에서 많은 것을 의거 하고 있음을 부언해 두고 싶다. 물론 부적당한 내용이 있다면 논평자가 책임질 일이다. 南 基 鶴 씨 논문의 새로운 시각은 몽골의 일본침략,몽골ㆍ일본관계라는 테마에 일본 - 고려라 는 좌표축을 그었다는 점이다. 南 基 鶴 씨는 서문 에서 지금까지 한국 학계에서는 고려의 대몽 골 항쟁에 역점을 두는 한편, 원 간섭기의 고려와 일본의 관계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최근에 일본 학계는 몽골의 침략에 대응했던 국내 정치사를 중심으로 분석이 행 해지고 있으며, 국제관계라고 해도 일본과 대륙의 관계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고 언급했 다. 각각 한국의 高 麗 史 학계와 일본의 日 本 史 학계의 상황을 지적한 것이다.
144 14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이와 같은 상황은 몽골제국사 학계에서도 타당하다. 중국의 蒙 元 史 학계에 대하여 말하 자면,기본적으로는 자국사의 입장에서 대외관계사(중국에서는 中 外 関 係 史 라고 한다)의 무대 를 고찰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대체로 対 高 麗 ㆍ 対 日 本 을 별개로 다루고 있으며, 通 史 와 断 代 史 개설서에서도 대외관계를 서술하는 章 에서 각각 별도의 節 과 항목으로 고려와 일본을 따로 취급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검토ㆍ서술은 사실상 元 史 外 夷 傳 의 고려ㆍ일본이라는 역 사서술의 틀을 답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면적ㆍ입체적인 국제관계의 파악과는 거리가 멀다 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일본에서도 종래의 몽골제국사 연구ㆍ 元 代 史 연구의 対 高 麗 ㆍ 対 日 本 에 관한 서술은 중 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일본에서는 몽골시대사 라는 개념이 제창되기에 이르렀고, 이 이후 중앙유라시아사 시각에서의 검토,유라시아사 규모에서의 고찰이 주류가 되 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조류가 새로운 식견과 많은 성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논평자도 인 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몽골의 対 高 麗 ㆍ 対 日 本 関 係 史 를 생각하는 경우,이러한 시각은 거시적 관점에 치우치는 측면이 있다. 실제로 미시적인 검토,특히 고려의 동향에 대한 세심한 분석에 대해서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최근의 일본 학계는 몽골제국과 일본의 관 계에 대하여 경제ㆍ문화교류에 관심의 중점이 이행되고 있으며, 정치ㆍ외교ㆍ전쟁에 관해서는 스기야마 마사아키( 杉 山 正 明 )씨가 일련의 개설서ㆍ통사에서 몽골시대사의 입장에서 언급하는 정 도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南 基 鶴 씨의 논문은 고려 조정과 三 別 抄 의 대일교섭 이라는 節 에서 몽 골의 대일외교 중단을 획책하거나,외교문서ㆍ 書 狀 을 통하여 일본의 태도 軟 化 를 시도하는 등 고려의 두드러진 동향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節 에서는 몽골이라는 대국에 복속되어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안정ㆍ보전을 위하여 전쟁 회피를 지향하는 양면외교를 전개했다고 볼 수도 있는 고려 의 주체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고려의 입장과 대책에 착안했던 점은 크게 평가 할 수 있다. 이로써 다면적ㆍ입체적인 歷 史 像 구축에 기여하고 있다. 이 공적에 대하여 두 가지 욕심을 말하고 싶다. 첫째로,몽골제국에 있어서 고려의 위치,특 히 고려 왕실의 지위와 관련해서이다. 고려 국왕은 1259년 이후 몽골제국 내부에서의 지위 상승 을 계속 추진해 간다. 몽골의 駙 馬 고려국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까지의 과정은 모리히라 마사히코( 森 平 雅 彦 )씨가 상세한 검증으로 추적하고 있다. 몽골에 있어서 고려국왕의 이러한 동향 과 몽골ㆍ고려의 대일교섭 및 정책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는 것도 그 당시 국제관계의 다면적인 파악에는 필요할 것이다. 두 번째로,몽골이 일본에 사절을 파견했을 때 고려가 취했던 양면외교라고도 할 수 있는 조
145 蒙 古 의 日 本 侵 略 과 日 本 의 対 応 143 치에 관해서이다. 고려는 일본으로 보낸 문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몽골의 외교정책에 협력하고 있는 듯한 표현으로 변명하는 것과 아울러서,몽골로 사절을 파견하도록 일본에 권유하고 있다. 고려의 이 조치는 커다란 문제를 품고 있다. 몽골 쪽에서 보자면 이와 같은 고려의 양면외교는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려가 몽골에게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행했을 가능성 뿐만 아니라,반대로 몽골쪽(특히 使 節 차원에서)이 일본의 강경한 자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는 방책을 취했을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중에 趙 良 弼 이 国 書 의 복사본을 일본 쪽에 부탁했던 일로 미루어 사절 일행은 이 같은 외교문서의 복사본을 휴대했던 것이 틀림없다. 즉 몽골 사절은 고려가 일본으로 보낸 문서의 내용을 확인했을 가능성 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추측에 의할 수밖에 없지만,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할 것 이다. 다음으로, 일본의 국내정세와 대외정책을 連 動 해서 고찰한 성과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스기야마 마사아키( 杉 山 正 明 )씨는 鎌 倉 日 本 에 外 交 는 없었다 고 평가를 내리고 있지만, 실제로 는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南 基 鶴 씨의 논문은 일본-몽골의 좌표축에 막부- 조정,아울러서 北 条 得 宗 家 - 将 軍 - 天 皇 이라는 좌표축을 추가함으로써 몽골 국서에 대하여 회 답하지 않았던 막부의 외교정책,더우기 그 이후의 異 国 征 伐 계획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 었다. 그런데 염려되는 것은 일본(막부ㆍ조정)의 대외정세 인식이다. 즉 일본은 어느 정도 당시 고 려의 한반도 정세를 인식할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이다. 종래에는 三 別 抄 가 보낸 牒 文 을 둘러 싸고 충분한 정세분석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논의되는 경향이었다. 반면에, 三 別 抄 의 존재는 한 반도 정세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무신정권에서 고려국왕의 복권이라는 대략적인 정세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정보가 使 節 로부 터 전해졌을 가능성은 높으며,무엇보다도 제출된 국서 2통은 대몽골국 황제와 고려국왕이 각각 발송한 것이었다. 이 인식이 조정과 막부의 대응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 유무에 대한 南 基 鶴 씨 의 의견,아울러서 플로어를 포함한 논의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고려와 일본의 상호인식에 관한 고찰에 대하여 언급하려 한다. 상술했듯이,이 좌표축을 그은 점이 南 基 鶴 씨 논문의 성과 중 하나이다. 南 基 鶴 씨의 논문은 몽골의 일본침략으 로 고려ㆍ일본의 상호인식은 부정적이며 굴절된 것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결론은 확실히 외교ㆍ정치ㆍ전쟁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떠오르는 것이 몽골ㆍ일 본 사이의 외교 단절과 경제ㆍ문화교류의 활성화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경제ㆍ문화교류 를 담당했던 불교라는 코드이다. 이 사실은 寺 社 造 営 料 唐 船 의 존재에서도 명백하며, 직접적인
146 14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현관이었던 중국의 江 南 뿐만 아니라,몽골의 비호를 받던 華 北 의 대사원에서도 邵 元 같은 일본 승려의 활약을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의 불교계도 몽골과 강력히 결합되어 있었다. 최근에 소개 된 松 広 寺 의 티베트어 法 旨, 大 都 교외와 安 陽 ㆍ 杭 州 의 사원 관련 사료 등에서도 그 긴밀성을 엿볼 수 있다. 환언하면 일본은 불교라는 코드를 통해서 몽골과 교류하고 있었고, 여기에는 고려 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국제환경에 있어서 일본과 고려의 경제ㆍ문화교류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써 본 코멘트를 끝내려 한다.
147 일본침공 이후의 여일관계 발표자 : 佐 伯 弘 次 토론자 : 金 普 漢 13 14세기는 북방 몽골초원에서 원의 성립, 금과 송의 멸망, 고려의 항복과 일본의 침공, 室 町 幕 府 와 조선의 성립, 원의 멸망과 명의 성립 등 동아시아 정세가 격변하는 시기였다. 본 발표문에서는 먼저 13세기 몽골침공 이후에 사신의 입국이라는 여일교섭의 진행과정과 일 본의 군사정보 수집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전기왜구의 흥기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를 소개 하고, 중국연안에 출현한 왜구와 고려침입 왜구의 연관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동아시아의 규모에 서 왜구가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고려의 禁 寇 使 臣 파견과 일본의 대응에서는 입국하는 고려사신을 열거하면서 피로인 송환으로 얻는 경제적 이익과 대마도에 지급되는 쌀 지 원이 고려 말부터 시작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본 발표문은 전체적 흐름 속에서 몽골침공 에 대한 군사적 위기, 금구에 위한 여일양국의 외교적 노력, 피로인 송환의 경제적 가치 등의 내 용순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본 발표문은 논문의 완결성 면에서 아직은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 다. 따라서 약간 조심스럽지만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은 궁금한 내용에서 대해서 몇 가지 질문 하고자 한다. 첫째, 1292년에 金 有 成 에 의해서 전달된 고려첩장에 대해서 일본조정과 院 이 무례, 우둔, 기 괴 로 평가했다고 하는데, 이전에 전달된 몽골 고려첩장에 대한 조정의 평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조정과 원의 판단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예를 들면 일본 중심적 관념 (신국사상 등) 혹은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대한 미숙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었는지 의문이 생 긴다.
148 14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둘째, 본문에서 대륙에 대한 일본의 군사정보 수집 대해서 元 의 정찰이 막부의 주도하에 행 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략) 日 元 貿 易 船 이 元 의 정찰을 떠맡고 있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당시에 원의 동향에 가장 민감한 존재는 일차적으로 막부보다 원을 오가며 교역의 담당하던 일본상인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상인은 무역이 우선이고, 무역과정에서 수집되는 정보는 차선이며, 원에 대한 정보는 부차적 생긴 결과물로 보아야 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고려내의 왜구활동에서 보면 조창의 위치정보, 인물에 대한 정보(최영 장군 등), 지 리 지형의 정보 등은 왜구들에게 필수요소였고,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즉 왜구의 고려에 대한 정보량은 막부의 그것보다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고 추측된다. 따라서 日 元 貿 易 船 의 주된 목 적은 일차적으로 원의 정찰보다 무역의 이익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셋째, 사료를 통해서 金 龍 은 1366년 8월 고려를 출발하여 9월 일본에 입국하고, 金 逸 은 1366 년 11월 고려를 출발하여 1367년 2월 일본에 입국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발표자는 이들이 모두 고려왕이 보낸 사신으로 보고 있는데, 고려가 비슷한 시기에 같은 목적 ( 禁 寇 )으로 사신을 중복해서 파견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넷째, 安 吉 祥 의 사절 파견 이래 室 町 幕 府 보다 오히려 博 多 의 九 州 探 題 와 교섭하는 것이 중 요하게 자리 잡았다는 느낌이 들며, 사절의 송환도 九 州 探 題 가 행하고 있었다. 고 서술하고 있 다. 본래 일본의 외교권은 조정의 고유한 권한인데, 김용 김일의 입국 이후에는 室 町 幕 府 가 관할 하고, 安 吉 祥 의 입국 이후에는 九 州 探 題 또는 西 國 의 大 名 에게로 이관되고 있다.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외교권에서 몇 차례 변화가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 마지막으로, 1380년대 왜구가 감소하는 경향에 대해서 고려의 외교가 西 國 의 大 名 들을 주목 하게 되면서 그 성과를 보게 된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대마도 宗 氏 에게 쌀 1,000석 하사에 주목하고 있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1354년 조운선 40여척 약탈, 1355년 200척 약탈, 1360년 윤 5월에 4만 석을 약탈한 이후에 상당기간(1년 혹은 9개월간) 고려에 왜구가 전혀 출현하지 않는다. 또 1368 년 11월에 고려 조정에서 쓰시마의 崇 宗 慶 ( 宗 宗 慶 )에게 쌀 1천석 하사한 이후에도 약 1년간 왜 구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상 4건의 기록의 공통점은 대량의 약탈품과 하사품이 전달된
149 일본침공 이후의 여일관계 147 이후에는 장기간 침입과 약탈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순히 고려시대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조선시대로 연결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해동제국기 와 경국대전 의 규정에서 무역을 제외한 순수 접대비가 1만석이 고, 중족실록 에 1509년(중종 4) 접대비용 2만 2천석이라는 숫자가 눈에 띈다. 결국 중세의 朝 日 관계는 고려가 약탈당한 총량을 조선이 그대로 떠안았기에 가능한 외교관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여일관계는 무역보다는 약탈의 측면에서, 조일관계는 내재된 약탈과 무역의 측면에 서 상호 통일된 조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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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발표문 일본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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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蒙 古 襲 来 と 異 文 化 接 触 村 井 章 介 ( 東 京 大 學 ) はじめに 1371 年 南 朝 方 征 西 府 の 主 として 九 州 を 抑 え 大 宰 府 に 都 していた 懐 良 親 王 ( 後 醍 醐 天 皇 の 皇 子 ) は 建 国 直 後 の 明 から 外 交 使 節 を 迎 えた 使 者 は 名 を 趙 秩 といい 日 本 に 対 して 明 の 中 華 支 配 の 正 当 性 を 認 め 臣 従 の 意 思 表 示 をするよう 促 すのが 任 務 だった 懐 良 は 趙 秩 と 問 答 を 交 わし や がてその 説 得 に 応 じて 表 箋 を 奉 りて 臣 と 称 し 祖 来 を 遣 はし 秩 に 随 ひて 入 貢 せしめた これに 接 した 洪 武 帝 は ただちに 懐 良 を 日 本 国 王 に 封 じた この 事 件 は 南 北 朝 内 乱 の 性 格 を 大 きく 変 える ことになる 村 井 2003 が それはさておき ここでは 両 人 の 問 答 に 注 目 したい( 明 実 録 洪 武 4 年 10 月 癸 巳 条 ) 懐 良 いま 新 天 子 が 蒙 古 のときと 同 様 中 華 を 掌 握 して 趙 という 姓 の 使 者 を 送 ってきた さだめし なんじは 昔 の 蒙 古 使 の 子 孫 であろう 心 地 よいことばで 誘 ってわれわれを 襲 うつもりだろう 趙 秩 私 は 蒙 古 使 の 後 裔 ではない 私 を 殺 せば 禍 がなんじに 降 りかかるだろう わが 朝 の1 人 の 兵 1 艘 の 戦 艦 は 蒙 古 軍 の100にも 相 当 する 礼 をもってなんじを 懐 けようとするわが 朝 と なんじを 襲 った 蒙 古 とを 比 べてみるがよい 蒙 古 襲 来 の 直 前 1271 年 と72 年 (2 度 めを73 年 とする 説 があるが 誤 り 朱 雀 2008 )の2 度 にわたっ て 大 宰 府 に 来 た 蒙 古 の 使 者 の 名 を 趙 良 弼 といった それと 同 姓 の 使 者 を 迎 えた 懐 良 は ただちに1 00 年 前 の 戦 争 の 再 現 を 連 想 した 蒙 古 襲 来 の 記 憶 がいかに 強 烈 なものであったかがわかる 蒙 古 襲 来 は 前 近 代 に 日 本 の 領 土 内 で 戦 われた 対 外 戦 争 として 希 有 なものである それ 以 外 に 1019 年 の 刀 伊 の 入 寇 と1419 年 の 応 永 の 外 寇 とがあるが 戦 争 の 規 模 は 比 べものにならない それだけに 蒙 古 襲 来 は 同 時 代 およびその 後 の 日 本 に 大 きな 刻 印 を 残 した この 点 については 鎌
154 15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倉 幕 府 政 治 の 推 移 御 家 人 制 や 惣 領 制 の 変 質 流 通 経 済 の 進 展 など さまざまな 観 点 から 検 討 され てきたが ここでは 異 文 化 との 直 接 的 な 接 触 という 角 度 から 蒙 古 襲 来 のもった 意 味 を 考 えてみたい 村 井 2005 第 9 章 参 照 1. 外 交 戦 争 は 外 交 の 延 長 という 命 題 は 蒙 古 襲 来 についてもなりたつ 1266 年 8 月 付 の 大 蒙 古 国 皇 帝 から 日 本 国 王 あて 国 書 は 高 麗 を 介 して 68 年 正 月 に 大 宰 府 に 到 達 した 時 間 がかかったのは 高 麗 の 消 極 的 抵 抗 による 国 書 は 蒙 古 が 中 華 を 領 有 したこと 高 麗 が 蒙 古 と 義 は 君 臣 と 雖 も 歓 は 父 子 の 如 し という 関 係 になったこと を 述 べたあと 国 交 を 結 んで 相 親 睦 するよう 求 めている 書 出 の 奉 書 書 止 の 不 宣 ともにそれなりの 礼 遇 を 表 現 しており さほど 尊 大 な 文 言 ではない しか し 兵 を 用 うるに 至 りては 夫 れ 孰 か 好 む 所 ならん という 一 節 は 東 アジア 外 交 に 習 熟 しない 日 本 側 とりわけ 幕 府 にとって 大 きな 軍 事 的 脅 威 と 映 っただろう 杉 山 2003 朝 廷 は はじめ 伝 統 的 対 外 姿 勢 に 従 って 返 書 を 送 らなかったが 1269 年 に 到 来 した 蒙 古 中 書 省 牒 張 2005 に 対 しては 大 宰 府 名 義 の 返 牒 を 送 ることに 決 し 荒 木 2008 文 案 を 作 成 した しかし 幕 府 の 態 度 は 一 貫 して 武 断 的 で 返 牒 を 握 りつぶし 異 国 警 固 番 役 の 創 設 等 軍 事 的 対 応 に 終 始 した そんななか 大 宰 府 まで 到 達 したものとしては2 度 めと3 度 めの 使 節 が かの 趙 良 弼 である 佐 伯 2003 趙 良 弼 と 南 浦 紹 明 蒙 古 使 趙 良 弼 は 2 度 めの 到 来 直 後 に 戦 争 が 始 まったことから まがまがしい 名 として 日 本 人 の 歴 史 的 記 憶 に 刻 まれた しかし 生 身 の 人 間 としての 彼 は 女 真 族 出 身 の 文 人 でみずから 対 日 外 交 の 役 目 を 買 って 出 たことから 想 像 されるように 高 い 教 養 を 備 えた 境 界 人 だった 山 本 2001 その 政 治 的 立 場 はけっして 主 戦 派 ではなく 2 度 めの 使 節 行 から 帰 った 彼 は 元 (1271 年 国 号 を 立 てる) 皇 帝 フ ビライに 対 して つぎのように 日 本 征 討 の 無 益 を 訴 えた( 元 史 巻 159 趙 良 弼 伝 ) 臣 日 本 に 居 ること 歳 余 其 の 風 俗 を 覩 るに 狼 勇 にして 殺 を 嗜 み 父 子 の 親 上 下 の 礼 有 る を 知 らず 其 の 地 は 山 水 多 く 耕 桑 の 利 無 し 其 の 人 を 得 れども 役 すべからず 其 の 地 を 得 れども 富 を 加 へず 況 んや 舟 師 海 を 渡 るに 海 風 期 無 く 禍 害 測 る 莫 し 是 れをしも 有 用 の 民 力 を 以 て 無 窮 の 巨 壑 を 填 む と 謂 ふなり
155 蒙 古 襲 来 と 異 文 化 接 触 153 現 在 にいたるまで 日 本 側 は 蒙 古 襲 来 を 蛮 族 の 国 が 文 明 国 日 本 にしかけてきた 戦 争 というイ メージで 捉 えてきた それは 同 時 代 人 も 例 外 ではなく 1271 年 良 弼 の 初 度 来 日 に 際 して 大 宰 府 の 長 少 弐 経 資 は 蛮 夷 の 者 帝 闕 に 参 る 事 先 例 無 し 牒 状 の 趣 承 るべし と 応 対 して( 吉 続 記 文 永 8 年 10 月 24 日 条 ) 良 弼 の 上 京 を 拒 否 した だが 良 弼 は 逆 に 儒 教 的 礼 義 を 知 らず 征 服 しても 得 るもの の 少 ない 蛮 国 と 日 本 を 見 なしていた 実 際 文 永 の 役 後 に 到 来 した 元 使 を 斬 殺 するという 幕 府 の 対 応 は 東 アジアの 外 交 慣 例 を 無 視 したものであり 蛮 国 に 似 つかわしい 行 動 と 見 なされ 再 度 の 戦 争 を 回 避 する 可 能 性 を みずから 閉 ざすものだったといわざるをえない 日 本 に 滞 在 中 の 趙 良 弼 の 事 蹟 として 注 目 されるのが 大 徳 寺 派 妙 心 寺 派 の 祖 南 浦 紹 明 との 詩 の 唱 和 である 南 浦 は 入 宋 して 名 僧 虚 堂 智 愚 に 嗣 法 し 1267 年 に 帰 国 70 年 に 博 多 西 郊 姪 浜 の 興 徳 寺 ( 開 基 は 北 条 時 定 )に 住 したあと 72 年 に 大 宰 府 に 近 い 横 岳 崇 福 寺 ( 開 基 は 少 弐 氏 )の 住 持 と なった 円 通 大 応 国 師 語 録 偈 頌 に 蒙 古 国 信 使 趙 宣 撫 の 韻 に 和 す と 題 された2 首 が 見 える( 現 代 語 訳 は 西 尾 1999b のもの) (1) 遠 公 不 出 虎 渓 意 慧 遠 が 虎 渓 を 出 ることがなかったというわけは 非 是 淵 明 誰 賞 音 陶 淵 明 でなかったならば 誰 がそのわけを 解 しようか 欲 話 箇 中 消 息 子 その 間 の 事 情 を 申 しあげたい 蒲 輪 何 日 到 雲 林 がまで 包 んだ 車 輪 の 車 に 乗 って 拙 寺 に 来 られるのは いつの 日 のこ とか (2) 外 国 高 人 来 日 本 外 国 の 高 官 が 日 本 にやって 来 た 相 逢 談 笑 露 真 機 出 会 って 談 笑 してみると 玄 妙 な 働 きを 露 わす 殊 方 異 域 無 差 路 国 を 殊 にしても 真 理 に 食 い 違 いはなく 目 撃 道 存 更 有 誰 一 目 見 ただけで 道 を 具 えていることがすぐわかる その 上 に 誰 があ ろうか 西 尾 賢 隆 は この 唱 和 時 に 南 浦 がいた 寺 を (1)に 出 る 虎 渓 三 笑 の 故 事 にふさわしい 環 境 から 崇 福 寺 と 推 定 し 唱 和 の 年 代 を 良 弼 の2 度 めの 来 日 時 と 考 定 し 京 上 を 許 されず 大 宰 府 で 荏 苒 と 日 を 過 す 良 弼 を 陶 淵 明 のような 自 適 へと 誘 わんとした 偈 とうけとりたい と 述 べた 従 うべき 見 解 であろう (1) は 良 弼 が 対 面 前 に 南 浦 のもとに 送 った 詩 に 寄 せた 和 韻 で (2)は 直 接 会 って 語 りあったのちの 唱 和 で ある (1)には 両 人 の 関 係 を 慧 遠 と 陶 淵 明 になぞらえる 中 国 文 化 への 憧 憬 と 造 詣 が 見 られ (2)には 禅 宗 と 儒 教 を 貫 く 道 に 照 らせば 国 や 地 域 の 差 異 は 本 質 的 なものではないという 世 界 観 が 盛 られて いる 緊 張 した 国 家 間 関 係 のなかにあっても 日 本 人 の 渡 海 僧 と 女 真 人 の 外 交 官 という 境 界 人 相 互 に
156 15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は 思 いのほか 共 感 が 通 いあっていた 帰 国 して 戦 争 回 避 を 説 いた 良 弼 の 念 頭 に 南 浦 との 邂 逅 が あったと 想 像 してみたくなる また この 会 見 における 南 浦 の 立 場 を 一 私 人 ではなく 外 交 の 一 角 をになうものと 見 る 説 がある 伊 藤 2002 蒙 古 襲 来 の 直 前 に 宋 から 帰 国 し 北 条 氏 ゆかりの 興 徳 寺 と 少 弐 氏 ゆかりの 崇 福 寺 に 歴 住 した 彼 の 経 歴 を 考 えると ありえない 話 ではない もしそうなら 南 浦 は 良 弼 から 得 た 大 陸 情 報 を 幕 府 関 係 者 に 伝 達 しただろうから 鎌 倉 幕 府 の 外 交 的 対 応 を 武 断 的 とのみ 評 価 することは 再 考 を 要 す る だがその 情 報 が 幕 府 の 政 策 判 断 に 反 映 した 形 跡 はない 三 別 抄 の 日 本 請 援 蒙 古 襲 来 に 対 する 従 来 の 見 方 は 蒙 古 高 麗 という 敵 に 対 してわが 鎌 倉 武 士 がいかに 勇 敢 に 戦 っ たか という 図 式 に 偏 っていた いま 眼 をユーラシアにひろげて 諸 地 域 がモンゴルの 急 激 な 膨 張 を どう 受 けとめたか という 視 点 に 立 つなら ちがった 歴 史 的 現 実 が 見 えてくる たとえば1280 年 代 には 伝 統 的 に 犬 猿 の 仲 だったベトナム チャンパ 間 に 蒙 古 の 脅 威 や 侵 略 に 対 抗 する 国 際 的 共 同 が 成 立 した 旗 田 1965 そして 同 様 の 歴 史 的 条 件 は 東 アジアにもあった 村 井 1988 蒙 古 軍 が 高 麗 への 侵 略 を 始 めたのは 日 本 より40 年 以 上 も 早 く 1231 年 のことである 当 時 高 麗 で 実 権 を 握 っていた 武 人 政 権 ( 日 本 の 幕 府 に 類 似 )は 翌 年 都 を 開 京 から 江 華 島 に 移 して 抵 抗 の 姿 勢 を 示 した その 後 30 年 間 6 波 におよぶ 侵 略 に 疲 弊 しきった 高 麗 は 1260 年 に 従 属 的 な 講 和 を 余 儀 なくされる 三 別 抄 とは 徴 兵 制 による 府 兵 に 代 わって 武 人 政 権 の 軍 事 力 の 中 核 をになった 精 鋭 部 隊 で 反 蒙 30 年 戦 争 のおもな 担 い 手 だった 1270 年 武 人 政 権 がクーデタで 倒 れ 王 室 が 蒙 古 に 完 全 に 屈 しようとしたとき 三 別 抄 は 蒙 古 兵 大 いに 至 り 人 民 を 殺 戮 す 凡 そ 国 を 輔 けんと 欲 する 者 は みな 毬 庭 に 会 せよ という 檄 を 飛 ばして 反 乱 に 立 ち 上 がった 反 乱 軍 は 王 族 のひとりをみずからの 王 に 擁 立 し 政 府 機 関 を 組 織 し 根 拠 地 を 朝 鮮 半 島 西 南 端 の 珍 島 に 移 して ゲリラ 戦 法 で 蒙 古 軍 と 高 麗 政 府 を 悩 ませた 1271 年 三 別 抄 は 牒 状 を 日 本 に 送 って 援 軍 と 兵 糧 を 要 請 した 高 麗 の 正 統 政 府 を 自 認 する 三 別 抄 は 江 華 島 から 珍 島 への 移 動 を 遷 都 と 言 っている また 漂 風 人 護 送 遣 使 問 訊 など 平 等 互 恵 の 関 係 を 結 ぶことを 提 案 した その 視 野 には 日 本 との 共 同 による 蒙 古 への 抵 抗 がとらえられて いた なお 牒 状 の 発 せられたのは 珍 島 が 陥 落 する 同 年 5 月 以 前 で 蒙 古 軍 の 将 忽 林 赤 が 開 京 か ら 日 本 への 出 撃 基 地 合 浦 へ 出 撃 したのは 同 年 8 月 である 牒 状 発 信 の 時 点 で 合 浦 をふくむ 金 海 府
157 蒙 古 襲 来 と 異 文 化 接 触 155 は 三 別 抄 の 勢 力 下 にあった 可 能 性 が 高 い 屯 金 海 府 之 兵 先 廿 許 人 送 日 本 国 事 という 牒 状 の 一 節 は 従 来 私 自 身 もふくめて 蒙 古 軍 の 動 静 を 伝 えたものと 解 釈 されてきたが 李 領 の 言 うように 三 別 抄 自 身 の 行 動 ( 予 定?)を 述 べたものであろう 李 1999 さらに 三 別 抄 の 外 交 活 動 が 日 本 への 援 助 要 請 にとどまるものでなかったことが 近 年 の 研 究 で 明 らかになった 太 田 彌 1995 山 本 2001 趙 良 弼 の 生 地 である 河 北 省 賛 皇 県 にある 石 刻 史 料 賛 皇 復 県 記 に 良 弼 の 初 度 渡 日 について 命 を 受 け 東 のかた 日 本 に 使 す 鯨 海 浩 瀚 にして 其 の 際 を 測 る 莫 し 叛 賊 耽 羅 其 の 衝 を 蔽 ふ とある 1271 年 5 月 に 珍 島 から 済 州 島 ( 耽 羅 )に 移 った 三 別 抄 が 良 弼 の 外 交 活 動 を 妨 害 したという おなじ 事 実 は 元 朝 名 臣 事 略 に 収 められた 良 弼 の 墓 碑 銘 には 既 に( 大 宰 府 に) 至 る 宋 人 と 高 麗 耽 羅 と 共 に 其 の 事 を 沮 撓 す( 阻 み 乱 す) ( 少 弐 氏 が) 公 を 大 宰 府 に 留 め 専 人 守 護 す と 書 かれており 三 別 抄 の 妨 害 工 作 が 大 宰 府 で 行 われたこと そこ に 宋 人 が 一 枚 かんでいたこと の2 点 が 知 られる 良 弼 の 大 宰 府 到 着 は1271 年 9 月 19 日 で 同 月 3 日 から 京 都 の 朝 廷 では 三 別 抄 の 牒 状 に 対 する 対 応 が 議 論 されていた( 吉 続 記 ) 大 宰 府 で 良 弼 と 接 触 した 耽 羅 とは この 牒 状 を 携 えて 渡 航 した 使 節 団 であろう 右 に 触 れた 金 海 府 から 日 本 へ 送 られた20 人 ばかりの 兵 士 は その 護 衛 を 任 務 とし たとも 考 えられる 大 宰 府 は 正 反 対 の 任 務 を 帯 びる2つの 使 節 団 が 鉢 合 わせして 緊 張 に 包 まれただ ろう 良 弼 への 妨 害 工 作 には 宋 人 も 関 与 していた 賛 皇 復 県 記 に 時 に 偽 宋 海 道 の 両 浙 を 去 ること 遠 からざるを 以 て 大 いに 之 を 畏 れ とあるように 南 宋 は 良 弼 の 説 得 が 功 を 奏 して 日 本 が 蒙 古 の 陣 営 に 加 わることを 強 く 警 戒 していた 蒙 古 から 見 れば 高 麗 の 反 蒙 古 勢 力 南 宋 日 本 の3 者 が 連 携 す ることは このうえない 脅 威 であった 南 宋 の 工 作 は 良 弼 の 再 度 の 渡 日 に 際 しても 試 みられた 賛 皇 復 県 記 に 時 に 偽 宋 僧 滕 原 瓊 林 等 を 遣 はし ( 良 弼 の) 行 を 止 むるを 諜 るを 為 す とあり 良 弼 は 日 本 人 と 宋 の 使 僧 に 対 して 宋 人 の 浮 偽 無 信 を 数 えあげ 中 国 大 陸 の 大 半 は 蒙 古 の 有 となり 東 南 弾 丸 の 地 を 余 すのみだ とまくし 立 てたところ 使 僧 は 語 に 詰 まって 反 論 できなかったという おなじことは 良 弼 の 墓 碑 銘 にも 宋 人 使 僧 の 瓊 林 と 曰 ふ 者 来 りて 渝 平 ( 和 平 を 攪 乱 する?)し 故 を 以 て 和 事 成 らず 公 還 る とあって こち らは 日 本 を 蒙 古 に 従 わせるという 良 弼 の 任 務 を 使 僧 が 妨 害 したことに 主 眼 がおかれている 南 宋 が 日 本 へ 送 った 使 僧 瓊 林 とは 日 本 からの 渡 海 禅 僧 桂 堂 瓊 林 らしい 延 宝 伝 燈 録 巻 3と 本 朝 高 僧 伝 巻 23によれば 彼 は 文 永 年 中 に 入 宋 し のちに 杭 州 径 山 住 持 となった 虚 舟 普 度 から 臨 済 宗 松 源 派 の 法 を 嗣 いで 帰 国 後 洛 東 の 勝 林 寺 に 住 した 帰 国 時 に 虚 舟 の 法 衣 頂 相 を 賜 与 され 嘉 元 年 中 には 舶 来 の 虚 舟 和 尚 語 録 を 募 縁 上 梓 したという 彼 の 師 虚 舟 がいたのは 蘇 州 や 杭 州 など
158 15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南 宋 中 枢 部 にある 寺 院 であり その 会 下 にいた 瓊 林 のような 渡 海 僧 は 対 日 外 交 にもってこいの 人 材 であった 以 上 のように 文 永 の 役 直 前 日 本 に 対 して3つの 勢 力 が 外 交 的 働 きかけを 試 みた そのうちで 南 宋 のみは 趙 良 弼 の 日 本 説 得 が 成 功 しなかったという 点 で 成 果 をあげたといえる 対 して 良 弼 と 三 別 抄 による 工 作 は 目 的 はまったく 反 対 であるが ともに 不 成 功 に 終 わった ここでは 三 別 抄 につい てのみふれておきたい 牒 状 を 受 け 取 った 朝 廷 は 亀 山 院 のもとで 会 議 を 開 いて 対 応 を 検 討 した しかしそこでは 牒 状 が 高 麗 の 反 蒙 古 勢 力 のものであることが 正 確 には 理 解 されず 字 づらの 解 釈 を 儒 者 たちが 競 い 合 う だけだった 一 方 北 条 時 宗 を 首 班 とする 幕 府 は 牒 状 に 接 して 九 州 に 所 領 をもつ 御 家 人 に その 所 領 に 赴 いて 守 護 の 指 揮 のもとに 異 国 の 防 禦 につくよう 命 じた 牒 状 は 蒙 古 の 脅 威 を 伝 えたと いう 文 脈 でのみ 理 解 されており 自 国 の 防 衛 を 固 めるだけで 三 別 抄 の 国 際 的 共 同 の 提 案 が 考 慮 さ れた 形 跡 はない 済 州 島 に 拠 った 三 別 抄 はなお2 年 間 抵 抗 を 続 け 1273 年 に 元 高 麗 連 合 軍 によって 壊 滅 した 翌 年 元 は 日 本 征 討 を 実 行 に 移 す( 文 永 の 役 ) 戦 争 が 思 いがけない 結 果 に 終 わった 直 後 幕 府 は 異 国 征 伐 すなわち 朝 鮮 半 島 への 反 攻 にのりだす そこには 冒 険 的 報 復 主 義 があるだけで 三 別 抄 の 立 場 への 一 片 の 理 解 も 見 られない 当 時 の 幕 府 に 異 国 征 伐 を 敢 行 するほどの 余 力 がなかったこと は むしろ 幸 いだったかもしれない 2. 戦 闘 蒙 古 合 戦 に 参 加 した 肥 後 国 御 家 人 竹 崎 季 長 は 文 永 弘 安 両 度 の 合 戦 のようすと その 中 間 に 先 懸 けの 功 の 認 定 を 求 めて 鎌 倉 に 赴 いた 経 緯 を 絵 巻 物 に 描 かせ 文 永 の 役 の 恩 賞 として 拝 領 した 肥 後 国 海 東 郷 の 鎮 守 甲 佐 大 明 神 に 奉 納 した これが 有 名 な 蒙 古 襲 来 絵 詞 ( 以 下 絵 詞 と 略 す)で 現 在 は 宮 内 庁 三 の 丸 尚 蔵 館 に 所 蔵 されている 絵 詞 は 季 長 個 人 の 眼 を 通 して 蒙 古 合 戦 という 世 界 戦 争 の 一 端 を 同 時 代 性 と 写 実 性 をもって 描 き 出 した 作 品 である 対 外 戦 争 の 経 験 のない 日 本 の 武 士 たちは 編 成 も 戦 法 も 武 器 もまったく 異 なる 異 国 の 軍 を 相 手 に どのように 戦 ったのだろうか 主 として 吉 田 光 邦 1975 佐 藤 鉄 太 郎 2005 太 田 彩 2000 の 仕 事 に 拠 りながら 鎌 倉 武 士 が 蒙 古 合 戦 を 通 じてどのような 異 文 化 と 接 触 したかを 見 ていこう
159 蒙 古 襲 来 と 異 文 化 接 触 157 陸 戦 絵 詞 に 描 かれた 蒙 古 軍 の 武 器 としては 火 薬 を 使 った 兵 器 てつはう( 鉄 砲 ) が 眼 をひく 鉄 の 半 球 ふたつを 合 わせたなかに 火 薬 を 仕 こみ 手 持 ちの 投 擲 器 を 使 って 敵 陣 に 投 げこみ 炸 裂 させるもの で さほど 殺 傷 力 があったとは 思 えないが 轟 音 による 威 嚇 効 果 は 抜 群 だった 八 幡 愚 童 訓 ( 以 下 愚 童 訓 と 略 す)は 逃 ル 時 ハ 鉄 放 ヲ 飛 シテ 暗 ク 成 シ 鳴 音 闇 高 レバ 心 ヲ 迷 シ 肝 ヲ シ 目 眩 耳 鳴 テ 亡 然 トシテ 東 西 ヲ 不 弁 と 表 現 する 退 却 の 際 に 使 われたことは 絵 詞 の 絵 と 一 致 する これに 太 鼓 や 銅 鑼 の 音 も 加 わって ずいぶんとにぎやかないくさだったようで 愚 童 訓 に 其 ノ 声 唱 立 サ ニ 日 本 ノ 馬 共 驚 テ 進 退 ナラズ とある 弓 矢 は 双 方 が 使 っているが 蒙 古 軍 の 弓 は2 種 類 あった ひとつは 宋 式 の 短 弓 で 握 りの 部 分 が へこんだ 形 をしており 射 程 距 離 が 長 く 矢 の 根 には 毒 が 塗 ってあったらしい もうひとつは 握 りにへ こみのない 蒙 古 式 の 長 弓 である また 蒙 古 軍 の 陣 では 兵 士 の 多 くが 槍 や 鉾 を 立 ててもっている 当 時 の 日 本 ではあまり 使 われなかったからことのほか 有 効 で 愚 童 訓 も 鉾 長 柄 物 具 ノ 罅 間 ヲ 差 テ 不 外 と 述 べている このほか 愚 童 訓 が 石 弓 と 呼 ぶ 投 石 機 もあった 蒙 古 軍 の 陣 には 大 きな 太 鼓 が3つと 銅 鑼 がひとつみえるが これらは 愚 童 訓 に 引 ベキニハ 逃 鼓 ヲ 打 懸 ベキニハ 責 鼓 ヲ 叩 クニ 随 テ 振 舞 ヒ とあるように 兵 力 を 組 織 的 に 動 かすための 信 号 手 段 だった 鳴 りものが 象 徴 する 集 団 戦 法 は 日 本 軍 をとまどわせた 愚 童 訓 は 一 面 ニ 立 並 ビテ 寄 ル 者 アレバ 中 ヲ 引 退 キ 両 方 ノ 端 ヲ 廻 合 テ 取 籠 テ 無 残 所 討 レケル と 述 べ またつぎのように も 描 いている 如 日 本 戦 相 互 名 乗 リ 合 テ 高 名 不 覚 ハ 一 人 宛 ノ 勝 負 ト 思 フ 処 此 合 戦 ハ 大 勢 一 度 ニ 寄 合 テ 足 手 ノ 動 処 ニ 我 モくト 取 付 テ 押 殺 シ 虜 ケリ 是 故 懸 入 ル 程 ノ 日 本 人 無 漏 者 やあやあわれこそは と 名 乗 っているうちに よってたかって 組 み 敷 かれてしまうという 悲 喜 劇 に 合 戦 の 作 法 のちがいがあらわれている 戦 闘 開 始 のときもそうで 愚 童 訓 によれば 日 の 大 将 少 弐 景 資 が 箭 合 ノ 為 トテ 小 鏑 ヲ 射 タリシニ 蒙 古 の 陣 からどっと 笑 い 声 があがったという 鏑 矢 は 飛 ばすと 音 を 発 する 儀 礼 用 の 矢 である さて 文 永 の 役 の 初 戦 竹 崎 季 長 は 先 駈 けの 功 を 立 てんとまっさきに 蒙 古 の 陣 中 へ 攻 め 入 り 鳥 飼 潟 現 在 の 福 岡 市 城 南 区 鳥 飼 周 辺 で 苦 戦 を 強 いられる a. 凶 徒 は 麁 原 に 陣 を 取 りて 色 々の 旗 を 立 て 並 べて 乱 声 暇 なくしてひしめきあふ b. 季 長 はせむかふを 藤 源 太 すけみつ 申 す 御 方 は 続 き 候 らん 御 待 ち 候 て 証 人 を 立
160 15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てゝ 御 合 戦 候 へ と 申 を 弓 箭 の 道 先 をもて 賞 とす たゞ 懸 けよ とて をめい て( 大 声 をあげて) 懸 く c. 凶 徒 麁 原 より 鳥 飼 潟 の 塩 屋 の 松 のもとにむけ 合 せて 合 戦 す 一 番 に 旗 指 馬 を 射 られ て 跳 ね 落 さる 季 長 以 下 三 騎 痛 手 負 ひ 馬 射 られて 跳 ねしところに 肥 前 の 国 の 御 家 人 白 石 の 六 郎 通 泰 後 陣 より 大 勢 にて 懸 けしに 蒙 古 の 軍 ひき 退 きて 麁 原 に 上 がる 詞 書 がこう 記 す 季 長 奮 戦 のシーンは 数 ある 絵 詞 の 絵 のなかでももっとも 有 名 である 蒙 古 兵 の 矢 に 射 られた 乗 馬 からは 鮮 血 がしたたり 季 長 の 右 膝 にも 矢 が 命 中 している 頭 上 には 投 げ 槍 が 飛 び てつはう が 炸 裂 する 左 手 には 季 長 に 矢 を 射 かける3 人 の 獰 猛 な 顔 をした 蒙 古 兵 がおり その うしろを 一 群 の 蒙 古 兵 が 退 却 していく ところが 近 年 の 研 究 によって この 絵 には 多 くの 疑 点 や 問 題 点 があることがわかってきた 佐 藤 鉄 太 郎 と 太 田 彩 の 分 析 結 果 を 私 なりに 総 合 して 紹 介 しよう( 詳 細 は 村 井 2001 を 参 照 ) 中 心 をなす 絵 7は2 紙 からなり 右 半 の 絵 7Ⅰに 騎 馬 の 季 長 左 半 の 絵 7Ⅱに 背 を 見 せて 逃 げる 蒙 古 の 歩 兵 が 配 置 され 両 紙 の 継 目 をはさんで 季 長 に 対 峙 する3 人 の 蒙 古 兵 が 描 かれている しかしほ んらい2 紙 は 連 続 せず 3 人 の 蒙 古 兵 は 追 筆 である(よく 見 ると この3 人 だけが 他 の 蒙 古 兵 とくらべて 輪 郭 線 身 なり 表 情 などの 筆 使 いが 異 なることがわかる) 絵 7Ⅰの 右 側 にある 絵 6は 右 側 に 季 長 の 姉 聟 三 井 資 長 がいて 馬 上 から 矢 を 蒙 古 兵 に 射 かけ 左 側 に 蒙 古 兵 が10 人 (うちひとりは 騎 馬 ) 資 長 に 背 をむけて 逃 げている これを 絵 7Ⅰと 絵 7Ⅱの 間 に 移 すと 右 から 左 へ 蒙 古 兵 が 退 却 するようす が 自 然 につながる(ただし 間 に 若 干 の 欠 落 がある) 絵 7Ⅰとつながることになった 絵 5には 馬 を 射 ら れて 徒 立 ちになった 季 長 の 旗 指 のうしろを 乗 馬 の 旗 指 に 先 導 された 白 石 通 泰 の 軍 団 が 懸 けるようす が 描 かれ 詞 書 cにある 通 泰 が 季 長 の 急 場 を 救 った 状 況 が 明 瞭 になる いっぽう 絵 7Ⅱの 左 に 続 く 絵 八 では 網 代 や 格 子 の 楯 を 並 べたうしろに 蒙 古 兵 が 陣 を 布 いており これは 詞 書 aを 描 いたものであ る この 復 原 案 では 詞 書 cに 対 応 する 絵 が 詞 書 aに 対 応 する 絵 よりも 前 ( 右 )に 来 て 詞 書 と 絵 が 時 間 的 に 逆 転 する それを 必 然 としたのは 右 端 に 白 石 通 泰 の 騎 馬 軍 団 左 端 に 蒙 古 軍 の 陣 というマッ スを 配 し 中 央 右 側 で 季 長 主 従 の 孤 軍 奮 闘 左 側 でそれに 追 われる 蒙 古 兵 を 描 くという 画 面 構 成 の 論 理 である これはまさしく 先 懸 けの 功 の 絵 解 きである 日 本 側 の 戦 法 は あくまで 単 独 のリーダーに 率 いられた 軍 団 が 独 自 の 意 志 で 動 く 軍 団 は 大 きい もので 菊 池 武 房 や 白 石 通 泰 の100 余 騎 小 さいものでは 季 長 のように 数 騎 である 詞 書 bによれば 従 者 すけみつに 味 方 の 到 着 を 待 ち 証 人 を 立 てて 戦 うよう 勧 められた 季 長 は 先 懸 けこそが 弓 箭 の 道 だ と 言 い 捨 てて 敵 陣 に 突 入 した ここにはふたつの 戦 い 方 が 示 されているが どちらも 個 人 中 心 であ
161 蒙 古 襲 来 と 異 文 化 接 触 159 る 点 で 共 通 している 先 懸 けのような 冒 険 的 行 動 は 戦 闘 全 体 の 帰 趨 にとってはマイナスになりなね ないが 当 時 の 日 本 軍 はそれを 賞 する 以 外 の 論 理 をもちあわせていなかった しかしいっぽうで 通 泰 軍 団 は 騎 馬 武 者 たちがおなじ 姿 と 向 きをもつ 塊 として 描 かれ 統 一 的 な 意 志 を 表 象 する 軍 団 の 規 模 が 大 きくなれば その 内 部 で 集 団 戦 法 の 比 重 が 大 きくなるようである さらに すけみつが 勧 めた 戦 法 には 個 々の 武 士 団 を 越 えた 集 団 戦 につながる 要 素 があり だからこそ 季 長 の 弓 箭 の 道 先 を もて 賞 とす が 際 だつのである 海 戦 絵 詞 下 巻 はほとんどが 弘 安 の 役 の 海 戦 場 面 で 占 められる 中 世 の 海 戦 をこれだけ 克 明 に 描 い た 絵 は 国 内 の 合 戦 についてもない まずは 船 の 描 写 から 見 よう 日 本 側 の 兵 船 には 大 小 の2 種 類 がある 小 は 草 野 大 矢 野 秋 月 らの 惣 領 が 率 い おのおの 10 名 未 満 を 乗 せる 刳 船 に 毛 が 生 えた 程 度 の 船 大 は 季 長 をふくむ 肥 後 勢 混 成 隊 や 少 弐 経 資 の 手 の 者 が 乗 る やや 大 型 の 構 造 船 である 後 者 の1 艘 の 船 尾 には 敵 船 に 乗 り 移 る 際 に 使 う 小 さな 端 船 がつないである 季 長 が 蒙 古 兵 の 首 を 掻 き 切 る 有 名 なシーンでは そのやや 大 型 のものを 季 長 の 従 者 が 敵 船 に 熊 手 で 引 き 寄 せている 対 する 蒙 古 軍 の 兵 船 も 大 小 の2 種 類 がある 小 は 走 舸 で 軽 快 な 操 船 が 可 能 なタイプ いわば 上 陸 用 の 船 である 船 上 に 居 室 をもたず 舷 側 に 楯 をならべて 防 御 する 数 隻 が 描 かれており そ のひとつには 舳 先 や 楯 に 日 本 軍 の 放 った 矢 が 無 数 に 突 き 立 っている 日 本 側 の 大 船 と 同 程 度 か そ れよりやや 大 きいように 見 える 大 は 闘 艦 で 甲 板 があり 船 倉 にも 多 くの 人 がはいれる 大 きいもの は 船 尾 にも1 室 を 設 ける 舷 上 には 網 代 の 垣 があり 甲 板 にいても 半 身 をかくせるようになっている 舷 側 の 孔 からオールを 突 きだして 漕 ぐ 季 長 の 乗 り 移 った1 隻 やその 左 側 に 描 かれた3 隻 がこれにあた り ある 船 上 では 兵 士 が 太 鼓 を 叩 き 銅 鑼 を 鳴 らしている 日 本 軍 は 船 いくさも 騎 馬 戦 同 様 個 人 中 心 だった 弘 安 役 の 終 盤 季 長 は 蒙 古 の 敗 残 兵 のいる 鷹 島 へ 向 かおうとするが 自 分 の 兵 船 が 回 漕 されてこず 途 方 にくれていた そこへ 通 りかかったたか まさという 武 士 の 船 に 守 護 のお 召 しがあります と 嘘 をついて 乗 せてもらおうとするが たかまさにた ちまち 見 破 られてしまう 拝 みたおしてやっと 季 長 本 人 だけ 乗 せてもらったが 兜 は 若 党 に 預 けたままに なってしまう 季 長 が 兜 がわりに 脛 当 を 額 に 当 てているのを 見 たたかまさは かたわらにいた 若 党 の 兜 を 貸 そうとするが 季 長 は ありがたいおことばですが 兜 をお 着 けにならずに 討 たれなさっては 季 長 のせいでこうなったと 妻 子 がお 歎 きになりましょう そうなっては 身 の 痛 みですから いただくわけ
162 16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にはまいりません と 断 る 事 実 絵 詞 には 激 しい 動 きで 季 長 の 額 から 飛 んだ 脛 当 がしっかり 描 か れている 藤 本 2003 季 長 の 例 で 注 意 すべき 点 がふたつある 第 1に 各 御 家 人 は 自 前 で 船 を 用 意 しなければならな かった 第 2に どんな 手 段 を 使 ってでも 身 ひとつになってでも がむしゃらに 前 進 することこそ 正 義 だった 合 戦 の 翌 朝 季 長 から 戦 功 報 告 を 受 けた 関 東 の 使 者 は 自 船 候 はで 一 度 ならずかり 事 ( 虚 言 )のみ 仰 せ 候 て 船 々に 召 され 候 て 御 大 事 に 会 はせ 給 候 御 事 は 大 猛 悪 の 人 に 候 と 上 の 見 参 に 入 まいらせ 候 べく 候 と 約 束 している 大 猛 悪 はあまりの 勇 猛 ぶりにあきれた 気 もちをあらわす また 若 党 をおきざりにたかまさの 船 に 乗 ったとき 季 長 はまたも 弓 箭 の 道 進 むをもて 賞 とす と 言 っ ている 以 上 のような 日 本 側 の 攻 撃 を 迎 える 蒙 古 軍 の 戦 法 は これまたあくまで 組 織 的 だった 草 野 次 郎 の 夜 襲 で 被 害 を 被 ったあと 彼 らは 用 心 シテ 船 ヲ 鏁 合 押 廻 シテ 守 護 シ 寄 スル 者 在 レバ 大 船 ヨリ 石 弓 ヲ 下 スニ 日 本 ノ 船 小 クテ 不 被 打 破 云 事 ナシ という 戦 法 をとった( 愚 童 訓 ) 蒙 古 軍 が 船 上 で 用 いる 楯 は 数 種 類 あるが 船 ごとには 統 一 されており 軍 団 組 織 のあり 方 を 示 す 第 1は 焦 茶 色 の 長 方 形 の 板 で 上 部 に1 隻 は 白 丸 1 隻 は 黒 丸 1 隻 は 黒 い 帳 のような 模 様 が 描 かれる 第 2は 上 辺 が 雲 形 で 卍 の 模 様 が 描 かれ 裏 には 可 動 式 のつっかい 棒 が 付 く 卍 模 様 は 漢 人 の 間 で 用 いら れたもので 武 経 総 要 という 本 によると 皮 漫 という 生 牛 皮 でつくる 兵 器 の 表 面 にもこの 形 が 描 かれていたという 第 3は 外 形 は 卍 をあしらった 楯 とおなじだが 卍 の 部 分 が 四 角 い 窪 みになってい る 第 4は 一 枚 板 ではなく 網 代 や 簀 子 を 長 方 形 に 編 んだ 楯 である 弘 安 の 役 の 江 南 軍 は 職 業 軍 人 だけでなく 愚 童 訓 が 今 度 ハ 一 定 可 勝 可 居 住 料 トテ 世 路 ノ 具 足 耕 作 ノ 為 トテ 鋤 鍬 マデモ 持 セタリケリ と 述 べるように 移 民 船 団 の 性 格 ももっていた 大 多 数 がそんな 一 般 民 衆 から 構 成 される14 万 人 は 大 半 が 鷹 島 周 辺 の 海 に 沈 み 海 ノ 面 ハ 算 ヲ 散 スニ 不 異 死 人 多 重 テ 如 嶋 タリ という 情 景 を 呈 した( 愚 童 訓 ) 3. 仏 教 と 貿 易 蒙 古 襲 来 史 料 の 多 くは 仏 教 色 の 濃 い 日 本 中 世 の 文 化 状 況 からして 僧 侶 の 残 したテキストにな る とくに 日 蓮 の 場 合 立 正 安 国 論 の 予 言 以 来 対 蒙 古 関 係 の 推 移 がストレートに 宗 教 的 言 説 に 反 映 したため おびただしく 残 る 消 息 類 が 多 くの 情 報 をもたらしてくれる それだけでなく 彼 の 対 外 的 反 応 は 他 の 僧 侶 や 一 般 人 とは 対 照 的 で それ 自 体 が 異 文 化 接 触 の 特 異 なケースといえる 前 近 代 の 戦 争 においては 近 現 代 とはちがって 国 家 間 の 緊 張 が 文 化 的 経 済 的 交 流 の 断 絶 にかなら
163 蒙 古 襲 来 と 異 文 化 接 触 161 ずしも 直 結 せず 戦 争 状 態 と 貿 易 とはかならずしも 相 いれぬものではなかった 文 永 弘 安 両 役 には さまれた1278 年 フビライが 日 本 国 人 市 舶 に 貿 易 を 許 可 したのは その1 例 である( 元 史 世 祖 本 紀 ) また 1276 年 の 南 宋 首 都 臨 安 ( 杭 州 ) 陥 落 という 大 事 件 が 臨 安 をふくむ 江 南 地 域 に 根 本 的 な 社 会 変 動 をもたらしたようには 見 えない さすがに 弘 安 の 役 後 には 空 白 があるが それをすぎると 戦 争 状 態 の 継 続 にもかかわらず 日 本 江 南 間 の 貿 易 船 の 往 来 は 開 戦 前 よりさかんになる 以 上 のよう な 観 点 から 仏 教 と 貿 易 をとりあげてみたい 日 蓮 のユニークさ 日 蓮 にはいるまえに 蒙 古 襲 来 に 際 だった 反 応 を 示 したもうひとりの 僧 東 巌 慧 安 にふれておこう 洛 外 の 臨 済 宗 正 伝 寺 住 持 だった 東 巌 が 1271 年 9 月 15 日 に 八 幡 大 士 六 十 余 州 一 切 神 等 に 捧 げた 願 文 ( 正 伝 寺 文 書 )は 奥 に すへのよの 末 の 末 までわが 国 はよろづのくにゝすぐれたる 国 という 和 歌 がしるされていて 敗 戦 前 は 皇 国 精 神 の 発 露 としてもてはやされた しかしこの 願 文 の 高 麗 は 半 ば 蒙 古 に 違 背 し 本 朝 に 随 順 す という 一 節 から 彼 が 三 別 抄 の 牒 状 を 見 ており その 反 蒙 行 動 に 気 づいていたことがわかる ただせっかくの 気 づきも 神 功 皇 后 とその 子 八 幡 神 への 熱 烈 な 祈 りを 介 して 二 国 和 合 し 衣 冠 一 致 す 両 度 の 牒 使 は 高 麗 人 なり 顕 然 として 疑 ひ 無 し というように 高 麗 を 蒙 古 とひとしなみの 敵 と 見 る 伝 統 的 な 観 点 に 流 しこまれてしまう こうした 傾 向 は 当 時 の 知 識 階 層 に 通 有 のもので 中 国 とのつきあいが 深 い 臨 済 僧 東 巌 の 嗣 法 師 は 渡 来 僧 兀 庵 普 寧 であるも 例 外 ではなかった 9 月 21 日 に 朝 廷 で 議 論 された 口 宣 案 にも 西 蕃 ( 高 麗 )の 使 介 有 り て 北 狄 ( 蒙 古 )の 陰 謀 を 告 ぐ の 文 字 があったが( 吉 続 記 ) その 認 識 が 外 交 判 断 に 反 映 したようす はない 日 蓮 は 1260 年 に 立 正 安 国 論 を 幕 府 に 呈 示 して 法 華 経 にひとえに 帰 依 しなければ 他 国 侵 逼 難 が 生 起 すると 予 言 していたが はやくも5 年 後 にそれが 蒙 古 の 脅 威 として 現 実 化 したことで いっそ う 自 己 の 使 命 に 確 信 をもった 経 文 の 如 くんば 彼 の 国 より 此 の 国 を 責 めん 事 必 定 也 而 して 日 本 国 中 日 蓮 一 人 まさに 彼 の 西 戎 を 調 伏 を 為 すべき 人 と 兼 ねて 之 を 知 る と 豪 語 している 彼 には 幕 府 内 に 親 しい 情 報 提 供 者 (おそらく 信 者 )がいたらしく 民 間 の 宗 教 者 ではあるが 敏 速 に 蒙 古 関 係 の 情 報 に 接 することができた しかし 幕 府 は 天 台 以 外 の 諸 宗 派 を 過 激 に 排 撃 する 日 蓮 一 派 を 対 外 的 脅 威 のさなかに 結 束 を 攪 乱 する 不 穏 分 子 とみなし その 主 張 に 耳 を 貸 さないばかりか か えって 弾 圧 を 加 えた 三 別 抄 の 牒 状 に 接 した 幕 府 は 1271 年 9 月 13 日 九 州 に 所 領 をもつ 御 家 人 に 自 身 または 代 官 の 下 向 を 命 じ 異 国 の 防 禦 と 領 内 悪 党 の 鎮 圧 を 命 じたが 有 名 な 龍 口 法 難 が 起 き
164 16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たのはその 前 日 だった 日 蓮 一 派 の 言 動 は 悪 党 に 準 ずるものと 見 なされたのである 川 添 2008 日 蓮 はこうした 幕 府 の 謗 法 が 続 くかぎり 蒙 古 の 侵 略 は 不 可 避 と 考 え そのことを 蒙 古 国 は 天 の 御 使 として 法 華 経 の 行 者 ( 日 蓮 自 身 のこと)をあたむ 人 人 を 罰 せらるゝか と 解 釈 した( 異 体 同 心 事 ) 幕 府 が 蒙 古 の 使 者 を 斬 ったことについても 日 本 国 の 敵 にて 候 念 仏 真 言 禅 律 等 の 法 師 は 切 れすして 科 なき 蒙 古 の 使 の 頸 を 刎 られ 候 ける 事 こそ 不 便 に 候 へ と きびしく 批 判 している( 蒙 古 使 御 書 ) 蒙 古 の 意 味 をこのように 理 解 した 日 蓮 は 神 の 与 えた 試 練 に 苦 しむ 人 びとの 姿 をとらえた 貴 重 な テキストを 残 した 去 文 永 十 一 年 < 太 歳 甲 戌 > 十 月 に 蒙 古 国 より 筑 紫 によせて 有 しに 対 馬 の 者 かためて 有 し に 摠 馬 尉 ( 宗 助 国 ) 逃 けれは 百 姓 等 は 男 をは 或 は 殺 し 或 は 生 取 にし 女 をは 或 は 取 集 て 手 をとをして 船 に 結 付 或 は 生 取 にす 一 人 も 助 かる 者 なし 壱 岐 によせても 又 如 是 ( 一 谷 入 道 殿 御 書 ) 当 時 つくしへむかへハ とゝまるめこゆくをとこ はなるゝときハかわをはくかこと く かをとかをとをとりあわせ 目 と 目 とをあわせてなけきしか 次 第 にはなれて ゆい のはま いなふら こしこへ さかわ はこねさか 一 日 二 日 すくるほとに あゆみくと をさかるあゆみを かわも 山 もへたて 雲 もへたつれハ うちそうものハなみたなり ともなうものハなけきなり いかにかなしかるらんかとなけかんほとに もうこのつわ ものせめきたらハ 山 か 海 もいけとりか ふねの 内 かかうらいかにて うきめにあハん ( 富 木 尼 御 前 御 書 ) 日 蓮 の 眼 には 謗 法 に 与 する 日 本 の 神 祇 はまったく 無 力 であった 文 永 の 役 で 筥 崎 八 幡 宮 が 焼 けたことを 彼 国 の 大 王 は 此 国 の 神 に 勝 たる 事 あきらけし と 断 じ 努 めを 果 たせなかった 八 幡 神 を 大 科 の 神 だとまでいう 川 添 2008 先 述 した 禅 宗 の 東 巌 や もっと 有 名 な 律 宗 の 叡 尊 が 日 本 国 の 守 護 神 である 八 幡 神 に 熱 誠 を 献 げ 法 力 で 蒙 古 に 立 ちむかおうとしたのに 対 して 日 蓮 は 国 家 的 正 統 派 とは 対 蹠 的 な 場 所 に 立 っていた それだけに 弘 安 の 役 の 結 末 は 彼 にとって 意 外 なものだったろ う 不 安 に 駈 られた 弟 子 からその 意 味 を 問 われて 此 別 一 門 大 事 也 惣 日 本 国 凶 事 也 いつも の 事 なれは 秋 風 に 纔 水 敵 船 賊 船 なんとの 破 損 仕 て 候 を 大 将 軍 生 取 たりなんと 申 祈 成 就 の 由 を 申 候 けに 候 也 又 蒙 古 の 大 王 の 頸 の 参 て 候 かと 問 給 へし と 答 えたが やはり 強 弁 にすぎよう これを 最 後 に 消 息 から 蒙 古 への 言 及 は 消 え 1282 年 の 死 にいたる
165 蒙 古 襲 来 と 異 文 化 接 触 163 最 後 の 遣 使 と 五 山 文 化 の 黎 明 弘 安 の 役 後 もフビライは 日 本 征 討 をあきらめず くりかえし 戦 争 準 備 を 命 じたが 国 内 外 に 悪 条 件 が 重 なって 実 行 にはいたらなかった しかし 働 きかけの 方 法 は 戦 争 一 辺 倒 ではなく 弘 安 役 後 まもな い1283 年 国 信 使 愚 渓 如 智 王 君 治 に 持 たせた 日 本 国 あての 詔 ( 善 隣 国 宝 記 巻 上 )には 和 好 の 外 に 余 善 無 く 戦 争 の 外 に 余 悪 無 し とある かつて 日 本 が 使 節 を 捕 えて 返 さなかったので 問 罪 のため 海 軍 を 送 った 交 戦 の 合 間 には 使 者 を 送 ったのに 日 本 は 一 言 も 返 答 しないで わが 軍 には むかった という 主 張 は 道 理 にかなっており 和 好 の 求 めを 口 先 だけの 甘 言 とかたづけるわけにはい かない むしろ 武 辺 一 辺 倒 の 日 本 外 交 の 硬 直 ぶりが 浮 き 彫 りになる しかし この 年 と 翌 年 の2 度 試 みられた 交 渉 は 日 本 の 中 央 まで 達 することなく 終 わった 1294 年 にフビライが 死 に 跡 を 嗣 いだ 孫 のテムルが98 年 国 交 樹 立 を 求 める 使 節 を 日 本 へ 送 ったの は フビライの 硬 軟 両 様 のうち 和 好 路 線 に 則 ったものといえる このとき 指 名 されたのが 舟 山 列 島 に ある 宝 陀 寺 ( 普 陀 山 ) 住 持 一 山 一 寧 で 発 遣 にさきだって 妙 慈 弘 済 禅 師 江 浙 釈 教 総 統 という 肩 書 が 付 与 された 使 節 の 送 達 はたまたま 慶 元 ( 寧 波 )に 入 港 した 商 船 に 託 された 普 陀 山 は 慶 元 から 日 本 へ 向 かう 航 路 上 にあり 開 山 の 恵 萼 は9 世 紀 中 葉 に 活 動 した 日 本 人 である 仏 教 と 民 間 貿 易 に 支 えら れた 国 家 外 交 だったが これを 最 後 に 元 が 日 本 に 外 交 使 節 を 送 ることはなかった 一 山 は1247 年 の 生 まれで 明 州 ( 寧 波 )や 杭 州 の 諸 寺 で 天 台 律 禅 をはば 広 く 学 び ついに 禅 宗 五 山 2 位 の 天 童 寺 で 簡 翁 居 敬 に 嗣 法 した 仏 教 以 外 にも 文 学 書 朱 子 学 などに 堪 能 なオール ラウンドの 文 化 人 だった 西 尾 1999a 1299 年 日 本 にいたった 一 山 を 幕 府 では 処 刑 せよとの 論 も あったが 沙 門 は 福 田 なり 有 道 の 士 は 万 物 に 心 無 し( 何 ものにもとらわれない) 元 国 に 在 りては 元 の 福 なり 我 が 邦 に 在 りては 我 が 福 なり という 観 点 から 北 条 貞 時 の 決 断 で 伊 豆 の 修 禅 寺 に 幽 閉 することになった ほどなく 幽 閉 も 解 かれ 渡 来 僧 が 住 するのが 慣 例 だった 建 長 寺 の 住 持 に 据 えられ た 1317 年 に71 歳 で 没 するまで 円 覚 寺 南 禅 寺 にも 住 し 北 条 得 宗 家 や 後 宇 多 院 の 崇 敬 を 受 け た ことに 後 宇 多 院 は 1319 年 に 一 山 の 頂 相 ( 肖 像 画 )にみずから 宋 地 万 人 傑 本 朝 一 国 師 という 賛 を 加 えたという( 一 山 和 尚 行 記 ) 一 山 に 嗣 法 した 日 本 僧 に 雪 村 友 梅 ( )がいる 今 谷 1994 雪 村 は1307 年 から23 年 間 元 に 滞 在 し 同 時 代 の 中 国 文 化 を 吸 収 した 日 本 の 初 期 五 山 文 学 を 代 表 する 作 家 で 在 元 中 の 詩 文 集 に 岷 峨 集 帰 国 後 の 作 品 集 に 宝 覚 真 空 禅 師 語 録 がある 一 山 に 発 する 法 系 は 大 門 派 をなさな かったが 嗣 法 をともなわない 場 で 彼 の 与 えた 文 化 的 影 響 は 絶 大 である 虎 関 師 錬 ( )は 一 山 から 日 本 の 高 僧 の 事 蹟 を 問 われて 即 答 できず 僧 伝 集 の 形 態 をとる 日 本 仏 教 史 元 亨 釈 書 を 著
166 16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した 夢 窓 疎 石 ( )は 一 山 を 慕 って 京 都 から 鎌 倉 へ 下 り 建 長 寺 入 寺 を 志 願 して 偈 頌 ( 仏 教 的 漢 詩 )の 試 験 で 好 成 績 を 収 めた その 後 夢 窓 派 は 室 町 幕 府 朝 廷 の 外 護 のもとに 臨 済 宗 の 最 大 勢 力 を 占 めるようになる 龍 山 徳 見 ( )は 一 山 が 円 覚 寺 にいたときやはり 偈 頌 の 試 験 で 首 席 をとった 1305 年 から45 年 間 も 元 に 滞 在 し 帰 国 後 多 くの 文 筆 僧 を 育 てた 作 品 集 に 黄 龍 十 世 録 がある 一 山 は みずからが 住 持 する 寺 に 修 行 僧 を 受 けいれる 際 偈 頌 を 作 らせ 中 国 語 で 朗 詠 させた 寺 内 の 日 常 生 活 でも 一 定 度 の 中 国 語 能 力 や 中 国 文 化 の 素 養 が 要 求 された 学 芸 の 方 面 で 彼 が 日 本 の 禅 宗 社 会 に 与 えた 影 響 はきわめて 大 きく 日 本 五 山 文 学 の 祖 と 評 される 西 尾 賢 隆 は わが 国 の 禅 家 が 幅 広 く 読 書 人 として 中 国 の 士 大 夫 にも 匹 敵 する 素 養 をもつ 一 つのきっかけとなったのは 一 山 による 偈 頌 の 試 験 であったといって 過 言 ではない と 指 摘 している 西 尾 1999a 倭 寇 事 件 と 貿 易 統 制 弘 安 の 役 後 日 元 間 の 商 船 の 往 来 はしばらくとだえていたが **** 年 に 復 活 し 以 後 14 世 紀 前 半 には 宋 代 以 上 にさかんになった 商 船 を 利 用 して 渡 海 した 禅 僧 たちに 関 わる 史 料 から そのようすが 復 元 できる この 時 代 には 集 中 して 寺 社 造 営 料 唐 船 すなわち 寺 社 の 造 営 費 用 を 貿 易 利 潤 によっ て 稼 ぎ 出 そうとする 勧 進 の 船 が 中 国 に 送 られたが その 実 態 は 日 元 間 を 往 来 する 中 国 人 商 人 経 営 の 貿 易 船 に 対 して 日 本 中 国 日 本 の 一 往 復 の 航 海 にかぎって 日 本 の 政 治 権 力 が 付 与 したタ イトルにすぎなかった 村 井 年 に 慶 元 で 日 本 商 人 と 役 人 が 衝 突 し 城 内 が 多 く 焼 失 するという 倭 寇 事 件 が 起 きて 以 来 元 側 の 倭 寇 を 理 由 とする 倭 船 入 港 規 制 が 断 続 的 に 行 われた 榎 本 2007 この 時 期 経 済 的 には 貿 易 拡 大 の 要 因 が 存 在 したが 政 治 的 軍 事 的 には 貿 易 規 制 が 強 まりつつあった そこに 蒙 古 襲 来 が 影 をおとしている 1328 年 冬 福 州 長 楽 港 に 日 本 から 来 た 貿 易 船 がおり 翌 年 日 本 へ 渡 航 して 翌 々 年 関 東 大 仏 造 営 料 唐 船 の 看 板 を 掲 げることになる 福 州 に 日 本 からの 船 が 入 るのは 異 例 のことだが その 背 景 には 年 ころに 慶 元 で 倭 寇 事 件 が 発 生 し 当 局 が 日 本 からの 船 の 慶 元 入 港 を 禁 止 していた 事 実 があった さらに 1342 年 冬 に 慶 元 に 入 港 した 天 竜 寺 船 の 場 合 からは 倭 船 規 制 の 状 況 がくわしくわかる 従 来 天 竜 寺 船 は 大 きな 利 益 を 得 て 帰 国 したことのみが 強 調 されてき たが じつは 慶 元 で 苦 難 に 見 舞 われていた 1320 年 以 来 慶 元 の 防 衛 に 任 じた 鍾 万 戸 は 年 ころに 慶 元 で 起 きた 倭 寇 を 鎮 圧 し それ 以 来 慶 元 を 管 轄 する 浙 東 道 都 元 帥 は 倭 船 の 交 易 流 通 を 禁 止 していた 鍾 万 戸 はこの 禁 令 に 基 づいて
167 蒙 古 襲 来 と 異 文 化 接 触 165 天 龍 寺 船 を 扱 った 貿 易 責 任 者 至 本 は 賊 船 ではないと 弁 明 したが 交 渉 は 難 航 した 年 を 越 してよう やく 貿 易 は 認 められたが 禅 僧 たちの 上 陸 はなお 許 されなかった 渡 海 僧 愚 中 周 及 は 1 中 国 商 人 の 協 力 を 得 て 小 船 で 慶 元 を 素 通 りし 著 名 な 禅 僧 のいる 寺 にかくまわれたが こんな 成 功 はむしろ 例 外 だった 榎 本 渉 2007 が 見 いだした 抄 物 史 料 愚 中 周 及 年 譜 抄 から つぎのような 情 報 が 得 ら れる 1 天 龍 寺 船 に 便 乗 して 求 法 をめざした 僧 の 数 は60 余 人 であった 2そのうち 上 陸 に 成 功 したの は 愚 中 の 一 行 11 人 のみであった 3 渡 来 僧 清 拙 正 澄 の 弟 子 たち17 人 は 密 入 国 しようとして 警 備 兵 に 捕 まり 怒 った 鍾 万 戸 に 皆 殺 しにされた 4 天 龍 寺 船 に 残 留 していた30 余 人 の 僧 たちは これを 聞 いて 全 員 日 本 に 帰 国 した 類 似 の 状 況 は 日 本 側 の 窓 口 においても 起 きていた 12 世 紀 ~13 世 紀 前 半 の 博 多 では 中 国 商 人 が 在 蕃 貿 易 を 営 み 多 彩 な 社 会 活 動 を 展 開 していた ところが13 世 紀 後 半 になると そうした 動 向 が 史 料 上 からパタリと 姿 を 消 す 在 蕃 の 衰 退 と 貿 易 船 往 来 の 増 加 は 正 の 相 関 関 係 にあるらしい 弘 安 の 役 直 後 幕 府 は 他 国 より 始 めて 来 入 せる 異 国 人 等 の 事 制 止 を 加 ふべし という 法 令 を 発 した 新 来 外 国 人 の 排 除 により 博 多 の 中 国 人 居 留 地 は 衰 退 の 一 途 をたどり 日 本 居 住 がむずかしくなっ た 中 国 商 人 は つねに 貿 易 船 を 動 かしていなくてはならなくなったのではないか こうして 蒙 古 襲 来 を 境 に 博 多 にはしだいに 公 権 力 の 支 配 が 浸 透 していった 天 竜 寺 船 の 渡 航 にさ いして 博 多 の 公 府 官 司 が 乗 船 者 の 選 定 に 一 定 の 関 与 をしていたことが 確 認 できる 1342 年 中 巌 円 月 は 再 度 の 中 国 渡 航 をもくろんで 博 多 に 至 ったが 官 司 の 文 書 下 り 乗 舶 を 禁 ず 故 に 再 出 を 得 なかった( 中 巌 月 和 尚 自 歴 譜 ) 1350 年 博 多 の 息 浜 に 龍 山 徳 見 以 下 18 人 の 日 本 人 僧 侶 と 船 主 以 下 11 人 の 中 国 人 を 乗 せた 宋 船 が 着 岸 した 代 官 から 報 告 を 受 けた 九 州 探 題 一 色 直 氏 は 帰 国 僧 の 名 簿 を 添 えて 室 町 幕 府 に 報 告 した( 園 太 暦 ) これらの 例 から 探 題 が 出 入 国 管 理 機 能 を はたすために 都 市 博 多 への 規 制 力 を 強 めていったようすがうかがわれる おわりに 中 世 の 日 本 人 にとって 蒙 古 襲 来 はまれにみる 異 文 化 接 触 の 経 験 だった それは 日 本 人 の 対 外 意 識 に 大 きな 痕 跡 を 残 した ただしそれは 異 なるもの への 理 解 という 方 向 でなく 日 本 を 他 国 に すぐれた 神 聖 空 間 として 異 なるもの への 蔑 視 と 排 除 をともなう 神 国 思 想 の 定 着 という 方 向 をた どった 神 が 国 を 守 る という 言 説 も 敵 に 関 するなにがしかの 理 解 をふまえて 自 己 を 再 認 識 すると いうのでなく 国 際 社 会 では 通 用 しない 空 疎 なお 国 自 慢 を 述 べたてたにすぎなかった 蔑 視 観 の 深 まりについては 日 本 が 新 羅 を 朝 貢 国 として 従 える 歴 史 的 起 点 とされてきた 神 功 皇 后
168 16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の 三 韓 征 伐 伝 説 の 変 化 からうかがうことができる その 元 祖 である 日 本 書 紀 では 征 伐 の 動 機 は 財 宝 への 欲 望 とされ また 新 羅 を 屈 服 させて 馬 飼 とした と 書 かれている これが 蒙 古 襲 来 を 経 た 鎌 倉 末 の 愚 童 訓 になると 征 伐 の 動 機 は 仇 討 ちとなり したがってその 前 段 に 新 羅 の 日 本 侵 攻 が 創 作 される 馬 飼 の 話 は 皇 后 が 弓 の 弭 で 岩 に 新 羅 国 の 大 王 は 日 本 の 犬 なり と 書 きつけた とい う 話 に 変 わる 金 1999 愚 童 訓 には 三 韓 征 伐 で 皇 后 に 付 き 従 った 者 として 全 国 各 地 の 神 々の 名 がおびただしくあら われる 彼 らはみな 弓 箭 甲 冑 を 帯 びて 征 伐 に 赴 くつわものだった 同 様 に 蒙 古 合 戦 も 人 と 人 と の 戦 いだったのと 少 なくとも 同 程 度 に 神 と 神 との 戦 いだった したがって 祈 祷 という 戦 闘 行 為 に 対 して 神 領 寄 進 という 恩 賞 が 求 められた 対 外 戦 争 という 希 有 の 経 験 も 国 内 合 戦 の 論 理 でとらえられ 認 識 の 変 革 にはつながらなかった では 蒙 古 襲 来 は 民 衆 の 意 識 に 何 を 残 したのか 1269 年 に 対 馬 まで 来 てひきかえした 蒙 古 使 は 塔 二 郎 弥 二 郎 というふたりの 島 民 をつれ 帰 った 燕 京 に 送 られたふたりに フビライはみずから 爾 国 は 中 国 に 朝 覲 し 其 の 来 れるや 尚 し 矣 今 朕 の 爾 国 の 来 朝 を 欲 するは 以 て 汝 に 逼 るには 非 ざる 也 但 だ 名 を 後 に 垂 れんと 欲 する 耳 と 語 りかけ 壮 麗 な 宮 殿 を 仰 ぎ 見 たふたりは 天 堂 仏 刹 有 り と 聞 くは 正 に 是 れを 謂 ふ 也 と 奏 した( 高 麗 史 元 宗 世 家 10 年 7 月 甲 子 条 ) 京 鎌 倉 はおろか 博 多 さえも 見 たことが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 庶 民 の 超 絶 体 験 は どことなくファンスティックな 趣 きがある む ろんこれが 日 本 人 の 意 識 に 何 らかの 痕 跡 を 残 したというわけではないが そのような 体 験 をした 日 本 人 がいたことは 記 憶 に 留 めておいてよいだろう いっぽう 民 衆 が 異 賊 の 侵 略 から 受 けた 恐 怖 は 得 体 の 知 れないものを 意 味 する ムクリコクリ( 蒙 古 高 句 麗 ) ということばに 残 った 井 伏 鱒 二 の 小 説 黒 い 雨 には 人 びとが 広 島 の 原 爆 雲 を ムク リコクリの 雲 と 呼 んだという 描 写 がある 田 中 1982 また 宮 城 県 仙 台 市 には モクリコクリの 碑 と 呼 ばれる 中 世 の 板 碑 があり これを 削 った 粉 を 呑 むと 百 日 咳 に 効 くといわれている 得 体 の 知 れない 威 力 をもつものにすがって 疫 病 などの 脅 威 に 対 抗 しようという 心 性 は めずらしいものではない 参 考 文 献 荒 木 和 憲, 2008, 文 永 7 年 2 月 日 付 大 宰 府 守 護 所 牒 の 復 元 日 本 高 麗 外 交 文 書 論 の 一 齣 ( 年 報 太 宰 府 学 2) 伊 藤 幸 司, 2002, 蒙 古 襲 来 をめぐる 円 爾 と 南 浦 紹 明 ( 都 府 楼 33) 今 谷 明, 1994, 元 朝 中 国 渡 航 記 雪 村 友 梅 の 数 奇 な 運 命 ( 宝 島 社 )
169 蒙 古 襲 来 と 異 文 化 接 触 167 榎 本 渉, 2007, 東 アジア 海 域 と 日 中 交 流 9~14 世 紀 ( 吉 川 弘 文 館 ) 太 田 彩, 2000, 絵 巻 蒙 古 襲 来 絵 詞 < 日 本 の 美 術 414> ( 至 文 堂 ) 太 田 彌 一 郎, 1995, 石 刻 史 料 賛 皇 復 県 記 にみえる 南 宋 密 使 瓊 林 について 元 使 趙 良 弼 との 邂 逅 ( 東 北 大 学 東 洋 史 論 集 6) 川 添 昭 二, 2008, 蒙 古 襲 来 史 料 としての 日 蓮 遺 文 ( 九 州 史 学 150) 金 光 哲, 1999, 中 近 世 における 朝 鮮 観 の 創 出 ( 校 倉 書 房 ) 佐 伯 弘 次, 2003, 日 本 の 中 世 9モンゴル 襲 来 の 衝 撃 ( 中 央 公 論 新 社 ) 佐 藤 鉄 太 郎, 2005, 蒙 古 襲 来 絵 詞 と 竹 崎 季 長 の 研 究 ( 錦 正 社 ) 杉 山 正 明, 2003, モンゴル 時 代 のアフロ ユーラシアと 日 本 ( 近 藤 成 一 編 日 本 の 時 代 史 9モンゴル の 襲 来 吉 川 弘 文 館 ) 朱 雀 信 城, 2008, 至 元 8 年 9 月 25 日 付 趙 良 弼 書 状 について ( 年 報 太 宰 府 学 2) 田 中 健 夫, 1982, ムクリコクリ ( 同 対 外 関 係 と 文 化 交 流 思 文 閣 出 版 初 出 1967) 張 東 翼, 2005, 1269 年 大 蒙 古 国 中 書 省 の 牒 と 日 本 側 の 対 応 ( 史 学 雑 誌 114 8) 西 尾 賢 隆, 1999a, 元 朝 国 信 使 寧 一 山 ( 同 中 世 の 日 中 交 流 と 禅 宗 吉 川 弘 文 館 初 出 1990) 西 尾 賢 隆, 1999b, モンゴル 襲 来 前 夜 の 日 元 交 渉 の 一 面 趙 良 弼 と 大 応 ( 同 中 世 の 日 中 交 流 と 禅 宗 吉 川 弘 文 館 初 出 1999) 旗 田 巍, 1965, 元 寇 蒙 古 帝 国 の 内 部 事 情 ( 中 公 新 書 ) 藤 本 正 行, 2003, 鎧 をまとう 人 びと 合 戦 甲 冑 絵 画 の 手 びき ( 吉 川 弘 文 館 ) 村 井 章 介, 1988, 高 麗 三 別 抄 の 内 乱 と 蒙 古 襲 来 前 夜 の 日 本 ( 同 アジアのなかの 中 世 日 本 校 倉 書 房 初 出 1982) 村 井 章 介, 2001, 北 条 時 宗 と 蒙 古 襲 来 時 代 世 界 個 人 を 読 む (NHKブックス) 村 井 章 介, 2003, 分 裂 する 王 権 と 社 会 ( 中 央 公 論 新 社 ) 村 井 章 介, 2005a, 東 アジアのなかの 日 本 文 化 ( 放 送 大 学 教 育 振 興 会 ) 村 井 章 介, 2005b, 寺 社 造 営 料 唐 船 を 見 直 す 貿 易 文 化 交 流 沈 船 ( 歴 史 学 研 究 会 編 港 町 の 世 界 史 1 港 町 と 海 域 世 界 青 木 書 店 ) 山 本 光 朗, 2001, 元 使 趙 良 弼 について ( 北 海 道 学 芸 大 学 史 学 会 史 流 40) 吉 田 光 邦, 1975, 蒙 古 襲 来 絵 詞 に 於 ける 武 器 について ( 新 修 日 本 絵 巻 物 全 集 10 角 川 書 店 ) 李 領, 1999, 元 寇 と 日 本 高 麗 関 係 ( 同 倭 寇 と 日 麗 関 係 史 東 京 大 学 出 版 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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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李 在 範 ( 京 畿 大 学 校 人 文 学 部 史 学 専 攻 ) 1. はじめに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を 全 体 的 にある 特 徴 的 な 状 況 として 言 うことは 難 しい そうといって 時 期 別 で 差 別 化 して 言 うことも 易 しくはない 1) それはこの 時 期 に 関 する 研 究 も 不 進 であり 実 際 に 交 流 関 係 を 明 らかにするための 資 料 が 充 分 に 残 っていない 状 況 である ある 意 味 では 実 際 に 交 流 関 係 が 活 溌 では なかったので 伝 えられてきた 資 料 がそれしか 残 っていないという 主 張 が 妥 当 のように 聞 こえるそのよう な 分 野 である この 時 期 に 両 国 間 の 関 係 が 疎 遠 するしかなかった 理 由 は 数 多 くあるだろうが まず 当 時 の 東 アジア の 国 際 環 境 と 関 連 があると 言 えよう 高 麗 が 建 国 した918 年 頃 の 国 際 情 勢 は 東 アジア 各 国 が 対 外 的 な 問 題 よりは 自 国 の 混 乱 収 拾 に 優 先 的 に 置 重 するしかなかった 処 地 であった 高 麗 としては 後 三 国 の 分 裂 を 一 応 統 一 して 急 な 状 態 は 片 付 けたというものの 地 方 で 勃 発 する 豪 族 らの 反 撥 と 王 室 内 で 展 開 された 王 位 争 奪 戦 は 国 家 を 安 定 し 難 く 作 ったのである 引 き 続 き 高 麗 の 門 閥 貴 族 たちの 間 の 勢 力 争 いも 高 麗 の 総 力 を 国 際 的 に 回 すことには 適 合 しない 与 件 であった 一 方 高 麗 の 周 辺 国 で 一 番 多 い 影 響 を 与 えた 中 国 の 状 態 もあまり 有 利 なことではなかった 高 麗 建 国 期 の 中 国 の 事 情 はいわゆる 唐 末 五 代 の 時 期 で 多 くの 王 朝 が 交 替 になっていた 混 乱 期 だった 1) 森 克 己 は10 世 紀 は 8-9 世 紀 の 政 治 中 心 的 な 對 外 關 係 から 經 濟 中 心 の 對 外 關 係 に 変 り 始 めた 大 轉 換 期 としてみて この 時 期 の 對 外 關 係 を 消 極 的 な 孤 立 主 義 または 閉 鎖 主 義 としてみていた 80 年 代 後 半 からは 石 上 英 一 を 中 心 にした 學 者 らはこの 時 期 を 積 極 的 な 孤 立 主 義 としてみるなど 一 連 の 試 圖 が 行 われた 李 炳 魯 はこのような 變 換 の 時 期 를9 世 紀 に 早 めたりする( 李 炳 魯, 11 世 紀 韓 日 兩 國 의 對 外 交 涉 에 關 한 一 考 察, 大 丘 史 學 제59집, 1-2쪽)
172 17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この 時 期 に 高 麗 は 日 本 よりも 中 国 の 多 くの 国 々との 関 係 に 力 をつくしながら 一 方 では 宋 を 無 視 する こともできなかった また 相 対 的 に 日 本 とは 大 きな 戦 争 などの 威 脅 がなかったので 疎 忽 するしかなかっ たのである そして 高 麗 としては 中 国 が 契 丹 族 によって 遼 が 成 立 され 大 規 模 の 高 麗 侵 入 を 敢 行 して 来 ると こ れに 対 する 対 備 として 他 の 国 との 関 係 に 気 を 配 る 余 裕 がなかった 実 際 に13 世 紀 以 前 まで 高 麗 の 対 中 国 関 係 は よほど 不 安 な 状 況 であった 契 丹 族 の 遼 が3 回 目 の 大 規 模 の 侵 略 戦 争 を 敢 行 したし そ の 後 を 引 き 続 き 女 真 族 が 金 を 建 てて 高 麗 に 圧 迫 を 加 えたりしていた このような 東 アジア 国 際 情 勢 の 中 で 高 麗 は 大 陸 との 関 係 改 善 に 多 大 な 力 を 入 れるしかない 状 況 であった 一 方 日 本 では 醍 醐 天 皇 の 延 喜 年 間 にもう 遣 唐 使 が 廃 止 され 中 国 との 国 交 が 断 絶 になった 状 態 であった その 後 が 宋 と 多 くの 関 係 を 持 とうとする 努 力 した 時 期 であった. それはいずれにせよ 高 麗 前 期 の 韓 日 関 係 に 関 する 研 究 は 日 本 の 研 究 が 主 を 成 していた 最 近 国 内 で 日 本 史 料 が 紹 介 されてから 一 連 の 研 究 などが 現 われているが まだ 満 足 するほどの 状 況 で はない それさえも 幸 なことであるということは 日 本 にある 資 料 が 国 内 に 紹 介 されたという 点 であろう 勿 論 資 料 集 という 性 格 自 体 が 限 界 があることは 分 明 であろうし そうだとしても 全 体 を 渉 獵 できる 機 会 を 持 つようになることは 非 常 に 幸 なことであろう 2) 本 考 はこのような 国 内 での 資 料 集 刊 行 と 関 連 して 高 麗 前 期 の 韓 日 関 係 を 全 体 的 に 眺 望 して 見 た 結 果 である 以 前 韓 国 での 高 麗 史 関 係 者 たちが 主 に 利 用 したことは 高 麗 史 を 含 めた 韓 国 の 文 献 で あった だから 自 然 に 韓 日 関 係 史 は 自 国 史 中 心 に 流 れるしかなかった したがって 韓 日 関 係 史 の 主 流 は 倭 寇 になり これを 討 伐 した 民 族 抗 争 がしばらくのあいだ 浮 刻 された 論 点 であった それで 高 麗 と 日 本 は 倭 寇 で 象 徴 される 関 係 になったのであろう しかし 倭 寇 以 前 の 韓 日 関 係 史 は 他 の 姿 で 現 われる そして 日 本 資 料 を 取 り 入 れることによって また 別 の 眼 目 からの 韓 日 関 係 史 を 眺 望 できるようになる 本 稿 では 既 刊 行 になった 日 本 文 献 の 中 の 韓 日 関 係 史 資 料 を 含 めて 既 発 表 された 研 究 成 果 を 渉 獵 して13 世 紀 以 前 の 韓 日 関 係 史 の 全 貌 を 考 えて みたい 関 係 史 を 説 明 するためには 時 期 的 に 区 分 することも 一 つの 方 法 になるだろう しかし 本 稿 では 高 麗 と 日 本 との 関 係 を 類 型 別 で 分 類 してみたい 例 えば 国 家 と 国 家 間 の 関 係 民 間 との 交 易 関 係 2) 本 稿 の 高 麗 前 期 の 韓 日 關 係 においては 旣 存 の 多 くの 学 者 の 助 力 を 頂 いた 必 要 な 場 合 には 脚 註 や 本 文 で 引 用 することで 感 謝 の 気 持 を 表 したい 特 に 張 東 翼 敎 授 の 勞 苦 に 感 謝 する 張 東 翼 敎 授 の 日 本 古 中 世 高 麗 資 料 硏 究 (서울 大 學 校 出 版 部, 2004)は 原 文 資 料 の 詳 細 な 紹 介 は 勿 論 資 料 內 容 まで 整 理 し てこの 分 野 に 大 きな 業 績 を 残 し 筆 者 にも 大 変 な 手 助 けになった そして 日 本 古 中 世 文 獻 속의 韓 日 關 係 史 料 集 成 (김기섭등, 혜안, 2005)も 大 きな 參 考 になった
173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171 文 化 的 交 流 などで 区 分 して13 世 紀 以 前 の 韓 日 関 係 の 大 綱 を 調 べてみることにする 2. 高 麗 と 日 本 の 国 家 対 国 家 間 の 関 係 13 世 紀 以 前 の 高 麗 と 日 本 との 関 係 を 一 言 で 整 理 することは 難 しい まず 史 料 上 の 問 題 があり 次 に 解 釈 上 の 問 題 がある 高 麗 史 は 高 麗 の 事 情 に 有 利 に 日 本 は 日 本 の 事 情 に 有 利 に 敍 述 したから である 本 章 では 史 料 に 現 われた 高 麗 と 日 本 との 関 係 を 類 型 別 に 分 類 して 報 告 し その 内 容 を 根 拠 に して13 世 紀 以 前 の 高 麗 と 日 本 との 関 係 を 設 定 して 見 よう まず 考 慮 しなければならない 事 項 が 国 家 対 国 家 の 関 係 としての 外 交 関 係 である すなわち 使 臣 の 交 換 を 通 して 韓 日 間 の 公 式 的 な 交 流 に 対 して 考 えてみたい 國 家 對 国 家 間 の 公 的 関 係 である 使 臣 の 交 換 は 関 係 史 でもっとも 重 要 な 内 容 になるだろう 国 家 間 の 位 相 そして 国 家 間 の 交 流 の 内 訳 などは 関 係 史 の 核 心 な 要 素 であるといえよう 我 が 国 と 日 本 の 関 係 資 料 をよく 見 れば 次 の< 表 1>のようになる 3) 連 番 年 度 関 連 事 実 典 拠 年 ( 景 明 王 6 延 喜 22) 年 ( 敬 順 王 3 延 長 7) < 表 1> 高 麗 と 日 本 の 国 家 間 の 公 式 関 係 6 月 5 日 日 本 朝 廷 が 対 馬 島 に 到 着 した 後 百 済 王 甄 萱 の 使 臣 輝 巌 を 帰 還 させよという 命 令 書 ( 官 府 )を 大 宰 府 に 送 る 1 月 13 日 耽 羅 島 を 往 来 していた 新 羅 船 舶 が 対 馬 島 下 県 郡 に 漂 着 島 守 坂 上 経 国 が 擬 通 事 長 岑 望 通 検 非 違 使 秦 滋 景 などをして 後 百 済 全 州 へ 送 還 させる 3 月 25 日 検 非 違 使 秦 滋 景 が 対 馬 島 到 着 全 州 王 ( 後 百 済 王 ) 甄 萱 が 日 本 と 通 交 を 希 望 したが 挫 折 した 事 実 を 知 らせる 甄 萱 が 長 岑 望 通 を 残 しておいて 秦 滋 景 だけ 帰 っ て 来 て 通 交 の 意 味 を 伝 える 5 月 17 日 全 州 王 の 使 臣 張 彦 澄 など20 人 が 対 馬 島 に 到 着 対 馬 島 司 がこれらを 拘 留 して 太 政 官 に 報 告 する 5 月 21 日 太 政 官 が 大 宰 府 に 官 府 を 下 して 張 彦 澄 などを 帰 還 させる 甄 萱 は 新 羅 の 部 下 なので 外 交 は 認 めない 年 ( 太 祖 20 承 平 7) / 扶 桑 略 記 延 喜 22 年 6 月 5 日 延 長 7 年 5 月 21 日 / 本 朝 文 粹 12 大 宰 府 答 新 羅 返 牒 / 扶 桑 略 記 延 長 7 年 5 月 17 日 / 扶 桑 略 記 延 長 7 年 5 月 17 日 / 扶 桑 略 記 延 長 7 年 5 月 17 日 / 扶 桑 略 記 延 長 7 年 5 月 21 日 / 異 国 牒 状 記 8 月 5 日 高 麗 が 送 った 牒 を 日 本 の 左 右 大 臣 以 下 閲 覧 / 日 本 紀 略 承 平 7 年 8 月 5 日 年 ( 太 祖 22 2 月 15 日 攝 政 藤 原 忠 平 が 高 麗 の 牒 を 左 少 弁 蔵 人 大 江 / 貞 信 公 記 抄 天 慶 2 年 2 月 15 日 3) 本 稿 に 収 録 された< 表 >の 内 容 は 張 東 翼 敎 授 が 前 揭 資 料 集 で 韓 日 兩 國 の 交 流 關 係 を 整 理 しておいた 內 容 (15 47 頁 )を 簡 略 にまとめたものである
174 17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天 慶 2) 朝 綱 に 送 る 年 ( 太 祖 23 天 慶 3) 年 ( 光 宗 23 天 禄 3) 年 ( 光 宗 25 天 延 2) 年 ( 成 宗 16 長 徳 3) 年 ( 顯 宗 10 寛 仁 3) 年 ( 顯 宗 11 寛 仁 4) 年 ( 文 宗 5 永 承 6) 年 ( 文 宗 10 天 喜 4) 年 ( 文 宗 34 承 暦 4) 3 月 11 日 大 宰 府 が 高 麗 の 広 評 省 に 送 る 答 書 [ 返 牒 ]ととも に 使 臣 団 を 返 す 6 月 21 日 以 来 日 本 朝 廷 で 高 麗 の 牒 を 検 討 し これに 対 して 議 論 する 9 月 23 日 大 宰 府 が 高 麗 の 南 京 ( 原 ) 府 使 咸 吉 兢 が 牒 を 持 っ て 対 馬 島 に 到 着 したことを 日 本 朝 廷 に 報 告 来 月 7 日 日 本 朝 廷 に 伝 逹 / 日 本 紀 略 天 慶 2 年 3 月 11 日 / 帥 記 承 暦 4 年 閠 8 月 5 日 25 日 / 貞 信 公 記 抄 天 慶 3 年 6 月 21 日 23 日 24 日 / 帥 記 承 暦 4 年 閠 8 月 5 日 25 日 / 日 本 紀 略 天 禄 3 年 9 月 23 日 ; 親 信 卿 記 天 禄 3 年 10 月 7 日. 10 月 15 日 大 宰 府 が 高 麗 の 金 海 府 使 李 淳 逹 が 牒 を 持 っ / 親 信 卿 記 天 禄 3 年 10 月 15 日. て 対 馬 島 に 到 着 したことを 日 本 朝 廷 に 報 告 10 月 20 日 日 本 朝 廷 で 高 麗 の 牒 に 対 して 議 論 する / 百 練 抄 天 禄 3 年 10 月 20 日. 閠 10 月 30 日 日 本 朝 廷 の 高 麗 国 交 易 使 ( 高 麗 貨 物 使 )が 対 馬 島 に 派 遣 され 高 麗 の 産 物 を 求 入 5 月 高 麗 の 牒 3 通 ( 受 信 処 は 日 本 国 対 馬 島 司 対 馬 島 ) 日 本 に 到 着 する 6 月 12 日 -13 日 日 本 の 公 卿 らが 高 麗 の 牒 に 日 本 を 侮 辱 する 文 句 があると 言 って 答 書 を 送 らないで 要 害 地 を 警 戒 するようにする 4 月 29 日 高 麗 の 鎭 溟 船 兵 都 府 署 が 海 賊 船 を 捕 獲 して 日 本 人 259 人 を 救 出 する 9 月 19 日 以 来 日 本 朝 廷 が 高 麗 が 女 真 族 に 捕 らえられた 日 本 人 送 還 と 一 緒 に 派 遣 した 鄭 子 良 が 持 って 来 た 牒 を 議 論 12 月 30 日 大 宰 府 が 日 本 朝 廷 に 高 麗 の 使 臣 に 関 する 日 記 を 捧 げる 高 麗 人 30 人 が 乗 船 した 船 泊 2 隻 が 対 馬 島 か ら 出 発 して 筑 前 国 に 漂 着 したという 2 月 以 来 女 真 族 によって 捕 らえられた 日 本 人 を 送 還 する ために 来 日 した 高 麗 の 使 臣 である 鄭 子 良 の 待 接 と 答 書 作 成 に 対 する 議 論 をする 7 月 10 日 日 本 朝 廷 が 高 麗 金 州 が 商 船 を 通 じて 牒 を 送 っ たことを 議 論 する -10 月 1 日 日 本 お 吸 物 の 使 臣 藤 原 頼 忠 など30 人 が 金 州 に 到 着 する. 2 月 5 日 大 宰 府 がもう 受 けていた 高 麗 礼 賓 省 の 牒 を 解 状 とともに 太 政 官 に 送 る / 日 本 紀 略 天 延 2 年 閠 10 月 30 日 ; 親 信 卿 記 天 延 2 年 閠 10 月 30 日. / 異 国 牒 状 記 長 徳 3 年. / 小 右 記 長 徳 3 年 6 月 12 日 13 日 ; 百 練 抄 長 徳 3 年 6 月 13 日 ; 水 左 記 承 暦 4 年 9 月 4 日 ; 帥 記 承 暦 4 年 9 月 2 日 3 日 ; 師 帥 記 貞 治 6 年 5 月 9 日. / 小 右 記 寛 仁 3 年 9 月 19 日 22 日 23 日 ; 左 経 記 寛 仁 3 年 9 月 22 日 / 異 国 牒 状 記 / 小 右 記 寛 仁 3 年 12 月 30 日. / 左 経 記 寛 仁 4 月 11 日 8 月 25 日 ; 日 本 紀 略 寛 仁 4 年 2 月 16 日 4 月 11 日 ; 百 練 抄 寛 仁 4 年 2 月 16 日. / 百 練 抄 永 承 6 年 7 月 10 日 ; 異 国 牒 状 記 ; 水 左 記 承 暦 4 年 9 月 4 日 ; 帥 記 承 暦 4 年 閠 8 月 25 日 9 月 2 日. / 高 麗 史 文 宗 10 年 10 月 己 酉. / 朝 野 群 載 20 太 宰 府 解. 4 月 19 日 日 本 朝 廷 で 礼 賓 省 の 牒 に 対 する 議 論 があり / 水 左 記 承 暦 4 年 4 月 19 日. 医 師 を 派 遣 することで 意 見 が 集 められる 10 月 2 日 命 令 書 [ 官 府 ]を 大 宰 府 に 下 して 高 麗 が 要 請 し / 師 帥 記 貞 治 6 年 5 月 9 日. た 医 師 を 派 遣 しないこと 高 麗 の 礼 物 を 返 すこと 大 宰 府 の 答 書 [ 反 貼 ]は 使 者 を 選 抜 して 送 ること そして 王 則 貞 を 法 に 回 付 して 処 罰 することなどを 伝 える
175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年 ( 文 宗 35 永 保 1) 年 ( 毅 宗 1 久 安 3) 年 年 ( 毅 宗 19 永 万 1) 11 月 3 日 大 江 朝 綱 が 源 俊 房 と 議 論 して 答 書 の 字 句 を 修 正 して 関 白 藤 原 師 実 に 報 告 し 最 終 本 を 完 成 した 後 これ を 大 宰 府 に 送 る 5 月 2 日 日 本 朝 廷 が 大 宰 府 が 高 麗 に 送 る 答 書 [ 半 分 牒 ] に 対 して 申 し 込 んだことを 議 論 する / 水 左 記 承 暦 4 年 11 月 3 日 ; 朝 野 群 載 20 太 宰 府 牒 ; 本 朝 続 文 粹 11 太 宰 府 牒. / 帥 記 永 保 1 年 5 月 2 日 ; 本 朝 続 文 粹 11 太 宰 府 解. 8 月 13 日 日 本 都 綱 黄 仲 文 など21 人 高 麗 に 到 着 する / 高 麗 史 毅 宗 1 年 8 月 甲 辰. 対 馬 島 の 寛 仁 が 牒 を 同 南 海 島 部 署 に 送 ることによって 都 / 高 麗 墓 誌 銘 集 成 李 文 鐸 墓 誌 銘. 府 署 がこれを 朝 廷 に 報 告 すると 都 府 署 の 名 前 で 答 書 [ 公 文 書 ]を 送 るようにする < 表 1>の 内 容 はいくつかの 類 型 で 区 分 することができる 高 麗 の 使 臣 が 日 本 に 行 った 境 遇 と 日 本 の 使 臣 が 高 麗 にきた 場 合 である そして 高 麗 の 国 家 的 な 使 節 が 直 接 朝 廷 に 行 った 境 遇 と 高 麗 の 牒 を 対 馬 島 に 伝 えられ 対 馬 島 でまた 朝 廷 に 伝 えた 方 法 などである そして 高 麗 の 地 方 官 の 名 前 で 送 った 牒 の 主 体 に 対 しても 明 か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また 高 麗 から 日 本 朝 廷 への 伝 逹 過 程 なども 明 か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 まず 上 の< 表 1>を 通 じて 分 かることは 高 麗 と 日 本 との 正 式 通 交 が 高 麗 の 後 三 国 統 一 以 後 から という 事 実 であり そして 相 当 な 時 間 の 間 隔 はあるものの 高 麗 と 日 本 の 公 式 的 な 外 交 関 係 は 続 けら 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あろう 高 麗 が 後 三 国 を 統 一 する 以 前 には 単 独 に 直 接 日 本 と 通 交 することは 難 しかったはずである 高 麗 の 建 国 が918 年 であるが 936 年 高 麗 が 後 三 国 を 統 する 前 までは 高 麗 使 節 は 日 本 へ 行 くことができな かったし 南 海 岸 一 帯 を 掌 握 した 後 百 済 の 使 節 が 日 本 と 往 来 していたことが 分 かる(1と2) それでは 高 麗 は 東 海 を 利 用 して 日 本 と 通 交 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だろうか この 部 分 は 高 麗 の 都 邑 である 松 岳 と 東 海 岸 の 地 理 的 な 条 件 が 考 慮 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し また 当 時 の 東 海 岸 を 利 用 した 渤 海 と 日 本 の 使 節 交 換 が 活 溌 していたことも 理 由 の 一 つになるだろうと 思 われる 4) 高 麗 の 公 式 的 な 使 節 による 牒 が 伝 逹 され 使 臣 団 が 初 めて 派 遣 されたことは937 年 939 年 940 年 の 順 序 である しかしこの 使 節 の 派 遣 は 日 本 側 で 拒 絶 された 5) しかしその 後 でも 政 府 次 元 の 正 常 的 な 通 交 関 係 は 続 けてなされてきた 使 臣 が 直 接 朝 廷 に 入 っていたかについてはしられていない し 4) この 頃 日 本 と 渤 海 との 公 式 使 節 の 交 換 は 度 々 施 行 されていた 今 後 の 硏 究 の 一 つとして 渤 海 と 日 本 そして 韓 半 島 との 関 係 の 硏 究 も 必 要 であろう 5) 拒 絶 の 理 由 について 韓 国 と 日 本 の 見 解 が 異 なっている 日 本 側 は 後 百 濟 と 高 麗 を 蕃 國 としてみていた からであるという しかし 韓 国 の 研 究 では 後 百 濟 が 日 本 へ 送 った 使 節 は 日 本 と 新 羅 の 聯 合 を 防 ぐための 意 圖 からであり 高 麗 使 臣 を 送 ったことは 韓 半 島 の 統 一 を 誇 示 するためであるという( 李 炳 魯 11 世 紀 韓 日 兩 國 의 對 外 交 涉 에 關 한 一 考 察 大 丘 史 學 59집, 94 頁 )
176 17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かし 高 麗 で 牒 が 朝 廷 に 報 告 された 例 は 少 なくない. この 時 期 に 問 題 になることは 高 麗 初 の 公 式 使 節 を 日 本 で 断 ったという 点 である この 事 実 において 大 体 日 本 の 平 安 時 代 の 外 交 の 閉 鎖 性 と 硬 直 性 で 原 因 を 見 い 出 すことが 一 般 的 な 日 本 学 界 の 雰 囲 気 であった しかし 石 上 英 一 6)はその 現 象 の 理 由 を 韓 半 島 の 周 辺 事 情 から 見 い 出 そうとした 彼 は 日 本 が 周 辺 世 界 に 対 して 無 知 とか 無 関 心 から 始 まったのではなく 当 時 韓 半 島 の 混 乱 と 動 搖 が 日 本 にまで 及 ぶかも 知 れないという 憂 慮 でこれを 避 けるための 日 本 の 意 図 的 な 積 極 的 孤 立 政 策 であると 主 張 し た その 後 石 の 主 張 は 渡 辺 誠 によって 日 本 が 周 辺 国 を 無 視 しないながらも 適 切 に 対 応 したという 主 張 7) が 加 わって 研 究 の 方 向 がよほど 変 ったのである しかし 南 基 鶴 は 日 本 学 界 の 主 張 とはことなって 高 麗 が 日 本 に 使 者 を 送 ったことは 高 麗 が 上 国 という 大 国 意 識 の 発 露 であると 推 定 した そして 朝 貢 やこれ と 似 ている 史 料 的 な 表 現 は 日 本 の 意 図 的 な 造 作 であると 主 張 した 8) また 李 炳 魯 も 高 麗 の 国 書 に 聖 旨 のような 単 語 を 使 用 して 日 本 にとって 気 にくわない 行 動 をしたことは 高 麗 が 自 身 の 正 体 性 を 誇 示 しよう としたことであると 主 張 した. このように 國 家 對 国 家 間 の 交 流 に 対 して 両 国 の 学 者 らは 自 己 式 の 主 張 をしている 事 件 の 歴 史 的 背 景 や 意 味 に 差 はあるものの 麗 日 関 係 で 国 家 間 の 公 式 的 な 関 係 が 断 絶 なしに 持 続 していたという 証 拠 は 972 年 に 高 麗 から 使 臣 を 送 ったことからも 分 かる この 年 に 二 度 の 牒 が 高 麗 から 対 馬 島 へ 伝 えられている ところで この 時 高 麗 で 牒 を 持 って 行 った 人 は 地 方 官 である 南 京 ( 原 ) 府 使 と 金 海 府 使 であった 9) 彼 らは 日 本 の 朝 廷 にまで 行 く 事 ができなかったようである しかし この 牒 が 日 本 の 朝 廷 に 伝 逹 されたことは 明 らかである 10) ところでここで 問 題 になることは 高 麗 の 牒 を 送 った 人 物 や 機 構 の 問 題 である 高 麗 の 牒 が 日 本 に 伝 達 される 場 合 南 京 府 使 や 金 海 府 使 が 発 送 者 になっていたり 地 方 の 都 府 署 が 発 送 者 になって いたりする 場 合 もあった それはいずれにせよ 13 世 紀 以 前 の 高 麗 と 日 本 の 公 式 的 な 国 家 交 流 はそ の 方 法 において 使 臣 であったり 牒 を 送 ったりなどの 手 段 の 差 はあったものの 続 けて 持 続 されてい た 交 流 の 方 式 や 内 容 については 多 くの 見 解 があるだろうが たとえ 回 数 は 多 くないと 言 っても 高 麗 と 日 本 の 国 家 間 の 使 節 の 交 換 は その 密 度 においてはよほど 深 い 関 係 にあったと 言 える 6) 石 上 英 一, 日 本 古 代 10 世 紀 の 外 交, 學 生 社, 東 アジアにおける 日 本 古 代 史 講 座 7. 7) 平 安 貴 族 の 對 外 意 識 と 異 國 牒 狀 問 題 歷 史 學 硏 究 823, ) 高 麗 と 日 本 の 相 互 認 識 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 歷 史 的 前 提 に 關 する 學 際 的 硏 究, 荒 野 泰 典 ( 硏 究 代 表 ) 平 成 年 科 學 硏 究 費 補 助 金 成 果 報 告 書, 森 平 雅 彦 の 原 稿 から 引 用 9) 張 東 翼 は 南 京 として ほかの 硏 究 者 らは 大 体 南 原 であるとみている 今 まで 紹 介 された 模 様 は 南 凉 になっている 10) 森 平 雅 彦, 日 麗 貿 易, 大 庭 康 時 佐 伯 弘 次 菅 波 正 人 田 上 勇 一 郞 編, 中 世 都 市 博 多 を 掘 る 海 鳥 社
177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175 ある 時 期 この 地 方 官 の 性 格 に 関 しても 注 目 がなされていた この 地 方 豪 族 の 対 外 活 動 における 独 自 性 と 連 続 性 の 問 題 である 新 羅 末 の 一 部 豪 族 の 場 合 は 独 自 的 に 中 国 と 連 結 した 時 もあった だからこの 時 期 に 南 原 や 金 海 のような 中 央 からは 比 較 的 に 遠 距 離 にある 地 方 の 大 豪 族 勢 力 の 中 では 独 自 的 に 対 外 活 動 を 行 う 可 能 性 も 残 っていた しかしこれらの 役 職 が 共 通 的 に 府 使 という 点 から 公 式 的 な 交 流 に 間 違 いはない 974 年 に 日 本 朝 廷 で 高 麗 国 交 易 使 が 対 馬 島 に 派 遣 され 高 麗 の 物 品 を 購 入 して 行 った 事 実 も 常 設 かどうかという 点 は 考 慮 の 余 地 があると 言 っても 国 家 的 な 公 的 交 流 の 事 例 としてみることはできるだろう その 他 にもこのような 高 麗 と 日 本 の 間 の 公 式 的 な 交 易 に 関 する 内 容 は 多 くの 所 で 探 すことができる ところで 両 国 の 間 の 国 家 的 な 公 式 的 関 係 で 一 番 気 を 使 う 点 は 両 国 間 の 国 家 的 な 位 相 の 問 題 であろ う そしてよく 挙 論 されることが 牒 の 内 容 と 格 式 の 問 題 である 997 年 の 高 麗 で 送 った 牒 の 内 容 と 格 式 もその 中 の 一 つである この 牒 が 問 題 になって 高 麗 人 が 日 本 から 追 放 された 事 件 が 起 きた 日 本 では 高 麗 の 牒 状 に 日 本 を 無 視 する 内 容 があると 言 って 日 本 朝 廷 が 高 麗 の 国 書 に 答 をしないほどに 両 国 関 係 が 悪 化 されたこともあった この997 年 の 高 麗 牒 状 事 件 の 状 況 解 釈 については 多 くの 見 解 が 提 示 されている 一 方 1019 年 には 高 麗 によって 女 真 の 海 賊 船 で 捕 らえられた 日 本 人 を 救 出 し 日 本 に 送 還 する 事 件 が 発 生 した この 時 鄭 子 良 が 女 真 海 賊 に 捕 らえられた 日 本 人 を 送 還 させたこの 事 件 は 高 麗 と 日 本 の 関 係 が 決 して 悪 くない 状 況 であったことを 物 語 っている 当 時 東 海 岸 一 帯 を 脅 威 していた 共 同 の 敵 である 女 真 海 賊 に 対 しては 同 病 相 憐 の 協 助 関 係 が 成 立 していたと 思 われる この 事 件 は 高 麗 と 日 本 の 両 国 関 係 において 一 大 転 機 になったと 把 握 する 傾 向 もある 森 克 己 は 高 麗 側 の 好 意 的 な 対 応 が 日 本 の 対 高 麗 姿 勢 を 柔 軟 に 変 え その 後 頻 繁 な 漂 流 民 送 還 のきっかけになっ たと 言 った しかし 村 井 章 介 は この 事 件 をめぐる 日 本 側 の 高 麗 の 軍 事 力 に 対 する 関 心 が 高 まったこ とに 注 目 して 高 麗 に 対 して 相 変 らず 疑 懼 心 があり 敵 国 新 羅 と 結 び 付 く 認 識 平 安 貴 族 の 国 際 感 覚 の 退 嬰 性 と 閉 鎖 性 を 強 調 した 石 井 正 敏 も 刀 伊 事 件 後 に 高 麗 に 対 する 日 本 の 敵 国 視 は 大 きい 変 化 な しに 中 央 地 方 を 問 わず 貴 族 層 の 基 本 的 な 認 識 であったと 敍 述 した また 高 麗 側 の 友 好 姿 勢 も 南 基 鶴 が 指 摘 したように 契 丹 との 抗 争 を 背 景 にする 方 便 だった 可 能 性 があったはずである 11) ただ 山 内 晉 次 が 指 摘 したように 日 本 側 の 優 位 意 識 と 警 戒 感 が 消 えたことではないものの 新 羅 の 境 遇 と 一 緒 に 極 端 的 な 敵 対 視 や 紛 争 は 生 じなかったと 言 えよう 12) そこで 特 記 すべきものは この 際 日 本 に 送 還 する 時 も 高 麗 で 牒 を 送 った 公 式 的 な 使 節 だったという 点 である このような 事 実 を 見 れば 高 麗 と 日 本 とは 11) 高 麗 と 日 本 の 相 互 認 識 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 歷 史 的 前 提 に 關 する 學 際 的 硏 究, 荒 野 泰 典 ( 硏 究 代 表 ) 平 成 年 科 學 硏 究 費 補 助 金 成 果 報 告 書, 森 平 雅 彦 の 原 稿 から 引 用 12) 朝 鮮 半 島 漂 流 民 の 送 還 をめぐって 歷 史 科 學 122, 1990.
178 17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基 本 的 に 共 同 の 威 脅 には 国 家 間 の 連 帯 をはかっていたとも 言 える これとともに 国 家 の 公 式 的 関 係 で 大 きく 注 目 される 事 件 が 高 麗 で 国 王 文 宗 の 病 気 を 治 療 するため の 医 師 を 日 本 へ 求 めたということである この 高 麗 の 医 師 の 招 請 は 結 局 のところ 日 本 から 送 らない ことになり 不 発 に 終 わってしまったが 日 本 では 決 定 を 下 すまえまでの 過 程 を 見 れば よほど 深 刻 に 論 議 されたと 思 われる 初 めには 醫 師 を 送 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 決 定 を 下 し 送 る 醫 師 を 具 体 的 に 擧 論 するに 至 るほど 日 本 では 真 面 な 姿 勢 で 臨 んでいた 13) 両 国 間 の 関 係 がどうであったが 見 当 がつく 事 件 であったといえよう この 頃 中 国 の 医 官 たちも 高 麗 に 往 来 していたが 14) 国 王 の 生 命 を 担 当 する 医 師 を 日 本 にも 依 頼 して 求 めたということは 単 純 な 医 学 技 術 の 問 題 だけではなく 国 家 間 の 友 好 関 係 を 考 えるべき 事 件 として 特 記 すべきであろう この 医 師 招 請 事 件 の 拒 絶 について 日 本 では 日 本 の 醫 師 が 文 宗 の 病 気 を 直 すことができなければ 羞 恥 であるという 意 見 もあったが 高 麗 の 牒 に 聖 旨 のような 単 語 が 使 われるなど 高 麗 の 大 國 意 識 が 文 書 の 形 式 と 内 容 から 見 えるということが 直 接 的 な 醫 師 派 遣 拒 否 の 理 由 であった そしてこの 牒 を 持 って 来 た 王 則 貞 に 対 して 処 罰 したのである 結 局 こ の 事 件 は 高 麗 と 日 本 との 国 家 間 の 自 尊 心 ないし 優 位 関 係 に 対 する 強 い 意 識 がもたらした 結 果 であった 13) これと 関 連 する 過 程 を 見 れば 次 のようになる 2 月 5 日 大 宰 府 がすでにもらっていた 高 麗 禮 賓 省 の 牒 を 解 狀 とともに 太 政 官 へ 送 る / 朝 野 群 載 20, 太 宰 府 解. 2 月 16 日 大 宰 帥 藤 原 資 仲 が 報 告 した 高 麗 國 皇 帝 の 牒 が 日 本 朝 廷 に 傳 達 されることが 伝 えられる / 水 左 記 承 曆 4 年 4 月 19 日. 4 月 19 日 日 本 朝 廷 で 禮 賓 省 の 牒 に 対 する 論 議 結 果 醫 師 を 派 遣 することで 意 見 が 集 まれる / 水 左 記 承 曆 4 年 4 月 19 日. 8 月 7 日 藏 人 辨 ( 右 少 辨 ) 藤 原 伊 家 が 禮 賓 省 の 牒 に 対 して 議 論 するように 命 じた 宣 旨 を 大 納 言 源 俊 房 に 伝 う / 水 左 記 承 曆 4 年 8 月 7 日 閏 8 月 2 日 大 納 言 源 俊 房 が 朝 廷 で 高 麗 が 醫 師 を 要 請 したことを 言 及 / 水 左 記 承 曆 4 年 閏 8 月 2 日. / 水 左 記 承 曆 4 年 閏 8 月 5 日 ; 帥 記 承 曆 4 年 閏 8 月 5 日 ; 百 練 抄 承 曆 4 年 閏 8 月 5 日. 閏 8 月 8 日 大 納 言 源 俊 房 が 高 麗 が 醫 師 を 要 請 したことに 対 する 公 卿 たちの 評 議 の 結 果 を 藏 人 辨 藤 原 伊 家 に 伝 う / 水 左 記 承 曆 4 年 閏 8 月 8 日. 閏 8 月 5 日 日 本 朝 廷 で 高 麗 の 牒 に 対 して 議 論 し 醫 師 を 派 遣 するのか 派 遣 する 場 合 だれを 送 るのか 答 書 はどの ようにするのか 等 について 議 論 する 閏 8 月 11 日 藤 原 伊 家 が 大 納 言 源 俊 房 に 왕즉정 を 尋 問 した 記 錄 を 伝 う / 水 左 記 承 曆 4 年 閏 8 月 13 日. 閏 8 月 14 日 日 本 朝 廷 で 宋 皇 帝 が 送 った 礼 物 に 対 する 対 処 および 高 麗 の 醫 師 要 請 について 議 論 したが 後 者 の 場 / 水 左 記 承 曆 4 年 閏 8 月 14 日 ; 合 は 丹 波 雅 忠 と 論 議 するのがいかがであろうかと 意 見 が 提 示 される 帥 記 承 曆 4 年 閏 8 月 14 日. 閏 8 月 22 日 關 白 藤 原 師 實 が 人 を 送 り 丹 波 雅 忠 に 咨 文 をもとめたが, 丹 波 雅 忠 が 醫 師 を 派 遣 するつ 惟 宗 俊 通 が 適 / 水 左 記 承 曆 4 年 閏 8 月 23 日 ; 当 であると 回 答 する 帥 記 承 曆 4 年 閏 8 月 22 日 閏 8 月 24 日 藤 原 師 實 が 醫 師 を 派 遣 しないことを 決 定 し これに 対 する 答 狀 を 大 江 匡 房 をして 起 草 させる / 水 左 記 承 曆 4 年 閏 8 月 24 日 ; 帥 記 承 曆 4 年 閏 8 月 25 日. 9 月 2 日 藤 原 師 實 が 源 經 信 を 呼 んで 大 江 匡 房 が 作 った 答 書 をみせる / 帥 記 承 曆 4 年 9 月 2 日. 9 月 3 日 藤 原 師 實 が 源 經 信 大 江 匡 房 を 呼 んで 答 書 を 検 討 する / 水 左 記 承 曆 4 年 9 月 3 日 ; 帥 記 ; 承 曆 4 年 9 月 3 日. 9 月 4 日 公 卿 たちが 藤 原 師 實 の 家 に 集 まり 答 書 について 議 論 する / 水 左 記 承 曆 4 年 9 月 4 日 ; 帥 記 承 曆 4 年 9 月 4 日. 9 月 6 日 大 江 匡 房 が 源 俊 房 に 高 麗 牒 が 前 例 と 異 なることを 伝 う / 水 左 記 承 曆 4 年 9 月 6 日 9 月 12 日 大 江 匡 房 が 源 俊 房 に 答 書 の 草 案 を 報 告 し, 源 俊 房 の 指 示 によって 內 容 の 中 の 殊 俗 を 蕃 王 に 直 す / 水 左 記 承 曆 4 年 9 月 12 日. 9 月 17 日 藤 原 師 實 が 公 卿 らを 招 待 して 答 書 を 見 せる / 水 左 記 承 曆 4 年 9 月 17 日. 9 月 18 日 大 江 匡 房 が 源 俊 房 に 答 書 を 伝 えて, 源 俊 房 がこれを 前 筑 後 守 俊 光 にして 淸 書 させる / 水 左 記 承 曆 4 年 9 月 18 日. 10 月 2 日 太 政 官 の 命 令 書 を 大 宰 府 に 下 し 高 麗 が 要 請 した 醫 師 を 派 遣 しないということ 高 麗 の 禮 物 を 返 すこと 大 宰 府 の 答 書 [ 返 牒 ]は 使 者 を 選 抜 して 送 ること そして 王 則 貞 を 法 によって 賞 罰 することなどを 伝 える 11 月 3 日 大 江 匡 房 が 源 俊 房 と 議 論 して 答 書 の 字 句 を 直 し 關 白 藤 原 師 實 に 報 告 して 最 終 本 を 完 成 した 後 これ を 大 宰 府 におくる 14) 宋 から 醫 官 王 愉 徐 先 を 送 る( 高 麗 史 卷 9 文 宗 世 家 26 年 6 月 庚 戌 ) / 師 帥 記 貞 治 6 年 5 月 9 日. / 水 左 記 承 曆 4 年 11 月 3 日 ; 朝 野 群 載 20 太 宰 府 牒 ; 本 朝 續 文 粹 11 太 宰 府 牒.
179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177 高 麗 の 医 師 招 請 は 失 敗 で 終 わり 日 本 はその 後 高 麗 の 八 関 会 朝 賀 禮 の 参 加 者 として 招 請 されな かったはずだという 主 張 も 出 たぐらい この 事 件 は 国 家 の 公 式 的 な 事 件 として 意 味 が 大 きかった 15) そ の 他 にもこの 事 件 と 関 連 して 日 本 での 拒 絶 理 由 として 多 くの 見 解 が 出 されたが 16) 日 本 での 拒 絶 そ の 自 体 が その 以 後 の 麗 日 関 係 に 直 接 敵 にどのような 影 響 を 及 ぼしたのかについて 具 体 的 に 論 証 でき る 資 料 はない 17) 日 本 から 高 麗 へ 牒 がきた 場 合 は 1156 年 である この 時 高 麗 に 牒 を 持 って 来 た 人 は 対 馬 島 の 寛 仁 であった この 時 の 牒 を 受 領 したことは 高 麗 の 東 南 海 都 府 署 であった この 牒 は 高 麗 朝 廷 に 報 告 され 高 麗 朝 廷 では 都 府 署 が 答 書 を 送 るように 措 処 していた その 手 続 きは 日 本 朝 廷 対 馬 東 南 海 都 府 署 高 麗 朝 廷 の 順 序 であっただろう 高 麗 と 日 本 の 公 式 的 な 交 流 であったのである 今 まで 高 麗 と 日 本 の13 世 紀 以 前 の 國 家 對 国 家 間 の 関 係 を 考 えてみた 両 国 間 の 公 式 的 な 交 流 は あまり 活 溌 ではなかった 高 麗 で 女 真 人 の 海 賊 に 捕 らえられた 日 本 人 を 送 還 した 事 例 や 高 麗 で 医 師 を 招 請 した 事 件 などがあるが 両 国 間 の 関 係 は 決 して 緊 密 であったとは 言 えない しかし 完 全 に 断 絶 された 状 態 であった 時 もなかった もちろん 今 まで 残 っている 史 料 を 根 拠 にした 時 だけはそうであろう 3. 交 易 関 係 高 麗 と 日 本 との 関 係 で 注 目 すべき 分 野 が 交 易 関 係 である 本 稿 では 交 易 の 範 囲 を 公 式 的 な 国 家 間 の 関 係 を 除 いたすべての 商 業 的 な 関 係 で 言 いたい もちろんこの 関 係 でも 使 臣 を 送 ったり 牒 を 持 たせたりした 交 易 関 係 は 別 に 扱 うべきであろうが そのような 条 件 が 揃 わなかった 場 合 には 交 易 関 係 と して 扱 いたい 交 易 関 係 に 関 する 内 容 を 調 べてみると 次 の< 表 2>のようになる 15) 奧 村 周 司, 醫 師 要 請 事 件 にみる 高 麗 文 宗 朝 の 對 日 姿 勢, 朝 鮮 學 報 ) 渡 邊 誠, 平 安 貴 族 の 對 外 意 識 と 異 國 牒 狀 問 題, 歷 史 學 硏 究 823, ) 高 麗 史 では 日 本 へ 醫 師 を 要 請 した 事 実 を 探 すことができない 文 宗 32 年 (1078)に 王 が 帰 国 する 使 節 を 通 して 感 謝 を 表 すとともに 自 信 が 風 痹 症 であることを 言 い 医 師 と 藥 材 を 要 請 した という 内 容 があるが 日 本 へ 牒 을を 送 ったという 内 容 は 見 れない あるいは 王 則 貞 個 人 と 関 連 するあることを 謀 事 したのでは ないかという 疑 わしい 部 分 がある 高 麗 史 では 日 本 へ 牒 が 到 着 した 年 に 薩 摩 州 から 方 物 を 捧 げたとの 記 錄 があることを 見 れば 王 則 貞 の 実 力 も 実 力 であろうが 高 麗 から 日 本 へ 医 師 を 要 請 したのであろうかとい う 疑 問 もある 中 国 では1079 年 にすでに 藥 材 100 種 と 閤 門 通 事 舍 人 王 舜 封 など88 人 を 送 ってきた
180 17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連 番 年 度 関 連 事 実 典 拠 年 ( 文 宗 27 7 月 5 日 日 本 人 王 則 貞 松 永 年 など42 人 高 麗 到 着 各 種 物 産 を 捧 / 高 麗 史 文 宗 27 年 7 月 丙 午 延 久 5) げ 壱 岐 島 勾 当 官 藤 井 安 国 等 33 人 派 遣 して 方 物 を 捧 げる 11 月 12 日 日 本 人 が 宋 黒 水 耽 羅 人 などとともに 八 関 会 に 参 加 して / 高 麗 史 文 宗 27 年 11 月 辛 亥 礼 物 を 捧 げる 年 ( 文 宗 28 2 月 2 日 日 本 国 船 頭 重 利 など39 人 が 高 麗 に 到 着 物 産 を 捧 げる / 高 麗 史 文 宗 28 年 2 月 庚 午 延 久 6) 年 ( 文 宗 29 閠 4 月 5 日 日 本 商 人 大 江 など18 人 が 高 麗 に 到 着 物 産 を 捧 げる / 高 麗 史 文 宗 29 年 閠 4 月 丙 申 承 保 2) 6 月 22 日 日 本 人 朝 元 時 経 など12 人 が 高 麗 に 到 着 物 産 を 捧 げる / 高 麗 史 文 宗 29 年 6 月 壬 子 7 月 10 日 日 本 商 人 59 人 が 高 麗 に 到 着 する / 高 麗 史 文 宗 29 年 7 月 庚 午 年 ( 文 宗 月 15 日 日 本 国 僧 俗 25 人 が 高 麗 霊 光 郡 に 到 着 して 上 京 するの / 高 麗 史 文 宗 30 年 10 月 戊 戌 承 保 3) を 要 請 して 許 諾 年 ( 文 宗 月 5 日 日 本 商 客 藤 原 などが 高 麗 の 興 王 寺 に 法 螺 海 藻 などを 施 / 高 麗 史 文 宗 33 年 11 月 己 巳 承 暦 3) 納 する 1080 年 閠 9 月 11 日 日 本 国 薩 摩 主 が 使 臣 を 高 麗 に 派 遣 して 方 物 を 捧 げる / 高 麗 史 文 宗 34 年 閠 9 月 庚 子 ; 高 麗 使 節 遼 文 宗 34 年 閠 9 月 年 ( 文 宗 月 19 日 対 馬 島 が 使 臣 を 高 麗 に 派 遣 して 方 物 を 捧 げる / 高 麗 史 文 宗 36 年 1 月 丙 戌 永 保 2) 年 ( 宣 宗 1 6 月 20 日 日 本 筑 前 州 の 商 客 信 通 などが 水 銀 250 斤 を 捧 げる / 高 麗 史 宣 宗 1 年 6 月 戊 子 応 徳 1) 年 ( 宣 宗 2 2 月 13 日 対 馬 島 勾 当 官 が 使 臣 を 高 麗 に 派 遣 して 柑 橘 を 捧 げる / 高 麗 史 宣 宗 2 年 2 月 丁 丑 応 徳 2) 年 ( 宣 宗 3 3 月 22 日 対 馬 島 勾 当 官 が 使 臣 を 高 麗 に 派 遣 して 方 物 を 捧 げる / 高 麗 史 宣 宗 3 年 3 月 己 卯 応 徳 3) 年 ( 宣 宗 4 3 月 20 日 日 本 商 人 重 元 親 宗 など32 人 高 麗 に 方 物 を 捧 げる / 高 麗 史 宣 宗 4 年 3 月 壬 申 応 徳 4; 寛 治 1) 7 月 21 日 対 馬 島 元 平 等 40 人 高 麗 に 各 種 物 産 を 捧 げる / 高 麗 史 宣 宗 4 年 7 月 庚 午 年 ( 宣 宗 6 8 月 19 日 日 本 大 宰 府 商 人 高 麗 に 各 種 物 産 を 捧 げる / 高 麗 史 宣 宗 6 年 8 月 丙 辰 寛 治 3) 年 ( 睿 宗 11 2 月 2 日 日 本 が 柑 子 を 捧 げ / 高 麗 史 睿 宗 11 年 2 月 丙 寅 永 久 4) 年 ( 毅 宗 13 8 月 2 日 日 本 朝 廷 が 高 麗 商 人 に 対 して 議 論 する / 百 練 抄 平 治 1 年 8 月 2 日 平 治 1) 年 ( 高 宗 30 9 月 29 日 金 州 防 禦 官 が 日 本 国 人 が 方 物 を 捧 げて 高 麗 の 漂 風 人 / 高 麗 史 高 宗 30 年 9 月 壬 申 寛 元 1) を 刷 還 したことを 報 告 する 年 ( 高 宗 31 寛 元 2) < 表 2> 高 麗 と 日 本 の 間 の 交 易 関 係 2 月 2 日 この 時 期 以 前 に 前 済 州 副 使 盧 孝 貞 判 官 李 珏 が 漂 流 して 来 た 日 本 商 船 の 貨 物 を 押 収 してからこの 時 発 覚 されて 配 流 される / 高 麗 史 高 宗 31 年 2 月 癸 酉 上 の 内 容 を 見 れば 高 麗 と 日 本 との 交 易 関 係 が 非 常 に 多 様 であったことが 分 かる たとえ 事 例 は 多 くないが 階 層 的 でも 形 態 において 多 様 な 模 様 が 現 われる 上 の 例 を 見 れば 高 麗 に 来 る 日 本 人 の 交 易 者 だけ 収 録 されている そして 根 拠 になった 出 典 が 高 麗 史 である どうしてこの 時 期 に 急 に 高 麗 史 だけに 日 本 から 来 る 通 交 者 たちが 多 くなったのかについて 説 明 することはできない この 時 期 の 交 易 の 類 型 を 見 れば 商 人 が 捧 げる 場 合 対 馬 島 や 壱 岐 島 の 勾 當 官 が 来 て 捧 げる
181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179 場 合 日 本 が 捧 げる 場 合 などがある 日 本 人 の 中 では 対 馬 島 や 壱 岐 島 の 勾 當 官 商 人 などが 見 え ており 高 麗 では 日 本 へ 送 ったという 記 録 はちゃんと 見 えない 日 本 の 史 料 の 中 には 高 麗 との 関 係 を 残 している 類 型 が 日 記 類 などに 多 く 残 っていることに 対 して 高 麗 では 官 撰 史 書 から 内 容 などを 捜 す ことができる ところで この 交 易 関 係 の 通 交 者 たちは 急 に11 世 紀 から 高 麗 史 に 集 中 されて 現 われて いる 上 の< 表 >から 見 れば 高 麗 商 人 などについて 日 本 朝 廷 で 議 論 したという 事 実 は 高 麗 商 人 も 日 本 に 行 くという 意 味 であろう ところで 高 麗 商 人 の 存 在 を 日 本 の 資 料 から 捜 すことは 容 易 ではない このように 交 易 の 担 当 者 らが11 世 紀 後 半 に 急 に 表 面 化 され 12 世 紀 に 入 ると また 急 速 に 影 をひ そめる 現 象 に 対 して 日 本 商 人 たちが 当 時 には 自 力 で 中 国 に 渡 航 するにあたっては 技 術 的 に 困 難 であっ たから まず 高 麗 へ 進 出 したとみていたが これは12 世 紀 以 後 になると 中 国 史 料 に 日 本 商 人 が 現 われることを 念 頭 に 置 いたことであると 言 えよう ところで このような 発 想 はまるで 倭 寇 の 移 動 が 前 期 には 高 麗 を 侵 犯 していたが 後 期 には 明 へ 進 出 し ひいては 東 アジアの 海 洋 民 族 になったという 図 式 と 大 変 類 似 している このような 発 想 は 朝 鮮 は 大 陸 進 出 のための 一 つの 足 場 であるという 卑 下 意 識 か ら 始 まったのではなかろうか 一 方 高 麗 に 渡 航 した 日 本 人 の 出 身 については 多 くの 説 がある 大 宰 府 の 貿 易 管 理 体 制 が 瓦 解 になり 荘 園 で 密 貿 易 が 行 われ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 持 論 を 前 提 にして 九 州 の 荘 園 領 主 あるいは 成 長 して 来 た 博 多 の 商 人 が 海 外 貿 易 に 取 り 掛 かったことであり 個 々による 私 的 な 物 品 献 上 ( 私 献 )の 形 式 を 取 っていたと 把 握 していた 18) そして 日 本 で 高 麗 側 に 望 んだことは 中 国 産 品 であり 19) 日 本 の 水 銀 螺 鈿 硫 黄 などが 高 麗 によって 宋 に 流 入 され 宋 の 物 品 が 高 麗 を 経 由 して 日 本 に 渡 って 来 て 日 本 の 水 銀 が 宋 を 通 して 高 麗 に 入 って 行 くという 物 流 の 三 国 連 鎖 関 係 を 指 摘 したりする しかし 森 克 己 の 見 解 については 疑 問 も 提 起 されている まず 荘 園 内 の 密 貿 易 説 につちえは 11 世 紀 段 階 では 大 宰 府 の 貿 易 管 理 が 機 能 していたという 指 摘 があって 20) 荘 園 の 対 外 交 易 主 体 としての 力 量 特 に 自 ら 海 外 に 進 出 する 能 力 に 対 して 愼 重 に 評 価 する 必 要 があるという 指 摘 もある 21) 貿 易 の 形 式 に 対 して 山 内 晉 次 は 奥 村 周 司 が 指 摘 した 八 関 会 的 秩 序 22) と 連 結 させて 理 解 しようと 18) 森 克 己, 日 宋 と 高 麗 との 私 獻 貿 易, 朝 鮮 學 報 34, ) 森 克 己, 日 本 高 麗 內 港 の 宋 商 人, 朝 鮮 學 報 9, ) 山 內 晉 次, 奈 良 平 安 期 の 日 本 とアジア, 吉 川 弘 文 館, ) また 当 時 の 日 宋 貿 易 は 宋 の 海 上 において 主 導 されており そのために12 世 紀 以 後 の 中 國 史 料 で 日 本 商 人 が 現 れたことは 力 関 係 の 變 化 を 表 したこととして 注 目 されたが 榎 木 涉 はこの 日 本 商 人 の 實 體 は 宋 商 であり 宋 商 が 日 宋 貿 易 を 主 導 する 狀 況 は12 世 紀 にも 変 らなかったという( 榎 木 涉, 宋 代 の 日 本 商 人 の 再 檢 討, 史 學 雜 誌 110-2, 2001) 22) 奧 村 周 司, 高 麗 における 八 關 會 的 秩 序 と 國 際 關 係, 朝 鮮 史 硏 究 會 論 文 集 16,1979.과 高 麗 の 外 交 姿 勢 と 國 家 意 識 - 仲 冬 八 關 會 儀 および 迎 北 朝 詔 使 儀 1を 中 心 として, 歷 史 學 硏 究 別 冊 特 輯, 1982
182 18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する 高 麗 の 国 家 的 祭 礼 である 八 関 会 での 国 王 朝 賀 禮 には 宋 商 女 真 耽 羅 など 異 域 人 たちが 参 礼 し ており 高 麗 王 を 中 心 とする 王 権 秩 序 が 表 現 されていたが 11 世 紀 後 半 にはそのに 日 本 からの 通 交 者 が 参 加 した 場 合 もあった 高 麗 の 立 場 では 日 本 もこのような 政 治 秩 序 に 包 攝 される 存 在 であったと 思 っ たようである 医 師 招 請 事 件 は 日 本 に 対 する 高 麗 の 大 国 意 識 が 文 書 形 式 として 反 映 されたこととし て 認 識 されることもある そして この 対 日 通 交 が 失 敗 することによって 日 本 政 府 との 関 係 が 再 認 識 さ れて その 以 後 に 成 立 したと 思 われる 八 関 会 に 日 本 が 参 加 者 として 登 録 されなかった 可 能 性 が 指 摘 さ れることもあった 日 麗 通 交 の 経 路 に 対 して 山 内 晉 次 は 貿 易 の 盛 行 と 相 反 して 官 庁 を 通 じた 漂 流 民 の 積 極 的 な 送 還 が 行 われたことに 注 目 して 大 宰 府 - 対 馬 ラインが 窓 口 になって 金 州 への 送 還 が 成 立 し 高 麗 では 金 州 の 東 南 海 船 兵 都 府 署 によって 中 央 に 送 られたという 今 後 の 日 本 との 交 易 や 外 交 折 衷 において 金 州 や 東 南 海 船 兵 都 府 署 の 場 としての 性 格 に 対 して 最 近 活 溌 に 展 開 されている 世 界 各 地 の 常 市 論 の 成 果 を 踏 襲 しながら また 朝 鮮 前 期 の 三 浦 形 成 の 前 史 という 点 を 強 調 しながら 本 格 的 な 検 討 を 追 加 する 必 要 があるだろうと 展 望 している 23) 12 世 紀 に 入 っては 高 麗 - 日 本 間 の 通 交 に 関 連 した 史 料 は 著 しく 減 少 する このような 関 係 記 事 の 変 化 は 事 実 の 有 無 その 自 体 を 意 味 するのではないが 傾 向 性 を 反 映 していると 評 価 されている 日 本 側 の 要 因 に 対 しては 日 本 商 人 が 高 麗 の 政 治 混 乱 による 危 険 を 受 けて 技 術 的 に 可 能 になった 対 宋 進 出 へ 転 換 したことであるとした 高 麗 内 外 の 動 搖 が 重 要 であるという 研 究 者 もある 24) 元 来 高 麗 貿 易 が 薄 利 だからという 説 もあり 日 宋 貿 易 の 発 展 による 利 潤 バランスの 変 化 のためであるという 説 もある 25) また 高 麗 側 の 要 因 についても 前 述 したように 双 方 の 経 済 の 隔 差 を 念 慮 した 高 麗 政 府 が 対 日 貿 易 を 縮 小 したという 見 解 がある 26) これに 対 する 反 論 では 高 麗 の 混 乱 や 経 済 隔 差 が 貿 易 衰 退 の 直 接 的 な 要 因 ではなく 高 麗 北 方 情 勢 が 不 安 定 になり( 女 真 の 台 頭 ) 日 遼 貿 易 船 であると 推 定 される 日 本 の 怪 船 泊 が 王 都 近 海 に 出 現 すると これを 警 戒 して 日 本 商 客 の 上 京 を 禁 じ また 医 師 招 請 交 渉 が 悪 化 されてから 日 本 に 対 する 応 対 が 重 視 されなくなったから 対 日 政 策 が 金 州 での 来 航 者 接 待 にとどまる 消 極 的 な 方 向 に 切 り 替 えられたという 主 張 がある 27) このように 民 間 の 交 易 についても 両 国 の 研 究 成 果 は 大 きな 格 差 を 表 している 特 記 すべきものは 日 本 の 麗 日 関 係 研 究 は 麗 日 宋 など 多 23) 山 內 晉 次, 朝 鮮 半 島 漂 流 民 の 送 還 をめぐって, 歷 史 科 學 ) 田 村 洋 行, 高 麗 における 倭 寇 濫 觴 期 以 前 の 日 麗 通 交, 經 濟 經 營 論 集 28-1, ) 三 浦 圭 一, 十 世 紀 - 十 三 世 紀 の 東 アジア, 講 座 日 本 史 2, 東 京 大 學 出 版 會, ) 大 山 喬 平, 中 世 の 日 本 と 東 アジア, 講 座 日 本 史 3- 中 世 1, 東 京 大 學 出 版 會, ) 李 領, 院 政 期 の 日 本 高 麗 交 流 に 關 する 一 考 察, 1999 これに 対 して 濱 中 昇 ( 書 評 : 李 領 著 倭 寇 と 日 麗 關 係 史, 歷 史 評 論 603, 2000)と 橋 本 雄,( 書 評 : 倭 寇 と 日 麗 關 係 史, 歷 史 學 硏 究 758, 2008)の 史 料 讀 解 批 判 と 反 論 があった
183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181 様 な 国 家 と 多 角 的 な 分 析 をしているという 点 だ それほど 多 くの 研 究 性 果 と 歴 史 を 持 っているという 意 味 であるだろう このような 民 間 の 交 易 及 び 交 流 関 係 から 興 味 深 い 事 実 は 12 世 紀 末 源 平 抗 争 の 中 で 藤 原 親 光 が 対 馬 で 高 麗 へ 亡 命 したというエピソードに 関 するものである 川 添 昭 一 28)は 11 世 紀 以 来 続 いた 高 麗 との 密 接 な 関 係 が 背 景 にあると 把 握 した 13 世 紀 全 般 の 史 料 には 韓 半 島 の 南 岸 地 域 で 対 馬 島 人 が 高 麗 の 統 制 の 枠 の 外 で 活 溌 に 活 動 していた 内 容 にも 注 目 して 政 府 記 録 には 見 えないが 地 方 民 間 ではその 以 前 から 通 交 が 続 いて 来 たのであろうと 推 定 したりする 4. 文 化 的 交 流 13 世 紀 以 前 高 麗 と 日 本 の 文 化 的 側 面 での 関 係 はどうだったのだろうか 実 際 に 日 本 では 韓 半 島 へ 渡 った 遺 物 が 大 変 多 くある そしてその 遺 物 らの 水 準 もとても 優 秀 なものなどが 多 い しかし こ の 遺 物 らが 製 作 された 時 期 は 13 世 紀 以 前 であっても 日 本 へ 渡 った 時 期 がいつなのかについては 正 確 に 分 からない 場 合 が 多 い だからこれらの 出 処 や 渡 った 経 緯 を 明 確 にできない 現 在 としては それ をここで 扱 うことは 無 理 な 気 がする 本 稿 では 文 献 上 で 紹 介 された 中 で 13 世 紀 以 前 にあった 文 化 的 交 流 だけを 調 べてみたい こ の 時 期 の 文 化 交 流 の 現 象 に 関 して 整 理 してみると 次 の< 表 4>のようになる 連 番 年 度 関 連 事 実 典 拠 1 990( 成 宗 9 永 祚 2) 4 月 3 日 この 年 に 百 済 国 ( 高 麗 )の 皇 后 が 宋 の 商 人 周 文 徳 楊 / 応 頂 山 勝 尾 寺 縁 起 記 下 ; 仁 紹 を 通 日 攝 津 国 の 勝 尾 寺 に 観 世 音 菩 薩 像 金 鼓 金 鐘 等 を 寄 元 亨 釈 書 28 贈 する 年 ( 献 宗 1 嘉 保 2) 年 ( 肅 宗 2 永 長 2) < 表 4> 高 麗 と 日 本 との 文 化 的 交 流 10 月 下 旬 薬 師 寺 の 僧 侶 大 房 が 大 宰 府 で 宋 の 商 人 柳 裕 に 高 麗 で 刊 行 された 極 楽 要 書 彌 陀 行 願 相 応 経 典 章 疎 を 求 め てくれることを 頼 み 3 月 23 日 宋 の 商 人 柳 裕 によって 高 麗 で 刊 行 された 彌 陀 極 楽 書 など13 部 20 冊 が 日 本 に 伝 わって これが 同 じ 年 5 月 23 日 興 福 社 浄 名 院 に 到 着 する / 阿 彌 陀 経 通 賛 疏 下 の 題 記 ( 叡 山 文 庫 所 蔵 ) / 阿 彌 陀 経 通 賛 疏 下 の 刊 記 [ 奥 書 ] ( 叡 山 文 庫 所 蔵 ) 年 ( 肅 宗 8 2 月 11 日 高 麗 で 刊 行 された 華 厳 経 隨 疏 演 義 が 播 磨 国 性 / 華 厳 経 隨 疏 演 義 義 識 語 康 和 5) 海 寺 で 筆 写 される ( 東 大 寺 尊 勝 院 所 蔵 ) 年 ( 肅 宗 10 長 治 2) 5 月 中 旬 大 宰 帥 藤 原 季 中 がこの 時 期 以 前 に 仁 和 寺 の 二 品 親 王 覚 行 の 命 を 受 けて 使 臣 を 高 麗 に 派 遣 して 釈 摩 訶 衍 論 通 玄 4 冊 釈 摩 訶 衍 論 賛 玄 5 冊 を 要 請 したことがあるが この 時 / 釈 摩 訶 衍 通 玄 及 び 釈 摩 訶 衍 論 賛 玄 疏 の 刊 記 [ 奥 書 ]( 高 野 山 金 剛 峰 寺 宝 亀 院 所 蔵 ); 釈 摩 訶 衍 通 玄 ( 叡 山 文 28) 川 添 昭 一, 鎌 倉 初 期 の 對 外 關 係 と 博 多, 箭 內 健 次 編 鎖 國 日 本 と 國 際 交 流 上, 吉 川 弘 文 館, 1988
184 18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年 ( 睿 宗 15 保 安 1) これらの 本 が 日 本 に 到 着 7 月 5 日 8 日 日 本 僧 侶 俊 源 が 大 宰 府 でかつて 僧 侶 覚 樹 が 宋 の 商 人 荘 承 蘇 景 等 を 通 じて 高 麗 から 持 って 来 た 聖 教 数 百 圏 中 で 弘 賛 法 華 伝 を 筆 写 庫 所 蔵 ); 釈 摩 訶 衍 論 賛 玄 疏 ( 仁 和 寺 所 蔵 ); 釈 摩 訶 衍 論 賛 玄 疏 ( 真 福 寺 所 蔵 ); 釈 摩 訶 衍 論 賛 玄 疏 奏 ( 東 北 大 所 蔵 ); 東 寺 王 代 記 ( 堀 河 院 長 治 2 年 ) / 弘 賛 法 華 伝 ( 東 大 寺 図 書 館 所 蔵 ) 年 ( 高 宗 3 2 月 6 日 日 本 国 の 僧 侶 が 高 麗 に 来 て 仏 法 を 求 める / 高 麗 史 高 宗 3 年 2 月 己 丑 建 保 4) 年 ( 高 宗 月 日 本 の 僧 侶 道 元 が 宋 の 慶 元 府 で 高 麗 の 僧 侶 智 玄 景 雲 / 正 法 眼 蔵 12 袈 裟 功 徳 貞 応 3) に 会 う 年 ( 高 宗 21 この 年 に 高 麗 国 王 が 日 本 の 貢 船 を 通 じて 円 爾 弁 円 に 法 語 を / 聖 一 国 師 年 譜 文 暦 1 年 ; 文 暦 1) 要 請 すると 彼 が 顯 密 法 門 すなわち 仏 教 の 教 学 を 條 列 して 答 元 亨 釈 書 7 慧 日 山 弁 円 えたという 年 ( 高 宗 34 この 年 に 高 麗 の 僧 侶 了 然 法 明 が 宋 の 径 山 無 準 師 範 を 尋 ねて / 日 本 洞 上 連 燈 録 1 了 然 法 明 宝 治 1) から 商 船 に 付 いて 日 本 へ 渡 って 京 都 鎌 倉 地 域 を 遊 歴 した 年 ( 高 宗 38 3 月 18 日 日 本 に 渡 った 高 麗 の 僧 侶 了 然 法 明 が 出 雨 国 善 見 村 / 日 本 洞 上 連 燈 録 1 了 然 法 明 建 長 3) の 玉 泉 寺 を 開 創 し 引 き 続 き 北 越 ( 越 前 地 域 )にとどまっていた 道 元 を 訪 問 して 彼 の 仏 法 を 継 承 した 年 ( 元 宗 即 この 年 に 日 本 の 僧 侶 が 高 麗 巨 済 島 の 僧 侶 洪 弁 を 尋 ねて 来 て / 法 華 霊 験 伝 下 位 年 正 元 1) 法 華 経 を 求 め 大 宰 府 崇 福 寺 に 備 置 する 年 ( 元 宗 1 中 統 1 文 応 1) この 年 に 高 麗 の 使 臣 団 に 付 いて 大 宰 府 崇 福 寺 に 渡 って 法 華 経 をよく 見 た 高 麗 の 僧 侶 [ 道 人 ] 法 行 が 帰 って 来 る / 法 華 霊 験 伝 下 上 の 内 容 を 見 れば 13 世 紀 以 前 の 高 麗 と 日 本 の 文 化 的 交 流 はほとんど 仏 教 関 係 だけに 現 われて いる そして 史 料 の 性 格 も 偏 向 的 だ 交 易 関 係 は 資 料 の 出 処 が 高 麗 史 だったが 仏 教 関 係 は 日 本 史 料 一 色 である ところで 日 本 史 料 にもかかわらず それほど 偏 頗 的 に 記 述 した 可 能 性 があったよう には 見 えない 上 の 内 容 で 両 国 の 文 化 交 流 を 見 れば いくつかのおもしろい 点 が 発 見 される 両 国 の 関 係 に 宋 が 介 入 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 そして ある 片 っ 方 が 一 方 的 に 文 化 を 普 及 する 状 況 である というよりは 友 好 的 関 係 で 交 流 が 成 立 していたように 見 える 高 麗 からは 日 本 へ 佛 法 を 求 めるためい 行 ったり 日 本 から 高 麗 へ 仏 書 を 要 請 したりする 時 々 宋 を 経 って 高 麗 と 日 本 の 仏 教 に 関 する 情 報 を 得 る 事 例 が 見 えたりする 高 麗 と 日 本 の 僧 侶 が 一 緒 に 日 本 を 旅 行 することもおもしろい 上 の 内 容 の 中 で 興 味 深 いことは990 年 の 内 容 である この 内 容 からは10 世 紀 に 宋 を 媒 介 にした 高 麗 と 仏 教 の 関 係 が 分 かる これは 攝 津 勝 尾 寺 縁 起 の 正 曆 元 年 (990)の 内 容 である これによれば 百 済 国 皇 后 が 宋 の 商 人 周 文 徳 楊 仁 紹 を 通 じて 渉 津 国 の 勝 尾 寺 に 観 世 音 菩 薩 像 金 鼓 金 鐘 等 を 寄 贈 したという これが 事 実 ならば 宋 商 を 置 いて 麗 日 通 交 が10 世 紀 に 行 われたことが 分 かるようになる しかし 原 美 和 子 29)はこの 説 話 に 見 える 宋 商 は 実 在 人 物 であるものの 説 話 自 体 は 周 辺 住 民 との 摩 29) 原 美 和 子, 勝 尾 寺 緣 起 に 見 える 宋 海 商 について, 學 習 院 史 學 40, 2002
185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183 擦 を 収 拾 する 方 便 として 長 谷 寺 の 観 音 霊 験 談 ( 異 域 から 来 た 仏 像 が 霊 力 を 発 揮 するという 説 )を 基 礎 にし て13 世 紀 中 伴 に 創 出 された 虚 構 であるという それならば 高 麗 と 日 本 の 思 想 的 交 流 が12 世 紀 から 本 格 化 したと 言 わ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 しかし 1247 年 の 高 麗 の 僧 侶 了 然 法 明 が 宋 の 径 山 無 準 師 範 を 尋 ねた 際 に 商 船 とともに 日 本 へ 渡 った 事 例 がある これを 見 れば 比 較 的 自 由 に 僧 侶 の 日 本 出 入 りが 描 写 されている このような 場 合 密 入 国 に 処 理 されないほど 思 想 界 では 交 流 が 比 較 的 に 円 満 であったと 思 われる そして 実 際 に 民 間 での 交 流 が 活 溌 した 点 を 見 れば 記 録 に 現 われるよりもっと 幅 広 い 範 囲 で 思 想 的 な 交 流 が 成 立 していたと 言 っても 無 理 がなさそうである 百 済 国 皇 后 の 事 実 は 信 じられないが これを 根 拠 に 高 麗 等 異 域 の 珍 宝 を 宋 商 が 持 って 来 たというモチーブが 実 際 歴 史 状 況 を 背 景 にしている 可 能 性 も 排 除 できないという 5. 軍 事 的 葛 藤 高 麗 と 日 本 との 関 係 を 考 える 基 準 の 一 つになることが 武 力 的 な 衝 突 である 言 い 換 えれば 国 家 勧 力 の 物 理 的 な 衝 突 である 軍 事 的 関 係 を 捜 してみることができる 現 前 する 史 料 に 見 える13 世 紀 以 前 の 高 麗 と 日 本 との 軍 事 的 な 関 係 はそれほど 多 くない そして その 衝 突 の 程 度 がそれほど 厳 しいと は 見 られない 関 係 史 料 などを 調 べてみると 次 のようになる 連 番 年 度 関 連 事 実 典 拠 年 ( 光 宗 5 1 月 25 日 新 羅 ( 高 麗 )が 日 本 を 攻 撃 しようと 思 うという 風 聞 / 長 い 勝 するの5 年 ( 陽 画 1)3 月 6 日. 天 暦 8) があって 藤 原 朝 忠 を 大 宰 大 弍 で 任 命 年 ( 顯 宗 5 3 月 12 日 日 本 が 新 羅 ( 高 麗 )と 戦 闘 を 行 い /シンファングゾングトングロック 中 長 長 和 3) 靴 3 年 3 月 12 日 ) 年 ( 顯 宗 10 寛 仁 3) 年 ( 毅 宗 6 仁 平 2) 3 月 28 日 以 来 女 真 族 である 刀 伊 が 対 馬 島 壱 岐 島 筑 前 国 怡 土 郡 等 の 地 域 を 攻 撃 したと 言 う これらの 侵 入 に 関 連 する 高 麗 関 係 記 事 も 収 録 されている この 年 に 日 本 肥 前 国 宇 野 廚 内 小 値 賀 嶋 の 弁 済 使 である 是 包 が 高 麗 の 船 舶 を 攻 撃 / 小 右 記 寛 仁 3 年 4 月 17 日 18 日 20 日 21 日 24 日 25 日 26 日 27 日 5 月 1 日 3 日 4 日 24 日 6 月 2 9 日 8 月 3 日 など; 扶 桑 略 記 寛 仁 3 年 4 月 8 日 18 日 ; 日 本 紀 略 寛 仁 3 年 4 月 17 日 18 日 21 日 25 日 27 日 5 月 26 日 ; 百 練 抄 寛 仁 3 年 4 月 18 日. / 青 方 文 書 安 定 イニョンサムワルシブ サムイルブグァンドングゼオザングア ン 年 ( 高 宗 10 5 月 22 日 倭 人 が 金 州 を 侵 犯 / 高 麗 史 高 宗 10 年 5 月 甲 子. 貞 応 2) 年 ( 高 宗 12 4 月 8 日 倭 船 2 隻 が 慶 尚 道 沿 海 地 域 を 侵 寇 している 途 中 / 高 麗 史 高 宗 12 年 4 月 戊 戌. 元 仁 2) 高 麗 軍 によって 拿 捕 される 年 ( 高 宗 13 1 月 27 日 倭 人 が 慶 尚 道 沿 海 地 域 を 侵 寇 している 途 中 巨 / 高 麗 史 高 宗 13 年 1 月 癸 未 嘉 禄 2) 済 県 領 であるジンリョンガブによって 撃 破 される
186 18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年 ( 高 宗 14 嘉 禄 3) 6 月 1 日 倭 人 が 金 州 に 侵 寇 する / 高 麗 史 高 宗 13 年 6 月 甲 申. 10 月 16 日 対 馬 島 と 高 麗 が 争 ったという 風 聞 がある / 明 月 記 嘉 禄 2 年 10 月 16 日. 10 月 17 日 松 浦 党 が10 余 隻 の 兵 船 を 率 いて 高 麗 を 攻 撃 し / 明 月 記 嘉 禄 2 年 10 月 17 日. 民 家 を 掠 奪 したという 風 聞 がある 12 月 7 日 등원정가 が 구조교실 から 高 麗 の 攻 撃 がある / 明 月 記 嘉 禄 2 年 12 月 7 日. はずだという 風 聞 を 伝 えて 聞 く 12 月 27 日 肥 後 壱 岐 の 民 たちが 高 麗 に 侵 入 したという 風 聞 / 民 経 記 嘉 禄 2 年 12 月 27 日 がある 2 月 全 羅 州 道 按 察 使 がスンゾンなど20 人 を 派 遣 して 大 宰 / 五 妻 鏡 嘉 禄 3 年 5 月 14 日. 府 に 牒 を 送 り 去 年 6 月 にあった 倭 寇 の 侵 入 を 詰 難 2 月 18 日 以 来 日 本 朝 廷 で 高 麗 の 牒 に 対 する 議 論 が 成 立 / 明 月 記 嘉 禄 3 年 2 月 18 日 4 月 13 日. 5 月 1 日 この 時 期 以 前 に 高 麗 の 全 羅 州 道 按 察 使 が 使 臣 を / 民 経 記 嘉 禄 3 年 5 月 1 日 15 日 ; 百 練 派 遣 して 大 宰 府 総 管 に 牒 を 送 り 倭 寇 の 侵 入 に 対 して 抗 議 抄 嘉 禄 3 年 7 月 21 日. する ここに 対 応 して 대재소이, 무등자뢰 が 使 者 団 の 前 で 悪 徒 90 人 を 処 刑 し 答 書 を 送 ると 同 時 に 牒 の 正 本 を 関 東 に 送 り 写 本 を 関 白 藤 原 に 送 る 5 月 14 日 高 麗 の 牒 が 鎌 倉 幕 府 に 到 着 する / 五 妻 鏡 嘉 禄 3 年 5 月 14 日 ; 鎌 倉 年 代 記 嘉 禄 3 年 5 月 14 日. 7 月 18 日 21 日 日 本 朝 廷 で 高 麗 の 牒 に 対 して 議 論 する / 民 経 記 嘉 禄 3 年 7 月 18 日 21 日 ; 百 練 抄 嘉 禄 3 年 7 月 21 日. 8 月 12 日 高 麗 が 再 び 牒 を 送 るという 巷 談 がある / 明 月 記 嘉 禄 3 年 8 月 12 日. 高 麗 と 日 本 の13 世 紀 以 前 までの 軍 事 的 緊 張 はほとんどなかったと 言 ってもよいだろう 韓 半 島 と 日 本 との 軍 事 的 な 緊 張 は 歴 史 的 に 見 る 際 大 きく 二 つの 類 型 で 現 われるしかない 大 陸 から 列 島 への 侵 攻 であったり 列 島 から 大 陸 への 侵 攻 である その 中 でも 歴 史 的 に(この 時 期 だけではなく) 韓 国 と 日 本 の 軍 事 的 葛 藤 の 原 因 の 中 の 一 つは 日 本 の 膨 脹 主 義 にあった 日 本 が 膨 脹 するようになれば ほとんど 中 国 を 領 土 化 しようとする 政 策 として 表 現 された ところで13 世 紀 の 日 本 ではそういう 膨 脹 主 義 が 現 われていたかのようには 見 えない 上 の 内 容 でも13 世 紀 に 立 ち 入 って 高 麗 と 日 本 の 間 の 緊 張 関 係 が 発 生 することは いわゆる 初 期 倭 寇 という 性 格 の 侵 寇 集 団 の 発 生 と 関 連 がある 上 の 事 例 でみたように 軍 事 的 葛 藤 であるような 事 例 が 少 ないばかりか 1223 年 5 月 の 倭 人 が 金 州 を 侵 犯 した 事 件 が 発 生 する 以 前 までは 物 理 的 衝 突 であると いう 形 跡 がまったく 見 えないと 言 っても 良 さそうだ そして 1223 年 以 後 からの 軍 事 的 葛 藤 は いわゆる 初 期 倭 寇 の 活 動 であるので 13 世 紀 以 前 の 一 般 的 な 麗 日 関 係 の 現 象 として 認 められない だからこのような 初 期 倭 寇 的 性 格 の 関 連 記 事 を 排 除 すると 13 世 紀 以 前 の 高 麗 と 日 本 との 軍 事 的 葛 藤 はほとんどなかったと 言 っても 問 題 がないだろう 上 で1019 年 の 刀 伊 と 係 わる 内 容 はむしろ 高 麗 で 女 眞 の 海 賊 から 日 本 人 を 救 済 して 送 還 し これをきっかけにして 両 国 間 の 関 係 はもっと 友 好 関 係 になった と 思 われる この 事 件 については 国 家 間 の 交 流 分 野 ですでに 述 べておいた
187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漂 流 民 の 送 還 及 び 訪 問 ( 民 間 人 の 交 流 ) 13 世 紀 以 前 高 麗 と 日 本 との 関 係 でもっとも 多 く 現 れる 記 録 は 民 間 での 交 流 である 民 間 での 交 流 と 言 えば 多 様 な 形 態 があるが その 中 で 漂 流 民 の 送 還 が 一 番 多 い 漂 流 民 の 送 還 はそのもの 自 体 が 国 家 勧 力 や 地 方 の 行 政 単 位 部 署 に 行 われていたが 漂 流 そのものは 公 式 的 である 事 件 ではなく 民 間 での 活 動 から 起 きた 副 次 的 な 事 なので この 事 実 を 通 じて 民 間 での 活 動 がどのような 形 態 で 成 立 していてたのかが 分 かるようになる そして 一 方 では 漂 流 民 に 対 する 処 遇 を 通 じて 両 国 の 友 好 関 係 がどうだったのかを 推 測 できるだろう 漂 流 民 の 送 還 と 係 わる 内 容 は 概 ね 次 の< 表 >のように 整 理 できる 連 番 年 度 関 連 事 実 典 拠 年 ( 太 祖 月 15 日 出 雲 国 司 が 新 羅 舟 7 隻 が 隠 岐 国 に 寄 着 したということを / 日 本 紀 略 天 慶 5 年 11 月 15 日 天 慶 5) 日 本 朝 廷 に 報 告 する 年 ( 成 宗 3 4 月 3 日 高 麗 船 が 筑 前 国 早 良 郡 に 到 着 する / 小 右 記 目 録 永 観 2 年 4 月 3 日 永 観 2) 21 日 年 ( 成 宗 5 5 月 19 日 日 本 朝 廷 が 石 見 国 に 到 着 した 高 麗 国 人 に 食 糧 を 与 えて / 小 右 記 長 徳 2 年 5 月 19 日 長 徳 2) 帰 国 させるようにする 年 ( 穆 宗 1 2 月 大 宰 府 が 高 麗 国 人 を 追 い 出 したが これは 南 蛮 人 の 手 違 い / 百 練 抄 長 徳 4 年 2 月. 長 徳 4) であると 判 断 される 年 ( 穆 宗 2 10 月 日 本 国 人 道 要 彌 刀 等 20 号 が 高 麗 に 來 投. / 高 麗 史 穆 宗 2 年 10 月. 長 保 1) 年 ( 穆 宗 5 6 月 27 日 日 本 朝 廷 が 苛 酷 な 政 治 を 避 けて 日 本 へ 渡 って 来 て 暮 す / 小 右 記 目 録 長 保 4 年 6 月 27 日 長 保 4) のを 要 請 した 高 麗 人 に 対 して 議 論 する ; 百 練 抄 長 保 4 年 6 月 27 日. 7 月 16 日 大 宰 府 に 到 着 した 高 麗 漂 流 人 である4 人 及 び 移 住 を 希 / 権 記 長 保 4 年 7 月 16 日. 望 した 高 麗 人 [ 參 來 高 麗 人 ]20 人 に 対 して 日 本 国 王 が2 通 の 文 書 [ 宣 旨 ]を 下 す 年 ( 穆 宗 7 3 月 7 日 日 本 朝 廷 が 因 幡 国 に 到 着 した 于 陵 嶋 人 折 兢 悦 など11 人 / 権 記 長 保 6 年 3 月 7 日 ; 長 保 6) に 対 して 議 論 する 本 朝 麗 藻 下 ; 千 載 和 歌 集 年 ( 顯 宗 3 8 月 3 日 日 本 国 人 潘 多 等 35 人 が 高 麗 に 來 投 / 高 麗 史 顯 宗 3 年 8 月 戊 戌. 寛 弘 9) 年 ( 顯 宗 10 5 月 29 日 高 麗 の 康 州 人 未 斤 逹 が 筑 前 国 志 摩 郡 に 漂 着 して 来 たこ / 小 右 記 寛 仁 3 年 6 月 21 日. 寛 仁 3) とを 拘 禁 して 訊 問 する 年 ( 顯 宗 20 7 月 28 日 日 本 に 漂 流 した 耽 羅 人 정일 など7 人 が 帰 還 する / 高 麗 史 顯 宗 20 年 7 月 乙 酉. 長 元 2) 年 ( 顯 宗 22 2 月 19 日 以 来 1 年 の 前 日 本 に 漂 流 して 来 た 耽 羅 人 8 人 を 帰 化 させ / 小 右 記 長 元 4 年 2 月 19 日 長 元 4) る 24 日 26 日 年 ( 靖 宗 3 3 月 対 馬 島 が 大 宇 国 に 漂 着 した 高 麗 人 を 帰 国 させたことを 日 本 朝 / 日 本 紀 略 長 元 7 年 3 月 某 日. 長 元 7) 廷 に 報 告 する 年 ( 靖 宗 2 7 月 16 日 日 本 が 漂 流 した 高 麗 人 謙 俊 など11 人 を 帰 還 させる / 高 麗 史 靖 宗 2 年 7 月 壬 辰. 長 元 9) 年 ( 靖 宗 5 5 月 10 日 日 本 人 男 女 26 人 が 來 投 / 高 麗 史 靖 宗 5 年 5 月 庚 子. 長 暦 30)
188 18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年 ( 文 宗 2 3 月 1 日 高 麗 人 を 父 とする 大 宰 府 の 舞 師 親 分 [ 舞 師 首 ]である 滋 井 / 貊 氏 系 図 永 承 3) 好 行 ( 貊 好 行 )が 死 5 月 2 日 大 宰 府 が 日 本 朝 廷 に 新 羅 暦 ( 高 麗 暦 )を 捧 げる / 百 練 抄 永 承 3 年 5 月 2 日 ; 扶 桑 略 記 永 承 3 年 5 月 2 日 年 ( 文 宗 3 11 月 29 日 対 馬 島 官 が 首 領 明 任 をして 漂 流 した 金 孝 等 20 人 を 金 / 高 麗 史 文 宗 3 年 11 月 戊 午. 永 承 4) 州 へ 送 還 する 年 ( 文 宗 5 7 月 11 日 対 馬 島 が 使 臣 を 派 遣 して 逃 げた 罪 人 良 漢 など3 人 を 送 / 高 麗 史 文 宗 5 年 7 月 己 未. 永 承 6) 還 年 ( 文 宗 月 1 日 日 本 国 の 使 臣 藤 原 頼 忠 等 30 人 が 金 州 に 到 着 する / 高 麗 史 文 宗 10 年 10 月 己 酉. 天 喜 4) 年 ( 文 宗 14 7 月 27 日 対 馬 島 が 漂 流 した 位 孝 男 を 送 還 / 高 麗 史 文 宗 14 年 7 月 癸 丑. 康 平 3) 年 ( 文 宗 26 3 月 20 日 求 法 僧 成 尋 一 行 の 船 舶 が 耽 羅 島 近 所 を 通 過 する / 参 天 台 五 台 山 記 1. 延 久 4) 年 ( 文 宗 月 15 日 日 本 国 僧 俗 25 人 が 高 麗 靈 光 郡 に 到 着 して 上 京 するこ / 高 麗 史 文 宗 30 年 10 月 戊 戌. 承 保 3) とを 要 請 して 許 諾 年 ( 文 宗 32 9 月 1 日 日 本 国 が 漂 流 した 耽 羅 人 高 砺 など18 人 を 送 還 / 高 麗 史 文 宗 32 年 9 月 癸 酉. 承 暦 2) 年 ( 文 宗 36 9 月 14 日 延 暦 使 の 僧 侶 戒 覚 が 宋 商 劉 琨 の 船 に 乗 って 耽 羅 島 近 / 戒 覚 渡 宋 記 永 保 2) 所 を 通 過 する 年 ( 宣 宗 10 7 月 8 日 高 麗 の 延 坪 島 巡 検 軍 が 海 賊 船 1 隻 を 捕 えたが これには / 高 麗 史 宣 宗 10 年 7 月 癸 未. 寛 治 7) 宋 人 12 人 倭 人 19 人 が 上 船 しており 各 種 貨 物 が 積 まれていた 年 ( 睿 宗 3 2 月 9 日 日 本 朝 廷 で 唐 人 高 麗 人 が 日 本 に 到 着 する 事 に 対 して 議 / 中 右 記 嘉 承 3 年 2 月 9 日. 嘉 承 3) 論 する 年 ( 毅 宗 14 4 月 28 日 日 本 朝 廷 が 対 馬 島 使 を 通 じて 高 麗 の 金 海 府 が 対 馬 島 民 / 百 練 抄 永 暦 1 年 4 月 28 日. 永 暦 1) を 拘 禁 したという 報 告 を 受 けて 多 くの 分 野 の 専 門 家 [ 制 度 制 度 博 士 ]に 意 見 を 開 進 [ 勘 申 ]する 12 月 17 日 日 本 朝 廷 で 高 麗 が 対 馬 島 の 商 人 を 拘 留 したことを 議 論 / 山 槐 記 永 暦 1 年 12 月 17 日 する ; 百 練 抄 永 暦 1 年 12 月 17 日 年 ( 明 宗 15 元 暦 2) 3 月 4 日 対 馬 守 藤 原 親 光 が 平 氏 の 乱 を 避 けて 家 族 及 び 部 下 を 導 / 玉 葉 文 治 2 年 2 月 24 日 ; いて 高 麗 に 亡 命 する 五 妻 鏡 元 暦 2 年 5 月 23 日 6 月 14 日. 6 月 14 日 対 馬 守 藤 原 親 光 が 高 麗 から 対 馬 島 に 帰 還 する. / 玉 葉 文 治 2 年 2 月 24 日 ; 五 妻 鏡 元 暦 2 年 6 月 14 日 年 ( 高 宗 10 冬 高 麗 人 が 越 後 国 寺 泊 浦 に 漂 着 / 五 妻 鏡 貞 応 3 年 2 月 29 日 ; 貞 応 2) 百 練 抄 貞 応 3 年 4 月 11 日 年 ( 高 宗 11 2 月 29 日 3ヶ 月 前 越 後 国 に 漂 着 した 高 麗 人 が 所 持 していた 弓 箭 を / 五 妻 鏡 貞 応 3 年 2 月 29 日. 貞 応 3) 含 めた 各 種 品 物 を 越 後 守 護 北 條 朝 時 が 押 収 して 幕 府 将 軍 源 頼 経 年 ( 高 宗 19 貞 永 1) に 送 る 閠 9 月 17 日 この 以 前 に 肥 前 国 唐 津 に 位 置 した 鏡 神 寺 の 住 人 が 高 麗 へ 渡 り 盗 みをした 事 件 があったが この 日 幕 府 が 犯 人 の 拘 留 及 び 上 船 臓 物 などの 処 理 に 対 して 守 護 所 に 命 令 を 下 し / 五 妻 鏡 貞 永 1 年 閠 9 月 17 日 年 ( 高 宗 30 9 月 29 日 金 州 防 禦 官 が 日 本 国 人 が 方 物 を 捧 げて 高 麗 の 漂 風 / 高 麗 史 高 宗 30 年 9 月 壬 申. 寛 元 1) 人 を 刷 還 したことを 報 告 する 年 ( 高 宗 31 2 月 2 日 この 時 期 以 前 に 前 済 州 副 使 盧 孝 貞 判 官 李 珏 が 漂 流 して 来 / 高 麗 史 高 宗 31 年 2 月 癸 酉. 寛 元 2) た 日 本 商 船 の 貨 物 を 押 収 したが この 時 ばれてしまい 配 流 される 年 ( 元 宗 4 6 月 この 月 に 日 本 の 官 船 大 使 如 真 などが 宋 に 行 こうとしたが 開 也 / 高 麗 史 元 宗 4 年 6 月. 弘 長 3) 召 島 群 山 島 楸 子 島 などが 漂 流 して 来 たし 大 宰 府 少 卿 殿 白 の 商 船 が 宋 で 日 本 に 帰 国 している 途 中 宣 州 加 次 島 に 漂 着 したが これ
189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187 ら 皆 を 帰 国 させる. 7 月 2 日 日 本 商 船 が 亀 州 艾 島 に 漂 着 すると 帰 国 させる. / 高 麗 史 元 宗 4 年 7 月 乙 巳. 高 麗 と 日 本 の 民 間 の 間 の 交 流 と 言 ったが ここには 両 国 が 民 間 人 をどのように 扱 っていたのかとい う 点 も 含 めている 時 には 極 めて 珍 しいが 朝 廷 政 府 が 処 理 する 場 合 もあった しかし 大 部 分 は 地 方 官 たちによって 漂 着 民 たちが 自 分 たちの 国 に 帰 還 されていた このような 漂 着 民 に 対 して 両 国 がある 条 例 ないし 規 約 を 持 っていたのかについてはよくわからない ところで 漂 流 民 送 還 や 交 易 をめぐって 浮 刻 されることが 対 馬 である 山 内 晉 次 30)は 対 馬 と 高 麗 との 間 で 頻 煩 密 接 な 人 的 交 流 が 成 立 していたということに 注 目 しているが 日 本 側 史 料 には 当 時 高 麗 と 交 易 したことはひたすら 対 馬 島 人 であったという 記 録 もある そこで 佐 伯 弘 次 31)は 日 麗 貿 易 の 主 な 担 当 者 として 対 馬 に 注 目 して 土 地 の 生 産 を 中 心 にした 交 易 形 態 を 指 摘 しているが 対 馬 の 銀 採 掘 に 高 麗 人 夫 が 関 与 した 可 能 性 も 考 慮 している. 7. 進 奉 関 係 高 麗 と 日 本 との 公 式 的 な 関 係 で 進 奉 関 係 が 出 る 記 事 がそれほど 多 くはないが 13 世 紀 になれ ば 高 麗 と 対 馬 との 関 係 において 進 奉 関 係 が 現 われている これと 係 わる 内 容 を 見 れば 次 の< 表 > になる 連 番 年 度 関 連 事 実 典 拠 年 ( 煕 宗 2 1 月 14 日 対 馬 島 の 使 臣 명뢰 など40 人 が 金 州 南 海 に 到 着 して / 平 戸 記 延 応 2 年 4 月 17 日. 元 久 3) 원포 2,000 牒 黑 鮑 2,000 果 鹿 皮 30 枚 を 進 奉 する 2 月 高 麗 の 金 州 防 禦 使 が 日 本 の 対 馬 島 に 牒 を 送 り 명뢰 など / 平 戸 記 延 応 2 年 4 月 17 日. が 捧 げた 牒 が 進 奉 の 礼 ではないことを 叱 ってこれを 返 す 年 ( 高 宗 14 2 月 全 羅 州 道 按 察 使 がスンゾンなど20 人 を 派 遣 して 大 宰 府 に 牒 / 五 妻 鏡 嘉 禄 3 年 5 月 14 日. 嘉 禄 3) を 送 り 去 年 6 月 にあった 倭 寇 の 侵 入 を 詰 難 する 2 月 18 日 以 来 日 本 朝 廷 で 高 麗 の 牒 に 対 する 議 論 が 成 立 / 明 月 記 嘉 禄 3 年 2 月 18 日 4 月 13 日. 5 月 1 日 この 時 期 以 前 に 高 麗 の 全 羅 州 道 按 察 使 が 使 臣 を 派 遣 し / 民 経 記 嘉 禄 3 年 5 月 1 日 15 て 大 宰 府 總 管 に 牒 を 送 って 倭 寇 の 侵 入 に 対 して 抗 議 する これに 日 対 応 して 대재소이 무등자뢰 が 使 者 団 の 面 前 で 悪 徒 90 人 を ; 百 練 抄 嘉 禄 3 年 7 月 21 日. 処 刑 し 答 書 を 送 ると 同 時 に 牒 の 正 本 を 関 東 に 送 って 写 本 を 関 白 藤 原 に 送 る 30) 山 內 晉 次, 奈 良 平 安 期 の 日 本 とアジア, 吉 川 弘 文 館, ) 佐 伯 弘 次, 國 境 の 中 世 交 涉 史, 海 と 列 島 文 化 3 玄 界 灘 の 島, 小 學 館, 1990
190 18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5 月 14 日 高 麗 の 牒 が 鎌 倉 幕 府 に 到 着 する 進 奉. / 五 妻 鏡 嘉 禄 3 年 5 月 14 日 ; 鎌 倉 年 代 記 嘉 禄 3 年 5 月 14 日. 7 月 18 日 21 日 日 本 朝 廷 で 高 麗 の 牒 に 対 して 議 論 する / 民 経 記 嘉 禄 3 年 7 月 18 日 21 日 ; 百 練 抄 嘉 禄 3 年 7 月 21 日. 8 月 12 日 高 麗 が 再 び 牒 を 送 るという 巷 談 がある / 明 月 記 嘉 禄 3 年 8 月 12 日 年 ( 元 宗 即 7 月 28 日 監 門 衛 録 事 韓 景 允 権 知 直 史 館 洪 貯 を 日 本 に 派 遣 して / 高 麗 史 元 宗 即 位 年 7 月 庚 午. 位 年 正 元 1) 倭 寇 の 禁 止 を 要 請 する 年 ( 元 宗 4 4 月 5 日 大 官 署 丞 洪 貯 詹 事 府 録 事 郭 王 府 を 日 本 に 派 遣 して 倭 寇 / 高 麗 史 元 宗 4 年 2 月 癸 酉. 弘 長 3) が 金 州 熊 神 県 の 勿 島 に 侵 入 して 公 船 を 盗 みにしたことを 詰 問 する 6 月 今 月 に 日 本 の 官 船 大 使 如 真 などが 宋 に 入 ろうとしたが 開 也 / 高 麗 史 元 宗 4 年 6 月. 召 島 群 山 島 楸 子 島 などに 漂 流 し 大 宰 府 少 卿 殿 白 の 商 船 が 宋 から 日 本 へ 帰 国 している 途 中 宣 州 加 次 島 に 漂 着 したが これら 皆 を 帰 国 させる 7 月 27 日 日 本 商 船 が 亀 州 艾 島 に 漂 着 し 帰 国 させる / 高 麗 史 元 宗 4 年 7 月 乙 巳. 8 月 1 日 洪 貯 郭 王 府 などが 対 馬 島 から 賠 償 を 受 けて 帰 国 する / 高 麗 史 元 宗 4 年 8 月 戊 申. 9 月 高 麗 の 使 臣 団 が 牒 をもって 博 多 [ 博 多 ]に 到 着 する / 青 方 文 書 肥 前 国 在 聴 解 案. 13 世 紀 全 般 には 日 本 で 高 麗 への 進 奉 が 史 料 で 確 認 される 時 期 である そして 初 期 倭 寇 が 麗 日 間 関 係 で 現 われる 時 期 でもある この 進 奉 については 朝 貢 と 等 しいことで 一 時 的 なものではなく 日 本 の 高 麗 通 交 の 全 般 にわた ることであると 把 握 した 事 がある そして13 世 紀 に 進 奉 が 史 料 に 現 われたことは 高 麗 が 交 易 を 縮 小 する 態 度 を 見 せたからであり それに 反 対 して 日 本 で 現 われた 対 応 が 倭 寇 32)の 発 生 であると 連 結 した りした しかしこのような 見 解 に 対 して 進 奉 は 鎌 倉 幕 府 が 民 間 の 自 由 貿 易 を 承 諾 した 結 果 として 現 われ たことだという 見 解 が 提 示 された 進 奉 はその 以 前 の 時 期 からの 私 献 貿 易 の 継 勝 で 対 馬 によって 行 わ れたことであり 倭 寇 の 発 生 はこの 際 日 本 商 人 が 撤 収 しながら 現 われた 現 象 であるという 指 摘 もあ る 33) 現 在 進 奉 に 対 しては 進 奉 の 日 本 側 の 主 体 前 代 貿 易 との 連 続 性 制 度 慣 例 などの 性 格 をど のように 見 るべきかによって 説 が 分 かれる 近 年 には 主 体 を 対 馬 であると 見 なす 傾 向 が 強 く 大 宰 府 の 関 与 や 認 知 も 推 定 されている 基 本 的 な 論 点 は 進 奉 が ある 特 定 時 点 の 状 況 を 一 般 化 したなの か ではなければ 通 常 的 な 儀 礼 であったのかということである 進 奉 という 用 語 は 下 から 上 に 対 32) 13 世 紀 前 半 に 倭 寇 の 存 在 が 見 られる 倭 寇 は 一 般 的 に14 世 紀 後 半 から 起 きた 歴 史 的 な 事 件 ないし 行 為 と して 理 解 している しかし 韓 国 の 史 料 ではすでに 廣 開 土 王 陵 碑 文 で 固 有 名 詞 化 した 倭 寇 という 単 語 が ある このような 敵 対 的 な 意 味 の 用 語 が 相 当 早 い 時 期 に 生 まれていたという 事 実 は それほど 日 本 と 高 句 麗 のあいだに 敵 對 的 關 係 があったという 意 味 の 一 つでもあるだろう 最 近 廣 開 土 王 陵 碑 文 にでる 倭 や 倭 寇 の 表 現 に 対 して 多 角 的 な 解 釈 が 行 われているが その 用 語 が 象 徴 する 一 種 の 拒 否 反 應 は 認 められな いということはできないだろう 本 稿 では 倭 寇 の 問 題 は 扱 わず 進 奉 とぼ 関 わりで 内 容 のみを 簡 略 に 扱 いたい 33) 森 克 己, 海 路 による 東 方 貿 易 の 展 開, 東 洋 學 術 硏 究
191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189 する 進 献 を 意 味 する 一 般 的 な 用 語 である ところで この 用 語 が13 世 紀 の 麗 日 関 係 において 高 麗 資 料 だけで 確 認 されている そしてこれに 対 する 一 定 の 正 論 に 至 るにはちょっと 時 間 が 必 要 ではないかと いう 時 点 であると 言 える ただ 進 奉 が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の 全 般 を 代 弁 することができる 関 係 で はないということだけは 明 らかなことであろう 8. 結 論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に 対 しては 不 明 な 点 が 多 い 関 連 資 料 も 省 略 されたのみではなく 研 究 者 も 多 くない ただ それさえも 一 部 研 究 者 によって 緻 密 な 分 析 と 解 釈 がなされて 現 在 に 至 っている 麗 日 関 係 史 において 研 究 者 の 数 や 研 究 成 果 は 韓 国 より 日 本 方 が 圧 倒 的 に 多 い したがって 関 連 資 料 に 対 する 解 釈 も 日 本 のほうがより 厳 密 に 行 われている 韓 日 関 係 史 だけではなく 関 係 史 で 警 戒 視 される 点 は 自 国 史 的 な 観 点 からの 接 近 だ 34) しかし 一 方 では 関 係 史 はほかより 自 国 史 の 立 場 から 接 近 しなければならない 分 野 でもある 韓 日 関 係 史 も 同 じであろう 韓 国 でも 脱 民 族 主 義 の 歴 史 観 を 主 張 しながら 東 アジア 史 への 志 向 を 強 く 主 張 する 例 が ある しかし 一 方 では 周 辺 国 の 民 族 主 義 化 を 軽 々しく 思 ってはいけないという 指 摘 も 出 ている 中 国 の 東 北 工 程 やチベット 新 彊 事 件 などは 歴 史 の 問 題 においても 心 配 の 問 題 である 史 学 との 出 会 いがすぐ 政 治 経 済 軍 事 などの 現 実 問 題 として 変 っていけば もうこれ 以 上 のこと はない 言 い 換 えれば 思 いや 関 心 が 物 質 世 界 をすぐにでも 変 化 させることができれば 良 いことであ る しかし 思 いや 無 形 の 要 素 らは 物 質 世 界 を 変 えるためには 非 常 に 多 くの 時 間 を 必 要 とする それよ りは すぐの 経 済 的 な 利 害 関 係 領 土 の 紛 争 のような 要 所 らがむしろ 当 代 の 歴 史 観 の 変 化 に 大 きい 影 響 を 及 ぼす したがって 多 様 な 歴 史 的 な 苦 悶 らが 時 々 刻 々 変 りつづある 国 際 情 勢 の 中 で どのぐら い 長 く 自 分 たちの 基 調 を 維 持 することができるかということには 大 変 な 惜 しさがある このような 考 えをしながら 今 まで 議 論 した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を 整 理 してこの 発 表 を 終 りにした い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は 文 献 に 現 われた 史 料 からみると 全 分 野 にわたり 交 流 が 活 溌 であった とは 言 い 切 れない 政 治 的 にも 冷 淡 であったと 表 現 するほどである 友 好 的 な 事 例 といえば 高 麗 が 女 眞 の 海 賊 に 抑 留 されていた 日 本 人 を 送 還 したぐらいである そしてたとえ 不 発 に 終 わったが 高 麗 か ら 日 本 へ 醫 師 を 招 待 したことが 友 好 的 な 関 係 であったと 設 定 することもできるだろう そうであっても 武 力 的 に 対 立 した 時 もない 高 麗 が 侵 攻 するとか 両 国 が 合 戦 をしたとかの 記 事 が 極 めて 珍 しく 現 われ 34) 大 國 意 識 이라는 주제가 나오게 된 것도 이러한 경향에서일 것이다. 李 炳 魯 는 日 本 측에서 後 百 濟 와 高 麗 에서 보낸 蕃 國 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데에 강하게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192 19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ている ただ 13 世 紀 後 半 にいくと モンゴルの 日 本 侵 攻 の 意 図 が 表 面 化 されながら その 雰 囲 気 が 変 わる もちろんこれより 先 立 って 対 馬 との 進 奉 関 係 が 揺 れながら 初 期 倭 寇 が 発 生 するが 本 格 的 な 敵 対 関 係 はモンゴルが 介 入 した 以 後 であると 言 えよう その 一 方 で 思 想 的 な 関 係 では 相 当 な 交 流 があったと 見 て 良 いだろう 高 麗 の 僧 侶 が 商 船 に 乗 っ て 来 て 日 本 の 中 心 地 を 悠 々と 見 回 っていたという 記 録 は 両 国 のこの 分 野 の 関 係 がよほど 友 好 的 で あったことを 意 味 することでもあろう また 中 国 で 会 った 高 麗 の 僧 侶 を 記 した 日 本 僧 侶 の 日 記 でも 両 者 間 の 交 流 は 一 応 円 満 に 成 り 立 っていたことが 分 かる そして 両 国 の 民 間 に 対 する 処 遇 も 一 応 自 国 へ 返 していることからも 分 かる しかし 相 変 らず この 時 期 の 研 究 に 大 きな 困 難 があることは 史 料 の 問 題 である この 時 期 の 史 料 が 特 定 の 資 料 であり 特 定 の 時 期 に 集 中 されて 現 われているので 信 頼 度 が 減 少 するということであ る 例 えば 日 本 から 高 麗 へ 多 くの 方 物 を 持 って 来 る 時 期 は 高 麗 文 宗 の 時 に 集 中 されている 他 の 文 献 で 容 易 に 探 すことは 難 しい これを 高 麗 の 八 関 会 的 秩 序 に 含 めて 理 解 しようとする 傾 向 もあるが それさえも 十 分 な 説 明 ではない また 日 本 に 仏 教 が 伝 来 された 経 緯 は 日 本 の 資 料 を 通 じてだけであ る だから 現 存 する 史 料 が どのぐらい 普 遍 的 なことであろうかについては 残 念 な 気 持 がする このような 資 料 と 研 究 成 果 の 劣 悪 の 中 でも 韓 日 関 係 史 の 次 元 で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を 特 徴 つけてみると 両 国 は 独 自 の 世 界 において 自 分 たちの 正 体 性 を 摸 索 する 中 で 相 互 依 存 的 に 持 続 的 な 発 展 を 作 ろうとした 時 期 であると 言 えよう 35) 35) 본고 작성에 森 平 雅 彦 敎 授 의 論 考 를 참고 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2008년도 6월6일부터 8일까지 東 京 에서 가졌던 韓 日 歷 史 共 同 硏 究 委 員 會 에서 發 表 한 森 平 雅 彦 교수의 世 紀 前 半 에 있어서의 日 麗 關 係 史 의 諸 問 題 - 硏 究 動 向 을 中 心 으로- 에서 많은 部 分 의 情 報 룰 취하였고, 本 考 의 內 容 의 一 部 는 森 平 雅 彦 교수의 見 解 나 整 理 를 옮겨 왔다. 그러나 앞의 論 考 를 森 平 雅 彦 敎 授 가 未 定 原 稿 이므로 轉 載 引 用 再 配 布 를 嚴 禁 한다고 하여 本 考 에서 脚 註 處 理 하지를 못한 點 이 遺 憾 이다.
193 13 世 紀 前 半 における 麗 蒙 交 渉 の 一 断 面 モンゴル 官 人 との 往 復 文 書 をめぐって 森 平 雅 彦 ( 九 州 大 学 ) 1. はじめに 高 麗 が 1231 年 より 本 格 化 したモンゴル 帝 国 の 侵 略 に 対 し 30 年 近 くにわたって 粘 り 強 く 抵 抗 し 続 けたことは 周 知 の 事 実 である 1) しかし 交 戦 の 一 方 で 外 交 努 力 による 事 態 の 打 開 を 模 索 していた ことは 同 じモンゴルに 対 して 強 硬 姿 勢 一 辺 倒 であった 日 本 などと 比 べ 2) 興 味 深 い 対 照 をなす か かる 事 実 そのものは 特 に 目 新 しいことでもないが その 内 容 と 歴 史 的 意 義 を 正 面 から 追 究 した 研 究 は ほとんど 例 がないようである この 問 題 に 対 しては 多 様 な 接 近 法 が 考 えられるが ひとまず 本 報 告 では 高 麗 がモンゴル 官 人 ( 将 帥 書 記 官 のほか ここではモンゴル 皇 族 を 含 める)と 交 わした 外 交 文 書 の 様 式 について 考 察 する 従 来 注 目 されてこなかったその 事 実 関 係 と 歴 史 的 な 文 脈 を 検 討 することで 対 元 講 和 以 前 における 麗 蒙 関 係 の 一 端 を 探 ってみたい 1) 池 内 1963김재1963 Henthorn1963 旗 田 1965 姜 晋 哲 1974 柳 在 蔡 漢 国 1988 尹 龍 爀 1991윤용19 94 参 照 2) ただし 最 前 線 の 対 応 責 任 者 の 動 向 については 別 途 検 討 を 要 す 至 元 8 年 (1271)に 元 使 趙 良 弼 が 来 日 した 際 大 宰 府 西 守 護 所 は 使 26を 送 ったという( 元 史 巻 208 日 本 伝 )
194 19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2. 文 書 形 式 の 検 討 李 奎 報 の 東 国 李 相 国 集 東 文 選 高 麗 史 には 対 元 講 和 以 前 において 高 麗 がモンゴル の 将 帥 や 書 記 官 あるいは 皇 族 に 対 して 送 付 した 文 書 に 関 する 記 録 が 多 数 収 載 されている(< 表 > 参 照 以 下 関 係 文 書 を 整 理 番 号 により 文 書 01 のごとく 呼 ぶ) まずはその 差 出 名 義 と 書 式 について 確 認 していこう 1) 差 出 名 義 文 書 01 02は 高 麗 に 闖 入 した 契 丹 集 団 を 追 って1218 年 に 初 めて 姿 を 現 したモンゴル 軍 の 将 帥 に 送 られた 文 書 であり 録 文 のタイトルや 附 記 によれば 尚 書 省 ( 尚 書 都 省 )を 差 出 名 義 とする 1181 年 に 死 亡 した 李 文 鐸 の 墓 誌 銘 には 対 馬 から 送 られた 牒 に 尚 書 省 が 返 信 しようとし 辺 吏 に 対 して 破 格 で あるとの 批 判 をうけて 中 止 されたという 事 件 が 記 される 必 要 によって 尚 書 省 が 外 国 に 文 書 を 出 す 事 態 はもともと 想 定 されてはいた しかし 上 記 以 外 に 実 例 は 確 認 されず 高 麗 の 官 府 が 外 国 の 官 府 官 人 と 文 書 を 交 わす 際 には 中 央 の 礼 賓 省 や 按 察 使 防 禦 使 などの 地 方 担 当 官 を 差 出 名 義 とする 牒 ( 統 属 関 係 にない 官 庁 間 で 使 用 )を 用 いるのが 一 般 的 だった 3) 対 馬 の 事 案 からも 窺 われるように 中 央 の 上 級 官 府 である 尚 書 省 が 直 接 文 書 を 発 行 することは それだけ 案 件 や 交 渉 相 手 の 重 要 性 を 意 味 する 初 顔 合 わせであるモンゴル 将 帥 に 対 して 尚 書 省 名 義 で 応 対 したことは 未 知 の 交 渉 相 手 に 対 する 異 例 な 重 視 の 表 れであり 換 言 すれば 慎 重 な 警 戒 姿 勢 ともいえるだろう 文 書 07 12は 王 族 の 淮 安 公 侹 を 差 出 名 義 とすることが 録 文 タイトルに 記 されている 前 者 は 彼 が モンゴルに 派 遣 された 際 の 道 中 保 護 に 対 する 礼 状 であり 後 者 はモンゴルの 将 帥 唐 古 から 令 公 宛 て に 送 られた 金 線 を 当 の 権 臣 崔 怡 が 受 領 せず 淮 安 公 名 義 で 返 書 を 作 成 したものである 4) この 場 合 はいずれも 私 的 な 性 格 の 強 い 書 状 と 考 えられる これらに 対 し 以 下 の 文 書 は 差 出 名 義 が 高 麗 王 ( 当 時 は 高 宗 )であることが 比 較 的 明 瞭 にわかる 事 例 である まず 文 書 06は 国 銜 ( 国 家 としての 資 格 )の 文 書 が 予 という 一 人 称 により 記 されてお り 具 体 的 には 王 朝 を 代 表 する 国 王 の 名 義 であったとみられる 同 じ 国 銜 行 である 文 書 05も 同 様 である 可 能 性 が 高 い 3) 森 平 2007 pp 参 4) 高 麗 史 巻 129 崔 忠 献 伝 附 崔 怡 伝 高 麗 史 節 要 巻 16 高 宗 19 年 5 月
195 13 世 紀 前 半 における 麗 蒙 交 渉 の 一 断 面 193 文 書 17には 所 論 予 及 崔 令 公 出 来 事 ( モンゴル 側 が 論 じる 所 の 予 と 崔 令 公 の 出 頭 の 事 )とあ り 権 臣 崔 怡 とともにモンゴルから 出 頭 を 命 じられた 予 が 高 宗 であることは 明 らかである 文 書 21も 予 という 一 人 称 により 記 される 一 方 遣 親 弟 新 安 公 代 我 身 ( 親 弟 の 新 安 公 を 遣 わして 我 が 身 に 代 える)と 述 べており 王 弟 新 安 公 の 兄 である 高 宗 の 名 義 で 書 かれていることが 判 明 する 同 じく 予 と いう 一 人 称 で 書 かれ 親 弟 新 安 公 の 文 言 が 現 れる 文 書 22も 同 様 であろう 文 書 13では モンゴルの 攻 撃 通 告 に 対 する 高 麗 の 百 姓 の 動 揺 を 説 明 し 予 亦 不 能 無 懼 ( 予 もま た 恐 れないわけにはいかない)と 述 べ また 達 魯 花 赤 (モンゴルの 監 視 官 )を 高 麗 が 殺 害 したことに 関 す る 譴 責 に 対 して 予 亦 一 一 不 能 知 之 ( 予 もまた 詳 細 な 状 況 を 逐 一 承 知 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と 回 答 している また 文 書 18では 予 は 大 官 人 を 遣 わして 書 を 皇 帝 闕 下 に 奉 る ( 遣 以 大 官 人 奉 書 于 皇 帝 闕 下 )と 記 し さらに 文 書 20では 予 は 使 者 を 遣 わして 土 地 の 些 少 の 産 物 を 皇 帝 闕 下 に 奉 進 する ( 以 土 地 軽 薄 所 産 遣 使 介 奉 進 于 皇 帝 闕 下 )と 記 している これらの 予 は 王 朝 の 統 治 に 責 任 を 負 い 国 家 を 代 表 してモンゴルと 交 渉 し 遣 使 進 献 を 行 う 主 体 であり 国 王 にほかならない 文 書 11において モンゴルの 指 示 を 有 司 に 命 じて 実 施 したと 述 べ るのも 国 王 の 行 為 であろう 文 書 も 予 という 一 人 称 によって 書 かれているが 差 出 名 義 は 国 王 だったと 理 解 してよいとおもう また 文 書 25 27については 国 王 文 書 であることが 高 麗 史 世 家 の 地 の 文 に 明 記 されている このように 差 出 名 義 が 録 文 のタイトルや 附 記 に 明 示 されない 外 交 文 書 については 実 際 には 国 王 名 義 の 文 書 だったことが 確 認 推 定 されるケースが 多 く 逆 に 国 王 名 義 ではないことが 確 認 推 定 され るものはない 文 書 のごとく 国 王 以 外 の 名 義 の 外 交 文 書 を 移 録 する 場 合 通 常 は 差 出 名 義 が 録 文 タイトル 等 に 明 示 されるのであろう したがって 差 出 名 義 が 附 記 されず かつ 文 書 内 容 に 判 断 材 料 がみあたらない 文 書 ~ も 国 王 名 義 である 可 能 性 が 高 いと 考 え られる 2) 書 式 文 書 01に 関 しては 尚 書 省 牒 という 記 載 があり 統 属 関 係 のない 官 庁 間 で 用 いる 牒 が 用 いられた ようにもみえる しかしこれは 編 纂 史 料 の 地 の 文 での 叙 述 であり 官 文 書 を 表 す 一 般 名 詞 にすぎない 可 能 性 もある 一 方 文 書 02では 録 文 の 文 言 により 対 等 関 係 での 書 簡 文 である 致 書 ( 書 き 出 しが 某 謹 致 書 ( 于 ) 某 となる) 5) が 使 用 されていることがわかる 文 書 01の 牒 も 実 体 は 致 書 であった 可 能 5) 致 書 について 中 村 1991 pp 中 村 1996 pp 中 西 200 参
196 19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性 があるが 当 初 は 牒 もしくは 別 の 書 式 を 使 用 しながら 後 に 致 書 に 変 更 したことも 考 えられないわ けではない チンギス カンČinggis Qanの 弟 カサルQasarの 子 であるイェグウYegü 大 王 に 対 して 国 王 名 義 で 出 さ れた(ないし 出 されたとみられる) 文 書 24~26(26では 官 人 に 対 するものも 含 む)も 部 分 的 な 録 文 では 書 式 が 判 明 しないが 高 麗 史 の 地 の 文 ではこれらの 送 付 を 致 書 と 述 べている しかし 高 麗 王 に 対 する 金 朝 皇 帝 の 詔 諭 や 6) 冒 頭 部 分 に 高 麗 国 王 昛 謹 奉 書 于 日 本 国 王 殿 下 と 記 す1292 年 の 対 日 国 書 7)のごとく 明 らかに 致 書 ではない 外 交 文 書 の 送 付 について 高 麗 史 の 地 の 文 では 致 書 と 表 現 するケースがある 8) 編 纂 史 料 の 地 の 文 における 文 言 で 書 式 を 判 断 するのは 危 険 であろう 高 麗 史 にみえる 他 の 事 例 ( 文 書 27~29)にいたっては 単 に 書 とあるのみで 書 状 一 般 をさす 場 合 と 区 別 がつかず やはり 書 式 を 表 す 術 語 とは 断 定 できない 一 方 全 体 の 半 数 弱 となる 文 書 04 08~18に 関 しては 右 啓 ないし 某 啓 ( 淮 安 公 名 義 の 文 書 07 12)と 書 き 出 し 不 宣 再 拝 謹 啓 などとむすぶ 書 式 が 用 いられている これは 中 国 でいう 啓 に 相 当 する 高 麗 が 参 酌 した 唐 制 において 啓 は 皇 太 子 ( 実 際 には 皇 太 子 以 外 の 王 も 含 む)や 官 府 の 長 に 対 する 上 申 文 と 規 定 されているが 9) 一 般 官 人 同 士 の 上 行 文 書 として また 私 人 間 において 丁 寧 の 意 を 表 し 吉 凶 の 挨 拶 や 起 居 を 通 じる 場 合 その 他 の 書 簡 文 として ひろく 用 いられていた 10) 外 交 での 使 用 は 隋 末 唐 の 高 祖 李 淵 が 自 立 当 初 において 突 厥 可 汗 に 対 して 使 用 した 例 や 渤 海 王 が 日 本 に 対 して 用 いた 例 がよく 知 られている これらは 丁 寧 の 意 をあらわす 個 人 間 の 通 信 文 としての 啓 の 性 格 を 応 用 したものと 考 えられ 渤 海 については 日 本 に 対 して 臣 礼 を 避 けつつも 辞 を 卑 くして 友 好 関 係 を 結 ぼうという 意 図 が 指 摘 されている 11) 宋 司 馬 光 の 温 公 書 儀 巻 1 私 書 では 私 文 書 における 啓 事 ( 物 事 を 陳 述 する 際 の 書 状 )の 書 式 とし て 啓 の 一 形 式 が 次 のように 記 されている([ ]は 割 註 ) 具 位 姓 某 右 某 啓 [ 述 事 云 々] 謹 奉 啓 事 陳 聞 [ 陳 賀 陳 謝 随 時 ] 伏 惟 尊 慈 俯 賜 鑑 念 不 宣 謹 啓 月 日 具 位 姓 某 啓 上 表 にあげた 文 書 録 文 で 右 啓 と 書 き 出 しているものは おそらく 冒 頭 の 具 位 姓 某 が 欠 け 6) 高 麗 史 巻 14 睿 宗 世 家 14 年 2 月 丁 酉 7) 日 本 金 沢 文 と 東 京 大 学 史 料 編 纂 写 し 残 され( 録 文 は 竹 内 1982 pp ) 8) 金 沢 文 庫 の 対 日 国 書 に 関 しては 高 麗 史 巻 30 忠 烈 王 世 家 18 年 10 月 庚 寅 に 記 録 がある 9) 朝 鮮 王 朝 で 国 王 に 対 する 上 申 文 を 啓 というのは この 流 れをひくものである 10) 堀 1998 pp 参 照 11) 堀 1998 pp また 石 井 2001 石 井 2001b pp 参 照
197 13 世 紀 前 半 における 麗 蒙 交 渉 の 一 断 面 195 ているのであろう 次 行 の 右 某 啓 の 某 も 欠 けていることになるが 後 述 する1267 年 の 啓 式 対 日 国 書 では 冒 頭 に 高 麗 国 王 王 禃 とあり 2 行 目 に 右 啓 と 書 き 出 している 交 戦 期 の 対 モンゴル 文 書 のうち 右 啓 とあるものは いずれも 国 王 文 書 であるか そのように 推 定 されるものであるから 年 のケースと 同 様 に 高 麗 国 王 姓 諱 / 右 啓 (/は 改 行 を 意 味 する)と 書 き 出 されていたものとおもわれ る 一 方 冒 頭 を 某 啓 と 記 すのは 淮 安 公 名 義 の 文 書 のみだが 唐 代 の 啓 では 一 般 的 な 表 記 法 で あり 例 えば 渤 海 の 対 日 国 書 のなかで 武 芸 啓 などと 書 き 出 している 温 公 書 儀 私 書 では 時 候 啓 状 ( 時 候 の 挨 拶 状 )や 別 簡 ( 添 え 状 か) 手 簡 ( 一 般 的 な 書 簡 )において 某 啓 と 書 き 出 す 形 式 をあげてお り 平 交 稍 卑 に 対 して 用 いるケースもみえる 国 王 の 啓 と 人 臣 の 啓 の 冒 頭 が 異 なるのは 国 王 の 啓 が 王 朝 を 代 表 する 国 書 であるのに 対 し 12) 淮 安 公 の 啓 は 前 述 のごとく 私 的 な 礼 状 であるという 違 いに 由 来 するのだろうが 温 公 書 儀 における 啓 事 とその 他 の 某 啓 形 式 の 用 法 区 分 が あるいはこの 違 いに 対 応 するのかもしれない ただ 右 啓 とする 啓 は 今 のところ 唐 代 には 確 認 できないようである 3. 使 用 書 式 の 歴 史 的 文 脈 啓 という 書 式 は 東 文 選 や 東 国 李 相 国 集 に 収 められた 文 書 録 文 を 通 じて 高 麗 国 内 でも 使 用 されていたことが 窺 われる 13) 現 時 点 では 用 法 に 関 して 中 国 との 違 いは 看 取 されない しかし 高 麗 前 期 には 宋 遼 金 など 冊 封 宗 主 国 やこれに 準 ずる 大 陸 王 朝 の 皇 帝 以 外 の 外 国 政 府 関 係 者 に 対 して 国 王 が 親 書 を 送 る 行 為 自 体 まれな 現 象 である 14) また 実 のところ 外 交 における 啓 の 使 用 はあまり 一 般 的 ではない 唐 末 より 東 アジアでは ある 君 主 が 君 臣 関 係 のない 外 国 君 主 などに 文 書 を 送 る 場 合 致 書 を 用 いるケースが 目 につく 15) モンゴル 交 戦 期 の 高 麗 王 も 遼 東 に 独 自 政 権 を 築 いていた 蒲 鮮 萬 奴 に 対 し 高 麗 国 王 某 謹 廻 書 于 東 夏 国 王 12) 国 書 とは 必 ずしも 君 主 間 で 交 わされる 文 だけではな 高 麗 史 巻 7 文 宗 世 家 9 年 7 月 丁 巳 による 契 丹 の 東 京 留 守 に 対 する 高 麗 王 の 親 書 も 国 書 と 呼 ばれている 13) 林 椿 代 李 湛 之 寄 権 御 史 敦 礼 書 荅 朴 仁 碩 書 ( 東 文 選 巻 58) 同 与 皇 甫 若 水 書 上 李 学 士 書 与 皇 甫 若 水 書 与 趙 亦 楽 書 同 前 書 与 洪 校 書 書 ( 同 書 巻 59) 李 奎 報, 与 金 秀 才 懐 英 書 ( 東 国 李 相 国 集 巻 26) 同 軍 中 荅 安 処 士 置 民 手 書 又 寄 安 処 士 ( 東 国 李 相 国 集 巻 26 ; 東 文 選 巻 5 9) 14) 宋 強 至 祠 部 集 巻 28 に 収 める 代 史 館 王 相 公 答 高 麗 王 王 徽 書 と 又 代 参 政 馮 諫 議 答 高 麗 王 書 は 宋 の 高 官 に 対 して 高 麗 王 の 親 書 が 送 られたことを 窺 わせる 例 である また 書 式 は 不 明 だが 契 丹 の 東 京 留 守 に 対 して 致 書 ( 書 式 は 不 明 した 例 もある( 高 麗 史 巻 7 文 宗 世 家 9 年 7 月 丁 巳 ) 15) 中 西 20 参 照
198 19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殿 下 という 冒 頭 句 の 書 状 を 送 っている 16) これは 蒲 鮮 萬 奴 から 送 られた 書 状 に 対 する 返 書 であるため 謹 廻 書 となっているが 事 実 上 致 書 である しかも 官 文 書 であれ 私 文 書 であれ 啓 は 基 本 的 に 相 手 を 上 にたてた 丁 重 な 書 式 である 対 等 な 関 係 において 用 いる 致 書 とは 性 格 が 異 なる おそらく それは 外 交 文 書 でも 同 様 であり 金 初 の 外 交 文 書 を 集 めた 大 金 弔 伐 録 の 記 録 によると 南 宋 の 高 宗 は 金 軍 の 元 帥 に 対 し 当 初 は 大 宋 皇 帝 と 名 乗 り 致 書 を 使 用 したが 劣 勢 に 立 たされて 宋 康 王 趙 構 を 名 乗 るにいたると やがて 啓 を 用 いるよ うになった 17) 一 方 1218 年 にモンゴル 軍 が 初 めて 高 麗 に 入 った 際 高 麗 政 府 はその 指 揮 官 に 対 し 尚 書 都 省 名 義 の 致 書 を 用 いた ところがその 後 同 じようなモンゴルの 将 帥 に 対 して 国 王 名 義 の 啓 を 使 用 する 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 高 麗 の 官 庁 が 平 行 文 書 を 用 いた 対 象 に 対 し 君 主 が 上 行 文 書 を 用 いたことに なるのだが これは 両 国 関 係 が 大 きく 変 化 したことに 起 因 しよう 1218 年 段 階 では 契 丹 集 団 を 共 同 討 滅 する 友 軍 として 接 触 したのだが 1231 年 以 降 はモンゴルの 大 規 模 侵 攻 を 被 るなかでの 折 衝 であっ た すなわち 南 宋 の 高 宗 が 金 に 対 して 行 ったように 危 急 存 亡 の 秋 を 迎 えた 高 麗 は 国 王 自 ら 辞 を 卑 くして 交 渉 にあたる 形 をとることで 事 態 の 打 開 をはかろうとしたのであろう そのような 高 麗 の 危 機 意 識 が 異 例 ともいうべき 啓 の 使 用 にも 表 れているとみられる 一 方 文 書 04において 高 麗 王 はチンギス カンČinggis Qanの 末 弟 テムゲ オッチギンTemüge Ot čiginに 対 しても 啓 を 用 いている 同 じオッチギンに 対 する 文 書 03においてどのような 書 式 が 用 いられた かは 不 明 だが モンゴルとの 開 戦 以 前 から 啓 を 用 いたことがわかる チンギス 近 親 の 皇 族 であるから モンゴル 官 人 に 対 するよりは 啓 の 使 用 も 不 自 然 ではないが 同 格 の 王 という 立 場 であれば 致 書 を 使 用 してもおかしくないところである しかし 当 時 オッチギンは 西 方 遠 征 中 のチンギスの 名 代 としてモン ゴル 高 原 を 統 括 する 責 任 者 であった 彼 を 皇 太 弟 と 呼 ぶ 高 麗 側 もその 勢 威 を 充 分 に 承 知 していたで あろう そして モンゴル 高 原 東 部 に 根 拠 地 を 有 し さらに 東 方 に 勢 力 を 拡 大 しようとするオッチギンは 当 時 は 貢 物 の 要 求 をくりかえして 高 麗 政 府 を 困 惑 させていた 1225 年 に 高 麗 辺 境 で 遭 難 して 両 国 関 係 決 裂 の 直 接 契 機 をつくった 著 古 与 は オッチギンのもとから 派 遣 された 人 物 である そのような 強 圧 的 な 皇 太 弟 との 折 衝 にあたり 慎 重 に 辞 を 卑 くした 国 王 文 書 を 用 いたのは 高 麗 ならではの 鋭 敏 な 対 応 であるとおもう そうすると 文 書 24~26のイェグウ 大 王 に 対 する 致 書 についても 多 少 の 推 論 が 可 能 になろう こ れが 高 麗 史 の 用 字 そのままに 致 書 であるとすると 過 去 にモンゴル 官 人 に 対 して 啓 を 用 いながら 格 16) 東 文 選 巻 61 回 東 夏 国 書 17) 井 黒 2008 参 照
199 13 世 紀 前 半 における 麗 蒙 交 渉 の 一 断 面 197 上 のモンゴル 皇 族 に 対 しては 逆 に 平 行 文 書 を 用 いたことになる しかし 苦 しい 戦 況 が 続 く 当 時 の 状 況 で は 考 えにくいことである やはり 致 書 は 書 式 を 表 す 術 語 ではなく 実 際 には 何 らかの 上 行 文 書 が 用 いられた 公 算 が 大 きいとおもう オッチギンの 例 から 類 推 すれば それは 啓 だったかもしれない 明 ら かに 啓 である 文 書 09の 送 付 について 高 麗 史 巻 23 高 宗 世 家 19 年 4 月 壬 戌 の 地 の 文 では 致 書 と 述 べてもいる モンゴル 官 人 に 対 する 国 王 文 書 のなかで 書 式 の 窺 えない ~ も あ るいはすべて 啓 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 ただし 書 形 式 にも 奉 書 献 書 など より 丁 重 な 書 式 も あるので それらが 使 用 された 可 能 性 も 皆 無 ではないだろう このあたりは 史 料 が 不 足 しているため 推 断 を 差 し 控 えたい なお 高 麗 における 啓 式 外 交 文 書 は 意 外 に 早 くから 存 在 した 可 能 性 も 皆 無 ではない 日 本 の 平 安 貴 族 藤 原 実 資 の 日 記 小 右 記 長 徳 3 年 (997)6 月 日 条 によると この 年 高 麗 国 牒 三 通 が 日 本 にもたらされ それぞれ 日 本 国 対 馬 島 司 対 馬 島 に 宛 てられていたが 一 方 でこれらの 文 書 は 高 麗 国 啓 牒 と 総 称 されてもいる 啓 と 牒 がそれぞれ 書 式 を 表 す 語 だったならば 少 なくとも 日 本 国 宛 ての 文 書 などは 啓 だった 可 能 性 が 高 い この 事 件 は 日 本 側 が 宋 の 謀 略 を 疑 うなど 差 出 人 の 正 体 に 不 審 点 をのこすが 実 際 に 高 麗 政 府 から 文 書 が 送 られた 可 能 性 はある そうだとすれば 外 交 に 啓 を 用 いる 先 例 はすでに 高 麗 初 期 にあり それは 国 王 名 義 のものだったかもしれないのである その 際 に 注 意 されるのは 10 世 紀 高 麗 には 渤 海 の 滅 亡 前 後 を 中 心 に 世 子 大 光 顕 をはじめとする その 遺 民 が 数 多 く 流 入 したことである 唐 代 に 啓 式 外 交 文 書 の 使 用 が 確 認 されるのは 今 のところ 渤 海 のみである 渤 海 に 蓄 積 されてきた 対 日 外 交 のノウハウが 高 麗 に 伝 わっていた 可 能 性 も 無 視 できな いであろう 997 年 に 高 麗 が 日 本 に 対 して 上 行 形 式 の 国 書 を 送 ったとすれば その 背 景 として 想 像 され るのは この 直 前 に 高 麗 が 契 丹 の 最 初 の 大 規 模 侵 攻 をうけたことである 北 からの 脅 威 を 迎 えた 高 麗 政 府 が 対 日 関 係 の 好 転 をはかろうとしたのであれば あえて 啓 を 用 いたことも 不 自 然 ではない 18) まさ に 唐 新 羅 と 対 峙 した 渤 海 武 王 が 日 本 に 啓 を 送 ってきた 時 と 同 じような 状 況 があったことになる しかしその 後 13 世 紀 前 半 まで200 年 以 上 にわたり 高 麗 の 啓 式 外 交 文 書 は 確 認 できない 10 世 紀 における 啓 式 国 書 の 存 否 は 別 として モンゴル 官 人 に 対 する 啓 の 使 用 に 制 度 上 の 連 続 性 があるか 否 かは 軽 々に 判 断 しかねるところである 高 麗 の 啓 式 外 交 文 書 が 最 後 に 確 認 されるのは 1274 年 に 元 高 麗 軍 が 日 本 を 侵 略 した 甲 戌 の 役 ( 日 本 史 上 のいわゆる 文 永 の 役 )に 先 だち 日 本 に 対 して 対 元 通 好 を 勧 告 する 目 的 で 作 成 された 至 元 4 年 (1 267) 付 け 日 本 国 王 宛 ての 元 宗 国 書 である 原 本 はないが 日 本 東 大 寺 所 蔵 の 調 伏 異 朝 怨 敵 抄 に 18) 南 基 鶴, 2003 p.31では 997 年 高 から 文 に 対 して 日 本 側 が 警 戒 感 を 示 したことについ 高 麗 の 大 国 意 識 表 れてい 可 能 性 を 指 摘 しているが もし 国 書 に 啓 を 用 いておれば 少 なくと 書 式 の 面 では 異 なることになる
200 19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このときの 元 世 祖 クビライQubilaiの 国 書 や 高 麗 使 潘 阜 らの 書 状 とともに 写 しが 残 されている 19) 主 要 部 のテキストは 高 麗 史 高 麗 史 節 要 にも 伝 えられ 二 次 的 な 録 文 は 江 戸 時 代 の 日 本 で 編 まれた 外 交 文 書 集 異 国 出 契 ( 内 閣 文 庫 所 蔵 )にも 収 められるが 同 時 代 性 が 高 く 首 末 をはじめとする 諸 形 式 が より 原 型 に 近 いと 考 えられる 調 伏 異 朝 怨 敵 抄 の 写 しが 高 い 史 料 的 価 値 を 有 している この 文 書 は 冒 頭 に 高 麗 国 王 王 禃 / 右 啓 云 々とあり 結 辞 には 拝 覆 / 日 本 国 王 左 右 / 至 元 四 年 九 月 日 啓 と 記 されており(/は 改 行 ) まさしく 啓 にほかならない ただし 高 麗 王 が 同 じ 王 である 日 本 の 君 主 に 対 して 上 行 文 書 を 用 いたのはやや 不 可 解 であり 蒲 鮮 万 奴 と 同 様 に 致 書 を 用 いるのが 自 然 にもおもえる 前 述 のごとく10 世 紀 に 前 例 があり それに 倣 った だけなのかもしれないが 2つの 出 来 事 に250 年 以 上 の 時 代 差 があること 10 世 紀 以 降 の 両 国 政 府 の 関 係 が 非 常 に 疎 遠 であること また 高 麗 が 国 家 体 制 を 整 えてゆく 過 程 で 海 東 天 子 20) や 八 関 会 的 秩 序 21) といわれる 自 尊 の 姿 勢 を 形 成 してきたことを 考 慮 すれば ただちには 首 肯 しがたい このことに ついては 一 緒 に 日 本 に 送 られた 元 の 国 書 との 兼 ね 合 いや 元 の 対 日 招 諭 に 対 する 高 麗 の 態 度 をあ わせて 考 える 必 要 があるが ここでの 論 旨 からは 外 れるので 別 の 機 会 に 考 察 したいとおもう 4. 高 麗 史 料 からみたモンゴル 官 人 の 文 書 モンゴル 官 人 から 高 麗 側 に 送 付 された 文 書 内 容 が 具 体 的 にわかるのは 第 1 次 侵 攻 軍 を 指 揮 する 撒 礼 塔 より1231 年 に 送 られた2 通 の 書 状 である 22) モンゴル 帝 国 で 編 み 出 された 白 話 風 の 漢 語 を 用 いてモンゴル 文 を 直 訳 調 に 訳 した 特 殊 文 体 いわゆるモンゴル 文 直 訳 体 白 話 風 漢 文 23)により 記 されて いるが この 種 の 文 書 としては 最 初 期 の 事 例 であり 他 に 類 例 のない 文 章 構 成 となっている その 文 書 学 的 性 格 については 専 門 家 の 研 究 にまたねばならないが その 冒 頭 句 天 底 気 力 天 道 将 来 底 言 語 所 得 不 秋 底 人 有 眼 瞎 了 有 手 没 了 有 脚 子 瘸 了 ( 天 の 力 天 の 言 ってきた 言 葉 従 わない 者 は 目 があればつぶれろ 手 があればなくなれ 足 があれば 病 んでしまえ)などは モンゴル 命 令 文 特 有 の 権 限 付 与 と 威 嚇 文 言 の 要 素 に 相 当 する 24) こうした 天 の 権 威 の 主 張 や 脅 し 文 句 は モンゴルでは 半 ば 定 型 化 した 言 い 回 しである しかしクビライQubilai 国 書 25)の 至 用 兵 夫 孰 所 好 19) 調 伏 異 朝 怨 敵 抄 のテキスについて 平 岡 195 所 載 の 影 を 参 照 20) 明 参 照 21) 奥 村 1979 参 照 22) 高 麗 史 巻 23 高 宗 世 家 18 年 12 月 壬 子 甲 戌 な 本 文 書 の 試 釈 に 村 上 1960Ledyard196がある 23) モンゴル 文 直 訳 体 に 関 する 最 新 の 研 究 成 果 に 舩 田 2007がある 24) モンゴル 命 令 文 の 書 式 については 松 川 1995を 参 照
201 13 世 紀 前 半 における 麗 蒙 交 渉 の 一 断 面 199 ( 兵 を 用 いるに 至 っては だれが 好 むであろうか)に 対 する 日 本 の 反 応 にもみられるように 文 化 の 異 な る 外 国 では 深 刻 に 受 け 止 められ 摩 擦 を 引 き 起 こしかねない 高 麗 側 の 受 けとめ 方 は 記 録 されていな いが 大 きな 衝 撃 をうけたことも 充 分 に 想 像 される 他 にモンゴル 官 人 の 文 書 が 全 面 的 に 著 録 された 例 はないが 次 のように 高 麗 側 文 書 で 引 用 された 部 分 があり やはりモンゴル 文 直 訳 体 白 話 風 漢 文 で 書 かれた 事 例 が 確 認 される 26) 文 書 03 不 曾 発 遣 女 孩 児 及 会 漢 児 言 語 人 亦 不 進 奉 諸 般 要 底 物 文 書 08 你 国 選 揀 人 戸 赴 開 州 館 及 宣 城 山 脚 底 住 坐 種 田 文 書 13 你 者 巧 言 語 説 得 我 出 去 後 却 行 返 変 了 入 海 裏 住 去 不 中 的 人 宋 立 章 許 公 才 那 両 箇 来 的 説 謊 走 得 来 你 毎 信 那 人 言 語 呵 返 了 也 達 魯 花 赤 交 死 則 死 留 下 来 如 今 你 毎 拿 縛 者 你 本 心 投 拝 出 来 迎 我 不 投 拝 軍 馬 出 来 与 我 廝 殺 者 以 上 は 文 書 の 主 文 であるが 冒 頭 形 式 については 文 書 22の 録 文 附 記 に 来 書 云 福 裏 統 領 蒙 古 糺 漢 大 軍 征 討 高 麗 唐 古 抜 都 魯 言 語 道 与 高 麗 王 ( 来 書 にいう 福 廕 のもとに 統 領 蒙 古 糺 漢 大 軍 征 討 高 麗 唐 古 抜 都 魯 の 言 葉 高 麗 王 に 言 う)とある 某 の 言 語 某 に 道 与 する という 表 現 は 初 期 のモンゴル 命 令 文 でよくみられる 形 だが 福 廕 裏 という 冒 頭 句 は 不 可 解 である 福 廕 に 言 及 する ならば 何 の 福 廕 であるかを 示 さねばならない これに 関 連 して 注 目 されるのは 高 麗 側 の 文 書 内 にみえる 次 のような 文 言 である 文 書 21 孟 夏 漸 熱 伏 惟 長 生 天 気 力 蒙 古 大 朝 国 四 海 皇 帝 福 裏 大 官 人 閣 下 起 居 千 福 文 書 22 夏 序 方 廻 伏 惟 長 生 天 気 力 蒙 古 大 朝 国 皇 帝 福 裏 帥 府 大 官 人 閣 下 茂 膺 千 福 いずれも 本 題 に 入 る 前 に 送 付 先 に 対 して 挨 拶 を 述 べる 部 分 だが 長 生 天 気 力 蒙 古 大 朝 国 皇 帝 福 裏 (とこしえの 天 の 力 のもとに 蒙 古 大 朝 国 皇 帝 の 威 福 のもとに)という 文 言 が 送 付 先 に 含 まれている のである 本 来 これはモンゴル 命 令 文 において 権 限 付 与 を 意 味 する 冒 頭 定 型 句 である 27) おそら く 文 書 21 22の 作 成 に 先 だって 高 麗 に 送 付 されてきたモンゴル 側 の 文 書 の 冒 頭 には 長 生 天 気 力 蒙 古 大 朝 国 皇 帝 福 廕 裏 某 官 某 言 語 などと 記 されていたものを 高 麗 側 が 誤 解 し 長 生 天 気 力 蒙 古 大 朝 国 皇 帝 福 廕 裏 を 発 令 者 たる 官 人 を 修 飾 する 語 句 とみなしたのであろう しかし 文 書 22に 先 だつ 来 書 に 関 する 記 録 が 残 された 際 には 単 純 なミスか 参 照 された 文 書 原 本 ないし 録 文 の 欠 損 といっ た 理 由 により 福 裏 より 前 の 部 分 が 脱 落 したものとおもわれる 25) 調 伏 異 朝 怨 敵 抄 所 収 26) これは 発 令 者 がモンゴル 人 だからであり 耶 律 楚 材 など 漢 文 化 人 が 発 した 文 書 があったとすれ( 未 確 認 お そらく 通 常 の 漢 が 使 用 されたであろう 27) モンゴル 語 のmöngke tengri yin kün dur. yeke monol ulus un qan u suu durの 直 訳
202 20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なおモンゴル 帝 国 の 統 治 下 であれば こうした 文 書 に 国 号 を 冠 する 必 要 はないわけで 蒙 古 大 朝 国 皇 帝 という 名 乗 りは 外 国 を 対 象 とする 文 書 であるがゆえの 用 語 である さらに 近 年 モンゴル 帝 国 に 関 して 大 朝 という 称 謂 が 注 目 され 28) 大 朝 大 朝 国 大 朝 蒙 古 国 といった 中 国 史 料 での 用 例 が 紹 介 されているが 蒙 古 大 朝 国 という 表 現 は 高 麗 史 料 より 判 明 した 新 たな 知 見 となる 29) また 文 書 21では 蒙 古 大 朝 国 四 海 皇 帝 という 称 謂 も 注 意 される 1246 年 のローマ 教 皇 インノケンティ ウス4 世 Innocentius Ⅳ 宛 て 定 宗 グユクGüyüg 国 書 の 印 璽 銘 には 皇 帝 の 称 謂 が mong ol un ulus un dalay in qan (モンゴルの 国 の 海 の 皇 帝 )と 記 される 30) この dalay in の 漢 訳 が 四 海 であろう 文 書 21は 太 宗 オゴデイÖgödei 期 のもので 四 海 皇 帝 という 称 謂 がオゴデイとグユクに 関 して 確 認 さ れたことになる モンゴル 帝 国 に 関 してユーラシアの 極 東 ( 朝 鮮 )と 極 西 ( 欧 州 )の 史 料 が 見 事 に 符 合 する 一 例 である 31) 高 麗 への 送 付 文 書 についてはモンゴル 文 正 本 が 存 在 した 可 能 性 も 指 摘 されており 32) 高 麗 がモン ゴルに 送 った 国 書 に モンゴル 側 から 送 られた 文 書 に 関 して 以 文 字 之 各 殊 憑 訳 解 而 乃 識 ( 文 字 が 互 いに 異 なるので 翻 訳 によって 理 解 した) 33) とあることが 根 拠 のひとつとなる ただしオゴデイ 期 のモ ンゴルの 国 情 を 記 した 黒 韃 事 略 には 行 於 漢 人 契 丹 女 真 諸 亡 国 者 只 用 漢 字 ( 漢 人 契 丹 女 真 諸 亡 国 に 送 る 文 書 は 漢 字 のみ 用 いる)ともあるので モンゴル 文 直 訳 体 で 記 された 外 交 文 書 のすべて にモンゴル 語 正 本 があったとみなすのも 早 計 であろう 5. むすびにかえて 本 報 告 では 麗 蒙 交 戦 期 において 高 麗 がモンゴル 官 人 に 対 して 用 いた 文 書 形 式 について 検 討 し その 歴 史 的 性 格 を 考 察 した あわせて 高 麗 側 の 記 録 より 窺 えるモンゴル 側 の 文 書 の 内 容 形 式 について も 若 干 の 論 及 をおこなった あえて 大 胆 な 推 測 を 加 えた 部 分 もあり ひとつの 試 論 にすぎないが 諸 賢 の 叱 正 を 乞 う 28) 采 2006 参 照 29) 蒙 古 大 朝 国 という 表 現 高 麗 史 巻 23 高 宗 世 家 18 年 12 月 甲 戌 収 められ 文 書 にもみえる 30) Pelliot1923, pl.なおモンゴル 皇 帝 のなかでもチンギスとグユクはqanと 呼 ばれる 31) 李 承 賓 王 録 描 され 元 の 宮 廷 饗 宴 模 マルコ ポーロの 東 方 見 聞 録 記 と 一 致 すといケースも( 森 平 2004 pp.78 79) 32) 宮 2006 pp ) 東 国 李 相 国 集 巻 28 蒙 古 国 使 賚 廻 上 皇 帝 表
203 13 世 紀 前 半 における 麗 蒙 交 渉 の 一 断 面 201 < 表 > 高 麗 からモンゴル 官 人 に 対 して 送 られた 文 書 番 号 名 義 送 付 先 年 次 起 草 者 書 式 出 典 01 尚 書 省 哈 真 1218 牒 節 要 高 宗 5/12 02 尚 書 都 省 蒙 古 兵 馬 元 帥 1219 李 奎 報 某 月 日 右 謹 致 書 于 某 官 幕 下 惶 恐 惶 恐 蒙 古 兵 馬 元 帥 幕 送 酒 菓 書 ( 東 61; 李 28) 03 蒙 古 皇 太 弟 (オッチギン) 李 奎 報 蒙 古 国 使 賷 上 皇 大 弟 書 ( 東 61; 李 28) 04 大 王 (オッチギン) 1221 兪 升 旦 右 啓 謹 啓 同 前 書 ( 東 61) 回 東 夏 国 書 に 対 する 05 国 銜 行 閣 下 (サルタク) 1232 李 奎 報 国 銜 行 荅 蒙 古 書 ( 李 28; 東 61) 06 国 銜 行 荅 児 巨 元 帥 (タングト) 1232 李 奎 報 同 前 荅 児 巨 元 帥 状 ( 李 28) 07 淮 安 公 荅 児 巨 元 帥 (タングト) 1232 李 奎 報 淮 安 公 荅 同 前 元 帥 状 ( 李 28) 08 蒙 古 国 元 帥 1232 李 奎 報 右 啓 送 蒙 古 国 元 帥 書 ( 李 28; 東 61; 高 19/3/ 甲 午 ) 09 撒 里 打 官 人 (サルタク) 1232 李 奎 報 右 啓 送 撒 里 打 官 人 書 ( 李 28; 東 61; 高 19/4/ 壬 戌 ) 10 河 西 元 帥 (タングト) 1232 李 奎 報 右 啓 送 河 西 元 帥 書 ( 李 28; 東 61) 11 某 官 1232 李 奎 報 右 啓 不 宣 謹 啓 送 某 官 状 ( 李 28; 東 61) 12 淮 安 公 河 西 元 帥 (タングト) 1232 李 奎 報 某 啓 再 拝 謹 啓 淮 安 公 荅 河 西 元 帥 書 ( 李 28; 東 61) 13 蒙 古 官 人 1232 李 奎 報 右 啓 荅 蒙 古 官 人 書 ( 李 28; 東 61; 高 19/9) 14 沙 打 官 人 (サルタク) 1232 李 奎 報 右 啓 荅 沙 打 官 人 書 ( 李 28; 東 61; 高 19/11) 15 晋 卿 丞 相 ( 耶 律 楚 材 ) 1232 李 奎 報 右 啓 送 晋 卿 丞 相 書 ( 李 28; 東 61) 16 沙 打 里 (サルタク?) 1232 李 奎 報 右 啓 不 宣 再 拝 謹 啓 荅 沙 打 里 書 ( 李 28; 東 61; 高 19/11) 17 蒙 古 大 官 人 1232 李 奎 報 右 啓 不 宣 再 拝 謹 啓 送 蒙 古 大 官 人 書 ( 李 28; 東 61; 高 19/12) 18 蒙 古 大 官 人 1232 李 奎 報 右 啓 荅 蒙 古 大 官 人 書 ( 李 28; 東 61; 高 19/12) 19 唐 古 官 人 (タングト) 1238 李 奎 報 送 唐 古 官 人 書 ( 李 28; 東 61) 20 晋 卿 丞 相 ( 耶 律 楚 材 ) 1238 李 奎 報 送 晋 卿 丞 相 書 ( 李 28; 東 61) 21 中 山 称 海 ( 粘 合 重 山 チンカイ) 1240 金 敞 与 中 山 称 海 両 官 人 書 ( 東 61) 22 唐 古 官 人 (タングト) 1240 朴 暄 荅 唐 古 官 人 書 ( 東 62) 23 呉 悦 官 人 1240 李 蔵 用 与 呉 悦 官 人 書 ( 東 62) 24 也 窟 (イエグゥ) 1253 致 書 高 40/8/ 己 未 25 高 麗 王 也 窟 (イエグゥ) 1253 致 書 高 40/9/ 戊 寅 26 也 窟 阿 毋 侃 呉 悦 1253 致 書 高 40/11/ 戊 寅 王 万 戸 洪 福 源 27 高 麗 王 也 窟 (イエグゥ) 1253 書 高 40/11/ 戊 戌
204 20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28 胡 花 官 人 1253 書 高 40/11/ 戊 戌 29 車 羅 大 1256 書 高 43/4/ 乙 亥 (ジャライルタイ) 注 ) 李 : 東 国 李 相 国 集 東 : 東 文 選 高 : 高 麗 史 高 宗 世 家 ( 数 字 と 干 支 は 年 月 日 ) 節 要 ; 高 麗 史 節 要 は 編 纂 史 料 の 地 の 文 における 当 該 文 書 に 関 する 表 現 参 考 文 献 井 黒 忍, 2008, 金 初 の 外 交 文 書 様 式 と 国 際 関 係 大 金 弔 伐 録 の 検 討 を 中 心 に 国 際 シンポジウム 1 0~14 世 紀 東 アジアの 外 交 交 流 史 料 予 稿 集. 池 内 宏, 1963, 蒙 古 の 高 麗 征 伐 同 著 満 鮮 史 研 究 中 世 第 3 冊 吉 川 弘 文 館. 石 井 正 敏, 2001a, 神 亀 四 年 渤 海 の 日 本 通 交 開 始 とその 事 情 第 一 回 渤 海 国 書 の 検 討 同 著 日 本 渤 海 関 係 史 の 研 究, 吉 川 弘 文 館. 石 井 正 敏, 2001b, 古 代 東 アジアの 外 交 と 文 書 日 本 と 新 羅 渤 海 の 例 を 中 心 に 同 著 日 本 渤 海 関 係 史 の 研 究, 吉 川 弘 文 館. 奥 村 周 司, 1979, 高 麗 における 八 関 会 的 秩 序 と 国 際 環 境 朝 鮮 史 研 究 会 論 文 集 16. 中 西 朝 美, 2005, 五 代 北 宋 における 国 書 の 形 式 について 致 書 文 書 の 使 用 状 況 を 中 心 に 九 州 大 学 東 洋 史 論 集 33. 中 村 裕 一, 1991, 唐 代 制 勅 研 究, 汲 古 書 院. 中 村 裕 一, 1996, 唐 代 公 文 書 研 究, 汲 古 書 院. 旗 田 巍, 1965, 元 寇 蒙 古 帝 国 の 内 部 事 情, 中 央 公 論 社. 平 岡 定 海, 1959, 東 大 寺 宗 性 上 人 の 研 究 並 史 料 ( 中 ), 日 本 学 術 振 興 会. 舩 田 善 之, 2007, 蒙 文 直 訳 体 の 成 立 をめぐって モンゴル 政 権 における 公 文 書 翻 訳 システムの 端 緒 大 東 文 化 フォーラム 13. 堀 敏 一, 1998, 渤 海 日 本 間 の 国 書 をめぐって 同 著 東 アジアのなかの 古 代 日 本, 研 文 出 版. 松 川 節, 1995, 大 元 ウルス 命 令 文 の 書 式 待 兼 山 論 叢 ( 史 学 篇 ) 29. 宮 紀 子, 2006, モンゴルが 遺 した 翻 訳 言 語 旧 本 老 乞 大 の 発 見 によせて 同 著 モンゴル 時 代 の 出 版 文 化, 名 古 屋 大 学 出 版 会. 森 平 雅 彦, 2004, 賓 王 録 にみる 至 元 十 年 の 遣 元 高 麗 使 東 洋 史 研 究 森 平 雅 彦, 2007, 牒 と 咨 のあいだ 高 麗 王 と 元 中 書 章 の 往 復 文 書 史 淵 144. 村 上 正 二, 1960, 蒙 古 来 牒 の 飜 訳 朝 鮮 学 報 17. 姜 晋 哲, 1964, 蒙 古 의 侵 入 에 대한 抗 争 한국사7 武 臣 政 権 과 対 蒙 抗 争, 국사편찬위원회. 김재홍, 1963, 원 침략자를 반대한 고려 인민의 투쟁, 과학원출판사. 南 基 鶴, 2003, 高 麗 と 日 本 の 相 互 認 識 グローバリゼーションの 歴 史 的 前 提 に 関 する 学 際 的 研 究 平 成 12~14 年 度 科 研 費 補 助 金 ( 基 盤 研 究 A2) 研 究 成 果 報 告 書 村 井 章 介 訳 ( 原 載 : 日 本 歴 史 研 究 1
205 13 世 紀 前 半 における 麗 蒙 交 渉 の 一 断 面 年 ). 盧 明 鎬, 1997, 東 明 王 篇 과 李 奎 報 의 多 元 的 天 下 観 震 檀 学 報 盧 明 鎬, 1999, 高 麗 時 代 의 多 元 的 天 下 観 과 海 東 天 子 韓 国 史 研 究 柳 在 城 ( 執 筆 ) 蔡 漢 国 ( 主 幹 ), 1988, 対 蒙 抗 争 史, 国 防 部 戦 史 編 纂 委 員 会. 尹 龍 爀, 1991, 高 麗 対 蒙 抗 争 史 研 究, 一 志 社. 윤용혁, 1994,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한국사20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于 采 芑, 2006, 蒙 古 汗 国 国 号 大 朝 考 赫 時 遠 羅 賢 佑 烏 蘭 編 天 驕 偉 業 成 吉 思 汗 与 蒙 古 汗 国 研 究 紀 念 文 集, 社 会 科 学 文 献 出 版 社. Henthorn, W.E Korea: The Mongol Invasions, E.J.Brill. Ledyard, G., 1963, Two Mongol Documents from The Koryo sa,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Pelliot, P., 1923, Les Mongols et la Papauté, Revue de l'orient Chrétien, 3esérie.
206
207 三 別 抄 と 麗 日 関 係 尹 龍 爀 ( 公 州 大 学 校 ) はじめに 高 麗 時 代 の 国 家 的 次 元 での 日 本 との 関 係 は 他 の 時 代 に 比 べて 全 般 的 に 疏 遠 な 関 係 が 維 持 され た 時 期 である これはこの 時 期 が 政 治 的 外 交 的 な 側 面 で 政 府 次 元 で 互 いの 必 要 性 がそれほどなかっ たことを 意 味 する なおかつ 13 世 紀 には 蒙 古 との 戦 乱 で 高 麗 の 領 土 は 疲 弊 され 政 権 と 王 朝 の 命 運 がかかった 絶 対 絶 命 の 条 件 の 中 で 取 り 囲 まれていたが 戦 乱 に 処 した 大 陸 の 情 勢 の 中 で 日 本 は 封 建 的 な 体 制 に 安 住 することで 東 アジア 交 流 の 環 境 は 活 発 ではなかった 13 世 紀 日 本 の 高 麗 に 対 する 国 家 的 な 関 心 が 提 起 されたことは 蒙 古 の 圧 迫 による 新 しい 情 勢 のためであった 長 期 的 な 侵 掠 戰 のあげく 一 応 の 服 属 を 標 榜 した 高 麗 を 先 に 立 たせて 蒙 古 は 日 本 に 対 する 圧 迫 を 加 えており このよう な 蒙 古 の 対 日 招 誘 作 業 に 高 麗 はその 嚮 導 として 動 員 された 本 稿 では1270 年 から1273 年 まで 珍 島 と 済 州 島 を 拠 点 に 蒙 古 高 麗 連 合 勢 力 に 抵 抗 した 三 別 抄 と 日 本 との 関 係 を 考 察 することである もちろん 実 際 三 別 抄 と 日 本 が 互 いに 何 らかの 具 体 的 な 外 交 的 関 係 を 形 成 したことではない 1271 年 日 本 に 派 遣 された 三 別 抄 の 使 者 も 日 本 朝 廷 の 何 らかの 注 目 を 引 く ことができず なお 拠 点 にしていた 珍 島 が 陷 落 されてしまったからである 済 州 島 の 場 合 には 対 外 関 係 を 展 開 する 体 系 を 揃 えることができず 三 別 抄 は 一 つの 政 治 集 団 として 積 極 的 な 外 交 的 方 案 を 駆 使 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まま 歴 史 上 において 消 えてしまった しかし 反 蒙 の 戰 線 を 新 たに 形 成 した 三 別 抄 勢 力 が 反 蒙 抗 戦 の 新 しい 突 破 口 として 日 本 との 連 合 戦 線 を 構 築 したということは 注 目 すべきである 特 に このような 企 圖 の 一 環 として 送 られた 外 交 文 書 関 連 の 資 料 が 少 しでも 残 っているという 点 も 興 味 深 いことである 4 年 にわたる 三 別 抄 の 蜂 起 と 抗 戦 は 失 敗 で 終 わったが 蒙 古 の 対 日 征 役 にある 程 度 支 障 をもたらし
208 20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結 果 的 には 日 本 に 対 する 蒙 古 軍 の 攻 撃 は 順 調 ではない 経 過 をあらわした このような 点 において 三 別 抄 と 日 本 との 外 交 的 関 係 以 外 に 三 別 抄 の 抗 戦 が 引 き 起 こした 情 勢 の 変 数 に 注 目 することも 必 要 なこ とであろう 本 稿 ではこのような 観 点 からまず 三 別 抄 抗 戦 が 持 つ 東 アジア 戦 局 への 影 響 及 び 対 日 関 係 の 側 面 を 検 討 し ひいては 三 別 抄 の 対 日 外 交 関 連 文 書 である 高 麗 牒 状 不 審 條 條 の 文 件 を 対 日 関 係 の 側 面 から 分 析 してみたいとおもう これを 通 じて 三 別 抄 が13 世 紀 後 半 東 アジアに 及 ぼした 影 響 をさらに 立 体 的 に 把 握 してみたい 一 方 最 近 沖 繩 出 土 の 高 麗 瓦 と 三 別 抄 勢 力 との 関 連 性 に 関 する 議 論 に 対 してもともに 触 れてみたい 1. 高 麗 三 別 抄 と 對 蒙 抗 争 高 麗 で 三 別 抄 の 蜂 起 が 惹 起 された 時 点 は 1170 年 ( 元 宗 11) 6 月 1 日 である 蒙 古 軍 が 高 麗 に 侵 入 を 開 始 して 崔 氏 政 権 がこれに 不 服 して 抵 抗 を 始 めた1231 年 ( 高 宗 18)から40 年 ぶりのことである こ の40 年 間 高 麗 は 崔 氏 政 権 の 執 政 者 である 崔 瑀 崔 沆 崔 竩 を 経 て 金 俊 と 林 衍 林 惟 茂 に 至 るまで 何 回 にわたり 内 部 の 政 治 的 な 変 動 があった しかし 執 政 者 の 交 替 にもかかわらず 蒙 古 に 対 して 抗 戦 を 固 守 する 政 策 路 線 は 変 わらなかった それは 武 人 執 政 者 の 交 替 が 政 権 の 性 格 に 大 きな 変 化 を 伴 わなかったからである 武 人 政 権 は 效 果 的 な 抵 抗 のために 侵 略 翌 年 の1232 年 王 都 開 京 に 近 くにあ る 島 嶼 である 江 華 島 へ 首 都 を 移 し 結 果 的 に 高 麗 は1231 年 から1259 年 まで 蒙 古 軍 によって 6 次 (11 回 )にわたった 侵 略 を 繰 返 し 受 けながら 長 期 的 な 抵 抗 戦 を 持 続 することができた 1270 年 三 別 抄 の 蜂 起 は 元 宗 の 開 京 還 都 決 定 及 び 武 人 政 権 の 崩 壊 という 政 治 的 な 変 動 状 況 から 惹 起 されたのである よく 知 られているように 三 別 抄 は 高 麗 武 人 政 権 下 の 執 政 者 催 優 によって 夜 別 抄 という 名 前 で 組 職 された 高 麗 の 軍 事 組 織 である その 時 期 は 蒙 古 軍 の 侵 入 直 前 の1230 年 ( 高 宗 17) 1) 頃 であった 別 抄 という 言 葉 で 現 われたように これらは 精 鋭 軍 として 選 発 された 組 職 であり 武 人 政 権 という 政 治 的 状 況 のもとで 作 られた 組 職 だったので 親 政 權 的 性 格 と 基 盤 を 持 つようになった ちょうど 蒙 古 軍 の 大 々 的 な 侵 略 が 始 まると 三 別 抄 は 高 麗 の 一 番 力 強 い 軍 事 集 団 として 目 立 つようになり 戦 争 の 長 期 化 に よってその 規 模 も 拡 張 された 夜 別 抄 が 三 別 抄 という 組 職 に 変 ったことも またこのような 組 職 拡 大 の 結 果 であると 言 えよう 三 別 抄 は 蒙 古 軍 の 侵 入 直 前 に 武 人 政 権 によって 設 置 されて 1270 年 武 人 政 権 の 崩 壊 と 同 時 に 政 府 によって 解 散 措 置 がくだされた 武 力 集 団 という 点 で 對 蒙 抗 争 期 の 武 人 政 1) 夜 別 抄 の 成 立 時 期 については, 김당택, 최씨정권과 그 군사적 기반 고려무인정권연구, 새문사, 1 987, pp ; 윤용혁, 삼별초의 봉기와 남천에 관하여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일지사, 2000, p.131
209 三 別 抄 と 麗 日 関 係 207 権 と 係 わった 一 番 象 徴 的 な 組 職 であると 言 っても 過 言 ではない 三 別 抄 のこのような 性 格 によって 武 人 政 権 が 崩 壊 し 高 麗 政 府 が 蒙 古 に 服 属 した 与 件 の 中 で 三 別 抄 の 存 立 の 根 拠 は 完 全 に 喪 失 された しかし 力 強 い 軍 事 力 の 保 有 が 問 題 であった 開 京 政 府 が 三 別 抄 の 解 体 を 命 じたのは 当 たり 前 の 手 順 であったが 三 別 抄 が 保 有 している 軍 事 力 は 完 全 な 屈 服 を 許 容 しなかった この 点 からみると 1270 年 三 別 抄 の 蜂 起 は 高 麗 が 蒙 古 に 対 する 抵 抗 から 服 属 に 切 り 替 えることによる 必 然 的 な 政 治 的 過 程 であったと 言 える すでに 三 別 抄 は 蒙 古 に 対 する 服 属 という 変 化 された 状 況 に 対 抗 する 高 麗 の 最 後 の 勢 力 として 残 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 まず 三 別 抄 に 対 していくつかの 言 及 を 行 いたい 第 一 は 三 別 抄 に 対 する 歴 史 的 な 評 価 問 題 であ る 三 別 抄 抗 戦 は 近 代 史 学 の 観 点 によって 民 族 抗 戦 の 代 表 的 な 事 例 という 評 価 を 受 けて 来 た 2) し かし 一 方 では 近 年 このような 民 族 抗 戦 としての 評 価 が 議 論 の 対 象 になっている 韓 国 歴 史 での 民 族 主 義 的 な 観 点 に 対 する 批 判 とともに 三 別 抄 抗 戦 の 歴 史 的 意 義 を 民 族 抗 戦 ではない 民 意 抗 争 で 論 証 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 見 解 が 提 起 された 3) そしてここから 一 歩 進 んで 三 別 抄 に 対 する 批 判 的 否 定 的 な 視 覚 も 提 起 された 三 別 抄 は 特 定 政 権 の 政 治 的 目 的 によって 操 作 されたイメージに 過 ぎ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 むしろ 彼 らが 反 民 族 的 な 集 団 であり 彼 らの 行 動 は 民 族 ではない 政 権 を 保 衛 しようとする 行 動 であったという 見 解 がこれに 属 する 4) 三 別 抄 に 対 するこのような 両 極 的 な 評 価 は 歴 史 的 事 件 を 過 去 としてではなく 顕 在 的 な 状 況 に 代 入 しすぎて 解 釈 したことから 起 因 する 視 覚 であると 考 えられる 特 に 彼 らが 高 麗 の 長 期 抗 戦 の 政 治 的 な 基 盤 だったし 蜂 起 の 際 反 蒙 救 国 を 直 接 的 に 主 唱 した 点 からも 民 族 抗 戦 としての 歴 史 的 な 意 味 を 否 定 する 理 由 はないだろう 5) 2) 王 朝 體 制 に 対 する 単 純 な 反 乱 として 認 識 されてきた 三 別 抄 の 抗 戰 を 外 勢 に 対 する 自 主 的 な 反 蒙 抗 戰 の 事 例 として その 意 味 を 積 極 的 に 与 えたことは 日 帝 下 のキンサンキの 貢 獻 であった(김상기, 삼별초와 그의 란에 就 하야 진단학보 9, 10, 13, ; 동방문화교류사논고, 을유문화사, 1948) 以 後 三 別 抄 は 對 外 抗 戰 の 代 表 的 な 事 件 あるいは 高 麗 の 對 蒙 抗 爭 のハイライトとしてその 意 味 が 強 調 された 一 方 では1970 年 代 の 軍 事 政 權 で 基 づいた 政 治 現 實 の 脈 絡 から 三 別 抄 の 抗 戰 は 國 難 克 服 の 代 表 的 な 事 例 として 強 調 されることもあった ほどの 差 はあるものの 民 族 主 義 の 脈 絡 から 構 成 された 解 放 以 後 の 韓 國 歷 史 のなかで 三 別 抄 の 抗 戰 が 一 定 の 歷 史 的 意 味 を 持 っていたことは 共 通 的 であった 3) 三 別 抄 の 抗 戰 が 持 つ 意 味 は 三 別 抄 の 强 忍 な 民 族 精 神 などによって 説 明 されることではなく 高 麗 支 配 層 とモンゴルの 結 託 に 反 対 する 一 般 民 の 抵 抗 が 爆 発 的 に 起 ったことにあるという 이익주, 고려후기 몽 골침입과 민중항쟁의 성격 역사비평 24, 1994, p ) 1970 年 代 軍 事 獨 裁 政 權 のもとで 御 用 學 者 たちは 武 臣 政 權 を 民 族 的 で 進 取 的 な 政 治 勢 力 として 高 く 評 価 し 三 別 抄 軍 の 活 動 を 國 難 克 服 の 一 つの 事 例 として 選 んだ 軍 事 獨 裁 政 權 の 民 族 主 義 的 な 正 統 性 を 確 保 しようとした 歷 史 操 作 の 一 つの 事 例 である 이이화, 몽골의 침략과 30년 항쟁 (한국사 이야기 7), 한길사, 1999, p.104, p.115 5) 三 別 抄 の 民 族 史 的 意 味 については かつて 村 井 氏 によって 注 目 されたことがある 反 蒙 保 國 という 三 別 抄 の 檄 文 は 三 別 抄 の 強 い 民 族 意 識 を 集 約 的 に 表 現 したことであるとしていた これに 関 しては 村 井 章 介
210 20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三 別 抄 抗 戦 を 一 方 的 に 美 化 することは 問 題 である それは 事 実 であるというよりは 神 話 作 り に 近 い からだ しかし 同 時 にこの 事 件 が 持 つ 歴 史 的 意 味 を 意 図 的 に あるいは 感 情 的 に 貶 下 することも 問 題 である 少 なくとも 三 別 抄 による 反 蒙 抗 戦 の 歴 史 的 事 実 と その 意 義 を 認 める 必 要 があるだろう 三 別 抄 の 歴 史 的 意 義 を 民 意 抗 戦 で 追 い 求 めることは 意 味 ある 見 解 であるが それを 必 ずしも 民 族 抗 戦 と 配 置 される 領 域 として 縮 小 解 釈 する 必 要 はないのではないかと 思 われる 6) 2. 麗 日 関 係 と 三 別 抄 三 別 抄 の 麗 日 関 係 と 係 わり まず 蒙 古 の 高 麗 に 対 する 助 軍 要 求 と 蒙 古 側 の 使 者 の 日 本 派 遣 をよく 調 べる 必 要 がある 特 に 蒙 古 の 助 軍 要 求 は 初 めは 明 確 に 日 本 を 狙 ったことではなかったが 蒙 使 の 日 本 派 遣 の 推 移 に 応 して 日 本 への 軍 事 的 な 攻 撃 へと 進 展 された 事 案 であった 蒙 古 の 対 日 遣 使 は 1266 年 に 初 めて 試 圖 された 以 後 2 次 1267 年 3 次 1268 年 4 次 1269 年 5 次 1271 年 6 次 1272 年 7 次 1273 年 など 麗 元 連 合 軍 の 日 本 侵 入 (1274)にのぼるまでほぼ 毎 年 行 わ れた 7) 1266 年 1273 年 までの 推 移 を 簡 単 に 整 理 すれば 次 の< 表 >になる 8) < 表 > 蒙 古 の 対 日 招 誘 の 遣 使 ( ) 次 数 年 度 遣 使 名 簿 遣 使 の 経 過 国 書 の 内 容 結 果 ( 蒙 古 ) 黒 的 ( 兵 部 侍 郞 ) 11 月 派 遣 巨 済 島 で 出 港 直 殷 弘 ( 禮 部 侍 郞 )( 高 麗 ) 宋 前 に 気 象 を 言 い 掛 かりに 抛 棄 巨 済 島 で 抛 棄 君 斐 ( 樞 密 院 府 使 ) 金 賛 ( 侍 御 史 ) 高 麗 三 別 抄 の 叛 亂 と 蒙 古 襲 來 前 夜 の 日 本 中 世 日 本 校 倉 書 房, 1988, pp 參 照 6) 三 別 抄 の 歷 史 的 な 評 価 問 題 については 筆 者 の 삼별초 대몽항전을 보는 여러 시각 ( 고려 삼별초 의 대몽항쟁, 일지사, 2000)をともに 参 照 されたい また 김일우 이정란은 삼별초 대몽항쟁의 주도 층과 그 의미 ( 제주도사연구 11, 2002, pp.25-27)で 三 別 抄 の 抗 爭 が 持 つ 歷 史 的 性 格 を 民 衆 的 性 格 と 抗 蒙 的 性 格 の 両 面 から 評 価 すべきであり 三 別 抄 を 含 めた 高 麗 の 長 期 抗 戰 が 元 의の 干 渉 があったに も 関 わらず 高 麗 の 獨 立 性 の 維 持 に 寄 與 したという 意 見 を 提 示 した 一 方, 筆 者 は 最 近 三 別 抄 に 対 する 評 価 問 題 を 含 めて 高 麗 の 長 期 抗 戰 の 原 因 戦 争 時 の 江 華 島 問 題 對 蒙 抗 戰 遺 跡 に 関 する 問 題 など 高 麗 の 對 蒙 抗 戰 についての 全 般 と 関 連 した 議 論 点 を 整 理 したことがある Yoon Yong-hyuk, The Focal Issues in the Historical Study of the Koryo s Resistance against Mongol,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 ory 10, ) 元 の 遣 使 は 大 德 3년(1299) 11 次 まで 進 行 された これについての 全 般 的 な 説 明 は 김위현, 여 원 일 본 정벌군의 출정과 여원관계 국사관논총 9, 1989, pp ) 高 麗 史 元 高 麗 記 事 元 史 などを 参 照. 日 本 側 の 資 料 は 장동익, 일본 고중세 고려자료 연구, 서울대출판부, 2004を 参 考
211 三 別 抄 と 麗 日 関 係 ( 高 麗 ) 潘 阜 ( 起 居 舍 人 ) 李 挺 ( 書 状 官 ) モンゼと 高 麗 国 書 伝 達 太 宰 府 で5ヶ 月 間 待 期 京 都 に は 行 かず ( 蒙 古 ) 黒 的 殷 弘 外 6 12 月 派 遣 1269 年 3 月 帰 国 人 の 時 対 馬 島 の 日 本 虜 2 人 ( 高 麗 ) 申 思 佺 ( 知 門 下 省 ( 塔 二 郎 彌 二 郎 )を 大 同 事 ) 陳 子 厚 ( 禮 部 侍 郞 ) 潘 阜 外 1 人 総 計 70 人 余 り ( 高 麗 ) 金 有 成 高 柔 7 月 日 本 の 捕 虜 を 送 還 する という 名 分 で 派 遣 対 馬 から の 手 紙 は 大 宰 府 幕 府 を 経 って 京 都 へ 送 る 対 馬 島 を 経 って 大 宰 府 で 滞 在 ( 蒙 古 ) 趙 良 弼 9 月 対 馬 をよらず 19 日 九 ( 高 麗 ) 徐 称 ( 別 將 ) 州 今 津 到 着 大 宰 府 へ 直 一 行 100 人 余 り 行 国 書 を 京 都 に 送 る 高 麗 使 者 2 月 13 日 元 宗 が 日 本 国 王 に 書 信 を 送 って 招 誘 す 4 月 日 本 派 遣 元 に 派 遣 した 使 者 団 護 送 帰 国 させる ( 蒙 古 ) 趙 良 弼 3 月 大 宰 府 から 京 都 には 入 ら ず 戻 ってくる ( 蒙 古 国 書 ) 日 本 の 服 属 を 誘 い 用 兵 の 可 能 性 も 間 接 的 に 暗 示 ( 高 麗 国 書 ) 蒙 古 の 意 図 が 友 好 関 係 樹 立 と いうので 日 本 説 得 国 書 に 対 する 回 答 を 受 けず 蒙 古 及 び 高 麗 国 書 を 東 大 寺 に 伝 える 大 日 本 軍 事 力 投 入 可 能 性 時 事 (10 月 ) ( 元 の 中 書 省 の 牒 狀 ) 日 本 は 拒 絶 の 返 事 を 作 成 した 日 本 の 來 属 要 求 及 び が 送 らない 武 力 使 用 可 能 性 も 言 及 日 本 使 者 12 人 を 元 に 送 ったが 元 世 祖 が 接 見 拒 否 ( 偽 使 ) 趙 良 弼 が 携 帯 した 書 状 が 残 っ ている 内 容 不 明 1268 年 高 麗 潘 阜 を 通 じて 日 本 に 伝 達 した 国 書 が 無 為 に 終 わると 蒙 古 は 高 麗 に 要 求 した 宋 征 伐 に 対 する 助 軍 要 求 軍 事 1 万 船 舶 1 千 隻 の 作 業 を 監 督 する 一 方 場 合 によってはこれを 日 本 に 投 入 す ることも 考 慮 するに 至 った 蒙 古 の 高 麗 に 対 する 助 軍 要 求 は 初 めには 日 本 より 対 南 送 戦 を 前 提 に 推 進 された 1268 年 ( 元 宗 9)3 月 于 也 孫 脱 などが 伝 えた 世 祖 クビライの 詔 書 で 對 宋 戰 をむかえて 高 麗 に 対 して 軍 事 と 兵 船 調 逹 に 対 する 準 備 軍 糧 の 蓄 えを 注 文 したのがそれである その 年 (1268)6 月 ( 乙 巳 ) 蒙 古 は 吾 都 止 を 派 遣 して 兵 船 の 数 と 軍 隊 人 数 を 点 検 し 8 月 大 将 軍 崔 東 秀 は 蒙 古 に 入 朝 して 助 軍 のための 軍 事 1 万 の 確 保 及 び 兵 船 1 千 隻 建 造 を 始 めたと 報 告 した 10 月 には 上 の 事 項 を 点 検 するために 蒙 古 から 脱 朶 児 王 国 昌 劉 傑 など14 人 が 入 国 したが 携 帯 した 蒙 帝 の 調 書 には これら 使 者 の 指 示 によって 船 舶 を 建 造 するはずであり 軍 隊 と 船 舶 をよく 整 理 して 南 宋 であれ 日 本 であれいつでも 使 用 できるように 備 え ること 黒 山 島 と 日 本 の 間 の 道 を 探 索 するように 指 示 する 内 容 などが 含 まれていた 王 國 昌, 劉 傑 な どは 高 麗 到 着 の 直 後 黒 山 島 現 地 を 点 検 し 黒 山 島 から 帰 って 来 た 劉 傑 は また 造 船 状 況 の 点 検 の ために 西 海 島 に 出 向 けたという 9) この 頃 蒙 古 は 南 宋 に 対 する 攻 撃 が 優 先 的 な 課 題 であったので 高 麗 の 助 軍 問 題 は 日 本 より 南 9) 高 麗 史 26, 元 宗 世 家 8 年.
212 21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宋 に 焦 点 があてられていた 1268 年 ( 元 宗 9)10 月 クビライは 都 元 帥 阿 朮 劉 整 などに7 万 の 軍 事 を 率 いて 揚 子 江 の 北 側 の 要 塞 襄 陽 を 包 囲 攻 撃 させることで 南 宋 に 対 する 本 格 的 な 作 戦 に 突 入 した 10) しかし 南 宋 攻 撃 のための 高 麗 の 助 軍 は 実 行 されなかった たぶん 高 麗 での 發 進 と 対 南 宋 戰 への 投 入 が 実 際 は 效 率 性 が 大 きくないという 判 断 からである 可 能 性 があり しかも1270 年 三 別 抄 の 蜂 起 は 高 麗 の 對 宋 助 軍 を 現 実 的 に 不 可 能 にさせた 高 麗 政 府 が 開 京 に 還 都 し 三 別 抄 が 珍 島 で 代 置 していた12 70 年 12 月 元 世 祖 の 詔 書 は 高 麗 が 造 船 及 び 徴 兵 命 令 を 承 諾 してからも 成 果 がないことに 対 して 責 め つけながら 南 宋 でも 日 本 でも 有 事 時 に 備 えて 兵 馬 と 軍 船 食 糧 を 早 く 準 備 するように と 再 び 指 示 していることを 見 れば 11) 軍 船 の 造 船 問 題 は 相 変 らず 未 完 の 段 階 にあり 高 麗 軍 を 南 宋 に 送 るか 日 本 に 送 るかも 決 めていなかった 段 階 にあったことが 分 かる このようにみれば 高 麗 の 大 規 模 軍 船 造 成 と1274 年 日 本 侵 略 への 参 加 は ある 程 度 予 見 されたこ とであり ただ1270 年 三 別 抄 の 反 蒙 蜂 起 と 抵 抗 という 新 しい 状 況 展 開 によって その 日 程 が 一 定 の 期 間 引 き 延 ばされたわけである 高 麗 の 造 船 作 業 と 係 わってこの 時 期 注 目 される 事 実 の 一 つは 1272 年 3 月 戰 艦 兵 糧 都 監 の 設 置 で ある 名 称 上 これは 大 規 模 軍 船 と 軍 糧 を 確 保 しようとする 機 構 の 新 設 であるが 短 期 的 には 済 州 の 三 別 抄 に 対 する 大 攻 勢 のための 準 備 だったものの 同 時 にそれは 日 本 征 伐 までを 念 頭 に 置 いた 機 構 で あったと 考 えられる この 頃 日 本 招 誘 に 対 する 問 題 が 徐 々に 具 体 化 されており この 都 監 の 設 置 が 麗 元 関 係 の 一 一 環 として 提 起 されていたからである 12) 特 に 1271 年 9 月 日 本 に 派 遣 された 元 使 趙 良 弼 は 11 月 を 期 限 に 相 変 らず 回 答 がなければ 兵 船 を 送 る という 通 牒 を 送 ったのである 13) この ような 推 移 は 高 麗 を 前 にたてた 今 後 の 軍 事 的 な 行 步 が 南 宋 ではなく 日 本 であることを 確 認 したことで あり 特 に 趙 良 弼 の 第 5 次 遣 使 をきっかけにして 日 本 に 対 する 軍 事 的 な 措 置 が 不 可 避 なことになること を 予 告 するものであった ただ 珍 島 陷 沒 以 後 済 州 島 を 拠 点 にして 相 変 らず 南 西 沿 岸 に 対 する 掌 握 力 を 喪 失 していない 三 別 抄 の 存 在 によって 日 本 に 対 する 軍 事 的 な 措 置 の 実 行 時 期 を 引 き 延 ばすし かない 実 情 であった 以 上 で 見 るように 対 外 征 伐 のための 高 麗 の 助 軍 及 び 造 船 に 関 する 問 題 は 三 別 抄 蜂 起 以 前 か ら 提 起 されたが 三 別 抄 の 蜂 起 という 高 麗 の 政 治 状 況 によって 引 き 伸 されたのである 1266 年 から 開 始 された 蒙 古 の 対 日 招 誘 1268 年 南 宋 戦 の 本 格 的 な 再 開 などの 進 展 を 勘 案 すれば 1270 年 三 別 抄 10) ドーソン 蒙 古 史, 三 田 史 學 會, 1933, pp ) 高 麗 史 27, 元 宗 世 家 11 年 12 月. 12) 戰 艦 兵 糧 都 監 とともに 鈿 函 造 成 都 監 が 設 置 されたが 後 者 は 元 の 皇 后 の 大 藏 經 保 管 のための 用 品 製 作 のためのものであった( 高 麗 史 27, 元 宗 世 家 13 年 甲 辰 ). 13) 此 上 以 來 十 一 月 可 爲 期 猶 爲 無 音 者 可 艤 兵 船 云 云 ( 吉 續 記 문영 8년 10월 24일).
213 三 別 抄 と 麗 日 関 係 211 の 蜂 起 がなかったならば 1271 年 頃 には 対 日 武 力 攻 撃 が 試 圖 された 可 能 性 が 高 い したがって 三 別 抄 蜂 起 によって 概 ね2 年 ぐらい 連 合 軍 の 対 日 攻 撃 時 点 が 引 き 伸 ばされたと 筆 者 は 考 えている 1270 年 三 別 抄 蜂 起 の 年 に 対 日 招 誘 の 遣 使 が 1 年 あいまを 置 くようになったことからも そのような 理 由 があったからであると 思 われる 14) これに 対 して 村 井 教 授 は 三 別 抄 の 蜂 起 による 対 日 征 役 の 阻 止 要 因 を 次 のようにいくつかに 分 けて 説 明 した 事 がある 蒙 古 の 屯 田 軍 及 び 日 本 遠 征 に 使 う 艦 船 に 対 する 三 別 抄 の 攻 撃 蒙 古 ( 元 )の 屯 田 軍 に 供 給 される 貢 賦 が 慶 尚 全 羅 地 域 で 正 常 的 にに 供 給 されなかっ た 点 日 本 遠 征 に 投 入 しようとしていた 屯 田 軍 を 三 別 抄 の 鎭 圧 に 転 用 せざるを 得 なかった 点 などがそれ である 15) しかし 一 方 では 珍 島 と 済 州 島 での 三 別 抄 との 海 戦 経 験 は その 翌 年 日 本 侵 入 と 関 連 し て 蒙 古 軍 には 一 つの 良 い 演 習 機 会 を 提 供 したという 評 価 もある 対 日 招 誘 過 程 では 第 1 次 麗 元 軍 の 日 本 侵 入 前 年 である1273 年 まで4 回 にわたって 毎 年 招 誘 使 節 が 派 遣 された 前 の< 表 >でみたように その 中 で1270 年 一 年 だけが 使 節 派 遣 ができなくなってそ のほかは 行 っていたが この1 年 の 休 止 は 三 別 抄 の 蜂 起 によって 南 部 沿 岸 の 一 帯 が 珍 島 拠 点 の 三 別 抄 の 繩 張 に 含 まれていた 複 雑 な 状 況 があったためであろう 三 別 抄 の 対 日 連 合 戦 線 への 追 求 は 基 本 的 には 麗 元 関 係 の 歴 史 性 と 地 理 的 な 隣 接 性 によって 提 案 されることができるものでもあった しかし 同 時 にこのように 数 年 の 前 から 推 進 してきた 日 本 への 招 誘 そして 対 日 征 役 を 念 頭 に 置 いた 軍 船 の 準 備 など 一 連 の 状 況 が 三 別 抄 にとって 麗 元 連 合 軍 に 対 する 劣 勢 を 補 うための 方 案 として 日 本 との 連 帯 を 具 体 的 に 模 索 するきっかけを 自 然 に 造 成 したことであると 言 えよう 高 麗 の 大 日 本 招 誘 の 過 程 及 び 以 後 の 事 態 進 展 から 確 認 される 事 実 の 一 つは 高 麗 と 日 本 を 一 つ の 同 一 範 疇 として 把 握 する 日 本 の 立 場 である ひいては 開 京 政 府 と 三 別 抄 に 対 してもこれを 区 分 する 意 識 がなかったという 点 が 注 目 される 16) 14) 三 別 抄 蜂 起 が 麗 蒙 軍 の 日 本 侵 入 を 遅 らせたことについて 多 くの 賛 同 が 行 われていた かつて 旗 田 巍 は この 点 をさして この 抗 戰 がなかったらば 蒙 古 はより 早 く 日 本 を 襲 撃 することができたのであろう 日 本 遠 征 のための 屯 田 軍 は 三 別 抄 のせいで 動 くことができず そのため 三 別 抄 の 討 伐 に 轉 用 されるしかな かった ( 中 略 ) 客 觀 的 にみれば 三 別 抄 の 乱 は 蒙 古 の 日 本 侵 入 を 遅 延 させ 防 御 準 備 を 整 える 時 間 を 与 えた と 断 定 していた( 旗 田 巍 元 寇 中 央 公 論 社, p.106) 15) 村 井 章 介 高 麗 三 別 抄 の 叛 亂 と 蒙 古 襲 來 前 夜 の 日 本 中 世 日 本 校 倉 書 房, 1988, pp ) 남기학, 몽고침입과 중세 일본의 대외관계 아시아문화 12,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p.4 74.
214 21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3. 三 別 抄 の 日 本 との 連 帯 試 圖 1270 年 6 月 1 日 江 華 島 の 三 別 抄 は 蒙 古 に 服 属 して 開 京 に 環 刀 した 元 宗 の 高 麗 政 府 に 反 旗 をあ げて 蜂 起 した 彼 らは 蒙 古 に 服 属 した 開 京 政 府 を 全 面 的 に 不 正 し 新 たに 組 織 した 彼 らの 政 府 こそ 高 麗 の 正 統 政 府 という 認 識 を 持 っていた これらは 蜂 起 の 直 後 江 華 島 から 珍 島 に 移 動 し 龍 藏 城 を 中 心 にして 独 自 の 勢 力 を 構 築 しながら 開 京 政 府 との 対 決 を 模 索 していた なお 旧 後 百 濟 の 地 域 と 南 部 海 岸 地 域 を 一 帯 とする 沿 岸 の 海 洋 勢 力 圏 を 通 じて 開 京 政 府 との 対 決 を 図 った 一 方 蒙 古 の 圧 力 に 対 応 する 方 便 として 日 本 との 共 同 戰 線 を 意 図 してそれなりの 勢 力 構 築 をはかろうとしたのである 蒙 古 への 対 抗 のための 日 本 との 国 際 的 連 帯 という 着 眼 は どこから 出 たのであろうか 三 別 抄 が 江 華 島 をあきらめて 珍 島 へ 南 遷 した 際 西 南 海 沿 岸 の 島 嶼 で 麗 蒙 聯 合 軍 の 攻 勢 を 防 御 することが できると 期 待 することは 難 しい 事 だった まず 珍 島 以 外 の 背 後 基 地 の 確 保 が 優 先 的 なことであって 次 に 南 宋 あるいは 日 本 との 連 結 を 模 索 することが 自 然 な 手 順 であったといえる 他 の 一 方 では 1266 年 以 来 もう 進 行 されていた 對 日 本 招 誘 によって 蒙 古 の 圧 力 の 下 に 置 かれた 日 本 の 立 場 に 対 して 認 知 し ていたはずである 17) 三 別 抄 の 対 日 交 渉 に 対 して その 可 能 性 を 一 番 先 に 議 論 したのは 根 本 誠 氏 である 18) 吉 続 記 の 文 永 8 年 9 月 の 高 麗 牒 狀 に 対 する 解 釈 がそれだ 19) そしてこれは 高 麗 牒 狀 不 審 條 條 文 書 の 発 見 によって 事 実 として 確 認 された これによれば 珍 島 政 府 が 日 本 へ 使 者 を 派 遣 對 蒙 抗 戦 において 共 同 の 補 助 と 協 助 を 打 診 するようになったことは 元 宗 12 年 (1271)のことである 珍 島 から 送 られた 手 紙 は 珍 島 政 府 が 蒙 古 軍 によって 崩 れてかた しばらく 後 の9 月 初 に 鎌 倉 幕 府 を 経 って 京 都 の 朝 廷 に 伝 達 された この 書 信 をもたらした 使 者 は 多 分 7 月 末 以 前 に 博 多 近 所 に 到 着 したと 推 測 されるが 珍 島 からの 出 発 を 珍 島 に 対 する 大 攻 勢 が 行 われた5 月 15 日 以 前 であるとみれば 博 多 あるいは 太 宰 府 へ の 到 着 は 概 ね5 6 月 頃 のことではなければならない 17) 三 別 抄 が 日 本 との 関 係 を 構 想 したことは 蒙 古 の 乱 暴 な 侵 略 と 支 配 に 抵 抗 する 戦 い 長 期 にわたる 抑 圧 を 耐 えてきた 経 験 から 得 た 意 識 と 三 別 抄 が 南 海 岸 を 拠 点 にして 活 動 した 過 程 で 徐 々に 日 本 の 存 在 を 半 券 して 理 解 したこと とのべたこと( 村 井 章 介 高 麗 三 別 抄 の 叛 亂 と 蒙 古 襲 來 前 夜 の 日 本 )について 李 領 は 高 麗 の 日 本 に 対 する 恒 常 的 な 外 交 関 係 に 基 づいたことであると 言 った(pp ) 18) 根 本 誠 文 永 の 役 までの 日 蒙 外 交 - 特 に 蒙 古 の 遣 使 と 日 本 の 態 度 軍 事 史 學 5, 1966, pp ) 日 本 へ 伝 えられた' 高 麗 牒 狀 に 対 する 議 論 は 吉 續 記 の 文 永 8년(1271)9 月 2 日 から 始 まっている 関 連 記 録 はジャンドンイック(장동익, 일본 고중세 고려자료 연구, pp でみられる ジャンドンイクに よると 吉 續 記 はかまくら 時 期 の 人 物 である 藤 原 經 長 ( )が1167 年 から1302 年 までの 日 記 体 の 記 録 として 麗 元 聯 合 軍 の 日 本 征 伐 に 関 連 する 記 録 9 件 が 含 まれている( 張 東 翼, 일본 고중세 고려자 료 연구, p.143)
215 三 別 抄 と 麗 日 関 係 213 珍 島 政 府 が 日 本 へ 送 った 手 紙 内 容 は 吉 続 記 の 同 年 9 月 4 日 条 に 蒙 古 が 日 本 を 攻 撃 するはずで あると 警 告 し 同 時 に 食 糧 と 兵 力 につおて 協 調 してくれることを 具 体 的 に 要 請 するということであった 20) ところで 東 大 史 料 編 纂 所 の 保 管 文 書 である 高 麗 牒 状 不 審 條 條 は この 際 珍 島 政 府 が 送 った 手 紙 の 内 容 について より 具 体 的 な 知 識 を 伝 えている この 文 書 は 珍 島 の 三 別 抄 が 送 った 手 紙 そのもの ではないが 手 紙 の 主 要 内 容 を 言 及 していて 三 別 抄 の 日 本 に 対 する 希 望 と 当 時 珍 島 政 府 の 内 部 事 情 に 対 して 貴 重 な 情 報 を 得 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 点 で 非 常 に 重 要 な 資 料 である 高 麗 牒 状 不 審 條 條 一 以 前 状 ( 文 永 五 年 ) 揚 蒙 古 之 徳 今 度 状 ( 文 永 八 年 ) 韋 者 無 遠 慮 云 云 如 何 一 文 永 五 年 状 書 年 号 今 度 不 書 年 号 事 一 以 前 状 帰 蒙 古 之 徳 成 君 臣 之 礼 云 云 今 状 遷 宅 江 華 近 四 十 年 被 髪 左 聖 賢 所 悪 仍 又 遷 都 珍 島 事 一 今 度 状 端 ニハ 不 従 成 戦 之 思 也 奥 ニハ 為 蒙 被 使 云 云 前 後 相 違 如 何 一 漂 風 人 護 送 事 一 屯 金 海 府 之 兵 先 二 十 許 人 送 日 本 国 事 一 我 本 朝 統 合 三 韓 事 一 安 寧 社 稷 待 天 時 事 一 請 胡 騎 数 万 兵 事 一 逹 冕 旒 許 垂 寛 宥 事 一 奉 贅 事 一 貴 朝 遣 使 問 訊 事 珍 島 三 別 抄 政 府 が 送 った 手 紙 には 第 一 蒙 古 に 対 する 非 難 反 蒙 意 志 がはっきりと 現 われてい る たとえば 第 1 条 で 蒙 古 を 韋 毳 という 言 葉 で 3 條 では 蒙 古 風 俗 ( 文 化 )を 被 髮 左 衽 ( 蛮 夷 の 習 俗 ) という 文 字 で 指 称 していることなどは 公 式 的 な 外 交 文 書 として 非 常 に 強 烈 な 反 蒙 意 志 の 表 現 である 第 二 当 時 三 別 抄 政 府 は 珍 島 政 府 こそ 正 統 の 高 麗 政 府 であることを 標 榜 しているという 点 が 注 目 される このためこの 文 書 の 題 目 は 高 麗 牒 状 であり 江 華 島 での40 年 抗 戦 以 後 抗 蒙 伝 統 を 受 け 継 いで 珍 島 へ 遷 都 したことを 第 3 条 で 明 らかにしている 20) 件 牒 狀 趣 蒙 古 兵 可 來 責 日 本 又 乞 糴 此 外 乞 救 兵 歟 就 狀 了 見 區 分 ( 吉 續 記 文 永 8 年 9 月 5 日 ) ハンド ンイク, 일본 고중세 고려자료 연구, p.139.
216 21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第 三 珍 島 政 府 と 日 本 との 共 同 的 な 運 命 ないし 珍 島 政 府 の 日 本 に 対 する 思 いやりが 強 調 されてい る このような 内 容 は 特 別 に 蒙 古 侵 略 の 危 機 的 な 状 況 を 日 本 と 共 同 で 打 開 して 行 くことを 願 う 三 別 抄 政 府 の 期 待 が 表 現 されたものである 情 況 を 直 接 見 せるために 使 節 の 派 遣 を 日 本 に 要 請 したことから 珍 島 政 府 は 日 本 との 反 蒙 抗 戦 のための 一 種 の 共 同 戰 線 を 希 望 していたことが 分 かる 21) 高 麗 牒 狀 文 書 の 以 上 のような 脈 絡 は 日 本 との 共 同 運 命 を 強 調 することで 珍 島 政 府 が 日 本 の 具 体 的 なサポートの 可 能 性 を 打 診 したものであると 言 えよう 三 別 抄 の 珍 島 政 府 の 対 日 使 者 派 遣 は 共 同 対 処 を 主 張 する 立 場 として 軍 糧 兵 力 などの 実 質 的 な 問 題 を 打 開 するための 目 的 があった 実 際 珍 島 政 府 が 食 糧 の 欠 乏 を 憂 慮 していた 事 実 は 元 宗 12 年 蒙 古 側 の 珍 島 に 対 する 諜 報 によって 確 認 され る 珍 島 政 府 は 蒙 古 軍 の 大 規 模 の 攻 勢 を 目 前 にして 兵 力 面 でも 相 対 的 な 劣 勢 にあり このために 日 本 との 連 帯 を 打 開 策 として 試 みたと 考 えられる 22) 三 別 抄 政 府 の 反 蒙 連 帯 への 提 議 に 対 する 日 本 側 の 反 応 は 曖 昧 なものであった 日 本 は 高 麗 国 内 の 情 勢 の 最 近 の 変 動 に 対 してほとんど 事 前 知 識 がなかった したがって 珍 島 からの 手 紙 の 真 義 さえ 把 握 することができないまま 空 虚 な 議 論 だけが 続 けられた しかし 日 本 は 蒙 古 の 侵 入 脅 威 が 徐 々に 現 実 化 されている 事 実 を 確 認 して 自 主 的 な 対 備 策 に 関 心 を 持 つようになったようである 問 題 の 三 別 抄 牒 狀 の 関 連 資 料 に 対 して 石 井 氏 の 紹 介 と 解 釈 以 来 何 回 にわたる 検 討 があった が 三 別 抄 の 対 日 関 係 をうかがうことができる 基 本 資 料 という 点 から 今 までの 資 料 についての 議 論 を 整 理 する 必 要 がある 文 件 の 中 で 特 に 当 時 の 対 日 関 係 と 直 接 連 関 されることは 番 目 の 文 句 であるのでこれに 限 定 して 検 討 してみよう 4 番 目 の 文 句 から 見 る 事 にする 一 今 度 状 端 ニハ 不 従 成 戦 之 思 也 奥 ニハ 為 蒙 被 使 云 云 前 後 相 違 如 何 まず 文 字 判 読 の 面 では 思 を 由 と 見 る 意 見 が 提 起 されている 23) 文 件 の 解 釈 では 不 従 成 戦 之 思 也 に 対 して 従 わなければ 戦 いが 起 る または 蒙 古 の 日 本 攻 撃 に 従 わないという 意 を 現 わした ことで 理 解 することも 可 能 という 解 釈 がなされた しかし 為 蒙 被 使 については 前 の 文 章 とその 内 容 が どのように 繋 がって どうして 前 後 が 相 違 したのかよく 把 握 できないとも 言 われていた 24) その 21) 石 井 正 敏 文 永 八 年 來 日 の 高 麗 使 について 東 京 大 學 史 料 編 纂 所 報 12, 1978 ; 柳 永 哲 高 麗 牒 狀 不 審 條 條 의 재검토 한국중세사연구 1, 石 井 の 論 文 は 筆 者 が 삼별초의 대일 통교사료 という 題 目 で 翻 訳 紹 介 したことがある( 史 鄕 2, 공주사대 역사교육과, 1985) 22) 三 別 抄 の 文 書 を 含 めた 珍 島 の 三 別 抄 全 般 については 윤용혁, 삼별초 진도정부의 수립과 전개 삼 별초의 진도항전 (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일지사, 2000) 參 考 23) 柳 永 哲, 고려첩장불심조조 의 재검토 한국중세사연구, 1994, pp
217 三 別 抄 と 麗 日 関 係 215 後 ギムユンゴンは 上 の 文 章 の 内 容 を" 三 別 抄 政 府 に 日 本 が 軍 糧 と 援 兵 を 送 りなさい この 命 令 に 追 わなければ 日 本 と 蒙 古 の 間 に 戦 争 が 起 るようになるはずで 日 本 は 蒙 古 に 従 うようになるだろう 25) と 整 理 した ここでは 不 従 の 主 体 を 日 本 で 設 定 してその 内 容 は 三 別 抄 に 対 する 日 本 の 不 従 を 仮 定 して 為 蒙 被 使 の 主 体 もまた 日 本 として 設 定 した これに 対 してリュヨンチォルは 不 従 成 戦 の 主 体 は 三 別 抄 為 蒙 被 使 の 主 体 は 開 京 政 府 という 前 題 下 で 上 の 文 件 を ( 降 参 出 陸 還 都 など 蒙 古 の 要 求 を) 従 わないことが ( 三 別 抄 と 蒙 古 開 京 政 府 の 間 ) 戦 争 が 起 る 理 由 だ そして 為 蒙 被 使 は ( 開 京 政 府 が) 蒙 古 に 従 うようになった と 解 釈 した 日 本 の 立 場 では 高 麗 が 降 伏 したともいい 蒙 古 と 一 戦 を 決 するようになったとも 言 って 混 同 を 起 こすしか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 26) 一 方 李 領 氏 もリュヨ ンチォル 氏 と 類 似 の 意 見 を 示 したことがある 27) 不 審 條 條 の 文 書 内 容 は 大 体 のところ 牒 狀 の 内 容 の 手 順 によってメモされたもののように 見 える 上 の 文 件 は 前 の 部 分 に 位 置 したもので 概 ね 今 までの 経 過 の 説 明 と 関 わる 部 分 であると 言 える し たがって 未 来 型 の 要 求 よりは 過 去 型 の 内 容 であると 考 えられる このような 観 点 から 見 れば 蒙 古 の 要 求 に 応 じなかったので 我 ら( 三 別 抄 )は 戦 争 に 参 入 したのであり 一 方 開 京 側 は 蒙 古 に 服 属 され て 従 うようになったというリュヨンチォルの 説 明 が 説 得 力 がある これは 牒 狀 の 中 で 1270 年 を 前 後 し た 高 麗 での 情 勢 変 動 に 関 する 簡 略 な 言 及 が 含 まれていたことを 意 味 する ただ これについて 日 本 側 では 開 京 政 府 に 対 する 三 別 抄 の 新 政 府 樹 立 など 当 時 高 麗 の 情 勢 変 化 に 対 する 事 前 知 識 が 全 くな かったので その 意 味 を 把 握 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と 考 えられる このために 戦 争 をするようになっ たということは 何 で 服 属 されて 使 いのような 立 場 になったということは 何 なのか 前 後 が 合 わない 混 同 を 引 き 起 こしたのである このような 日 本 側 の 混 線 と 不 明 確 な 認 識 は 不 審 條 條 だけではなく 一 方 で 吉 続 記 の 記 録 の 中 にも 現 われている 28) 高 麗 で 惹 起 された 一 連 の 情 勢 変 化 を 日 本 では 全 然 認 知 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 したがって 牒 狀 の 文 面 内 容 を 理 解 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であろう 24) 石 井 正 敏 文 永 八 年 來 日 の 高 麗 使 について p.5 25) 김윤곤, 삼별초의 대몽항전과 지방 군현민 동양문화 21 22, 1981, pp ) 류영철, 고려첩장불심조조 의 재검토 한국중세사연구, ) 李 領 元 寇 と 日 本 高 麗 關 係 倭 寇 日 麗 關 係 史 東 京 大 學 出 版 會 1999 p ) 当 時 の 朝 廷 では 外 交 文 書 を 正 確 に 読 んで 相 手 の 意 図 を 明 確 に 把 握 する 能 力 がある 人 物 がなかったの である その 結 果 評 定 は 日 本 の 国 家 としての 外 交 的 な 対 応 を 策 定 する 重 要 な 会 議 というよりは 高 辻 長 成 日 野 資 宣 藤 原 茂 範 など 儒 者 たちの 漢 文 解 読 能 力 をあらそう 場 になってしまった ( 村 井 章 介 高 麗 三 別 抄 の 叛 亂 と 蒙 古 襲 來 前 夜 の 日 本 中 世 日 本 校 倉 書 房 1988 p.167)
218 21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一 漂 風 人 護 送 事 日 本 側 の 漂 風 人 を 三 別 抄 が 護 送 したという 内 容 であるが 解 釈 上 では 別 に 問 題 が 内 容 に 見 える 元 宗 年 間 (1263 年 元 宗 4 年 6 7 月 ) 高 麗 沿 海 で 日 本 側 の 船 舶 が 遭 難 し この 時 の 漂 風 人 など 高 麗 側 によって 本 国 に 護 送 された 事 例 が 次 のように 報 告 されていた 29) -6 月 日 本 官 船 大 使 如 真 などが 佛 法 を 学 ぼうと 宋 へ 向 かう 途 中 風 にあい 僧 俗 合 わせて230 人 が 開 也 召 島 に 至 り 265 人 は 群 山 島 と 湫 子 島 にとどまった - 太 宰 府 少 卿 殿 の 商 船 に 乗 った78 人 が 宋 から 日 本 に 帰 国 する 途 中 風 に 会 い 船 を 失 って 小 船 で 宣 州 加 次 島 に 停 泊 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 全 羅 道 按 察 使 に 命 じて 食 糧 と 船 を 与 え 本 国 に 護 送 してくれ た (6 月 ) -7 月 ( 乙 巳 ) 日 本 商 船 30 人 が 風 のため 漂 流 し 亀 州 の 艾 島 に 止 まったので 食 糧 を 与 え( 本 国 へ) 護 送 した これによって 当 時 高 麗 沿 岸 海 路 で 日 本 船 舶 の 海 難 事 故 がたびたび 起 こり そのため 漂 風 人 の 護 送 が 行 っていたことが 分 かる 上 の 船 舶 すべて 南 宋 へ 往 来 していた 日 本 の 船 舶 であり 漂 流 ある いは 停 泊 地 点 が 開 也 召 島 ( 西 天 現 在 は 群 山 市 開 也 島 ) 群 山 島 ( 群 山 仙 遊 島 ) 湫 子 島 加 次 島 ( 平 北 先 天 ) エド( 平 北 構 成 現 在 は 井 州 )などほとんど 西 海 沿 岸 の 南 北 全 域 にかけていて 当 時 日 本 の 對 宋 往 来 が 江 南 への 直 航 路 とともに 韓 半 島 沿 海 を 北 上 して 中 国 沿 海 を 回 って 南 下 する 沿 岸 航 路 が 相 変 らず 利 用 されていたことが 推 測 できる その 過 程 でたびたびの 海 難 事 故 が 西 海 沿 岸 で 起 こり これら 漂 風 人 を 帰 還 させたことがあるということを 物 語 ってくれる 30) 1270 年 三 別 抄 蜂 起 以 後 西 南 海 沿 岸 を 三 別 抄 が 掌 握 していたので この 時 期 西 海 沿 岸 の 漂 風 人 の 問 題 が 三 別 抄 の 管 轄 下 に 入 って 行 くよう になったのである リュヨンチォルはこの 漂 風 人 の 護 送 がわざわざ 不 審 條 條 で 言 及 された 理 由 は 当 時 三 別 抄 による 漂 風 人 の 護 送 使 についての 事 実 を 幕 府 が 分 かっていなかったと 推 測 した 31) 太 宰 府 の 少 卿 殿 商 船 の 場 合 のように 当 時 日 本 は 地 方 領 主 あるいは 寺 院 が 主 体 になって 直 接 商 船 を 派 遣 して 交 易 をしていたので このような 諸 般 事 実 を 日 本 政 府 あるいは 業 務 担 当 者 が 詳 しく 把 握 していなかっ たと 思 われる 29) 高 麗 史 元 宗 世 家 6월, 7월 30) 60 年 後 である1323 年 寧 波 ( 明 州 )を 出 発 して 博 多 に 向 かう 貿 易 船 が 全 南 シンアンの 置 きで 沈 沒 したことも も しかするとこの 船 舶 が 江 南 と 日 本 列 島 の 直 行 路 ではなく 高 麗 の 西 海 沿 岸 の 海 路 を 利 用 していたかもしれ ない 31) 류영철, 앞의 고려첩장불심조조 의 재검토, pp
219 三 別 抄 と 麗 日 関 係 217 ただ 不 審 條 條 での 漂 風 人 についての 性 格 に 対 する 問 題 が 残 る 1270 年 三 別 抄 蜂 起 以 後 は 西 海 沿 岸 が 一 種 の 戰 時 状 態 に 置 かれていたから 問 題 の 漂 風 人 は 純 粋 な 漂 風 人 よりは 南 海 と 西 海 沿 岸 を 掌 握 していた 三 別 抄 によって 航 海 途 中 拘 留 された 集 団 である 可 能 性 が 多 いことと 考 えられる 三 別 抄 は 潜 在 的 連 合 勢 力 である 日 本 との 通 好 を 開 く 方 案 として 彼 らを 本 国 に 護 送 し したがって 日 本 側 への 牒 狀 でもこの 点 を 特 に 強 調 して 言 及 したはずである 不 審 條 條 で 漂 風 である 護 送 使 と 言 及 した 部 分 は このような 脈 絡 から 読 むのが 理 解 しやすい 一 屯 金 海 府 之 兵 先 二 十 許 人 送 日 本 国 事 金 海 部 に 駐 屯 していた 軍 事 のなかで 先 に20 余 人 を 日 本 に 送 った と 言 う 内 容 である ここで 何 より 問 題 になることは 屯 金 海 府 之 兵 の 正 体 に 関 する 問 題 だ これに 対 して 石 井 氏 はこれらが 蒙 古 軍 兵 士 として 日 本 に 行 く 趙 良 弼 一 行 の 情 報 を 伝 えるために 日 本 に 送 った 兵 士 であると 解 釈 した 1271 年 9 月 19 日 九 州 の 今 津 に 到 着 した 当 時 の 元 使 趙 良 弼 一 行 の 使 節 団 の 規 模 は 100 女 人 に 至 ること になっているのに 32) この 文 書 では100 人 ではなく 20 人 余 り と 記 述 したことは それほど 三 別 抄 側 の 不 正 確 な 情 報 を 反 映 することだという 33) 40 余 名 の 元 使 趙 良 弼 一 行 が 高 麗 に 到 着 したことは 同 じ 年 (1271) 正 月 ( 奇 妙 である)のことであった 忽 林 赤 王 国 昌 洪 茶 丘 などが 同 行 したが 趙 良 弼 以 外 のこ れら 麾 下 の 軍 師 は 趙 良 弼 が 日 本 から 戻 って 来 るまで 金 州 ( 金 海 ) 等 地 の 浜 辺 で 待 つように 措 置 した 34) これは 元 使 一 行 に 惹 起 される 万 が 一 の 事 態 に 備 えたことであると 同 時 に それを 予 防 するための 圧 力 措 置 であったと 言 える しかし 日 本 に 派 遣 される 蒙 古 使 者 趙 良 弼 の 先 発 隊 としての 蒙 古 兵 士 が 今 度 三 別 抄 の 使 行 とどのよ うな 関 わりがあるのかについては よく 理 解 ができない このためにギムユンゴンはこの 金 海 部 の 兵 士 を 蒙 古 兵 であるという 解 釈 を 否 定 し この 20 人 軍 事 が 捕 虜 になった 倭 寇 であるのと 解 釈 した こ れに 対 して リュヨンチォルもこの 日 本 に 送 られた20 人 の 兵 士 が 金 海 を 侵 入 してから 捕 らえられた 倭 寇 であり 元 宗 12 年 (1271)4 月 三 別 抄 が 金 州 を 襲 った 時 これを 奪 取 したことであり これら 奪 取 した 倭 寇 を 三 別 抄 が 日 本 本 国 に 返 したことであると 説 明 した この 場 合 屯 金 海 府 之 兵 の 屯 の 意 味 が 問 題 になるが ここでの 屯 は 抑 留 の 意 味 であり 日 本 に 対 する 外 交 的 な 儀 礼 として 金 海 に 抑 留 され ていた 倭 寇 たちを 金 海 部 の 屯 兵 として 表 現 したこと であると 主 張 した 35) 32) 五 代 帝 王 物 語 ( 續 群 書 類 從 完 成 會 本 3) 石 井 논문에서 재인용. 33) 石 井 正 敏 文 永 八 年 來 日 の 高 麗 使 について. 34) 高 麗 史 27, 元 宗 世 家 12 年 正 月 己 卯 35) 류영철, 고려첩장불심조조 의 재검토, pp
220 21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李 領 氏 はこの 問 題 について 1271 年 3 4 月 の 金 州 一 帯 に 対 する 三 別 抄 の 大 大 的 な 攻 略 に 注 目 して いる すなわちこの 時 期 が 對 日 本 牒 狀 の 作 成 及 び 発 送 時 期 にあたるという 点 のためであるが 彼 は 牒 狀 の 作 成 時 期 を 元 世 祖 の 詔 書 を 珍 島 にもたらした 朴 天 澍 の 帰 京 以 後 から 三 別 抄 が 長 興 部 などを 攻 撃 して 南 海 沿 岸 に 対 する 攻 勢 を 本 格 化 する2 月 癸 卯 日 のあいだであると 推 定 した 36) 同 時 に 三 別 抄 の 牒 狀 が 送 られた 後 であるとも 言 える 1271 年 5 月 趙 良 弼 はまだ 開 京 に 泊 まっていて 趙 良 弼 が 日 本 を 行 って 来 るうちに 金 州 に 待 機 し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 洪 茶 丘 が 三 別 抄 の 拠 点 珍 島 攻 撃 前 に 投 入 されて いる 事 実 を 指 摘 した 37) 趙 良 弼 が 開 京 を 出 発 するのが8 月 彼 らが 筑 前 国 今 津 に 到 着 したのが 9 月 1 9 日 という 点 から 問 題 の 記 録 を 元 使 趙 良 弼 と 直 接 連 関 させることはどうしても 難 しい 事 になる 文 字 的 に 見 て 金 海 部 の 軍 師 は 金 海 部 に 駐 屯 していた 軍 事 である リュヨンチォルなどは 屯 を 抑 留 していたという 意 味 で 解 釈 したが これはやっはり 無 理 であろう このために 金 海 部 の 軍 師 は 金 州 駐 屯 の 蒙 古 軍 として 初 めて 解 釈 されたである もうこれら 金 海 部 駐 屯 の 軍 師 が 蒙 古 軍 も 倭 寇 もな いならば この 金 海 部 の 兵 士 が 三 別 抄 の 軍 師 である 可 能 性 を 検 討 する 必 要 がある 李 領 は1271 年 4 5 月 金 州 一 帯 での 旺 盛 な 三 別 抄 の 軍 事 活 動 が 南 海 島 に 拠 点 を 置 いた 劉 存 奕 の 部 隊 であると 推 定 し た 劉 存 奕 の 部 隊 は 伝 統 的 な 高 麗 日 本 の 友 好 関 係 を 根 拠 にして 日 本 との 連 帯 をはかるため 金 海 一 帯 に 進 出 したが 麗 蒙 聯 合 軍 の 大 攻 勢 の 前 の 時 点 での 三 別 抄 のこのような 兵 力 分 散 が 珍 島 三 別 抄 の 失 敗 の 一 原 因 であるという 意 見 を 李 領 氏 は 出 している 38) 珍 島 三 別 抄 の 軍 事 的 失 敗 の 一 原 因 を 南 海 島 拠 点 の 軍 事 力 の 分 散 として 見 なすことが 適 当 なこと であろうかについては 疑 問 がある 珍 島 自 体 が 沿 岸 の 小 さな 島 としてここだけに 兵 力 を 集 中 することが 必 ず 戦 略 的 に 效 果 的 なことであると 断 定 することができないからだ 当 時 三 別 抄 は 済 州 島 に 背 後 を 設 定 して 莞 島 南 海 島 など 沿 岸 多 くの 島 に 拠 点 を 確 保 していたが むしろこのような 地 域 拠 点 の 設 定 が 戦 略 的 に 必 要 な 事 であっただろう それはそうであるが 不 審 條 條 で 言 及 した 金 海 部 の 兵 士 は お そらく 三 別 抄 の 軍 事 である 可 能 性 がある すなわち 対 日 使 者 団 の 派 遣 のための 三 別 抄 の 事 前 段 階 てきな 措 置 ではなかろうかと 思 われる それが 必 ず 劉 存 奕 麾 下 の 軍 師 であったかは やはり 検 討 を 要 する 36) 李 領, 여몽 연합군의 일본침공과 여일관계 일본역사연구 9, 1999, pp ) 고려사 27, 元 宗 世 家 12 年 5 月 丁 丑 および 庚 寅 の 記 録 から 確 認 される 李 領, 上 の 여몽 연합군의 일본침공과 여일관계 pp ) 李 領, 前 の 여몽 연합군의 일본침공과 여일관계, p.74 參 照 一 方 珍 島 政 府 の 急 速 な 沒 落 背 景 金 海 府 駐 屯 兵 士 である 劉 存 奕 との 関 係 の 可 能 性 についてもベサンヒョンも 類 似 な 意 見 を 出 している ベ サンヒョン(배상현), 삼별초의 남해항쟁 역사와 경계 57, 2005, p.105 및 p.111 參 照
221 三 別 抄 と 麗 日 関 係 219 一 安 寧 社 稷 待 天 時 事 イウソンはこれに 対 して 天 時 がくると 社 稷 が 再 び 安 定 するはずだという 所 信 を 披 瀝 したことで あるという 39) すなわち 今 後 の 政 局 に 対 する 三 別 抄 の 自 信 感 と 期 待 が 反 映 されているという 意 見 であろ う これに 対 してリュヨンチォルは 社 稷 の 安 寧 が 天 時 を 待 つほど 緊 急 である と 解 釈 した 40) この 解 釈 と 必 ず 反 するものではないが 筆 者 はこの 句 節 について 社 稷 を 安 寧 にすることは 天 時 を 待 つことで ある すなわち 社 稷 の 安 寧 はただ 天 にかかっている という 意 味 として 解 釈 したい これは 未 来 に 対 する 期 待 あるいは 危 機 意 識 の 表 現 でもあるが これよりは 自 分 の 運 命 がただ 天 にかかっているとい うことで 巨 大 な 麗 蒙 聯 合 軍 と 軍 事 的 に 対 決 中 にあった 三 別 抄 政 府 の 荘 厳 な 決 意 の 表 明 であると 考 え られる そしてこのような 三 別 抄 の 運 命 が 一 方 では 日 本 の 運 命 とも 繋 がっていることを 暗 示 すること で 三 別 抄 と 日 本 が 共 同 運 命 体 であることを 強 調 したのではないかと 思 う 高 麗 正 統 政 府 を 自 任 する 三 別 抄 政 府 の 樹 立 を 知 ることができない 幕 府 では このような 三 別 抄 の 危 機 意 識 と 決 然 としている 情 勢 判 断 と 覚 悟 を 理 解 できなかったのである 一 請 胡 騎 数 万 兵 事 これについて リュヨンチォルは 請 軍 の 主 体 は 開 京 政 府 で 胡 騎 数 万 は 蒙 古 軍 であるとしている すなわち 開 京 政 府 が 大 規 模 の 蒙 古 軍 を 引 き 入 れた 事 実 を 意 味 するという 41) これに 対 してベサン ヒョンはこれが 日 本 軍 の 数 万 を 要 請 したことであるという 42) 文 字 とおりに 見 るとやっぱり 豪 気 は 蒙 古 軍 であるしかないと 考 えられる そうならば リュヨンチォルの 見 解 どおり 開 京 政 府 が 請 軍 の 主 体 とせざ るを 得 ない すなわち 高 麗 政 府 と 連 合 した 大 規 模 の 蒙 古 軍 の 進 入 が 予 定 されている 事 情 を 伝 えるもの であると 言 える やっはり 三 別 抄 政 府 と 高 麗 政 府 に 対 する 混 線 から 理 解 の 混 乱 が 惹 起 されたと 思 われ る 三 別 抄 はこのような 事 態 が 自 分 たちに 対 する 危 機 である 同 時 に 今 後 日 本 に 対 する 圧 迫 へと 移 さ れるはずであることを 予 告 したのである 三 別 抄 の 対 日 牒 狀 は 日 本 との 連 帯 によって 共 同 対 抗 するということが 一 次 的 な 目 標 であったが 39) 이우성, 삼별초의 천도 항몽운동과 대일통첩 한국의 역사상, 창작과비평사, 1982, p ) 류영철, 앞의 고려첩장불심조조 의 재검토, p ) 류영철, 위의 논문, p ) 胡 騎 の 胡 호 が オランケ の 指 稱 ではなく 戈 戟 を 意 味 することもあるということから 胡 騎 は よく 武 裝 さ れた 騎 兵 を 要 請 したことであるという ベサンヒョン(배상현), 삼별초의 남해항쟁 역사와 경계 57, 2005, p.105
222 22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一 方 では 危 機 の 際 の 背 後 避 乱 地 の 確 保 を 模 索 するという 意 図 も 含 まれていると 考 えられる 当 時 三 別 抄 は 済 州 を 背 後 基 地 として 確 保 していたものの 済 州 以 後 の 背 後 基 地 として 日 本 列 島 の 有 用 性 につい ても 深 い 関 心 を 持 っていたはずである 以 上 の 内 容 を 整 理 してみたいと 思 う 三 別 抄 の 牒 狀 では 蒙 古 による 高 麗 の 服 属 及 びそのあいだの 情 勢 変 動 と 関 連 した 簡 単 な 状 況 伝 達 があり 西 南 海 上 で 確 保 した 日 本 商 人 あるいは 漂 風 人 の 送 還 を 通 じて 三 別 抄 に 対 する 友 好 的 な 関 心 を 引 っ 張 り 出 そうと 思 っていた 同 時 に 金 海 部 駐 屯 の 三 別 抄 軍 事 (20 人 規 模 )を 先 に 派 遣 して 今 度 日 本 に 対 する 遣 使 を 準 備 しようとしたことにも 見 える 珍 島 側 ではもし か 日 本 側 が 諸 般 の 状 況 を 正 確 に 把 握 することができない 可 能 性 を 上 程 して 必 要 だったら 珍 島 に 対 す る 現 地 確 認 も 歓 迎 するという 立 場 であった しかし 当 時 日 本 朝 廷 は 全 般 的 に 東 アジア 情 勢 に 対 する 知 識 がなかったし 国 際 的 な 認 識 さえ 欠 けて 牒 狀 文 句 の 正 確 な 意 味 についての 把 握 さえできないまま これを 死 蔵 してしまった はなはだしくは 開 京 側 の 高 麗 政 府 と 三 別 抄 政 府 の 間 の 仕 分 けさえ 認 識 するこ とができなかったのだ 高 麗 と 日 本 の 外 交 的 な 相 互 関 係 が 疏 遠 した 時 代 的 背 景 が 牒 狀 の 処 理 にも そのまま 反 映 されたのである しかし 他 の 一 方 では この 三 別 抄 の 牒 狀 にたいする 接 収 をきっかけにし て 日 本 は 蒙 古 の 脅 威 を 現 実 的 な 状 況 として 認 識 することができ 具 体 的 な 九 州 防 衛 戦 に 対 する 準 備 を 始 めたのである 43) 4. 沖 繩 と 三 別 抄 韓 国 では 2007 年 国 立 済 州 博 物 館 での 沖 繩 特 別 展 をきっかけに 沖 繩 出 土 のいわゆる 癸 酉 銘 の 瓦 の 三 別 抄 との 関 連 についての 議 論 が 興 味 をひいている 特 に 出 品 された 資 料 中 には 癸 酉 銘 瓦 以 外 に 三 別 抄 の 拠 点 であった 珍 島 龍 藏 城 出 土 のものと 非 常 にそっくり 似 ている 蓮 花 文 瓦 當 が 含 まれ ているからである 元 々 沖 繩 出 土 の 高 麗 係 瓦 は 9 種 類 32 形 式 に 至 る 非 常 に 多 様 な 様 態 を 見 せている 44) その 中 で 43) 朝 廷 で 三 別 抄 の 牒 狀 に 対 する 議 論 直 後 とも 言 える9 月 13 日 幕 府 から 九 州 に 領 地 を 持 っている 御 家 人 たち へ자 自 信 が 自 らいくか 代 官 を 急 いで 送 るように 命 令 し 翌 年 文 永 9 年 (1272) 正 月 には 九 州 の 御 家 人 をし て 沿 岸 を 警 備 するように 守 護 に 命 じていた これについては ナンギハック(남기학), 중세 일본의 외교 와 전쟁 동양사학연구 80, 2002, p.205 參 考 44) スマクセ4 種 アンマクセ10 種 スキ2 種 アンキ 瓦 5 種 有 段 式 スキワ5 種 ソカレ 瓦 1 種, 鬼 面 瓦 1 種, マ ルキ1 種 などがそれである これら 高 麗 系 の 瓦 沖 縄 に 到 来 した 高 麗 匠 人 によって はじめて 作 られた 以 後 技 術 的 な 継 承 によってなされたことであろう( 上 原 靜, 오키나와제도의 고려계 기와 탐라와 유구왕 국, 국립제주박물관, 2007, p.212 參 照 )
223 三 別 抄 と 麗 日 関 係 221 特 別 に 癸 酉 年 高 麗 瓦 匠 造 の 名 文 瓦 は 製 作 者 の 身 元 及 び 製 作 時 期 を 明 らかにした 紀 年 が 入 っている ので 早 くから 注 目 されてきた 5 百 年 高 麗 歴 史 の 中 でこの 癸 酉 年 が 具 体 的 にどの 年 代 をさしているかに ついては 1153 年 1273 年 1333 年 1393 年 などが 提 示 されたが その 間 の 議 論 を 通 じて 大 体 に 高 麗 元 宗 14 年 (1273)と 朝 鮮 太 祖 2 年 (1393)の 二 つの 説 が 主 に 論 難 の 対 象 になってきた 45) まず 1273 年 説 は 浦 添 城 を 根 拠 にして 中 山 に 強 大 な 勢 力 を 形 成 したのが 琉 球 王 国 の 英 祖 王 の 治 世 という 判 断 によるものである 46) ここに 関 口 広 次 は 癸 酉 年 名 文 瓦 と14 世 紀 全 般 の 勝 連 城 本 丸 敷 地 で 出 土 した 古 瓦 との 技 術 上 の 連 続 性 ないし 継 勝 性 を 考 慮 する 観 点 から 英 祖 王 の1273 年 説 を 支 持 し ており 47) 大 川 清 もやはり1273 年 製 作 のこの 瓦 が 琉 球 王 国 において 瓦 製 作 の 始 めという 観 点 を 強 調 した 事 がある 48) 以 上 のような1273 年 説 に 対 して 1393 年 説 は 高 麗 史 に 昌 王 元 年 (1389)に 初 めて 琉 球 高 麗 の 間 の 交 渉 の 記 録 が 登 場 しているという 点 朝 鮮 王 朝 実 録 に 見 える 琉 球 王 の 高 麗 への 亡 命 など 高 麗 末 朝 鮮 初 において 両 国 交 渉 を 重 視 して 問 題 の 癸 酉 年 が1393 年 という 立 場 を 取 った 49) 西 谷 正 は 九 州 大 学 所 蔵 のまた 他 の 癸 酉 銘 及 び 大 天 名 文 資 料 を 紹 介 する 一 方 瓦 の 年 代 については1393 年 説 に 傾 いているが しかしその 以 前 に 遡 及 できる 可 能 性 も 排 除 していない 50) 一 方 癸 卯 年 高 麗 瓦 に 対 する 日 本 での 多 様 な 年 代 観 に 比 べて 国 内 ではイヒョング 51) チョイ ギュソンがこの 癸 卯 年 高 麗 瓦 を 三 別 抄 と 連 結 して1273 年 説 を 強 調 したように ほとんど1273 年 説 が 大 きい 流 れとして 認 識 されていることは 特 記 する 点 である 1273 年 は 高 麗 元 宗 14 年 にあたり これは 済 州 島 の 缸 坡 頭 里 を 拠 点 にした 三 別 抄 が 麗 元 連 合 軍 によって 完 全 鎭 圧 された 年 である すなわち 連 合 軍 に 追 いかけられた 済 州 三 別 抄 の 一 部 が 済 州 を 脱 出 国 内 沿 岸 あるいは 海 外 へ 逃 げた 可 能 性 を 上 45) 1153 年 の 説 は 田 邊 泰 巖 谷 不 二, 琉 球 建 築, 1935, p.49 ; 新 城 德 祐 琉 球 歷 史 年 表 1960などに よって 行 われてきたが 最 近 ほぼ 議 論 されていない 1333 年 の 説 は 考 古 學 的 遺 物 と 関 係 などによって その 可 能 性 が 完 全 に 排 除 されていない 46) 松 本 雅 明, 沖 繩 の 歷 史 と 文 化 - 國 家 の 成 立 を 中 心 として, 近 藤 出 版 社, 1971, p.89 47) 關 口 廣 次, 沖 繩 における 造 瓦 技 術 の 變 遷 とその 間 の 事 情 - 勝 連 城 本 丸 跡 出 土 古 瓦 を 中 心 として- 考 古 學 雜 誌 62-3, ) 大 川 淸, 琉 球 古 瓦 調 査 抄 報 琉 球 政 府 文 化 財 保 護 委 員 會 文 化 財 要 覽 1962 年 版, 1962, pp ) 49) 三 島 格, 琉 球 の 高 麗 瓦 など 鏡 山 猛 先 生 古 稀 記 念 古 文 化 論 攷, 1980, pp ) 西 谷 正, 高 麗 朝 鮮 兩 王 朝 と 琉 球 の 交 流 -その 考 古 學 的 硏 究 序 說 九 州 文 化 史 硏 究 所 紀 要 26, 九 州 大, 1981 この 論 文 は 筆 者 が 全 文 を 翻 訳 して 忠 淸 道 文 化 財 硏 究 院, 금강고고 4, 2007に 載 せた 51) おそらくこの 時 期 に 濟 州 道 で 連 合 軍 に 抗 拒 していた 三 別 抄 とその 家 率 たちは 琉 球 の 方 に 避 難 したのではな いかと 思 われる この 際 渡 来 した 高 麗 人 たちが 琉 球 の 都 城 造 營 事 業 似 も 参 加 して 建 築 と 製 瓦 に 従 事 し ていたと 考 えられる (이형구, 앞의 논문, p.531)
224 22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程 することができるし その 場 合 沖 繩 琉 球 王 朝 への 歸 附 も 充 分 に 可 能 性 あるという このような 国 内 の 年 代 観 からみると 済 州 博 物 館 の 特 別 展 に 出 品 された 資 料 中 のウラソエ 城 の 蓮 花 文 樺 膜 の 瓦 は 龍 藏 城 から 出 土 された 樺 膜 の 瓦 と 非 常 に 似 ているという 点 で 特 別 な 関 心 を 引 き 起 こし た 銀 杏 を 連 想 させる9 葉 の 蓮 花 の 葉 っぱが 中 心 文 様 として 展 開 され 中 央 には 鋭 くない 子 房 がある が 子 房 と 蓮 花 の 間 に 突 線 帶 の 枠 を 取 り 囲 んであった 9 葉 の 蓮 花 の 外 には2 組 の 禪 臺 を 取 り 囲 み 禪 臺 の 間 に30 余 文 様 を 飾 った 形 態 である 瓦 當 の 大 きさは 短 縮 長 軸 21.0cmである 52) この 高 麗 瓦 當 は 国 内 ではじめて 紹 介 されたが 特 にそれが 三 別 抄 の 拠 点 であった 珍 島 龍 藏 城 の 出 土 品 とそっ くりだということは 沖 繩 高 麗 との1273 年 製 作 説 と 絡 み 合 って 大 きく 興 味 を 起 こすようなことであった 沖 繩 のウラソエ ヨオドレ 出 土 の 物 を 龍 藏 城 出 土 の 瓦 當 と 厳 密 に 比 べてみると 兩 者 は 等 しいもので はないことが 分 かる まず 龍 藏 城 のものが 8 葉 であることに 対 して 沖 繩 瓦 は 蓮 花 が9 葉 という 点 花 びらの 形 態 が 龍 藏 城 の 物 がもうちょっと 丸 い 感 じで 外 の 聯 珠 文 も 龍 藏 城 の 方 がもうちょっと 整 理 され た 感 じを 与 えるという 点 等 の 差 異 が 観 察 されるからである それにもかかわらず 二 つの 資 料 がよほど 類 似 しているということは 特 記 すべきである 1271 年 三 別 抄 の 残 余 勢 力 が 珍 島 から 済 州 へ 移 動 する 時 残 余 勢 力 の 一 部 が 済 州 島 ではなく 第 3 の 地 域 で 分 散 した 可 能 性 も 充 分 に 上 程 することができる 1273 年 済 州 島 での 場 合 は 珍 島 に 比 べて より 多 い 数 の 島 外 分 散 が 不 可 避 だったのであろう 済 州 島 から 脱 走 した 三 別 抄 の 残 余 勢 力 は また 高 麗 の 南 西 沿 岸 の 島 嶼 へ 回 帰 して 生 き 延 びた 場 合 もあっただろうが 一 方 では より 安 全 が 保 障 され た 日 本 列 島 方 面 への 必 死 的 な 脱 走 可 能 性 も 充 分 に 上 程 することができる 1274 年 日 本 が 麗 蒙 聯 合 軍 の 侵 入 を 受 けてから 以 後 九 州 では 連 合 軍 の 攻 撃 対 象 になった 博 多 ( 福 岡 ) 海 岸 一 帯 に20km 長 さの 大 規 模 の 長 城 いわゆる 元 寇 防 塁 を 構 築 した 53) 海 岸 に 石 垣 の 長 城 を 積 んで 敵 から 防 御 するという 九 州 のこのアイディアは 一 体 どこから 出 たのであろうか 当 時 としてこのよう な 石 垣 の 關 防 施 設 は 日 本 としては 非 常 に 例 外 のことであるからだ ところで 1 次 日 本 遠 征 の 直 前 麗 元 軍 は 三 別 抄 の 最 後 拠 点 である 済 州 島 を 陥 落 させた 事 があったが この 済 州 島 には 海 岸 を 取 り 囲 んだ 長 城 が 三 別 抄 の 防 御 設 備 として 構 築 されていた 済 州 島 の 沿 岸 を 石 垣 でめぐらしたといういわゆ る 環 海 長 城 の 存 在 がそれである 54) 現 在 残 された 済 州 島 の 環 海 長 城 遺 跡 は 倭 寇 などに 対 する 必 要 のため 後 に 補 修 が 絶 えず 行 われていたと 考 えられるものの その 遺 跡 の 一 部 がまだ 済 州 島 に 残 さ 52) 국립제주박물관, 탐라와 유구왕국, 2007, pp 写 真 史 料 と 説 明 53) 元 寇 防 壘 の 調 査 と 研 究 に 関 する 概 要 は 川 添 昭 二 蒙 古 襲 來 硏 究 史 論 雄 山 閣, 1977に 時 期 別 に 研 究 史 が 整 理 しており 地 區 別 の 現 場 重 心 の 槪 況 は 柳 田 純 孝 など 元 寇 と 博 多 - 寫 眞 で 讀 む 蒙 古 襲 來, 西 日 本 新 聞 社, 2001, pp.27-52が 良 い 参 考 になる 54) 강창언, 제주도의 환해장성 연구 탐라문화 11, 1991
225 三 別 抄 と 麗 日 関 係 223 れている 蒙 古 軍 の 侵 略 を 石 垣 の 防 塁 によって 沮 止 するという 元 寇 屋 塁 のアイディアが 済 州 島 沿 海 を 石 垣 で 取 り 囲 んだ 環 海 長 城 と 同 じ 発 想 ということは 兩 者 の 連 関 関 係 を 暗 示 することであって 同 時 に 済 州 島 の 三 別 抄 勢 力 の 一 部 が 九 州 に 上 陸 することで 提 供 したアイディアである 可 能 性 も 考 えら れる 現 段 階 での 問 題 の 核 心 は 韓 国 と 沖 繩 の 両 地 域 の 高 麗 瓦 に 対 するより 鉱 範 で 精 緻 な 検 討 を 進 む ことであり 特 に 造 瓦 の 技 術 的 な 側 面 について 細 密 に 点 検 する 必 要 があるだろう 龍 藏 城 缸 坡 頭 里 城 など 珍 島 と 済 州 島 の 抗 蒙 遺 跡 は 沖 繩 高 麗 瓦 の 問 題 を 解 決 する 一 つの 重 要 な 鍵 になっている このような 点 でこれら 遺 跡 の 持 つ 意 味 は 単 純 な 戰 爭 史 あるいは 民 族 抗 争 史 の 次 元 を 越 え 中 世 東 アジア 交 流 の 国 際 的 な 側 面 であり したがってこれからの 持 続 的 な 検 討 が 重 要 であるということを 物 語 っ ている おわりに 本 稿 は 1270 年 江 華 島 で 蜂 起 して 珍 島 済 州 島 を 転 々しながら1273 年 まで 活 動 した 三 別 抄 に 対 し て 特 に 日 本 との 関 係 を 中 心 に 考 察 した 三 別 抄 の 対 日 関 係 を 考 察 するに 当 たって もっとも 重 要 な 資 料 は1271 年 珍 島 の 三 別 抄 が 日 本 に 送 っ た 牒 狀 関 連 史 料 ( 高 麗 牒 状 不 審 條 條 )である これによれば 当 時 の 高 麗 は 牒 狀 を 通 じて 蒙 古 に 対 す る 服 属 及 びそのあいだの 情 勢 変 動 と 係 わった 簡 単 な 状 況 伝 達 の 内 容 が 含 まれていた 三 別 抄 は 西 南 海 における 制 海 権 を 基 盤 に 確 保 した 日 本 商 人 と 漂 風 人 の 送 還 を 通 じて 三 別 抄 に 対 する 友 好 的 な 関 心 を 引 き 出 そうと 思 っていた 同 時 に 金 海 部 駐 屯 の 三 別 抄 軍 師 (20 人 規 模 )を 先 に 派 遣 して 今 度 日 本 に 対 する 遣 使 を 準 備 するようにしたと 考 えられる 珍 島 側 ではもし 日 本 側 が 諸 般 の 状 況 を 正 確 に 把 握 するこ とができない 可 能 性 を 上 程 して 必 要 だったら 珍 島 に 対 する 現 地 確 認 も 歓 迎 するという 立 場 であった しかし 当 時 日 本 の 朝 廷 は 全 般 的 に 東 アジア 情 勢 に 対 する 知 識 がなかったし 国 際 的 な 認 識 さえ 欠 けて 牒 狀 文 句 の 正 確 な 意 味 についての 把 握 さえできないまま これを 死 蔵 させてしまった 高 麗 と 日 本 の 外 交 的 な 相 互 関 係 が 疏 遠 した 時 代 的 な 背 景 が 牒 狀 の 処 理 でそのまま 反 映 されたわけである 麗 蒙 聯 合 軍 は 三 別 抄 鎭 圧 以 後 の1274 年 に 日 本 への 征 役 に 出 たが もし 三 別 抄 の 蜂 起 がなかっ たらば 蒙 古 はもっと 早 く 少 なくとも1-2 年 を 前 もって 日 本 への 無 力 的 な 方 法 による 圧 迫 に 出 たはずで あろう 三 別 抄 の 蜂 起 以 前 の 対 日 招 誘 の 過 程 では 1266 年 から 第 1 次 麗 元 軍 の 日 本 侵 入 の 前 年 で ある1273 年 まで4 回 にわたり 毎 年 使 節 が 派 遣 された その 中 で 1270 年 の 一 年 だけが 使 節 派 遣 を 行 わず このような1 年 の 休 止 は 三 別 抄 の 蜂 起 によって 南 部 沿 岸 一 帯 が 珍 島 拠 点 の 三 別 抄 の 繩 張
226 22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に 含 まれていたという 複 雑 な 状 況 のためだったのであろう 三 別 抄 の 対 日 連 合 戦 線 への 追 求 は 基 本 的 に 麗 元 関 係 の 歴 史 性 と 地 理 的 な 隣 接 性 によって 提 案 されたものである しかし 同 時 にこのように 数 年 の 前 から 推 進 していた 日 本 への 招 誘 そして 対 日 征 役 を 念 頭 に 置 いた 軍 船 の 準 備 など 一 連 の 状 況 が 三 別 抄 にとって 日 本 との 連 帯 を 具 体 的 に 模 索 するように なるきっかけを 造 成 したとも 言 えよう 本 稿 では 三 別 抄 と 関 連 して 癸 酉 年 高 麗 瓦 匠 造 という 字 が 書 かれた 沖 繩 出 土 の 瓦 が 三 別 抄 と 関 連 性 があるということを 最 後 に 言 及 した 瓦 の 癸 酉 年 ということは1273 年 の 可 能 性 があり 特 に 龍 藏 城 のものとそっくりな 瓦 當 の 存 在 は 済 州 島 あるいは 珍 島 三 別 抄 と 関 係 がある 可 能 性 を 高 めている た だ この 点 が 事 実 として 確 認 されるためには 今 後 より 活 発 な 研 究 と 幅 広 い 資 料 検 討 を 要 する
227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 高 麗 と 日 本 の 関 係 に 留 意 して- 南 基 鶴 ( 翰 林 大 學 校 ) 端 書 き 13 世 紀 末 蒙 古 (1271 年 以 後 国 号 を 大 元 に 変 えたが 本 稿 では 便 宜 上 蒙 古 という 名 称 を 用 い 必 要 に 応 じて 元 と 称 する)の 日 本 侵 略 は 東 アジアの 諸 国 が 連 携 された 国 際 的 な 事 件 であった この 戦 争 は 蒙 古 南 宋 高 麗 日 本 各 国 の 国 内 事 情 と 各 国 を 取 り 囲 んだ 国 際 情 勢 の 流 れに 連 動 されて 勃 発 し それによって 東 アジアの 国 際 政 局 は 大 きく 搖 れた 南 宋 は 世 界 帝 国 へと 背 伸 びしようとする 蒙 古 によっ て 滅 亡 され 蒙 古 に 服 属 した 高 麗 は 二 度 も 日 本 侵 略 に 強 制 動 員 された 日 本 は 歴 史 上 未 曽 有 の 対 外 的 危 機 を 迎 えて 国 家 の 存 亡 をかけてその 対 応 に 苦 心 した 本 稿 では 蒙 古 の 侵 略 に 対 して 日 本 が 外 交 上 軍 師 上 にどのように 対 応 していたのかを 全 般 的 に 検 討 してみたい このためには まず 蒙 古 の 意 図 と 政 策 蒙 古 によって 動 員 された(あるいは 動 員 される 立 場 に 置 かれた) 高 麗 の 立 場 と 対 策 そして 日 本 の 対 応 方 式 とそれを 規 定 していた 国 内 事 情 をあまねく 考 察 しなければならないであろう その 中 でも 特 に 本 稿 では 高 麗 と 日 本 の 関 係 に 留 意 してみたい 一 方 当 事 者 である 高 麗 は 日 本 を 招 誘 しようとする 蒙 古 と 日 本 の 間 でどのような 立 場 に 置 かれたの か またどのように 対 応 していたのか 高 麗 は 日 本 に 対 してどんな 態 度 を 取 り 日 本 は 蒙 古 と 高 麗 の 外 交 交 渉 に 対 してどのように 対 応 したのか また 蒙 古 の 日 本 侵 略 戦 争 において 高 麗 が 遂 行 していた 役 割 および 日 本 は 蒙 古 と 高 麗 に 対 してどのような 形 で 軍 師 行 動 をとり 戦 争 を 経 験 しながら 高 麗 と 日 本 は 互 いにどのように 認 識 していたのかが 重 要 な 問 題 であろう このような 問 題 は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に 対 する 日 本 の 対 応 の 性 格 は 勿 論 この 時 期 の 高 麗 と 日 本 の 関 係 を 把 握 するために 欠 かせてはいけない 分 析 の
228 22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対 象 である 今 まで 韓 国 学 界 では 高 麗 の 対 蒙 古 抗 争 に 力 点 を 置 く 一 方 元 の 干 渉 期 の 高 麗 と 日 本 の 関 係 にはあ まり 関 心 を 傾 けようとしなかった 一 方 近 年 日 本 学 界 は 蒙 古 の 侵 略 に 対 応 した 国 内 政 治 史 を 重 心 にし た 分 析 が 行 われており 国 際 関 係 と 言 っても 日 本 と 大 陸 の 関 係 に 重 点 を 置 く 傾 向 が 強 い この 時 期 高 麗 と 日 本 の 関 係 に 対 するより 正 確 で 均 衡 を 保 つ 理 解 はこれからの 課 題 ともいえよう 1 蒙 古 の 日 本 招 誘 と 日 本 の 対 応 1) 蒙 古 の 日 本 招 誘 の 展 開 蒙 古 は 第 1 2 次 日 本 侵 略 を 前 後 にして 持 続 的 に 日 本 との 外 交 交 渉 を 試 みた 事 実 蒙 古 の 日 本 に 対 する 政 策 は 外 交 交 渉 (= 日 本 招 誘 )と 武 力 解 決 (= 日 本 遠 征 )の 二 つの 軸 から 展 開 された この 両 面 政 策 は 状 況 の 展 開 によって 比 重 が 変 わったものの 蒙 古 が 日 本 に 対 してともに 用 いた 基 本 政 策 でもあっ た 蒙 古 は 軍 師 的 手 段 なみに いやそれに 先 立 って 可 能 であるならば 外 交 的 な 手 段 で 所 期 の 目 的 を 果 たそうとしたことを 見 逃 してはいけない 以 下 では まず 蒙 古 の 対 日 交 渉 の 展 開 を 全 体 的 に 眺 めて 見 よう 1274 年 第 1 次 日 本 侵 略 以 前 の 段 階 で 蒙 古 は6 回 (1266 8: 未 到 着 )にわたって 日 本 招 誘 を 試 みている 1268 年 1 月 に 到 着 した 最 初 の 蒙 古 国 書 は 大 蒙 古 国 皇 帝 が 日 本 国 王 あてに 送 る 形 式 で 高 麗 が 蒙 古 に 来 朝 したことを 知 らせて 高 麗 と 接 した 小 国 日 本 が 蒙 古 に 通 好 = 朝 貢 することを 要 求 しながら 末 尾 には 兵 力 を 使 うことを 誰 が 好 むだ ろうか と 軍 師 的 脅 威 を 表 していた 1) この 国 書 は 元 代 の 評 価 によれば 日 本 を 臣 下 として 見 下 ろしてい ないし 全 く 丁 寧 な 表 現 を 使 ったことだという 2) 国 書 の 文 面 上 蒙 古 は 日 本 との 円 満 な 交 渉 を 望 んで いたのである この 段 階 で 蒙 古 の 日 本 招 誘 の 意 図 に 対 しては 南 宋 征 伐 の 一 環 であろうということには 概 ね 見 解 が 一 致 している 蒙 古 は 南 宋 の 襄 陽 城 攻 撃 ( )を 前 後 して 日 本 招 誘 を 試 みているし その 目 的 は 海 上 で 繋 がっている 南 宋 と 日 本 の 通 交 関 係 を 切 り 南 宋 を 孤 立 させるためであった 數 次 の 1) 至 元 3 年 (1266) 8 月 蒙 古 國 牒 案, 鎌 倉 遺 文 13 卷 9564 號 2) 國 書 の 末 尾 には 不 宣 という 言 葉 で 終 りにしているが 元 代 の 國 朝 文 類 ( 卷 41 征 伐 日 本 )によると 不 宣 は 臣 下 として 見 なしていないことをさす と 記 されており この 國 書 の 全 般 について 文 體 が 誠 を 尽 くしており 謙 讓 の 意 思 が 簡 冊 にあふれる と 評 価 していた
229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27 使 者 派 遣 にもかかわらず 日 本 側 の 回 答 がなかったので 蒙 古 のクビライは 1270 年 11 月 日 本 遠 征 準 備 に 取 り 掛 かって 高 麗 へ 屯 田 兵 を 派 遣 している 3) しかし ちょうど 高 麗 で 起 きた 三 別 抄 の 反 乱 ( )によってその 実 行 が 不 可 能 になり 1273 年 4 月 三 別 抄 を 平 定 して 阻 害 要 因 がなくなると 戦 列 を 整 備 し その 翌 年 に 日 本 侵 略 に 乗 り 出 したのである 4) 1274 年 は 5 年 間 にわたった 襄 陽 城 攻 略 が 成 功 した 直 後 であり なお 蒙 古 が 南 宋 の 本 土 へ 本 格 的 な 侵 攻 を 行 った 時 期 に 当 たる したがって 第 1 次 日 本 侵 略 は 実 は 同 年 開 始 された 南 宋 に 対 する 全 面 的 な 進 攻 作 戦 の 一 環 であった すなわち 日 本 の 軍 師 的 な 征 服 が 目 的 ではなく 南 宋 に 対 する 総 攻 撃 の 側 面 作 戦 として 南 宋 と 日 本 の 関 係 を 遮 斷 する ための 武 力 示 威 ないし 武 力 偵 察 だったのである 5) この 時 の 遠 征 軍 は 蒙 古 人 漢 人 ( 旧 金 朝 人 ) 高 麗 人 などで 構 成 された3 万 数 千 の 兵 力 で 6) 九 州 博 多 での 戦 闘 の 翌 日 の 気 象 悪 化 も 重 なってそのまま 撤 退 している 第 1 次 侵 略 以 後 蒙 古 は1275 年 4 月 と1279 年 6 月 の2 回 にわたり また 使 臣 を 派 遣 して 日 本 招 誘 を 試 みている 蒙 古 は 実 際 の 軍 師 的 脅 威 による 日 本 の 態 度 変 化 を 期 待 したはずであった 1275 年 の 使 臣 は 日 本 との 戦 闘 後 高 麗 へ 帰 還 した1274 年 11 月 からわずか 三 月 後 である1275 年 2 月 に 決 定 されており 1279 年 の 使 臣 は 蒙 古 に 降 伏 した 南 宋 の 使 臣 と 日 本 人 留 学 僧 を 一 緒 に 派 遣 するなど 南 宋 との 関 係 を 利 用 して 日 本 側 の 態 度 変 化 をはかっている 蒙 古 としては 使 者 一 行 が 翌 年 1280 年 4 月 まで 戻 ってきて 日 本 の 態 度 に 対 する 最 終 判 断 を 下 した 後 出 兵 可 否 を 決 める 予 定 であった しかし 日 本 側 は2 回 の 使 者 一 行 を 皆 斬 首 しており その 事 実 は 遅 れて 蒙 古 側 に 知 らされ 2 次 侵 略 の 直 接 的 なきっかけとして 作 用 する 7) 1281 年 蒙 古 の 第 2 次 日 本 侵 略 は 南 宋 征 伐 が 成 功 した 後 日 本 側 の 使 者 処 刑 の 消 息 が 伝 わる 中 で 推 進 されたのである 遠 征 軍 は 蒙 古 漢 人 高 麗 のほかに 降 伏 した 南 宋 の 軍 師 を 含 んで14 万 もなる 大 規 模 の 兵 力 8)で1 次 に 比 べて 約 5 倍 に 達 しており 日 本 に 屯 田 軍 を 設 置 する 予 定 であったことを 考 えてみ 3) 旗 田 巍 元 寇 - 蒙 古 帝 國 の 內 部 事 情 中 央 公 論 社 1965 pp ) 村 井 章 介 高 麗 三 別 抄 の 叛 亂 と 蒙 古 襲 來 前 夜 の 日 本 同 アジアのなかの 中 世 日 本 校 倉 書 房 pp ) 杉 山 正 明 大 モンゴルの 世 界 陸 と 海 の 巨 大 帝 國 角 川 書 店 1992 pp 石 井 進 鎌 倉 び との 声 を 聞 く 日 本 放 送 出 版 協 會 2000 pp ) 元 史 高 麗 史 などの 史 料 と 数 多 くの 関 連 研 究 は 遠 征 軍 の 規 模 について それぞれ 異 なって 記 述 してい る 本 稿 では 戰 鬪 要 員 だけが 約 2 萬 6 千 ( 蒙 漢 軍 2 萬 高 麗 軍 約 6 千 ) 高 麗 の 船 頭 梢 工 水 手 6,700の 總 3 萬 2 千 ~3 萬 3 千 が 動 員 されたとみる そのほかに 元 から 別 に 船 頭 水 手 が 供 給 された 可 能 性 もあるが( 池 內 宏 元 寇 の 新 硏 究 東 京 東 洋 文 庫 1931 pp.126~127 參 照 ) 現 在 としては 不 明 である 7) 相 田 二 郞 蒙 古 襲 來 の 硏 究 增 補 版 吉 川 弘 文 館 1982 pp 參 照 8) 高 麗 から 出 陣 した 東 路 軍 は 約 4 萬 ( 高 麗 軍 1 萬 高 麗 の 水 手 約 1 萬 7 千 蒙 漢 軍 1 萬 數 千 ) 中 國 から 出 陣 し た 江 南 軍 は10 萬 이であった 特 に 江 南 軍 10 萬 을をのせた3,500 隻 の 大 艦 隊 は 外 海 に 向 けた 艦 隊 として
230 22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れば 蒙 古 は 日 本 ( 少 なくともその 一 部 の 地 域 )に 対 する 軍 師 的 な 征 服 支 配 まで 考 慮 したようである 9) 蒙 古 のクビライは1266 年 当 時 日 本 に 対 して 不 臣 の 朝 貢 国 としての 国 交 開 始 を 要 求 したが 日 本 の 無 回 答 によって 無 力 行 事 につながり 使 臣 の 処 刑 によって1279 年 の 中 国 統 一 後 には 征 服 による 属 領 化 を 狙 ったと 思 われ 少 なくとも 君 臣 関 係 の 設 定 を 意 図 したと 考 えられる 10) 大 規 模 な 第 2 次 日 本 侵 略 が 台 風 によって 失 敗 した 以 後 にもクビライが1282 年 年 年 にわたって 第 3 次 日 本 侵 略 を 執 拗 に 図 っていたことはよく 知 られた 事 実 である 11) しかしクビライ はひたすら 無 力 解 決 のみ 考 えたわけではなく 従 来 通 り 数 回 にわたり 使 者 を 送 って 日 本 の 招 誘 をはかっ ていた 第 2 次 日 本 侵 略 の 後 蒙 古 の 日 本 に 対 する 使 者 派 遣 は 1283 年 8 月 の 如 智 王 君 治 1284 年 5 月 の 如 智 王 積 翁 1292 年 10 月 の 高 麗 使 者 金 有 成 郭 麟 1299 年 3 月 の 禅 僧 一 山 一 寧 など 総 4 回 に 達 する また 1292 年 7 月 帰 国 する 日 本 商 船 に 寄 託 した 燕 公 楠 の 牒 狀 を 含 めば 蒙 古 は 全 5 回 の 日 本 招 誘 をはかったことになる このなかで 初 めの2 回 は 日 本 に 到 着 しておらず 燕 公 楠 の 牒 狀 は 無 視 されており 金 有 成 は 抑 留 され 最 後 の 一 山 一 寧 も 同 じく 日 本 に 抑 留 されたと 言 えよう クビライは 第 3 次 日 本 侵 略 の 企 圖 が 中 国 江 南 各 地 の 反 乱 ベトナムの 抵 抗 蒙 古 帝 国 の 内 部 の 事 情 によって 続 けて 挫 折 し 日 本 を 軍 師 的 に 征 服 支 配 するという 意 志 を 捨 てて 外 交 交 渉 の 方 へ 重 点 を 置 く ようになったと 思 われる 12) 1294 年 クビライが 死 亡 した 後 にも 蒙 古 は1299 年 成 宗 が 国 書 を 送 って 日 本 招 誘 を 試 みている この 時 の 蒙 古 国 書 は 書 式 上 クビライが 最 初 に 送 った 国 書 と 似 ており 先 皇 の 遺 意 を 奉 じて 日 本 に 対 して 通 問 を 要 求 するという 趣 旨 であった 13) クビライが 初 めて 意 図 したことと 等 し く 成 宗 も 日 本 が 不 臣 の 朝 貢 国 になる 形 態 として 円 満 に 国 交 を 結 ぶことを 希 望 していたのである その 一 年 前 の1298 年 成 宗 は 日 本 侵 略 の 建 議 に 対 して 今 は 時 ではない と 棄 却 したが 14) 実 際 にその 後 成 宗 が 日 本 侵 略 を 準 備 した 形 跡 はない は 人 類 史 上 最 初 の 超 大 型 艦 隊 だったという 9) 日 本 遠 征 軍 の 姿 とか 当 時 の 戰 況 が 詳 しく 描 かれた 八 幡 愚 童 訓 ( 甲 本 )では 今 回 は 必 ず 勝 利 するので あろうということで 居 住 に 必 要 な 生 活 用 具 と 耕 作 するための 農 器 具 まで 持 ってきた と 記 されている( 日 本 思 想 大 系 20 寺 社 緣 起 岩 波 書 店 1975 p.190). 10) 中 村 榮 孝 十 三 四 世 紀 の 東 亞 情 勢 とモンゴル 襲 來 岩 波 講 座 日 本 歷 史 6 中 世 p ) 旗 田 巍 元 寇 pp 參 照 12) 1292 年 8 月 に 高 麗 の 世 子 が 入 朝 した 際 クビライはその 席 で 日 本 侵 略 についての 意 見 を 聞 いていたが 今 回 の 侵 掠 準 備 は 今 までとは 異 なって 高 麗 だけに 命 じ 中 國 內 部 で 行 った 痕 跡 はない( 旗 田 巍 元 寇 p.167). 中 國 人 の 反 抗 を 警 戒 したわけでもあるが 侵 掠 の 目 的 が 少 なくともこの 段 階 に 至 ると 日 本 の 來 服 を 促 すことにあったことを 強 く 思 わせる 13) 序 頭 に 大 元 皇 帝 致 書 于 日 本 國 王 末 尾 に 不 宣 と 書 いていた( 大 德 3 年 [1299]3 月 元 國 王 書 狀 寫 鎌 倉 遺 文 第 25 卷 號 ). 14) 元 史 卷 208 外 夷 列 傳 日 本 傳 大 德 2 年 (1298).
231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29 このようにみる 際 少 なくともクビライの 晩 年 あるいは 成 宗 即 位 後 の 蒙 古 の 外 交 交 渉 に 対 して 日 本 が 冷 情 で 思 慮 深 く 対 処 したらば 日 本 は 臣 事 であれ 不 臣 であれ 蒙 古 の 朝 貢 国 になることで 済 み 事 実 上 実 現 する 可 能 性 が 少 なかった 侵 略 の 圧 迫 と 危 機 感 から 逃 れることができたはずである しか し 幕 府 は 滅 亡 に 至 るまで 外 交 交 渉 を 拒 否 し 蒙 古 に 対 する 防 御 体 制 を 固 めるのみであった 日 本 は その 被 害 が 比 較 的 に 軽 微 で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 蒙 古 の 使 臣 たちを 処 刑 または 抑 留 する 硬 直 され た 態 度 に 一 貫 している 15) この 点 は 結 局 蒙 古 の 侵 略 軍 を 退 けた 安 南 (ベトナム 中 部 北 部 )と 占 城 (ベ トナム 南 部 のツァンパ:Champa)が 後 には 自 らクビライ 政 権 に 入 朝 して 従 属 関 係 を 結 んだ 事 実 16)と 対 照 的 である その 方 が 蒙 古 の 絶 え 間 のない 圧 迫 から 脱 することができることは 勿 論 政 治 的 経 済 的 に も 利 点 が 多 かった 17) 一 応 入 朝 すればクビライは 再 び 軍 隊 を 送 らなかったのである 2) 高 麗 朝 廷 と 三 別 抄 の 対 日 交 渉 1266 年 11 月 クビライは 日 本 招 誘 のため 蒙 古 の 使 臣 黒 的 を 高 麗 に 派 遣 し 日 本 への 道 案 内 を 命 じた 18) これに 対 して 高 麗 は 翌 年 1 月 宋 君 斐 金 賛 などを 黒 的 と 同 行 するようにしたが 彼 らは 巨 済 島 に 至 って 風 と 波 が 激 しいという 理 由 で 開 京 へ 帰 還 してしまう すると 高 麗 国 王 元 宗 は 黒 的 が 本 国 に 帰 る 途 中 に 宋 君 斐 を 一 緒 にクビライのもとへ 派 遣 し 対 馬 島 の 風 俗 が 頑 迷 で 礼 儀 がない から 使 者 の 渡 日 が 危 ないこと そして 日 本 は 元 来 小 邦 と 通 交 したことがなく ただ 対 馬 島 人 が 時 々 貿 易 のため 金 州 を 往 来 するだけである と 報 告 した 19) しかしこれはクビライの 大 きいな 怒 りを 買 ってしまい 高 麗 は 以 後 日 本 招 誘 の 使 命 を 直 接 担 うことになる 1267 年 8 月 黒 的 一 行 がクビライの 命 令 を 記 した 詔 書 を 持 って 再 び 高 麗 へ 来 ると 20) 宰 相 李 蔵 用 は 黒 的 に 書 信 を 送 って 次 のように 言 っている まず 旧 来 の 中 国 と 日 本 の 関 係 に 対 して 日 本 が 海 を 隔 てて 中 国 から 遠 く 離 れており 時 々 相 通 するがあってもかつて 中 国 に 職 貢 したことはなく 中 国 も 来 ればこれを 慰 撫 し 行 けば 関 係 を 切 った これを 得 ても 王 化 に 利 益 がなく 捨 てても 皇 威 に 損 傷 がない と 思 っていて 日 本 を 放 置 しておいた 15) アジアの 諸 国 でも 元 の 使 臣 を 殺 害 または 抑 留 したり 侮 辱 を 加 えたりしていたが 日 本 のようにそのあと でも 自 らの 外 交 手 段 を 講 じなかった 国 はなかったという( 片 倉 穰 蒙 古 の 膨 脹 とアジアの 抵 抗 荒 野 泰 典 石 井 正 敏 村 井 章 介 編 日 本 史 Ⅳ 東 京 大 學 出 版 會 1992 p.101). 16) 杉 山 正 明 大 モンゴルの 世 界 pp ) Morris Rossabi Khubilai Khan His Life and Tim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8 p.218. 杉 山 正 明 大 モンゴルの 世 界 p ) 高 麗 史 券 26 元 宗 世 家 元 宗 7 年 (1266) 11 月 癸 丑 條. 19) 同 元 宗 7 年 (1266) 11 月 丙 辰 條 元 宗 8년(1267) 1 月 條. 20) 同 元 宗 8 年 (1267) 8 月 丙 辰 條.
232 23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と 説 明 する そして 隋 文 帝 の 時 の 例 をあげて 日 本 は 驕 慢 で 名 分 が 分 からない 国 なので 日 本 に 国 書 を 送 逹 することに 対 して 送 らないことが 得 策 である と 勧 告 する 結 論 的 に 李 蔵 用 は 海 遠 くに ある ということを 信 じて 蒙 古 に 入 朝 しない 日 本 をほったらかしておいて 歳 月 を 約 束 して 日 本 のやり 方 を 見 ながら 中 国 へ 来 れば 内 附 を 勧 め 来 なければ 度 外 に 置 いて 日 本 が 愚 かに 人 里 離 れた 所 で 一 人 暮 らしをするようにほったらかすこと 提 言 していた 21) これに 対 して 高 麗 史 では ( 李 ) 蔵 用 は 日 本 が 畢 竟 来 ないと 将 来 我 が 国 に 障 害 ( 累 )になるだ ろうと 思 って 隠 密 に 黒 的 を 説 得 し その 事 ( 日 本 招 誘 )を 中 断 するようにしたこと と 評 している 高 麗 の 累 というのは すなわち 蒙 古 の 日 本 遠 征 に 高 麗 が 動 員 されることを 指 しており その 事 態 を 憂 慮 して 国 書 を 送 らないことが 得 策 であると 黒 的 に 力 説 したのであった 李 蔵 用 の 日 本 認 識 は 前 述 した 元 宗 のそれ と 等 しい 元 宗 はまた1271 年 3 月 クビライに 差 し 上 げた 表 文 の 中 で その( 日 本 の) 風 俗 が 頑 疾 し 思 廬 深 くない 22) と 言 っている 高 麗 国 王 の 日 本 に 対 する 認 識 は 日 本 はただ 島 夷 であるのみだ 23) と 話 した 忠 烈 王 の 言 葉 でも 確 認 される 高 麗 が 当 初 からクビライに 対 する 非 協 力 的 な 態 度 を 取 った 背 後 にこのような 高 麗 朝 廷 の 日 本 認 識 が 介 在 していたことは 日 本 招 誘 のための 高 麗 の 対 日 交 渉 の 姿 勢 から 反 証 される 1268 年 1 月 日 本 に 派 遣 された 高 麗 使 者 潘 阜 は 九 州 の 大 宰 府 あてに 書 信 を 送 り 高 麗 と 日 本 の 関 係 が 古 くから 敦 睦 した ことをあげて その 長 年 の 友 好 関 係 のために 以 前 蒙 古 使 臣 ( 黒 的 )の 渡 日 を 阻 んだことに 対 して 貴 国 に 向 けた 我 国 の 意 の 反 映 であると 強 調 した 引 き 継 き その 皇 帝 国 書 の 意 味 は 帰 国 と 通 好 すること 以 外 に 決 して 他 のことはない と 言 って 蒙 古 国 書 と 高 麗 国 王 書 を 直 接 日 本 国 王 に 伝 えることを 希 望 してい た 彼 が 持 ち 込 んだ 高 麗 国 王 書 では 蒙 古 皇 帝 の 日 本 通 好 要 求 は 貢 献 の 利 益 のためではなく た だ 無 外 の 名 前 を 天 下 に 高 めるためだだけである と 言 いながら 一 介 の 使 臣 を 派 遣 して 行 って 見 るよ うにすること を 勧 めている 24) 高 麗 国 王 の 国 書 と 高 麗 使 臣 の 書 状 は 高 麗 と 日 本 両 国 の 友 好 関 係 とそれに 即 した 日 本 への 思 いや りを 強 調 して 蒙 古 国 書 に 対 して 予 想 される 日 本 の 疑 惑 と 反 発 を 撫 でさして 蒙 古 の 朝 貢 要 求 に 応 じるよ うに 日 本 を 説 得 することに 力 を 入 れていた このような 高 麗 の 姿 勢 は 前 述 した 日 本 認 識 すなわち 驕 慢 と 名 分 が 分 からない あるいは 風 俗 が 頑 疾 で 思 廬 深 くない という 日 本 = 小 夷 島 夷 観 と 矛 盾 21) 高 麗 史 券 102 列 傳 15 李 藏 用. 22) 高 麗 史 券 27 元 宗 世 家 元 宗 12 年 (1271) 3 月 條. 23) 高 麗 史 券 28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4 年 (1278) 7 月 甲 申 條. 24) 至 元 五 年 (1268) 正 月 日 高 麗 國 牒 狀 案 鎌 倉 遺 文 13 卷 9845 號 年 金 有 成 が 日 本 にもたらした 高 麗 國 書 にも 貴 國 は 遠 くの 海 外 にある ただ 使 者 を 送 り 入 朝 だけすれば けっしていかなる 後 患 も 無 いは ずであるので よく 考 えてくれることを 望 む といって 基 本 的 に 同 じ 趣 旨 を 表 している( 高 麗 史 券 30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18 年 (1292) 10 月 庚 寅 條 ).
233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31 するように 見 える しかし むしろそういう 認 識 が 根 底 にあったからこそ 用 語 使 用 に 格 別 な 注 意 をしな がら 日 本 との 外 交 交 渉 に 心 血 を 傾 けて 臨 んでいると 解 釈 しなければならないであろう 初 めには 蒙 古 使 臣 の 渡 日 と 蒙 古 国 書 の 送 付 をどうしても 妨 げようと 思 っていたが クビライの 命 によって 日 本 招 誘 の 使 命 を 担 うようになった 高 麗 は 戦 争 の 事 態 を 未 然 に 防 止 するために 日 本 に 対 する 外 交 的 説 得 ないし 懐 柔 へ 切 り 替 えたのである 蒙 古 国 書 は 朝 貢 か それとも 戦 争 かという 両 者 択 一 を 日 本 に 強 要 しており 高 麗 が 日 本 に 対 して 上 でみたように 蒙 古 の 意 図 を 説 明 したことは 蒙 古 国 書 に 対 する 強 い 反 発 を 憂 慮 したからである 高 麗 朝 廷 は 基 本 的 に 島 夷 日 本 が 柔 軟 な 国 際 的 な 現 実 感 覚 が 欠 けていると 考 えており その 認 識 を 土 台 にした 高 麗 なりの 外 交 的 努 力 は 結 局 成 果 をあげ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潘 阜 一 行 は 大 宰 府 の 冷 淡 な 待 遇 を 受 けたのちにそのまま 帰 国 し 25) 日 本 側 は 後 述 するように 蒙 古 国 書 が 礼 を 欠 けた と 言 って 返 牒 さえ 送 らなかったのである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いう 事 態 を 願 わなかった 高 麗 朝 廷 の 立 場 は 高 麗 が 兵 站 基 地 として 引 き 受 ける 重 い 負 担 が 予 想 されたことによる ところが 一 応 日 本 遠 征 が 不 可 避 ことになると 高 麗 としてはでき る 限 り 負 担 を 少 なくしようとしたり あるいはその 負 担 の 代 価 として 遠 征 軍 の 中 での 自 国 の 地 位 向 上 に 力 をつくそうとした 第 1 次 日 本 侵 略 翌 年 の1275 年 2 次 遠 征 に 応 じることができない 高 麗 の 困 窮 した 状 態 を 訴 えた 忠 烈 王 が1278 年 突 然 日 本 遠 征 を 自 ら 要 望 して 26) 1280 年 には 軍 糧 兵 力 水 手 など 軍 備 負 担 の 限 界 を 力 説 する 一 方 高 麗 の 将 軍 金 方 慶 が 元 師 府 に 参 加 して 公 事 を 主 観 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 要 請 したこと 27) は その 端 的 な 例 である 第 1 次 遠 征 当 時 消 極 的 に 回 避 しようとしていた 高 麗 が 第 2 次 遠 征 では 元 の 日 本 遠 征 意 志 を 手 伝 って 日 本 を 元 に 服 従 させて 自 国 の 消 耗 を 減 らそうとしたという 主 張 があるが 28) そ の 背 後 には 蒙 古 の 第 2 次 遠 征 が 必 然 視 され 高 麗 の 負 担 も 避 け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 状 況 があった 29) なおかつこのような 高 麗 の 態 度 変 化 について 高 麗 で 深 刻 な 倭 寇 問 題 を 元 の 力 を 借 りて 解 決 しよう としたという 解 釈 がまだ 続 いているが 30) これには 賛 成 できない 倭 寇 の 被 害 がいっそう 深 刻 になる13 25) 高 麗 史 券 26 元 宗 世 家 元 宗 9 年 (1268) 7 月 丁 卯 條. 26) 高 麗 史 卷 28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4 年 (1278) 7 月 甲 申 條. 27) 高 麗 史 卷 29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6 年 (1280) 11 月 己 酉 條. 28) 中 村 榮 孝 文 永 弘 安 兩 役 間 の 國 際 政 局 - 日 本 モンゴル 間 の 高 麗 - 日 鮮 關 係 史 の 硏 究 上 東 京 吉 川 弘 文 館 1965 p.72 以 下 川 添 昭 二 中 世 における 日 本 と 東 アジア ( 上 ) 福 岡 大 學 總 合 硏 究 所 報 p ) 1278 年 に 忠 烈 王 が 上 奏 文 を 送 った 背 景 には この 前 に 命 令 を 受 けた 矢 の 製 作 が1277 年 1 月 に 終 わった 状 況 で 2 次 日 本 遠 征 を 避 けられないという 王 の 判 斷 とともに 当 時 高 麗 の 南 方 の 半 分 を 元 に 歸 屬 させようと した 洪 茶 丘 の 策 動 を 牽 制 しようという 意 圖 があった( 池 內 宏 元 寇 の 新 硏 究 pp.200~201 參 照 ).
234 23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20 年 代 以 後 ひいては 本 格 的 な 倭 寇 に 展 開 される1350 年 代 以 後 高 麗 が 蒙 古 の 日 本 遠 征 を 望 んで いた 形 跡 は 全 くないし 高 麗 はあくまでも 和 親 的 な 立 場 を 取 って 外 交 折 衷 による 倭 寇 問 題 の 解 決 をはかっ ていたからである 客 観 的 に 見 て 日 本 遠 征 の 最 大 の 被 害 者 は 高 麗 だったし その 被 害 は13 世 紀 当 時 の 倭 寇 とは 比 較 されることができないほどの 甚 だしいことだったという 事 実 を 認 識 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であろう 一 方 高 麗 朝 廷 の 立 場 が 本 来 蒙 古 と 日 本 との 戦 争 を 回 避 することにあったらば それとは 反 対 に 高 麗 国 内 では 日 本 と 連 帯 して 蒙 古 への 抗 戦 を 図 る 動 きがあった すなわち 高 麗 武 臣 政 権 の 中 枢 として 対 蒙 古 抗 戦 の 中 心 であった 三 別 抄 である 近 年 日 本 で 発 見 された 高 麗 牒 状 不 審 條 條 という 古 文 書 によって 知 られているように 三 別 抄 は1271 年 5 月 珍 島 陷 落 直 前 日 本 に 対 して 軍 師 援 助 と 連 帯 闘 い を 訴 えるために 通 牒 した 31) 通 牒 を 送 るに 際 して 日 本 へ 漂 流 民 を 護 送 したり 礼 物 を 送 ったりなど 友 好 的 儀 礼 的 な 措 置 を 取 っていたことも 共 通 の 敵 に 対 する 同 盟 関 係 結 成 の 一 布 石 だった 朝 廷 が 古 から の 友 好 関 係 をたてまえにして 蒙 古 に 入 朝 するように 外 交 的 な 説 得 に 力 を 入 れたらば 珍 島 の 三 別 抄 政 府 は 等 しく 日 本 との 友 好 を 表 示 しながら 対 蒙 古 抗 戦 のための 軍 師 同 盟 を 模 索 するはずであった 三 別 抄 は 朝 廷 と 等 しい 高 麗 の 正 統 王 朝 として 自 任 しており また1260 年 代 に 倭 寇 と 敵 対 した 経 験 が あって 倭 寇 の 被 害 が 多 かった 南 海 地 域 の 民 間 の 支 持 を 得 ていた 点 からみると 日 本 を 夷 狄 あるい は 寇 賊 として 見 なす 観 念 から 脱 皮 したとは 考 えられない たぶん 三 別 抄 は 対 蒙 古 連 帯 闘 争 を 展 開 するに 至 っては 有 用 な 蛮 夷 として 荒 くて 倭 寇 として 海 戦 に 上 手 な 国 家 として 日 本 を 期 待 したのではない かと 思 われる しかし 日 本 では 高 麗 政 府 と 三 別 抄 をまともに 区 別 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まま 高 麗 と 蒙 古 を 同 じ 敵 として 見 做 す 雰 囲 気 が 支 配 的 であった 32) 三 別 抄 の 通 牒 に 対 する 日 本 の 対 応 は 確 認 されていないが おそらく 政 府 当 局 者 はこれを 無 視 したはずだ これは また 一 つの 健 全 な 両 国 関 係 の 発 展 の 可 能 性 が 喪 失 されたことを 意 味 する 蒙 古 の 日 本 侵 略 以 前 に 外 交 的 解 決 をはかった 朝 廷 の 試 みであれ 反 対 の 軍 師 的 同 盟 を 模 索 した 三 別 抄 の 試 みであれ 日 本 の 対 応 によっては 高 麗 と 日 本 の 間 に 新 しい 関 係 が 形 成 され 今 後 の 東 アジアの 中 で 両 国 関 係 が 相 当 に 進 展 されたはずであるということは 想 像 し 難 くない しかし 日 本 は 高 麗 朝 廷 の 説 得 に 臨 むほど 柔 軟 な 国 際 的 な 感 覚 を 持 たず また 三 別 抄 とともに 連 帯 闘 争 を 展 開 するほど 高 麗 の 国 内 事 情 を 把 握 していなかったし 積 極 的 な 防 御 戦 略 を 立 てる 能 力 も 欠 けていた 30) 川 添 昭 二 中 世 における 日 本 と 東 アジア ( 上 ) p ) 石 井 正 敏 文 永 八 年 來 日 の 高 麗 使 についてー 三 別 抄 の 日 本 通 交 史 料 の 紹 介 ー 東 京 大 學 史 料 編 纂 所 報 村 井 章 介 高 麗 三 別 抄 の 叛 亂 と 蒙 古 襲 來 前 夜 の 日 本 pp.164~ ) 文 永 8 年 (1271) 9 月 15 日 祈 願 文, 鎌 倉 遺 文 第 14 卷 號.
235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33 3) 日 本 の 対 応 日 本 は 蒙 古 が 二 度 にわたる 侵 略 を 前 後 して 方 法 を 変 えながら 粘 り 強 く 試 みていた 外 交 交 渉 をすべ て 無 視 し 戦 争 の 事 態 を 避 けるための 高 麗 の 勧 誘 と 説 得 にも 一 体 の 外 交 的 対 応 をしていなかった 蒙 古 への 連 帯 闘 争 を 訴 える 三 別 抄 の 通 牒 に 対 しても 默 默 不 答 であった 日 本 は 外 交 上 無 対 応 に 一 貫 したわけである その 背 後 にはどんな 国 内 事 情 があったのだろうか 日 本 国 内 では 蒙 古 という 強 大 な 勢 力 と 大 陸 での 侵 略 戦 争 に 対 して 少 なくとも 蒙 古 国 書 が 到 来 した 当 時 には 大 体 認 知 していた それは 蒙 古 国 書 が 渡 来 すると 公 家 武 家 がみせてくれた 戸 惑 いと 危 機 感 を 通 じて 伺 うことができる この 事 は 国 家 の 珍 事 であり また 同 時 に 大 事 なことである 万 人 が 驚 歎 するしかない 33) とか これ( 牒 狀 )を 見 て 公 家 と 武 家 が 大 きく 驚 いて 返 牒 を 送 るかどうか 牒 使 を 斬 首 するかしないか 諸 道 の 意 見 書 と 公 卿 の 僉 議 がまちまちであった 34) という 言 葉 に 端 的 に 現 われてい る 民 間 でも 当 時 天 下 無 双 の 驚 きべきことは ただこの 事 だけだ 35) と 衝 撃 的 な 事 として 受 け 入 れ ていた 10 世 紀 以 後 長 年 にわたり 周 辺 国 家 と 国 交 を 結 ばず 国 際 的 な 緊 張 状 態 に 置 かれたことが ほとんどなかった 日 本 としては 外 交 的 でも 軍 師 的 でも 国 家 存 亡 の 危 機 に 対 処 しなければならない 新 し い 状 況 に 直 面 したのである 鎌 倉 幕 府 は 九 州 の 大 宰 府 から 送 った 蒙 古 国 書 を 高 麗 国 書 とともに 京 都 の 朝 廷 の 後 嵯 峨 上 皇 にさし あげるとともに 同 時 に 1268 年 2 月 蒙 古 に 対 する 警 戒 令 を 西 国 地 方 の 御 家 人 らに 下 している 36) ここに 原 則 上 朝 廷 が 外 交 権 を 掌 握 し 対 外 的 に 国 王 [ 天 皇 ]として 日 本 を 代 表 していたこと そして 幕 府 が 日 本 国 の 守 護 を 本 来 的 な 職 務 の 軍 師 権 門 37)として 警 戒 態 勢 を 取 り 揃 えていたことを 伺 うことができる 幕 府 は 警 戒 令 で 蒙 古 人 が 凶 心 を 抱 いて 本 朝 の 様 子 を 伺 おうと 牒 使 を 送 ったのである 38) と 言 っている これに 対 して 幕 府 が 始 めから 蒙 古 国 書 の 到 来 を 侵 略 の 前 兆 として 受 け 入 れたという 見 解 39)もある が このような 場 合 においては 当 然 はかるべき 警 戒 態 勢 として 見 なした 方 が 適 当 であろう 一 方 蒙 古 国 書 に 初 めて 接 した 公 家 貴 族 らは 後 嵯 峨 上 皇 が 駐 在 する 院 評 定 で 返 牒 の 有 無 をめぐ 33) 深 心 院 關 白 記 文 永 5 年 (1268) 2 月 8 日 條 ( 大 日 本 古 記 錄 深 心 院 關 白 記 岩 波 書 店 1996). 34) 八 幡 遇 童 訓 伏 敵 編 卷 1 p ) 至 元 5 年 (1268) 正 月 日 高 麗 國 牒 狀 案, 鎌 倉 遺 文 第 13 卷 9845 號. 36) 龍 肅 蒙 古 襲 來 至 文 堂 1959 pp ) 黑 田 俊 雄 中 世 の 國 家 と 天 皇 岩 波 講 座 日 本 歷 史 6 中 世 ( 同, 日 本 中 世 の 國 家 と 宗 敎 岩 波 書 店 1975 收 錄 ). 38) 文 永 5 年 (1268) 2 月 27 日 關 東 御 敎 書 追 加 法 436( 佐 藤 進 一 池 內 義 資 編 中 世 法 制 史 料 集 第 1 卷 岩 波 書 店 1955 p.227). 39) 川 添 昭 二 蒙 古 襲 來 硏 究 史 論 雄 山 閣 出 版 1977 p.27.
236 23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る 議 論 を 繰 り 返 えしたあげくに 蒙 古 国 書 が 礼 を 欠 ており 回 答 しない 40) と 決 めた ところで このよう な 朝 廷 の 方 針 は 1269 年 9 月 第 4 回 の 使 臣 が 来 たことをきっかけに 変 わる 朝 廷 は 今 度 は 返 牒 を 送 る 事 にしたが その 趣 旨 は 従 来 の 中 国 との 通 好 が 中 絶 されていたので 蒙 古 の 通 好 要 求 に 応 じにくいとい うこととともに 蒙 古 の 軍 師 的 脅 威 に 対 して その 不 義 を 訴 えるということだった 41) 菅 原 長 成 が 基 礎 し た 文 永 7 年 (1270) 正 月 日 付 けの 贈 蒙 古 国 中 書 省 牒 は 日 本 国 太 政 官 から 蒙 古 の 中 書 省 あてに 送 る 形 式 で 帰 国 とはかつて 人 物 の 交 通 がなかったので 本 朝 にどうして 好 悪 があるのか 由 緒 を 振 ふり 返 かえず 凶 器 を 使 おうとするに 和 風 がまた 吹 いても 疑 氷 が 相 変 らずあつい どうして 帝 徳 仁 義 の 境 地 を 称 しながら 民 庶 殺 傷 の 根 源 を 開 こうとするのか 42) という 道 義 的 批 判 の 色 彩 を 帯 びたこともそのた めであった 朝 廷 はこのような 返 牒 を 作 成 して 幕 府 に 送 ったが 幕 府 はこれを 抑 留 して 送 らなかった ここで 朝 廷 はどうして 返 牒 を 送 ろうとし 幕 府 はどうしてそれを 抑 留 したのかが 検 討 対 象 になる 朝 廷 の 返 牒 は 実 はどうしても 蒙 古 との 戦 争 を 回 避 しようとする 公 家 側 の 意 図 の 発 露 であった 年 9 月 第 5 回 の 使 者 趙 良 弼 が 日 本 に 来 て 回 答 を 要 求 しながら 来 る11 月 を 期 限 に 相 変 らず 回 答 が なければ 兵 船 を 送 る という 最 後 通 牒 を 発 した 際 朝 廷 側 は 事 態 が 大 変 急 になった ことが 終 局 に 向 かっているので 歎 息 するに 値 する と 荒 てて 幕 府 が 抑 留 したこの 前 の 返 牒 の 下 書 きを 若 干 修 正 して 急 いで 送 ろうとしていた 43) 1269 年 末 朝 廷 が 返 牒 を 送 る 事 にしたことも 同 年 2 月 対 馬 島 に 到 着 した 第 3 回 の 使 者 たちと 島 民 との 衝 突 44) その 際 に 捕 えて 連 れて 行 った 島 民 2 人 を 送 還 しながら 回 答 を 要 求 す るなど 蒙 古 の 重 ねた 尋 問 45) によって 対 外 的 な 危 機 意 識 が 高 くなったからであった 46) 朝 廷 は 蒙 古 の 通 互 要 求 は 婉 曲 に 断 りながらも 戦 争 事 態 を 事 前 に 阻 むため 外 交 的 手 段 を 講 じたのであった 40) 深 心 院 關 白 記 文 永 5 年 (1268) 2 月 8 日 10 日 14 日 17 日 19 日 25 日 26 日 條 및 鎭 西 要 略 文 永 5 年 條 伏 敵 編 卷 1 p ) 蒙 古 來 使 記 錄 鎌 倉 遺 文 第 14 卷 號. 42) 贈 蒙 古 國 中 書 省 牒 本 朝 文 集 67 伏 敵 編 卷 1 p ) 吉 續 記 文 永 8 年 (1271) 10 月 24 日 條. 44) 五 代 帝 王 物 語 龜 山, 新 校 群 書 類 從 第 2 卷. 45) 師 守 記 貞 治 6 年 (1367) 5 月 9 日 條 史 料 纂 集 師 守 記 第 9. 46) 最 近 張 東 翼 は 異 國 出 契 (1680 年 前 後 成 立 )に 収 録 されている 大 蒙 古 國 中 書 省 牒 と 高 麗 國 慶 尙 晋 安 東 道 按 察 使 牒 を 学 会 にはじめて 紹 介 した( 一 二 六 九 年 大 蒙 古 国 中 書 省 の 牒 と 日 本 側 の 対 応, 史 学 雑 誌 ). 前 者 は 蒙 古 國 中 書 省 が 日 本 國 王 あてに 送 った 至 元 6 年 (1269)6 月 の 牒 狀 であり 後 者 は 高 麗 慶 尙 道 按 察 使 が 大 宰 府 守 護 所 あてに 送 った 至 元 6 年 8 月 の 牒 狀 で ともに1269 年 9 月 日 本 へ 到 着 したことが 明 らかになっている それによると 蒙 古 の 中 書 省 は 對 馬 島 民 2 人 を 送 還 しながら 翌 年 春 まで に 期 間 を 限 定 して 日 本 の 臣 屬 を 要 求 し これに 応 じなかったらば 武 力 行 使 を 行 うという 意 志 を 明 確 にして いた( 同 pp.66-69). 張 東 翼 の 指 摘 とおり この 牒 狀 は 最 初 の 蒙 古 國 書 に 比 べてより 具 体 的 であり なお 脅 迫 性 も 強 いものである 中 書 省 の 牒 狀 は 趙 良 弼 の 最 後 通 牒 とともに 朝 廷 の 返 牒 が 危 機 意 識 の 産 物 とし て 戦 争 を 回 避 しようとする 意 圖 が 含 まれていることを 伺 わせる
237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35 朝 廷 はこれと 同 時 に 高 麗 に 対 しても 大 宰 府 守 護 所 牒 を 送 ろうとしたが そこではこの 前 の 使 臣 と 対 馬 島 民 との 衝 突 事 件 に 対 して むしろ 丁 寧 に 謝 って 使 行 の 難 しさに 同 情 を 示 して 食 糧 を 提 供 しよう とするなど 非 常 に 宥 和 的 である 態 度 をとっていた 47) 日 本 国 内 でこの 返 牒 を 和 親 するという 意 味 で 受 け 入 れたこと 48) は 単 純 な 誤 伝 ではなく この 返 牒 が 外 交 的 平 和 的 な 問 題 解 決 を 志 向 したことに 起 因 する 要 するに 朝 廷 側 は 蒙 古 高 麗 との 外 交 交 渉 を 通 じて 戦 争 を 回 避 しようとしたことであり 返 牒 に 対 する 蒙 古 側 の 反 応 を 察 しようとしたことに 見 える そうすると 幕 府 はどうして 朝 廷 がおくろうとした 返 牒 を 抑 留 したのであろうか 朝 廷 の 返 牒 方 針 に 対 する 幕 府 の 措 置 に 対 しては その 事 情 を 説 明 しないまま 結 局 のところ ( 蒙 古 ) 牒 状 の 体 が 無 礼 である ので 返 牒 する 必 要 がない と 言 って 使 者 をそのまま 返 したと 伝 わる 49) ここで 注 目 すべきことは 幕 府 が 牒 状 の 体 を 問 題 視 している 点 である これを 伝 統 的 な 国 際 意 識 や 慣 習 による 態 度 50)として 見 ることは そのような 意 識 の 張 本 である 朝 廷 が 返 牒 を 選 んだことを 考 慮 すれば 説 得 力 がない また 軍 師 警 察 を 担 当 する 政 権 としての 武 断 的 劃 一 的 な 態 度 51)の 反 映 であると 見 ることは 幕 府 の 状 況 認 識 を 度 外 視 する 武 人 体 質 論 的 な 評 価 に 近 い その 他 に 当 時 南 宋 側 からの 情 報 や 民 族 主 義 的 で ある 中 国 の 禅 僧 らの 宗 教 思 想 の 影 響 を 指 摘 する 見 解 52)もあるが 朝 廷 側 もそういう 情 報 と 思 想 を 接 した 痕 跡 がある 53) したがってこの 問 題 は 日 本 の 政 治 体 制 すなわち 朝 廷 と 幕 府 の 関 係 及 び 幕 府 権 力 の 性 格 を 通 して 接 近 する 必 要 があると 考 えられる 蒙 古 国 書 はあくまでも 日 本 国 王 である 天 皇 へ 送 られたものであり 幕 府 がそれを 朝 廷 に 上 奏 し て 重 大 な 国 際 事 件 に 対 する 対 応 を(たとえ 形 式 的 だと 言 っても) 幕 府 に 任 せたことは 朝 廷 ( 天 皇 )の 存 在 意 義 が 対 外 的 な 危 機 の 中 でも 確 認 されていたことを 意 味 する 朝 廷 の 返 牒 は 国 家 統 治 権 者 としての 当 たり 前 の 権 限 の 発 動 であり 国 家 の 重 大 事 を 自 ら 担 当 しようとする 意 識 の 反 映 であったと 言 えよう 結 果 的 には 幕 府 によって 抑 留 されたが 朝 廷 が 幕 府 の 意 思 とは 別 に いやそれに 反 してまで 返 牒 を 送 ろうとしたことは 対 外 問 題 をきっかけに 朝 廷 の 為 政 者 意 識 が 高 まったことを 示 すものであった 54) 47) 贈 高 麗 國 牒 本 朝 文 集 67 伏 敵 編 卷 1 pp ) 朝 廷 の 返 牒 について 今 回 は 返 牒 を 送 り また 和 親 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 ( 文 永 7 年 [1270]5 月 26 日 東 嚴 慧 安 敬 白 文 鎌 倉 遺 文 第 14 卷 號 )という 巷 說 が 流 布 されたことも 基 本 的 には 返 牒 が 外 交 的 平 和 的 な 指 向 性 を 持 っていたことに 一 原 因 があるだろう 49) 五 代 帝 王 物 語 龜 山. 50) 田 中 建 夫 東 アジア 通 交 關 係 の 形 成 岩 波 講 座 世 界 歷 史 9 岩 波 書 店 1970 p ) 村 井 章 介 高 麗 三 別 抄 の 叛 亂 と 蒙 古 襲 來 前 夜 の 日 本 p ) 川 添 昭 二 中 世 九 州 の 政 治 と 文 化 文 獻 出 版 1981 pp ) 京 都 の 正 傳 禪 寺 住 持 である 東 嚴 慧 安 は 蒙 古 國 は 性 情 が 驕 慢 であります ( 中 略 ) 謹 んで 敵 國 の 元 来 の 意 圖 を 考 えてみるに 日 本 の 軍 兵 を 退 き 諸 国 の 国 土 を 國 土 を 降 伏 させようとすることであります という 意 見 書 を 朝 廷 關 係 者 にみえる 人 物 へ 提 出 していた( 東 嚴 慧 安 意 見 狀 鎌 倉 遺 文 第 14 卷 號 ).
238 23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対 外 的 な 危 機 下 での 朝 廷 のこのような 動 きは その 方 針 がいずれにせよ 外 交 面 で 幕 府 の 主 導 権 が 制 約 されることになった なおかつ もし 返 牒 をきっかけに 蒙 古 の 使 臣 と 牒 狀 が 渡 来 して 朝 廷 と 蒙 古 の 接 触 が 活 発 になるようになると 幕 府 が 孤 立 化 される 恐 れもああった そのため 幕 府 は 朝 廷 の 外 交 権 の 発 動 を 抑 制 し 牒 状 が 無 礼 なので 返 牒 する 必 要 がない という 大 義 名 分 に 即 した 強 硬 な 政 策 を 選 んだのではないかと 思 う この 名 分 論 的 な 強 硬 策 は 朝 廷 の 返 牒 すなわち 外 交 権 の 発 動 を 抑 制 す るための 正 当 性 を 提 供 し 軍 師 権 門 である 幕 府 が 武 力 による 国 家 守 護 を 表 面 的 に 立 てて 外 交 上 の 主 導 権 を 確 保 することに 有 效 だったのであろう 蒙 古 に 対 する 軍 師 的 対 応 を 要 求 する 立 場 の 論 理 的 な 帰 結 が 我 が 国 の 大 小 のことは 皆 武 家 に 賦 課 してください 武 家 は 朝 家 の 第 一 の 重 宝 です 55) という 言 說 のように これはつまり 幕 府 による 国 政 の 主 導 であった 一 方 当 時 幕 府 権 力 の 最 高 実 力 者 が 北 條 氏 の 家 督 である 北 條 時 宗 であったという 事 実 もこの 強 硬 策 の 背 景 の 一 つとして 注 目 される もう 時 宗 の 生 父 である 北 條 時 頼 の 時 代 から 幕 府 の 実 質 的 な 最 高 権 力 は 執 権 という 公 職 にあったのではなく 北 條 氏 の 本 家 の 長 である 得 宗 へ 移 されていた 56) しかし 北 條 氏 は 本 来 幕 府 の 御 家 人 と 同 列 の 身 分 あり 得 宗 は 将 軍 が 持 っていた 御 家 人 支 配 の 正 統 性 が 欠 けていた 57) したがって 外 国 からの 脅 威 から 軍 師 的 な 対 決 を 避 けようとしたら 支 配 の 正 統 性 が 欠 けている 自 分 の 権 力 に 対 する 対 抗 勢 力 の 批 判 に 直 面 するようになることを 憂 慮 したはずである ここで 幕 府 の 得 宗 権 力 は 大 義 名 分 に 即 した 強 固 な 態 度 を 取 らざるを 得 なかったと 思 われる 幕 府 が 日 本 と 蒙 古 との 交 渉 自 体 を 拒 否 し 牒 状 の 無 礼 を 名 目 にして 蒙 古 に 対 する 戦 争 不 辞 という 強 硬 策 を 選 んだのは 以 上 のような 日 本 国 内 の 政 治 的 な 背 景 があったのである 第 1 次 侵 略 以 後 年 9 月 同 年 4 月 に 到 着 した 蒙 古 の 使 臣 を 幕 府 が 斬 首 したことも 同 じこととして 理 解 することができる 幕 府 の 使 臣 斬 首 は 永 遠 に 和 親 しないで 通 問 しない 58) あるいは 日 本 を 狙 うことを 阻 んで 侵 略 ができないようにする 59) という 名 分 からであった この 措 置 は 幕 府 の 得 宗 権 力 が 蒙 古 に 対 する 断 固 54) 朝 廷 に 対 する 幕 府 の 力 の 優 位 を 決 定 させた1221 年 承 久 の 亂 以 後 特 に1246 年 宮 騷 動 をきっかけにして 朝 廷 は 幕 府 の 強 い 干 渉 のもとにおかれるようになり その 結 果 誕 生 したことが 後 嵯 峨 上 皇 が 主 宰 する 院 評 定 制 であった その 後 後 嵯 峨 院 政 下 の 朝 廷 は 內 外 の 重 大 事 に 関 して 幕 府 の 意 向 にしたがったと 指 摘 さ れている( 上 横 手 雅 敬, 鎌 倉 幕 府 と 公 家 政 権 岩 波 講 座 日 本 歴 史 5 中 世 1 岩 波 書 店 1975 pp なお 網 野 善 彦, 蒙 古 襲 来 小 学 館 1974 pp.48-51). しかし 蒙 古 國 書 の 到 來 という 元 来 な かった 新 しい 沙 汰 に 直 面 して 朝 廷 がそれなりに 主 體 的 な 動 きを 見 せたのは 注 目 される 55) 東 嚴 慧 安 意 見 狀 鎌 倉 遺 文 第 14 卷 號. 56) 村 井 章 介 執 權 政 治 の 變 質 日 本 史 硏 究 p ) 幕 府 體 制 の 頂 点 である 將 軍 になるためには 身 分 的 な 尊 貴 性 を 整 え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が 北 條 氏 は 小 國 伊 豆 の 在 廳 官 人 の 出 身 で 低 い 身 分 であった( 同 上 pp.27-28). 58) 關 東 評 定 傳 建 治 1 年 (1275) 群 書 類 從 第 4 輯 補 任 部. 59) 鎌 倉 年 代 記 裏 書 建 治 1 年 (1275) 增 補 續 史 料 大 成 51.
239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37 たる 態 度 を 国 内 外 に 見 せ 付 けたことである 60) と 同 時 に 蒙 古 との 外 交 交 渉 の 自 体 が 必 要 ではないとい う 幕 府 の 意 思 表 明 でもあった 朝 廷 がこの 時 の 牒 狀 の 上 奏 を 受 け 取 ったことはそれから 一 月 も 過 ぎた 後 のことであった 61) 1279 年 6 月 滅 亡 した 南 宋 の 昔 の 臣 下 出 身 の 牒 使 が 到 着 した 時 にも 幕 府 は 形 式 上 の 牒 狀 を 朝 廷 に 常 在 したものの 朝 廷 の 評 定 を 待 たずにやっはり 幕 府 独 断 で 処 刑 した 62) 朝 廷 の 外 交 権 は この 段 階 で 事 実 上 認 められず 初 めから 外 交 的 な 対 応 の 機 会 さえ 与 えられなかった のである 朝 廷 は 幕 府 の 独 断 的 な 措 置 に 対 して 無 力 であって その 後 反 牒 不 可 という 先 例 によって 幕 府 の 政 策 に 順 応 するしか 他 の 方 途 はなかった 63) 2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高 麗 日 本 1) 高 麗 の 軍 師 戦 略 的 な 位 置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は 日 本 から 一 番 近 くに 接 した 国 家 であると 同 時 に 蒙 古 に 服 属 した 高 麗 の 軍 師 基 地 化 をもたらした 高 麗 は 蒙 古 の 日 本 遠 征 のための 戦 艦 軍 糧 兵 力 などを 普 及 しなければならない 兵 站 基 地 として 転 落 するしかなかった 高 麗 が 憂 慮 した 事 態 が 現 実 になっておびただしい 負 担 をもたらし たことは 高 麗 の 諸 史 料 から 確 認 される 1271 年 1 月 蒙 古 は 日 本 へ 使 者 趙 良 弼 を 派 遣 する 段 階 から 蒙 古 の 軍 隊 を 金 州 ( 金 海 )に 駐 屯 させな がら 必 要 な 食 糧 を 供 給 し 戦 艦 を 金 州 に 集 結 させることを 命 じていた 64) また 同 年 3 月 には 屯 田 経 略 司 を 鳳 州 ( 黄 海 道 鳳 山 )に 設 置 して 軍 隊 を 駐 屯 させており 農 牛 3,000 頭 屯 田 に 必 要 な 農 具 種 子 秣 粮 及 び 秋 までの 軍 糧 を 普 及 することを 要 求 した 65) 屯 田 軍 の 設 置 に 引 き 続 き1272 年 2 月 には 戦 艦 兵 糧 都 監 が 設 置 され 66) 高 麗 は 本 格 的 な 普 及 基 地 体 制 下 に 置 かれるようになる 1273 年 4 月 耽 羅 の 三 別 60) 江 戶 時 代 の 大 日 本 史 贊 藪 では 時 宗 はこの 時 の 元 の 使 者 を 斬 首 して 日 本 の 威 武 を 宣 揚 し 外 國 へ 恐 ろしさを 与 えたことは 良 いことであったと 評 価 している( 同 卷 4 日 本 國 粹 全 書 刊 行 會 1916 p.293). 61) 師 守 記 貞 治 1 年 (1362) 5 月 9 日 條, 增 補 續 史 料 大 成 ) 北 條 九 代 記 下 弘 安 2 年 (1279) 條 續 群 書 類 從 第 29 輯 上. 勘 仲 記 弘 安 2 年 7 月 29 日 條 增 補 史 料 大 成 34. 相 田 二 郞 蒙 古 襲 來 の 硏 究 增 補 版 pp ) 1292 年 7 月 高 麗 の 使 者 金 有 成 がもたらした 高 麗 國 書 について 朝 廷 の 後 深 草 上 皇 は 実 は 高 麗 國 王 の 文 體 が 無 礼 で 奇 怪 する という 反 応 みせ その 対 策 として 以 前 に 決 定 した 趣 旨 と 違 いない という 前 例 を 重 視 する 段 階 にとどまっていた( 正 應 5 年 (1292) 12 月 10 日 後 深 草 上 皇 書 狀 鎌 倉 遺 文 第 23 卷 號 ). 64) 高 麗 史 卷 27 元 宗 世 家 元 宗 12 年 (1271) 1 月 己 卯 條. 65) 同 3 月 丙 寅 條.
240 23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抄 が 滅 亡 した 翌 年 高 麗 は 1274 年 1 月 から5 月 まで 諸 道 で 造 船 人 員 30,500 人 を 徴 発 して 大 船 300 隻 を 含 んだ 総 900 隻 を 急 速 に 建 造 完 工 した 67) 第 1 次 遠 征 に 動 員 された 高 麗 軍 は 約 6,000 人 船 頭 水 夫 な どは6,700 人 高 麗 がその 間 負 担 していた 軍 糧 米 は 糧 穀 が 乏 絶 68) になるほどであった この 戦 争 における 高 麗 の 負 担 は 1275 年 1 月 もしまた 日 本 征 伐 を 起 こしたら そこに 所 用 される 戦 艦 と 軍 糧 を 供 給 する 能 力 を 小 邦 は 持 っておりません 結 局 国 が 破 滅 されて 消 えるようになるでしょう 69) とクビライ に 訴 えた 忠 烈 王 の 言 說 でも 端 的 に 現 われている 第 2 次 日 本 遠 征 による 普 及 基 地 として 高 麗 の 負 担 は1 次 よりもっと 重 かったのである 高 麗 は 戦 艦 9 00 隻 軍 師 10,000 人 船 頭 水 夫 17,000 人 軍 糧 最 小 10 万 石 以 上 70)を 供 給 した ここに 馬 の 飼 料 武 器 各 種 兵 站 品 まで 調 逹 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高 麗 は 二 度 にわたる 遠 征 による 戦 艦 の 建 造 で 河 川 と 海 辺 の 材 木 さえもほとんど 伐 採 し もうこれ 以 上 戦 艦 の 建 造 が 不 可 能 な 状 態 であった 71) 十 八 年 辛 巳 年 (1281) 官 軍 が 日 本 を 征 伐 する 時 すべての 戦 艦 食 糧 を 含 め 軍 卒 と 船 頭 水 夫 その 他 一 体 の 物 資 に 至 るまであらゆる 力 をつくして 供 給 した 72) という 忠 烈 王 の 話 は 政 治 的 な 言 辞 であることを 考 慮 しても 高 麗 が 担 っていた 負 担 の 重 さを 充 分 に 理 解 できる その 後 もクビライの 第 3 次 日 本 遠 征 の 祈 祷 があるたびに 高 麗 は 戦 艦 の 修 理 建 造 軍 糧 の 準 備 兵 器 の 製 作 軍 士 と 水 夫 の 徴 発 などに 対 する 要 求 を 受 けたのは 勿 論 のことである 73) 蒙 古 は 高 麗 以 外 に 中 国 江 南 と 東 京 ( 遼 陽 )にも 普 及 基 地 としての 役 目 を 命 じたが 1285 年 11 月 江 南 の 江 淮 米 100 万 石 を 高 麗 の 合 浦 ( 馬 山 )まで 運 んで 保 存 するように 命 じたこと 74) に 現 われるように 高 麗 こそ 日 本 遠 征 のため 66) 東 國 通 鑑 卷 36 元 宗 13 年 (1272) 2 月 條. 67) 高 麗 史 卷 27 元 宗 世 家 元 宗 15 年 (1274) 1 月 條 同 6 月 辛 酉 條. 68) 第 1 次 遠 征 軍 に 対 して 高 麗 が 供 給 した 軍 糧 は 史 料 で 確 認 されない ただ 数 年 にわたった 遠 征 準 備 期 間 に 高 麗 が 供 給 した 軍 糧 は 庚 午 年 (1270)から 今 まで5 年 の 間 に 軍 糧 を 供 給 して 来 たので もう 糧 穀 が 乏 絶 され てことは 長 くなる という 言 葉 のように 莫 大 なものであった 高 麗 は1274 年 2 月 近 年 に 軍 人 軍 馬 の 食 糧 と 史 料 は 到 底 用 意 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 官 員 らと 民 たちからおさめたものは 数 え 切 れない と 言 いなが ら 食 糧 供 給 の 難 しさを 訴 えたが これに 対 して 元 は 同 年 4 月 米 2 万 石 を 送 って 軍 糧 に 補 うようにして 糧 穀 値 段 として 絹 を 送 るようにした( 高 麗 史 巻 27 元 宗 世 家 元 宗 15 年 (1274)2 月 甲 子 條 同 4 月 甲 子 條 ) 太 田 弘 毅 の 指 摘 どおり ここで 言 う2 万 石 が 実 際 に 漕 運 されたといっても 結 局 糧 食 の 準 備 は 高 麗 が 負 担 し 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はずである( 太 田 弘 毅 蒙 古 襲 来 -その 軍 事 史 的 研 究 - 錦 正 社 1997 p.91) 69) 高 麗 史 卷 28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1 年 (1275) 1 月 庚 辰 條. 70) 第 2 次 遠 征 の 当 時 高 麗 が 供 給 した 軍 糧 については10 萬 石 ( 元 史 世 祖 本 紀 ) 11 萬 石 ( 高 麗 史 忠 烈 王 世 家 ) あるいは12 萬 3 千 5 百 60 餘 石 ( 東 國 通 鑑 忠 烈 王 8 年 )など 諸 史 料 に 異 なって 記 されている 71) 高 麗 史 卷 31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20 年 (1294) 1 月 癸 酉 條. 72) 同 忠 烈 王 23 年 (1295) 10 月 丙 申 條. 73) 高 麗 史 卷 29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9 年 (1283) 3 月 庚 午 條 同 卷 30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11 年 (12 85) 12 月 辛 丑 條 同 12 月 甲 寅 條 丁 卯 條 東 國 通 鑑 卷 38 忠 烈 王 9 年 (1283) 3 月 條. 74) 元 史 卷 13 世 祖 本 紀 至 元 22 年 (1285)11 月 癸 巳 條 また 元 はおそらくクビライ 死 亡 直 前 である1293
241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39 の 第 一 の 兵 站 基 地 だったのである 高 麗 は 蒙 古 の 日 本 遠 征 のための 普 及 基 地 ないし 兵 站 基 地 としての 役 目 を 遂 行 するようになった 一 方 反 対 に 日 本 からの 侵 攻 に 対 する 防 御 基 地 としての 役 目 も 果 た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すでに 蒙 古 の 日 本 遠 征 以 前 から 高 麗 と 日 本 の 間 に 造 成 された 軍 師 的 緊 張 の 中 で 高 麗 は 日 本 からの 侵 攻 に 備 え 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1269 年 5 月 慶 尚 道 按 察 使 が 済 州 島 人 が 日 本 に 漂 流 してから 戻 ってきて 言 う のは 日 本 が 兵 船 を 取 り 揃 えて 我 らを 侵 犯 しようとしている と 報 告 すると 高 麗 朝 廷 は 三 別 抄 を 派 遣 して 沿 海 を 驚 備 する 一 方 築 城 と 糧 食 の 備 蓄 を 命 じて 日 本 に 近 い 彰 善 県 ( 南 海 )にあった 国 史 を 珍 島 へ 移 すようにしている 75) 日 本 側 の 蒙 古 侵 入 に 対 する 警 戒 態 勢 が 誤 解 されて 伝 われたものであるが 高 麗 としては 三 ヶ 月 前 に 黒 的 一 行 が 対 馬 島 民 と 衝 突 して 島 民 2 人 を 捕 らえて 帰 還 した 事 件 もあって 日 本 の 軍 師 動 向 を 注 視 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はずである それで 戦 争 が 実 際 に 勃 発 した 以 後 には 日 本 の 侵 攻 に 備 えてもっと 防 備 を 強 化 することが 必 然 的 であった 第 1 次 日 本 遠 征 直 後 合 浦 には 蒙 古 軍 で 構 成 された 鎭 戍 軍 が 設 置 され 1278 年 高 麗 軍 に 取 り 替 えられるまで 駐 屯 した たぶん 憂 慮 されていた 日 本 の 侵 攻 に 備 えた 措 置 であろう 76) 1280 年 5 月 倭 賊 が 固 城 漆 浦 及 び 合 浦 に 侵 入 して 漁 夫 を 捕 え 連 れ 去 った 事 件 が 発 生 すると 高 麗 は 慶 尚 道 と 全 羅 道 に 軍 師 を 送 って 守 備 する 一 方 蒙 古 に 大 将 軍 を 派 遣 してこの 事 件 を 報 告 している 77) 蒙 古 はこの 際 高 麗 の 軍 卒 を 利 用 して 倭 賊 を 防 御 することを 命 じたが 日 本 遠 征 に 際 しては1281 年 6 月 に 本 国 から 騎 兵 300 人 を 送 って 合 浦 を 守 るようにした 78) 遠 征 が 失 敗 した 直 後 の1281 年 10 月 蒙 古 は 忠 烈 王 と 征 東 行 省 の 要 請 を 受 け 入 れ 日 本 と 見 合 わせる 要 衝 である 慶 尚 道 金 州 合 浦 等 地 と 全 羅 道 に 鎭 辺 万 戸 府 を 設 置 した 79) 翌 年 1282 年 1 月 には 日 本 の 高 麗 沿 岸 への 侵 寇 事 件 についての 忠 烈 王 の 要 請 を 受 け 入 れ 蒙 古 は 本 国 から 軍 師 500 人 を 金 州 に 派 遣 することを 決 定 した 80) まもなく2 月 年 日 本 征 伐 のために 江 南 米 10 萬 石 を 運 搬 して 江 華 島 に 備 蓄 しておいたのである( 高 麗 史 卷 31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20 年 (1294)12 月 庚 寅 條 ). 75) 高 麗 史 卷 26 元 宗 世 家 元 宗 10 年 (1269)5 月 丙 午 條 76) 1278 年 7 月 高 麗 の 忠 烈 王 は 合 浦 鎭 戍 軍 は 残 しておいて 倭 寇 に 備 えてください と 願 ったが クビライ は わざわざ 残 す 必 要 があるのか 君 の 民 たちに 害 にならないのか 君 が 自 分 の 国 の 国 人 をして 鎭 戍 する ようにしなさい 倭 寇 に 恐 ろしがる 必 要 はない と 返 事 している( 高 麗 史 巻 28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4 年 (1278)7 月 戊 戌 條 ) 後 述 する2 次 遠 征 直 後 の 動 向 を 一 緒 に 考 慮 すれば 蒙 古 軍 はたぶん1 次 遠 征 直 後 要 害 地 域 である 合 浦 に 数 年 間 駐 屯 して 日 本 の 侵 攻 に 備 えていたことであると 推 定 される 77) 高 麗 史 卷 29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6년(1280)5 月 癸 卯 條 78) 同 忠 烈 王 7 年 (1281)6 月 丙 戌 條 79) 元 史 卷 99 兵 志 鎭 戍 에는 至 元 十 八 年 (1281) 十 月 高 麗 王 并 行 省 皆 言 金 州 合 浦 固 城 全 羅 州 等 處 沿 海 上 下 與 日 本 正 當 衝 要 宜 設 立 鎮 邊 萬 戶 府 屯 鎮 從 之 とみえる 80) 元 史 卷 208 外 夷 列 傳 高 麗 傳 至 元 19 年 (1282) 正 月 條. 元 高 麗 記 事 には 至 元 19 年 正 月 1
242 24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蒙 古 は 蒙 漢 軍 1,400 人 を 送 り 耽 羅 島 の 防 備 を 強 化 しており 81) 4 月 には 軍 師 340 人 を 送 って 合 浦 を 守 るようにし 60 人 は 王 京 を 守 るようにして 不 意 の 変 故 ( 不 慮 ) に 備 えることにした 82) このような 一 連 の 措 置 は 蒙 古 と 高 麗 が 日 本 からの 逆 攻 に 備 えて 金 州 合 浦 などを 含 めた 高 麗 の 要 害 と 首 都 開 京 そし て 日 本 と 中 国 の 江 南 地 方 を 連 結 する 海 上 の 要 衝 である 耽 羅 島 の 防 備 を 強 化 していたことの 証 である 蒙 古 本 国 も 日 本 の 仕 返 しを 憂 慮 して1281 年 11 月 日 本 遠 征 から 戻 ってきた 軍 師 らをして 慶 元 ( 寧 波 ) 上 海 澉 浦 など 江 南 地 方 の 沿 海 を 鎭 戍 させた 83) 1 2 次 日 本 遠 征 の 発 進 基 地 であった 高 麗 の 合 浦 は 行 政 上 金 州 の 管 区 の 中 にある 要 害 地 であった 84) 金 州 は 遅 くても11 世 紀 中 葉 から1266 年 廃 止 される 前 まで 日 本 人 の 貿 易 商 人 を 応 待 する 館 舍 があ るほど 高 麗 で 日 本 人 との 交 流 が 行 われる 対 日 交 渉 の 拠 点 であった 85) 金 州 が 平 和 の 時 には 日 本 人 の 海 上 往 来 がもっとも 活 発 な 隣 接 地 域 86)であったので 戦 時 には 日 本 との 軍 事 的 な 對 峙 が 一 番 尖 鋭 な 地 域 になりかねなかった 蒙 古 と 高 麗 が 攻 守 両 面 の 軍 師 要 害 として 合 浦 と 金 州 を 重 視 した 理 由 はここにあったのである 2 次 遠 征 失 敗 直 後 に 慶 尚 道 の 合 浦 等 地 と 全 羅 道 に 設 置 された 鎭 辺 万 戸 府 は 日 本 を 控 制 する 87) ことが 主 要 な 目 標 であった 1301 年 7 月 蒙 古 は 高 麗 の 要 請 に 従 い 前 年 に 設 置 された 耽 羅 総 管 府 を 廃 止 して 高 麗 に 隷 属 させ 万 戸 府 を 設 置 するに 至 る 88) これら 三 つの 所 の 万 戸 府 は 蒙 古 君 の 一 時 的 な 駐 屯 89)を 除 いて 平 時 には 高 麗 軍 に 充 当 されて 征 東 行 省 の 管 轄 下 に 置 かれた 本 来 第 2 次 日 本 遠 征 5 日 蒙 古 軍 100 名 で 高 麗 の 金 州 を 鎭 戍 した と 見 える 81) 東 國 通 鑑 卷 38 忠 烈 王 8 年 (1282)2 月 條. すでに 蒙 古 は 遠 征 失 敗 直 後 である1281 年 9 月 耽 羅 の 鎭 戍 軍 を 增 員 して 高 麗 にその 戰 具 を 供 給 するように 命 じた( 元 史 卷 11 世 祖 本 紀 至 元 18 年 (1281) 9 月 癸 酉 條 ) 当 時 耽 羅 は 蒙 古 の 直 轄 地 でダルハチ 總 管 府 の 支 配 下 に 置 いていた 82) 高 麗 史 卷 29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8년(1282) 4 月 戊 戌 條. 83) 元 史 卷 99 兵 志. 鎭 戍 至 元 十 八 年 (1281) 十 一 月 條. 84) 高 麗 史 卷 57 志 11 地 理 2 慶 尙 道 金 州 條 によると 金 州 には 義 安 郡 咸 安 郡 の2 郡 と 漆 園 縣 熊 神 縣 合 浦 縣 の3 縣 が 属 していた また 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 卷 32の 昌 原 都 護 府 には 合 浦 の 形 勝 に 関 して 合 浦 は 大 きな 陣 である 虎 が 蹲 っているような 竜 が 蟠 っているようである( 合 浦 巨 鎭 虎 踞 龍 盤 ) と 記 述 さ れていた 合 浦 は 朝 鮮 時 代 に 慶 尙 右 道 兵 馬 節 度 使 の 本 營 があったところでもある 85) 南 基 鶴 고려와 일본의 상호인식 日 本 歷 史 硏 究 pp ) 日 本 からの 高 麗 漂 流 民 の 送 還 も 日 本 各 地 大 宰 府 對 馬 島 金 州 東 南 海 ( 船 兵 ) 都 部 署 という 官 廳 間 の ルートで 処 理 されていた( 山 內 晉 次 古 代 における 朝 鮮 半 島 漂 流 民 の 送 還 をめぐって 歷 史 科 學 쪽) 13 世 紀 に 入 り 金 州 に 倭 寇 が 発 生 したこともここが 對 馬 島 をはじめとする 九 州 地 域 民 た ちがもっとも 活 発 に 往 来 した 地 域 であることを 反 證 する 87) 元 史 卷 208 外 夷 列 傳 高 麗 傳 至 元 18 年 (1281) 11 月 條. 88) 高 麗 史 卷 32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27 年 (1301) 5 月 庚 戌 條. 89) 1287 年 3월には 合 浦 を 守 っていた 蒙 古 の 軍 事 たちが 翻 刻 へ 帰 っていた( 高 麗 史 卷 30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13 年 (1287) 3 月 庚 申 條 )
243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41 のため1280 年 8 月 に 設 置 された 征 東 行 省 は 遠 征 失 敗 後 何 回 も 置 廃 を 繰 り 返 えしてからやがて 防 倭 (= 対 日 本 防 禦 ) 機 関 としての 役 目 を 遂 行 するようになった 90) 征 東 行 省 が 日 本 遠 征 のための 軍 司 令 部 役 目 をした 初 期 には 江 南 軍 の 蒙 古 人 総 司 令 官 が 長 官 を 担 当 していたが その 後 には 高 麗 国 王 が 長 官 であった 1302 年 遼 東 行 省 が 征 東 行 省 を 竝 合 しようと 図 っていた 時 高 麗 の 忠 烈 王 は 小 邦 は 元 国 の 一 番 遠 い 辺 彊 にある 重 要 な 地 域 で まだ 帰 順 していない 日 本 国 に 接 しています 至 元 18 年 (1281) 大 軍 が 海 を 渡 って 出 征 した 後 至 元 20 年 (1283) 世 祖 皇 帝 の 聖 旨 を 奉 じて 本 人 が 行 征 東 省 事 の 職 を 引 き 受 けて 辺 面 を 威 鎭 し 現 在 の 慶 尚 道 合 浦 等 地 と 全 羅 道 の 二 つの 場 所 の 鎭 辺 万 戸 府 を 管 領 してきました そし て 本 国 ( 高 麗 )の 軍 官 軍 人 を 徴 発 して 現 在 の 合 浦 加 徳 東 莱 蔚 州 竹 林 巨 済 角 山 内 礼 梁 などの 要 害 地 域 と 耽 羅 等 地 に 派 遣 配 置 し 烽 燧 を 設 置 して 船 兵 を 隠 しておき 日 夜 を 問 わず 監 視 巡 察 して 日 本 国 賊 軍 に 対 備 する 仕 事 を 主 観 してきており 今 まであやまちをおかしたことはありません かつて 日 本 の 賊 人 を 捕 獲 したことがあり これを 元 国 の 中 書 省 と 樞 密 院 に 公 文 にて 報 告 もしました と 征 東 行 省 の 任 務 と 日 本 に 対 する 高 麗 の 警 備 ( 経 費 ) 態 勢 の 万 全 を 強 調 した 後 以 前 のように 行 征 東 省 事 を 担 当 させ 東 方 極 辺 の 未 服 属 国 である 日 本 方 面 に 対 して 威 鎭 する 仕 事 を 専 担 させてくださるならば 辺 関 事 務 が 大 きく 間 違 うことはないでしょう と 上 奏 した 91) ここで 日 本 に 対 する 威 鎭 ( 警 戒 対 備 )を 主 任 務 に する 軍 師 機 関 としての 征 東 行 省 の 存 在 意 義 をよくわかることができる また この 時 高 麗 が 併 合 反 対 の 理 由 として 表 明 したことが 日 本 に 対 する 效 果 的 な 警 備 であった 92) という 点 で 蒙 古 の 対 日 防 禦 基 地 としての 高 麗 の 位 置 がよく 現 われている 蒙 古 の 政 府 も 第 3 次 日 本 遠 征 を 計 画 する 一 方 で いつも 日 本 の 仕 返 しを 憂 慮 していたことは 1292 年 10 月 貿 易 のために 慶 元 に 入 港 した 日 本 船 から 武 器 が 発 見 さ れると 異 図 があるのではないか 恐 ろしくて 直 ちに 都 元 帥 府 をして 海 道 を 防 備 するようにした 措 置 93)か 90) クビライの 死 亡 をきっかけに 遠 征 論 議 が 中 断 された 後 征 東 行 省 は1299 年 に 再 設 置 になって 高 麗 を 管 轄 領 域 にする 元 の 地 方 機 関 として 性 格 が 転 換 され 以 後 元 の 滅 亡 に 至 るまで 高 麗 の 内 政 を 見 張 る 役 目 をした ということが 一 般 的 な 見 解 である これに 対 して 高 柄 翊 は 征 東 自 体 が 中 止 された 以 後 にも 征 東 行 省 は 名 義 上 形 式 上 に 存 在 していたし 一 時 的 に 元 朝 の 官 吏 を 要 職 に 任 命 して 高 麗 内 政 に 対 する 監 視 と 統 制 を 行 ったこともあるが 基 本 的 には 高 麗 の 元 帝 国 内 での1 行 省 としての 地 位 を 確 定 することでその 存 在 意 義 があったとみている そして 征 東 行 省 の 軍 事 機 構 としての 主 要 任 務 は 征 東 から 控 制 日 本 すなわち 防 倭 に 変 わったという( 高 柄 翊 麗 代 征 東 行 省 의 硏 究 同 東 亞 交 涉 史 의 硏 究 서울 大 學 校 出 版 部 1970 pp pp 參 照 ) 91) 高 麗 史 卷 32 忠 烈 王 世 家 忠 烈 王 28 年 (1302) 條. 92) 上 の 上 表 では 東 京 から 開 京 までは1500 餘 里 であり 開 京 から 合 浦 まではまた1400 餘 里 である もし 海 外 にすこしでも 警 戒 することがあるならば 報 告 往 來 に 千 里 も 遠 いと 言 っているのに 況 や3 千 里 の 外 に なるのでどうなるでしょうか と 言 っている 93) 元 史 卷 17 世 祖 本 紀 至 元 29 年 (1292) 10 月 戊 子 條.
244 24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ら 伺 うことができる 以 上 のように 高 麗 は 軍 事 戦 略 上 蒙 古 の 日 本 遠 征 のための 兵 站 普 及 基 地 に 止 まらず 蒙 古 の 対 日 防 禦 基 地 としての 位 置 にも 置 かれるようになった 高 麗 の 立 場 ( 入 場 )では 日 本 遠 征 の 負 担 だけで はなく 対 日 防 禦 の 負 担 まで 担 う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 蒙 古 としては 自 信 の 東 藩 94) である 高 麗 国 をして 蒙 古 と 對 峙 している 日 本 を 威 鎭 控 制 するようにし 高 麗 は 日 本 の 侵 攻 から 自 国 を 防 衛 するため でも この 役 目 を 自 ら 引 き 取 らざるを 得 なかった 95) 2) 日 本 の 異 国 征 伐 計 画 高 麗 が 日 本 からの 侵 攻 を 憂 慮 したことは 決 して 杞 憂 ではなかった 以 下 では 日 本 の 方 に 視 野 を 向 けて 当 時 異 国 征 伐 と 呼 ばれた 高 麗 侵 攻 計 画 の 経 過 と 背 景 について 考 えてみたい これは 蒙 古 の 侵 略 に 対 する 日 本 の 軍 事 的 な 対 応 の 特 徴 をよくあらわす 事 例 であると 同 時 に 高 麗 と 日 本 の 両 国 関 係 の 展 開 を 察 するために 見 逃 してはいけない 重 要 な 事 件 の 一 つである 1274 年 10 月 5 日 高 麗 の 合 浦 を 出 発 した 第 1 次 日 本 遠 征 軍 は 対 馬 島 一 岐 島 を 占 領 して10 月 20 日 ついに 九 州 博 多 に 上 陸 した 日 本 の 武 士 たちがこれに 対 して 応 戦 を 行 ったが 結 果 は 日 本 側 の 苦 戦 日 本 軍 は 大 宰 府 方 面 で 後 退 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遠 征 軍 が 蒙 古 人 女 真 人 漢 人 高 麗 人 な ど 多 くの 民 族 で 構 成 された 混 成 部 隊 でありながらも 統 一 的 な 指 揮 体 系 のもとで 組 織 的 な 集 団 戦 法 を 駆 使 し 毒 を 塗 った 短 い 矢 と 鉄 砲 のような 火 薬 武 器 まで 利 用 して 重 装 備 の 個 人 戦 で 応 戦 する 日 本 軍 を 敗 退 させたことは 八 幡 愚 童 訓 によく 描 かれている 96) 個 人 騎 馬 戦 を 主 とした 国 内 戦 争 とは 異 なる 大 規 模 の 対 外 戦 争 だったという 点 で 個 別 武 士 団 を 集 合 させておいたぐらいの 日 本 軍 の 指 揮 体 系 の 不 一 致 非 効 率 こそ 最 大 の 弱 点 であった 97) 94) 1330 年 潤 7 月 高 麗 の 忠 肅 王 は 高 麗 の 国 家 を 否 定 して 元 帝 国 の 内 地 として 作 ろうとする 画 策 を 聞 いて 元 国 太 師 右 丞 相 に 書 簡 を 送 り 高 麗 国 は 我 らの 東 藩 である といって 至 元 3 年 (1266) 日 本 を 招 誘 した 蒙 古 国 書 の 文 章 を 引 用 して 反 駁 している( 高 麗 史 卷 36 忠 肅 王 世 家 忠 肅 王 17 年 (1330) 閏 7 月 庚 寅 條 ) 高 麗 が 元 の 東 藩 であることは 世 祖 クビライ 以 来 の 両 国 の 基 本 關 係 として 続 けて 認 められてきたもので ある 95) 1332 年 6 月 高 麗 の 臣 下 たちは 忠 恵 王 の 復 位 問 題 に 関 する 上 書 文 のなかで 王 が 不 在 した 状 態 では まだ 帰 順 しない 燐 国 の 海 倭 の 変 を 憂 慮 しなければならない と 言 っている( 高 麗 史 卷 36 忠 惠 王 世 家 忠 惠 王 2 年 (1332)6 月 壬 辰 條 ) 王 の 復 位 の 必 要 性 を 強 調 するための 文 脈 ではあるものの 高 麗 が 変 りなく 日 本 に 対 する 警 戒 態 勢 を 維 持 していることを 分 かる 96) 八 幡 愚 童 訓 ( 甲 本 ) 日 本 思 想 大 系 20 寺 社 緣 起 pp ) 南 基 鶴 중세 일본의 외교와 전쟁-몽골의 일본 침략을 소재로- 東 洋 史 學 硏 究 pp.214
245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43 気 象 悪 化 も 重 なって 翌 日 遠 征 軍 が 退 いた 後 幕 府 は 蒙 古 の 再 侵 に 備 えて 沿 岸 警 備 をより 強 化 した いわゆる 異 国 警 固 番 役 を 整 備 して 翌 年 1275 年 2 月 には 春 夏 秋 冬 各 3ヶ 月 ずつを 守 護 の 指 揮 のも とで 九 州 各 国 の 御 家 人 が 交 代 に 驚 備 する 体 制 を 作 った 98) 同 年 4 月 蒙 古 の 使 臣 杜 世 忠 一 行 が 長 門 国 室 津 に 到 着 したことをきっかけに 幕 府 は5 月 周 防 安 芸 両 国 の 御 家 人 を 長 門 国 の 警 備 に 動 員 し 備 後 の 御 家 人 を 追 加 させることで4ヶ 国 で 編 成 して 侵 入 に 備 えることにした 99) ところで 幕 府 はこの 使 者 一 行 を8 月 に 関 東 へ 召 還 して9 月 7 日 鎌 倉 の 滝 の 口 で 斬 首 し その 後 まもなく 異 国 征 伐 の 計 画 を 樹 立 していた この 計 画 は 遅 くとも 同 年 11 月 以 前 には 立 てられたことが 確 認 される 100) このように 幕 府 は 蒙 古 の 再 侵 に 備 えて 警 備 体 制 を 整 備 強 化 していたが 使 者 の 処 刑 という 強 硬 策 に 引 き 継 き 異 国 を 征 伐 するという 攻 勢 へと 旋 回 したのである ここで 言 う 異 国 は 侵 略 の 張 本 人 である 蒙 固 ではな く 侵 略 に 動 員 された 隣 接 国 高 麗 を 示 す この 計 画 の 概 略 的 な 内 容 は 翌 年 1276 年 3 月 頃 を 実 行 時 期 にして 鎭 西 (= 九 州 )の 軍 事 力 を 中 心 的 に 動 員 するが 不 足 な 場 合 には 山 陰 山 陽 南 海 道 など 西 国 沿 岸 地 帯 の 地 頭 御 家 人 及 び 本 所 一 円 地 の 船 頭 [ 梶 取 ] 首 府 [ 水 手 ]を 徴 発 するということであった 101) そして 実 際 に 1276 年 3 月 を 前 後 した 時 期 に 九 州 の 守 護 または 守 護 代 が 総 責 任 者 である 大 宰 少 弍 経 資 の 指 揮 によって 御 家 人 非 御 家 人 を 問 わず 動 員 を 督 促 するなど 征 伐 の 準 備 が 進 行 されていた ただ 関 連 史 料 である 北 條 九 代 記 では これを 警 固 事 の 一 環 で 把 握 しており 102) また 幕 府 が 実 行 時 期 に 合 わせて 高 麗 に 向 けて 出 陣 する 者 を 除 いた 九 州 の 武 士 たちに 異 国 警 固 石 築 地 を 築 造 するようにしている 点 103)からみると 異 国 征 伐 は 元 来 高 麗 に 対 する 全 面 侵 攻 ではなく 異 国 警 固 とともに 推 進 された 局 地 的 な 侵 攻 計 画 であっ たと 考 えられる 幕 府 は1276 年 3 月 これから1 2ヶ 月 は 格 別 に 異 国 警 固 を 怠 けてはいけない 104) と ) 文 永 12 年 (1275) 2 月 4 日 少 弐 経 資 書 状 案 鎌 倉 遺 文 第 15 巻 号. 99) 建 治 元 年 (1275) 5 月 12 日 関 東 御 教 書 案 鎌 倉 遺 文 第 16 巻 号 建 治 元 年 (1275) 5 月 20 日 関 東 御 教 書 案 同 号. また このごろ 異 國 警 固 番 役 の 方 式 も 変 更 されて 三 ヶ 月 ずつ 年 一 回 から 一 ヶ 月 ずつ 年 三 回 として 変 った( 建 治 元 年 (1275) 6 月 5 日 豊 後 大 守 護 友 頼 泰 書 下 同 号 ). 100) 帝 王 編 年 記 巻 26 九 州 探 題. 101) 建 治 元 年 (1275) 12 月 8 日 関 東 御 教 書 案 鎌 倉 遺 文 第 16 巻 号. 村 井 章 介 は 安 藝 1 國 から100 隻 を 越 える 船 舶 が 守 護 によって 徵 發 されたという 点 から 異 國 征 伐 のための 軍 事 動 員 は 相 当 な 規 模 であった と 指 摘 している( 村 井 章 介 北 条 時 宗 と 蒙 古 襲 来 時 代 世 界 個 人 を 読 む 日 本 放 送 出 版 協 会 2001 p p ) 102) 北 条 九 代 記 下 建 治 元 年 條 では 警 固 事 に 対 して 決 めた 鎭 西 に 有 能 な 守 護 らを 任 命 して 海 辺 地 域 に 派 遣 した 京 都 大 番 役 を 中 止 した 在 京 人 を 置 いた 公 家 と 武 家 が 国 家 行 事 の 費 用 を 減 らして 倹 約 を 行 い 民 庶 を 煩 わしくしないようにした これらはすべて 軍 旅 の 準 備 するためのことだった と 記 述 されている 103) 建 治 2 年 (1276) 3 月 5 日 大 友 頼 泰 書 下 鎌 倉 遺 文 第 16 巻 号 建 治 2 年 3 月 11 日 持 蓮 請 文 同 号 等.
246 24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異 国 征 伐 を 準 備 する 一 方 で 異 国 警 固 を 厳 しく 施 行 していたのである そうならば なぜ 幕 府 は 異 国 警 固 に 止 まらず 異 国 征 伐 まで 敢 行 しようとしたのであろうか 異 国 征 伐 については 蒙 古 の 日 本 攻 略 基 地 であると 同 時 に 兵 站 基 地 である 高 麗 に 対 する 反 撃 や 仕 返 し 攻 撃 という 軍 事 戦 略 的 な 次 元 で 理 解 することもできるし 105) そこに 敷 かれた 対 外 態 度 としての 高 麗 の 弱 体 を 狙 った 冒 険 的 な 侵 略 主 義 106) を 指 摘 することも 可 能 であろう しかしそれまで 蒙 古 の 使 者 たちを 送 り 返 して 防 御 体 制 に 一 貫 してきた 幕 府 が 突 然 使 者 の 処 刑 と 外 敵 への 攻 撃 という 極 端 的 な 強 硬 策 を 選 んだことには それなりの 国 内 事 情 があったと 考 えられる 将 軍 と 御 家 人 の 間 の 御 恩 - 奉 公 の 相 互 関 係 に 即 した 幕 府 主 従 制 の 原 理 上 戦 後 御 家 人 が 恩 賞 地 を 望 むことは 当 然 の 事 であった 特 に 1272 年 2 月 以 来 九 州 御 家 人 たちは 過 重 な 異 国 警 固 の 負 担 を 担 っていたからその 要 求 は 当 然 ながら 強 かった 実 は 戦 場 に 出 陣 した 御 家 人 たちの 窮 極 的 な 同 期 は 勳 功 の 賞 であり 自 分 の 領 主 制 支 配 の 拡 大 と 強 化 にあった 107) 戦 争 が 終 わってからまもない1275 年 6 月 九 州 の 肥 後 国 の 御 家 人 竹 崎 季 長 が 銀 賞 の 訴 訟 のため 鎌 倉 まで 行 ったことはあまりにも 有 名 な ことである このような 武 士 が 少 なくなかったことは 翌 年 3 月 豊 後 国 の 御 家 人 田 原 泰 広 が 鎌 倉 に 直 接 上 訴 しようとしたこと 108) からも 伺 うことができる しかし 幕 府 は 戦 後 新 しく 獲 得 した 領 地 はなく 蒙 古 の 再 侵 に 備 えなければならない 状 況 であったので 特 別 な 勳 功 者 以 外 は 銀 賞 給 与 を 延 期 するしかなかっ た そのため 銀 賞 を 期 待 していた 多 くの 御 家 人 らに 不 満 が 生 じたのは 勿 論 のことである このような 御 家 人 らの 不 満 と 経 済 的 な 負 担 はさまざまな 紛 争 や 訴 訟 をもたらす 原 因 になり ひいては 訴 訟 を 管 轄 裁 判 する 鎭 西 守 護 と 御 家 人 の 間 の 不 和 が 大 きくなったのであろう これは1280 年 12 月 近 年 守 護 と 御 家 人 が 土 地 訴 訟 や 刑 事 訴 訟 をおこし そのため 多 数 が 不 和 しているので( 鎭 西 警 固 に) 気 をつけていな い 109) という 幕 府 の 警 告 からも 伺 うことができる 104) 建 治 2 年 (1276) 3 月 8 日 北 条 宗 頼 書 状 ( 川 添 昭 二 注 解 元 寇 防 塁 編 年 史 料 - 異 国 警 固 番 役 史 料 の 研 究 - 福 岡 市 教 育 委 員 会 1971 pp ). 105) 一 例 として 中 村 栄 孝 は 積 極 的 な 防 衛 政 策 として 海 を 渡 って 反 撃 する 異 国 征 伐 計 画 として 理 解 している ( 同 十 三 四 世 紀 の 東 亜 情 勢 とモンゴル 襲 来 p.37) 一 方 幕 府 がモンゴルの 再 侵 に 備 えるために 西 国 を 中 心 にする 広 範 囲 な 地 域 に 散 在 する 兵 力 を 短 期 間 に 博 多 湾 周 辺 に 動 員 する 必 要 から' 異 国 征 伐 を 名 目 に' 西 国 の 御 家 人 に 動 員 令 を 下 下 したとみる 見 解 もある( 安 田 元 久 編 古 文 書 の 語 る 日 本 史 3 鎌 倉 筑 摩 書 房 1990 p.226) これは 征 伐 のための 準 備 としては 極 めて 疏 略 した 点 または 幕 府 の 軍 事 力 の 劣 勢 に 注 目 した 見 解 として 鎌 倉 幕 府 が 本 当 に 高 麗 に 侵 攻 することを 思 っていたと 思 わない しかし 現 存 史 料 は 高 麗 侵 攻 準 備 が 現 地 で 具 体 的 に 進 行 されていたことを 伝 えているから 本 稿 は 異 国 征 伐 を 単 純 な 名 目 であったとは 見 なさない 立 場 である 106) 村 井 章 介 高 麗 三 別 抄 の 叛 亂 と 蒙 古 襲 來 前 夜 の 日 本 p ) 黒 田 俊 雄 庄 園 制 社 会 日 本 評 論 社 1976 p ) 建 治 2 年 (1276) 3 月 8 日 北 条 宗 頼 書 状.
247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45 守 護 と 御 家 人 の 不 和 は 訴 訟 のほかにも 戦 功 軍 忠 の 報 告 をめぐってはみ 出 ていた 前 述 した 竹 崎 季 長 の 場 合 も 自 分 の 戦 功 を 抜 け 落 ちさせた 守 護 に 対 する 不 満 が 背 後 にあった 異 国 警 固 の 独 立 的 な 勤 務 をめぐる 御 家 人 総 領 と 庶 子 の 対 立 も 軍 忠 を 幕 府 に 報 告 する 職 責 があった 守 護 との 不 和 をもたらした もう 一 つの 要 因 であった 1276 年 閏 3 月 豊 後 国 の 御 家 人 禅 季 は 異 国 警 固 に 関 しては 総 領 の 指 揮 に 従 わず 守 護 の 指 揮 に 従 いたいことを 願 いながら その 理 由 として 幕 府 に 戦 功 を 報 告 する 際 自 分 の 名 前 を 名 簿 に 直 接 あげたいからであると 明 らかにしていた 110) このような 庶 子 の 行 動 は 総 領 との 紛 争 をもたらして 守 護 自 分 も 兩 者 の 対 立 のなかに 引 き 込 まれることになったのであろう 以 上 のように 軍 役 賦 課 による 経 済 的 な 負 担 恩 賞 の 延 期 から 伴 った 不 満 警 固 番 役 の 勤 務 方 式 をめぐる 総 領 庶 子 間 の 対 立 そして 戦 功 軍 忠 を 報 告 する 守 護 に 対 する 不 信 不 満 などが 訴 訟 の 頻 発 と 守 護 御 家 人 の 不 和 を 深 化 させたと 思 われる この 現 象 は 戦 後 恩 賞 問 題 が 大 きな 社 会 的 な 関 心 事 と して 台 頭 される1275 年 以 後 現 われるようになっただろう 守 護 と 御 家 人 の 不 和 は 守 護 による 御 家 人 の 指 揮 統 制 に 即 した 防 禦 体 制 の 童 謡 をもたらす 幕 府 はこの 事 態 を 根 本 的 に 解 決 することができず 自 分 の 宿 意 を 抱 いて 天 下 大 乱 をほったらかすのは 非 常 に 不 忠 なことである 111) と 言 って それを 抑 制 し ようとしただけであった 1275 年 9 月 使 者 の 処 刑 という 幕 府 の 強 硬 策 は 当 時 の 国 内 事 情 特 にもっとも 重 要 な 防 衛 地 域 で ある 九 州 の 現 地 事 情 を 考 慮 したらば 実 は 対 外 危 機 を 自 ら 釀 成 することで 防 禦 体 制 の 弛 緩 を 引 き 締 めようということであった それに 引 き 続 く 異 国 征 伐 計 画 も 単 純 な 外 敵 への 攻 撃 に 止 まらず それを 軸 にする 防 御 体 制 の 再 編 強 化 をはかったことにみある 幕 府 は 動 搖 している 防 御 体 制 で 外 敵 の 侵 略 を 待 つより むしろ 攻 撃 することによって 敵 軍 に 打 撃 を 加 える 同 時 に 対 外 戦 争 の 遂 行 をきっかけにして 臨 戦 体 制 下 で 国 内 統 制 の 強 化 をはかろうとしたのではなかろうか この 臨 戦 体 制 下 での 幕 府 は 御 家 人 に 対 する 守 護 の 軍 事 指 揮 権 を 強 化 することができ 従 来 支 配 権 をおよぼ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本 所 一 円 地 の 武 士 まで 軍 事 指 揮 統 制 のもとに 置 くことができた 112) また 幕 府 が 国 内 武 士 の 統 制 のために 得 宗 権 力 の 意 思 を 直 接 代 弁 し 貫 徹 することができる 多 数 の 有 力 な 守 護 (あるいは 守 護 代 )らを 西 国 地 方 へ 派 遣 したことも 注 目 される 113) この 計 画 は 実 行 において 困 ることになり 114) まもなく 中 止 になっ 109) 弘 安 3 年 (1280) 12 月 8 日 関 東 御 教 書, 鎌 倉 遺 文 第 19 巻 号. 110) 建 治 2 年 (1276) 閏 3 月 15 日 僧 禪 季 申 狀 案, 鎌 倉 遺 文 第 19 巻 号. 111) 同 註 109). 112) 幕 府 は 第 1 次 蒙 古 の 侵 掠 に 際 して 御 家 人 ではなくても 軍 功 をたてれば 恩 賞 を 与 える 緊 急 措 置 を 取 ったこと があるが( 文 永 11 年 (1274)11 月 1 日 関 東 御 教 書 案 鎌 倉 遺 文 第 15 巻 号 ) 現 存 史 料 のなかで 実 際 に 非 御 家 人 を 幕 府 の 指 揮 統 制 下 に 動 員 したことは1276 年 3 月 以 來 のことである 異 國 警 固 は 例 外 な く 軍 役 平 均 役 である ( 建 治 3 年 (1277)9 月 19 日 関 東 御 教 書 鎌 倉 遺 文 第 17 巻 号 )という 原 則 が 成 立 した 時 點 も 全 面 的 な 警 固 事 が 定 まれた1275 年 末 において 探 すことができるだろう
248 24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たようだが 幕 府 による 国 内 武 士 の 統 制 效 果 において 充 分 に 満 されたことは 否 定 できない 一 方 異 国 征 伐 という 大 義 名 分 の 自 体 が 得 宗 権 力 の 対 蒙 古 政 策 に 正 当 性 を 提 供 した 側 面 も 見 逃 すことができない 従 来 防 御 を 固 守 して 来 た 幕 府 が かえて 外 敵 を 攻 略 するという 攻 勢 的 な 姿 勢 を 明 確 に 現 わすことで 得 宗 権 力 は 幕 府 の 有 力 御 家 人 と 朝 廷 の 公 家 側 に 対 して 政 策 主 導 の 正 当 性 を 主 張 獲 得 しようとした 考 えられる このような 大 義 名 分 のもとで 北 條 氏 一 族 が 大 挙 西 国 地 方 の 守 護 と して 進 出 しており 京 都 の 本 所 領 家 側 の 支 配 領 域 に 幕 府 の 支 配 権 が 拡 大 されていったことが 注 目 され る 115) この 大 義 名 分 は 北 條 一 門 の 守 護 の 西 国 進 出 に 対 する 外 様 守 護 の 不 満 やその 支 配 圏 を 侵 害 さ れた 本 所 領 家 側 の 反 発 を 抑 圧 するためにも 有 效 だったのだろう 幕 府 の 異 国 征 伐 計 画 が 中 止 された 以 後 石 築 地 の 造 営 がほぼ 完 成 された 116) 1277 年 6 月 南 宋 の 滅 亡 が 国 内 に 伝 わり 1279 年 7 月 には 一 ヶ 月 前 に 到 着 した 元 使 ( 旧 南 宋 降 将 の 使 臣 )を 博 多 で 処 刑 するなど 対 外 的 な 緊 張 はもっと 高 まっていた 南 宋 の 滅 亡 による 国 際 状 況 の 変 化 のためかこの 時 期 に 異 国 征 伐 を 計 画 した 痕 跡 はない それが 現 われたことは 第 2 次 日 本 侵 略 直 後 のことであった 遠 征 軍 が 台 風 によって 壊 滅 的 被 害 を 被 って 撤 退 した1281 年 閏 7 月 初 から 約 一 ヶ 月 余 りの 時 期 に 幕 府 は 再 び 異 国 征 伐 = 高 麗 侵 攻 を 計 画 した 大 将 は 少 弍 経 資 あるいは 大 友 頼 泰 で 彼 らの 管 轄 国 と 見 える3ヶ 国 ( 筑 前 豊 後 肥 前 )の 御 家 人 だけではなく 少 なくとも 山 城 大 和 の 悪 徒 57 人 を 動 員 すると いう 内 容 で その 悪 徒 たちは8 月 中 九 州 に 行 くように 命 じられた 117) 今 回 の 計 画 は 前 回 に 比 べて 小 規 模 で 筑 前 肥 前 など 戦 闘 の 中 心 地 が 動 員 対 象 になっていた これは 今 度 の 計 画 が 戦 勝 の 雰 囲 気 に 乗 って 侵 略 国 への 仕 返 しをするという 大 義 名 分 に 即 していたことを 示 唆 してくれる たぶん 該 当 地 域 の 非 御 家 人 や 九 州 他 の 地 域 など 西 國 地 方 の 武 士 は 異 国 警 固 に 動 員 されていたはずである この 計 画 も 実 行 された 痕 跡 はないが 118) 単 純 な 攻 撃 だけではなく 幕 府 による 国 内 統 制 の 強 化 を 企 ていたという 点 で 前 回 と 基 本 的 に 一 致 している それは1282 年 得 宗 時 宗 の 叔 父 北 條 時 定 が 少 弍 経 資 の 代 わりに 肥 前 国 の 守 護 に 就 任 しており その 後 彼 が 北 條 氏 の 九 州 支 配 の 強 化 に 橋 頭 堡 的 な 役 113) 村 井 章 介 蒙 古 襲 來 と 鎭 西 探 題 の 成 立 pp ) 石 築 地 造 營 との 兩 立 の 難 しさ 課 役 負 擔 の 輕 減 を 望 む 御 家 人 の 意 向 幕 府 によってはじめて 動 員 される 本 所 一 圓 地 の 武 士 すなわち 非 御 家 人 の 非 積 極 性 などによって 結 局 のところ 實 行 には 移 されなかったよう に 見 える 115) 村 井 章 介 蒙 古 襲 來 と 鎭 西 探 題 の 成 立 pp 南 基 鶴 蒙 古 襲 來 と 鎌 倉 幕 府 の 對 應 - 對 應 策 の 性 格 をめぐって-, 蒙 古 襲 來 と 鎌 倉 幕 府 臨 川 書 店 1996 pp 參 照 116) 1277 年 1 月 薩 摩 守 護 島 津 久 時 は 同 国 御 家 人 比 志 島 太 郎 佐 範 に 筥 崎 役 所 の 石 築 地 役 の 勤 務 を 完 了 した という 證 明 書 を 發 給 していた( 建 治 3년(1277) 1 月 27 日 島 津 久 時 覆 勘 狀, 鎌 倉 遺 文 第 17 巻 号 ). 117) 弘 安 4 年 (1281)8 月 16 日 聖 守 書 状, 鎌 倉 遺 文 第 19 巻 号. 118) 大 和 興 福 寺 側 の 否 定 的 な 態 度 ( 勘 仲 記 弘 安 5 年 10 月 16 日 条 裏 文 書 )による 幕 府 との 交 涉 遠 征 失 敗 後 高 麗 側 の 對 日 防 禦 態 勢 の 整 備 などによって 実 行 が 遲 延 中 止 されたと 推 測 される
249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47 割 を 果 たした 事 実 119) かつて1278 年 の 段 階 から 幕 府 が 統 制 下 のもとに 置 こうとした 大 和 の 悪 徒 120)を 異 国 征 伐 の 大 義 名 分 として 重 ねて 動 員 しようとしたことからも 現 われている 以 上 考 察 したように 蒙 古 の 第 1 2 次 の 日 本 侵 略 後 にそれぞれ 台 頭 した 異 国 征 伐 計 画 は 高 麗 侵 攻 を 転 機 にして 国 内 武 士 に 対 する 統 制 を 強 化 し 窮 極 的 には 北 條 氏 の 得 宗 権 力 の 直 接 的 な 指 揮 統 制 下 での 対 蒙 古 防 禦 体 制 を 構 築 しようとしたものであった 高 麗 と 日 本 関 係 から 見 ると この 計 画 は 両 国 が 交 戦 国 として 双 方 の 侵 攻 から 常 に 警 戒 しなければならない 正 面 対 峙 の 状 態 に 突 入 したことを 意 味 する 日 本 にとって もう 高 麗 は 蒙 古 と 完 全 に 一 体 化 した 異 国 = 外 敵 そのものとして 現 実 的 な 侵 略 対 象 として 浮 び 上 がったのであった 高 麗 の 日 本 に 対 する 控 制 威 鎭 はそれほど 現 実 性 を 持 ってい たとも 言 えよう 3) 高 麗 と 日 本 の 相 互 認 識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は かつてなかった 大 規 模 の 外 侵 を 受 けた 日 本 人 の 対 外 意 識 特 に 高 麗 観 に 深 刻 な 影 響 を 与 えた 高 麗 が 自 分 の 意 図 に 反 して 仕 方 なく 戦 争 に 動 員 されたものの 日 本 側 から 見 る 時 高 麗 は 蒙 古 と 一 体 化 した 敵 国 として 映 されたことも 事 実 だ 日 本 は1275 年 蒙 古 の 使 者 とともにき た 高 麗 使 者 を 処 刑 し 第 2 次 侵 略 直 後 日 本 軍 の 捕 虜 になった 遠 征 軍 の 中 で 奴 隷 にした 旧 南 宋 軍 を 除 い た 蒙 古 人 と 高 麗 人 をすべて 処 刑 した 121) 高 麗 人 を 日 本 の 侵 略 者 として 蒙 古 人 と 同 一 視 していることが 分 かる 異 国 征 伐 は 正 しくそういう 認 識 が 土 台 に 敷 かれた 高 麗 への 強 い 敵 対 感 を 現 わしであった 特 に 直 接 的 な 被 害 を 受 けた 対 馬 壱 岐 博 多 など 北 部 九 州 地 域 民 らの 蒙 古 高 麗 に 対 する 恐 怖 と 敵 愾 心 は 当 時 史 料 によく 現 われている 例 えば [ 蒙 古 国 の 兵 士 らは] 民 をつかまえて 男 は 殺 したり 虜 に 取 ったりし 女 は 一 所 に 集 め 手 をくぐって 船 に 縛 ったり 捕 虜 として 捕 らえたりした 122) とか 高 麗 の 兵 船 500 隻 は 壱 岐 対 馬 からきて 次 から 次 へと 殺 した 人 民 たちはこれを 耐 えることができず 妻 子 を 連 れ て 深 い 山 に 隠 れたが [ 高 麗 軍 が] 赤 ん 坊 の 泣 き 声 を 聞 いて 結 局 のところ 彼 らのところまで 来 たの で 生 き 延 びるために 愛 する 赤 んぼうを 殺 すしかなかった 123) という 話 が 流 れた どこまでが 事 実 な 119) 川 添 昭 二 岩 門 合 戦 再 論 - 鎮 西 における 得 宗 支 配 の 強 化 と 武 藤 氏 - 論 集 日 本 歴 史 4 鎌 倉 政 権 有 精 堂 1976 p ) 1278 年 7 月 幕 府 は 大 和 國 の 惡 徒 = 寺 僧 國 民 を 動 員 しようとし 興 福 寺 側 では 國 民 ついては 応 じるが 寺 僧 については 拒 否 したことがある( 中 臣 祐 賢 記 建 治 4 年 (1278)7 月 3 日 同 4 日 条 ) 121) 國 朝 文 類 卷 41 征 伐 日 本 122) 日 蓮 聖 人 遺 文 建 治 元 年 (1275) 5 月 8 日 一 谷 入 道 女 房 宛 書 状 鎌 倉 遺 文 第 16 巻 号. 123) 八 幡 愚 童 訓 ( 甲 本 ), 日 本 思 想 大 系 20 寺 社 緣 起.
250 24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のか 確 認 しにくいが 高 麗 を 含 んだ 遠 征 軍 の 残 酷 な 侵 略 者 のイメージは 当 時 から 形 成 されて 世 間 に 伝 え 来 た 後 世 に ムクリ コクリ( 蒙 古 高 麗 ) という 言 葉 が 西 日 本 地 域 で 恐 怖 の 代 名 詞 として 使 われ たこと 124) もそういう 事 情 による 蒙 古 の 侵 略 という 国 家 存 亡 の 危 機 はいわゆる 神 国 思 想 を 大 きく 高 揚 させた 日 本 は 数 多 い 神 々が 暮 している 神 聖 な 国 土 であり 神 明 の 加 護 があるから 外 国 が 絶 対 狙 う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 思 想 が 神 風 を 触 発 製 にして 幅 広 く 拡 散 した ここに 内 在 した 神 秘 的 獨 善 的 な 自 国 優 越 意 識 を 土 台 として 神 功 皇 后 の 三 韓 征 伐 神 話 が 想 起 され ましては 新 羅 ( 高 麗 )の 王 は 日 本 の 犬 だ 125) という 言 說 で 高 麗 を 卑 下 する 態 度 が 現 われるようになった 古 代 には 神 明 加 護 であるから 諸 藩 特 に 新 羅 を 支 配 する 力 があ るという 対 外 的 な 優 越 意 識 が 神 国 思 想 の 主 な 内 容 であったが 126) それからは 高 麗 をただの 畜 生 とし て 扱 う 露 骨 的 な 蔑 視 観 さえ 登 場 したである また 一 つ 注 目 したいことは 蒙 古 の 侵 略 以 後 日 本 の 武 威 に 対 する 観 念 が 高 揚 されたという 点 で ある 自 己 認 識 の 一 形 態 として 外 国 に 対 する 日 本 の 軍 事 的 な 威 勢 の 自 覚 と 主 張 は 武 士 政 権 が 樹 立 された 鎌 倉 初 期 から 芽 ぐみ 始 めたが 127) 蒙 古 の 侵 略 による 対 外 的 緊 張 をきっかけにしていっそう 高 揚 されることになった 蒙 古 国 書 の 到 来 以 後 京 都 正 伝 寺 の 禅 僧 東 厳 慧 安 は 日 本 国 の 武 芸 は 他 の 国 々よりすぐれる 弓 箭 は 比 べものにならないし 甲 冑 は 鬼 を 恐 ろしくする 128) と 言 って 鎌 倉 幕 府 の 武 力 とその 威 勢 に 対 する 期 待 を 表 明 していた 鎌 倉 末 南 北 朝 期 の 儒 者 玄 恵 は 天 竺 (インド) 震 旦 ( 中 国 ) 日 域 ( 日 本 )の3 国 の 中 で 日 本 人 は 心 も 強 く 弓 の 力 が 他 の 国 よりすぐれる 129) と 言 っている こ のように 日 本 ( 具 体 的 には 鎌 倉 幕 府 )の 武 威 が 高 揚 されながら 武 威 が 厳 重 で 文 道 が 正 しいから 四 夷 の 起 こる 事 はなく 三 韓 をすぐ 服 属 させることができる 130) という 三 韓 ( 高 麗 )に 対 する 武 断 的 な 侵 略 主 義 ができた 幕 府 が 祈 った 異 国 征 伐 こそまさにその 表 現 であった 一 方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は 高 麗 の 日 本 観 にも 非 常 に 否 定 的 な 影 響 を 及 ぼした 蒙 古 の 第 2 次 日 本 侵 略 に 際 して 全 羅 南 道 順 天 都 護 府 にある 定 慧 社 ( 現 松 広 寺 )の 禅 僧 冲 止 131)は 日 本 遠 征 の 威 容 を 称 124) 田 中 健 夫, ムクリコクリ, 日 本 歴 史 pp ) 太 平 記 卷 39 神 功 皇 后 攻 新 羅 給 事 126) 成 澤 光 政 治 のことば 意 味 の 歷 史 をめぐって 平 凡 社 1984 p ) 南 基 鶴, 鎌 倉 時 代 의 武 威 에 대한 일고찰 - 中 世 日 本 의 自 己 認 識 의 한 형태 -, 歷 史 學 報 pp ) 東 嚴 慧 安 意 見 狀 鎌 倉 遺 文 第 14 卷 號. 129) 玄 惠 注 聖 德 太 子 憲 法 ( 坂 本 太 郞 編 聖 德 太 子 全 集 第 1 卷 龍 吟 社 1942 所 收 ). 130) 宴 曲 抄 文 武 ( 早 川 純 三 郞 編 宴 曲 十 七 帖 附 謠 曲 末 百 番 國 書 刊 行 會 1912 所 收 ). 131) 冲 止 ( 俗 名 は 魏 元 凱 )は 1244 年 科 擧 に 合 格 した 人 才 として1254 年 出 家 する 前 まで 官 職 にいたと 推 定 される そのあいだに 倭 寇 問 題 を 解 決 するために 使 者 として 日 本 へ 行 った 経 歴 がある 彼 を 官 と 全 く 関 係 ない 人 物 として 見 なすことはできないが 僧 侶 になってから 民 間 に 身 を 置 きながら 官 からも 自 由 な 宗 敎 人 としての
251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49 頌 する 内 容 の 東 征 頌 132) を 作 った まず 彼 は 蒙 古 の 皇 帝 クビライの 寛 徳 と 恩 沢 をほめた 後 日 本 が 海 を 間 に 置 いて 隔 てていたこと で 蒙 古 に 来 朝 しないことに 対 して 問 罪 したということで 東 征 を 正 当 化 している そして 日 本 に 対 して は 釜 の 中 の 魚 魚 群 [ 鼎 魚 群 ] のように 偏 狭 で かつ 孤 立 した 醜 い 島 国 蛮 夷 [ 島 夷 醜 ] として 描 い ている 日 本 に 対 する 蔑 視 の 態 度 がありありと 現 われている 冲 止 は1280 年 東 征 のための 戦 艦 を 作 る 際 嶺 南 地 方 の 惨 状 を 目 撃 して 嶺 南 の 苦 痛 を 言 おう と 思 ったら 涙 が 先 にでる 133) と 言 うなど 民 衆 に 同 情 的 な 人 物 であった このような 彼 が 遠 征 軍 の 威 容 をほめていたことは 二 律 背 反 的 にみえるものの 彼 の 本 心 は 日 本 遠 征 が 不 可 避 だった 以 上 その 事 実 を 是 認 しながら 民 衆 の 鬱 憤 を 排 泄 しようとしたという 指 摘 134)がある このような 冲 止 の 立 場 を 支 えたものが 日 本 に 対 する 島 夷 観 と 倭 寇 観 であった 東 征 頌 の 作 詩 と 同 じごろ 彼 は 遠 征 軍 の 都 元 帥 である 金 方 慶 に 差 し 上 げた 祝 寿 で 日 本 を 示 して 卉 服 あるいは 倭 寇 と 蔑 稱 していた 135) すなわち 夷 狄 と 寇 賊 として 日 本 を 認 識 し 指 称 していた 日 本 を 蛮 夷 として 見 なす 観 念 は 朝 廷 のそのものと 等 しいことであり 日 本 = 倭 寇 観 は13 世 紀 に 入 って 形 成 され 始 めた 略 奪 者 としての 日 本 人 のイメージが 徐 々に 強 化 されて 高 麗 と 日 本 の 敵 対 関 係 を 背 景 にしてもっと 固 まっ たかのように 見 える 彼 は 民 衆 の 鬱 憤 を 発 散 するもう 一 つの 方 法 を 高 麗 と 辺 民 を 侵 奪 する 倭 寇 (= 日 本 )の 討 伐 で 探 していたのであるまいか 彼 において 日 本 は 偏 狭 で 醜 い 島 夷 辺 民 を 掠 奪 する 倭 寇 に 過 ぎなかった 民 間 に 身 を 置 いて 民 衆 に 同 情 的 であった 彼 の 日 本 認 識 は 民 間 の 情 緒 を 一 部 分 でも 代 弁 することであったと 思 われる このように13 世 紀 末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は 高 麗 と 日 本 の 間 に 偏 見 憎 悪 恐 怖 蔑 視 に 彩 色 された 否 定 的 な 相 互 認 識 をもたらしたのである 国 家 間 の 戦 争 がもたらした 傷 痕 は 両 側 ともに 深 かったし 相 互 認 識 は 相 当 な 屈 折 を 経 験 するしかなかった 生 活 もしていたことから 民 間 知 識 人 と 見 なすこともできるだろう 132) 冲 止 著 秦 星 圭 譯 圓 鑑 國 師 集 亞 細 亞 文 化 社 1988 pp ) 同 上 解 題 p ) 嶺 南 艱 苦 狀 二 十 四 韻 庚 辰 年 造 東 征 戰 艦 時 作 同 上 pp ) ' 都 元 帥 金 侍 中 ' 祝 壽 疏 同 上 pp
252 25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結 びにかえて-アジアの 中 の 高 麗 と 日 本 - 高 麗 末 の 儒 者 李 斉 賢 は1323 年 高 麗 を 元 の 内 地 にしようとするいわゆる 立 省 策 動 を 反 駁 しながら 元 の 中 書 省 に 上 書 したが その 中 で 小 邦 と 日 本 は 海 を 間 に 挟 んだ 隣 接 国 であるので 我 らが 中 国 と 和 親 し 福 を 享 受 すれば 彼 らは 帰 化 が 遅 れたことを 恥 ずかしがることであり 私 たちが 冷 待 を 受 け れば 彼 らは 頑 迷 するので 自 慢 することは 必 然 的 なことであります 136) と 記 述 している 立 省 策 は 中 国 ( 元 )の 高 麗 に 対 する 冷 待 として 受 け 取 られて 日 本 の 帰 化 をもっと 難 しくするはずなの で その 帰 化 を 促 すためにも 立 省 策 を 中 止 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 論 理 である ここでは 元 帝 国 の 支 配 秩 序 に 属 した 高 麗 王 朝 の 名 分 論 的 立 場 から 元 に 帰 化 しない 日 本 を 頑 迷 な 国 として 扱 っている かつて 蒙 古 の 使 者 が 高 麗 へ 来 た 際 宰 相 李 蔵 用 が 中 国 の 冊 封 体 制 に 基 づいて 日 本 の 国 際 的 な 地 位 を 小 夷 島 夷 で 規 定 したことを 思 い 出 させる このような 高 麗 の 日 本 観 は 中 国 すなわち 元 帝 国 の 冊 封 体 制 に 属 した 高 麗 とそこから 脱 している 日 本 という 両 国 の 立 場 が 変 わらない 限 り 持 続 するしかな かった 高 麗 と 日 本 は13 4 世 紀 蒙 古 帝 国 のユーラシア 大 陸 支 配 - 東 西 統 合 という 時 代 の 流 れの 中 でそれぞ れそれへの 編 入 と 離 脱 という 異 なる 道 を 歩 むことになった それによって 高 麗 と 日 本 の 両 国 の 歴 史 展 開 も 大 きな 分 かれ 道 に 立 ち 入 ることになった 12 世 紀 末 ほとんど 同 時 期 に 成 り 立 った 両 国 の 武 士 政 権 は 結 局 高 麗 の 武 臣 政 権 が 蒙 古 の 侵 略 を 受 けて1 世 紀 ぶりに 消 滅 し 日 本 の 武 家 政 権 はその 後 にも 存 續 発 展 して 行 った 日 本 は 蒙 古 を 中 心 にした 世 界 秩 序 の 中 で 高 麗 を 含 んだアジアの 多 くの 国 々と 異 なっ て 敵 対 の 態 度 を 最 後 まで 固 守 していた その 主 体 は 東 アジアの 例 外 的 な 存 在 ともいえる 武 士 政 権 だっ たのである 蒙 古 帝 国 の 登 場 と 高 麗 と 日 本 の 異 なった 進 路 は 両 国 間 の 武 力 衝 突 と 深 刻 な 軍 事 対 峙 を 伴 った 高 麗 の 対 日 交 渉 の 拠 点 であった 金 州 は その 管 轄 内 の 合 浦 が 日 本 遠 征 軍 の 発 進 基 地 になり 高 麗 と 一 番 緊 密 な 交 流 地 域 だった 北 部 九 州 は 遠 征 軍 と 日 本 軍 の 激 戦 地 になってしまった 以 後 半 世 紀 以 上 にわたり 両 地 域 は 相 対 国 に 対 して 厳 しい 警 戒 態 勢 を 取 る 防 禦 基 地 化 して 通 交 は 断 絶 された 比 較 的 に 平 穏 だった 両 国 関 係 は 極 度 に 悪 くなってしまい 古 からの 制 限 的 な 通 交 さえ 行 われず 地 理 的 な 隣 接 要 因 も 作 用 して 日 本 と 大 陸 の 間 よりもっと 強 い 敵 対 的 な 緊 張 関 係 が 形 成 持 続 された 137) しかし 他 の 一 方 で 厳 密 に 言 えば 日 本 は 蒙 古 を 中 心 にした 世 界 秩 序 の 中 での 一 つの 構 成 員 として 参 加 していたことも 留 意 しなければならない 元 の 開 放 的 な 貿 易 政 策 と 日 本 の 大 陸 文 物 に 対 する 旺 盛 136) 高 麗 史 卷 110 列 傳 23 李 齊 賢 137) 南 基 鶴 고려와 일본의 상호인식 p.85
253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51 な 意 欲 を 背 景 にして 日 本 は 早 くも13 世 紀 末 から 元 との 貿 易 に 乗 り 出 している 14 世 紀 に 入 っては 寺 院 神 社 の 造 営 を 名 目 にして いわゆる 寺 社 造 営 料 唐 船 という 一 種 の 公 許 貿 易 船 が 幕 府 によって 元 に 派 遣 されるのに 至 る 政 治 軍 事 的 には 対 立 していたものの 日 本 と 大 陸 との 文 物 交 流 は 非 常 に 活 発 に 成 り 立 っていたのである ここから 後 日 の 日 明 間 の 勘 合 貿 易 の 歴 史 的 な 前 提 を 探 すことは 難 しい 事 ではない このようにみると 日 本 は 蒙 古 帝 国 の 支 配 下 の 世 界 秩 序 の 中 で ある 程 度 一 定 な 孤 立 を 維 持 しながらも 同 時 にそれへの 積 極 的 な 参 加 という 二 重 の 相 反 する 姿 を 見 せていたと 言 えよう
254
255 日 本 侵 攻 以 後 の 麗 日 関 係 佐 伯 弘 次 はじめに~モンゴル 襲 来 から 前 期 倭 寇 へ 13 世 紀 代 の 東 アジアの 政 治 的 動 向 を 大 きく 規 制 したのは モンゴル( 元 )の 動 向 である 高 麗 は 年 代 以 降 モンゴルの 激 しい 攻 撃 を 数 次 にわたって 受 けるが モンゴルに 屈 服 した 後 には その 藩 属 国 として モンゴルからの 強 い 政 治 的 制 約 を 受 けた 13 世 紀 の 後 半 に2 度 にわたるモンゴル 襲 来 を 受 けた 日 本 は 3 回 目 のモンゴル 襲 来 に 備 えて 異 国 警 固 番 役 や 石 築 地 の 築 造 異 国 降 伏 の 祈 祷 寺 社 への 徳 政 政 策 など 様 々な 政 策 を 行 った 結 局 3 回 目 のモンゴル 襲 来 は 実 行 されなかったが 異 国 警 固 番 役 や 石 築 地 の 修 築 は14 世 紀 代 まで 続 いた 元 の 日 本 招 諭 は1299 年 まで 続 き 日 元 の 間 で 外 交 関 係 が 構 築 されることはなかった しかし その 反 面 日 元 貿 易 は 活 発 に 行 われ 政 治 的 には 対 立 しながら 経 済 文 化 面 では 深 い 交 流 があると いう 政 経 分 離 の 関 係 が 長 く 続 いた これに 対 して 高 麗 と 日 本 の 間 は 外 交 関 係 はもちろんのこと 経 済 的 交 流 も 公 的 には 断 絶 したままであった これが 日 元 関 係 と 日 麗 関 係 の 大 きな 相 違 点 である 14 世 紀 中 後 期 になるとこうした 関 係 に 大 きな 変 化 があらわれる 1350 年 以 後 の 前 期 倭 寇 ( 庚 寅 以 来 の 倭 寇 )の 活 動 と 中 国 における 明 の 建 国 によって 麗 日 関 係 はもとより 東 アジアの 国 際 関 係 は 大 きく 変 化 することになった 大 きな 流 れとしては モンゴル 襲 来 ( 戦 争 )の 時 代 から 倭 寇 の 活 動 とそれへの 対 策 さらには 明 に よる 東 アジア 世 界 の 再 編 と 各 国 の 対 応 の 時 代 に 変 化 していくのである
256 25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1. モンゴル 襲 来 以 後 の 麗 日 交 渉 1) 元 使 高 麗 使 の 日 本 派 遣 1281 年 の 元 の 第 2 次 日 本 遠 征 ( 弘 安 の 役 ) 後 においても 元 の 日 本 招 諭 1)は 継 続 した フビライは 日 本 遠 征 の 準 備 をその 後 も 行 っており 日 本 側 もそれを 予 想 して 異 国 警 固 や 石 築 地 の 修 築 を 継 続 して 行 っていた 3 度 目 の 日 本 遠 征 (モンゴル 襲 来 )は 両 国 にとって 近 く 実 施 される 現 実 の 問 題 であった 1283 年 12 月 には 日 本 の 鎌 倉 幕 府 は 元 が 来 年 春 に 襲 来 するので 異 国 警 固 番 役 を 厳 重 に 行 う ように 薩 摩 国 中 の 地 頭 御 家 人 や 本 所 一 円 地 の 住 人 たちに 命 じた 翌 84 年 4 月 元 は 日 本 国 信 使 王 積 翁 や 愚 渓 如 智 らを 日 本 に 派 遣 したが 同 行 した 者 たちが 対 馬 で 積 翁 を 殺 したため 元 の 使 節 たちは 引 き 返 した 1289 年 から90 年 にかけて 日 本 の 朝 廷 周 辺 で 近 く 蒙 古 が 襲 来 する という 噂 が 流 れ 朝 廷 や 幕 府 は 主 要 な 寺 社 に 異 国 降 伏 の 祈 祷 を 命 じた しかしこれはまさに 浮 説 であり 元 の 襲 来 はなかっ た 反 フビライ 派 のモンゴル 王 族 ナヤンやカダンが 中 国 東 北 部 でフビライに 反 乱 を 起 こした この 反 乱 は 高 麗 にまで 波 及 したが 1291 年 にフビライ 側 の 勝 利 で 終 わった その 翌 年 の1292 年 5 月 日 本 商 船 が 耽 羅 に 立 ち 寄 った 時 商 人 2 名 が 現 地 の 人 に 捕 らえられた 同 年 7 月 日 本 商 船 が 元 の 慶 元 ( 寧 波 )から 帰 国 し 元 の 地 方 官 燕 公 南 の 牒 状 をもたらした その 内 容 は 不 明 であるが 鎌 倉 幕 府 が 異 国 降 伏 の 祈 祷 を 全 国 の 一 宮 国 分 寺 に 行 わせたことから モンゴルの 再 来 襲 を 予 見 させるような 内 容 であっ たと 考 えられる 高 麗 は フビライの 指 示 を 受 け 1292 年 に 耽 羅 で 捕 らえられた 日 本 商 人 を 送 還 するという 名 目 で 日 本 に 使 者 を 派 遣 した 高 麗 使 ( 宣 諭 使 ) 金 有 成 一 行 は 同 年 10 月 に 来 日 した 2) 11 月 12 日 鎮 西 ( 九 州 のこと)の 使 者 が 京 都 に 到 着 し 蒙 古 牒 状 ( 実 際 は 高 麗 牒 状 )の 到 来 を 報 じ 翌 13 日 に 六 波 羅 探 題 の 使 者 も 同 行 して 鎌 倉 に 向 かった 11 月 24 日 鎌 倉 幕 府 は 寄 合 を 開 き 北 条 兼 時 同 時 家 を 異 国 打 手 大 1) 弘 安 の 役 後 における 元 の 日 本 招 諭 に 関 しては 池 内 宏 元 寇 の 新 研 究 東 洋 文 庫 1931 年 龍 粛 蒙 古 襲 来 至 文 堂 1959 年 ; 川 添 昭 二 蒙 古 襲 来 研 究 史 論 雄 山 閣 1977 年 南 基 鶴 蒙 古 襲 来 と 鎌 倉 幕 府 臨 川 書 店 1996 年 佐 伯 弘 次 日 本 の 中 世 9 モンゴル 襲 来 の 衝 撃 中 央 公 論 新 社 2003 年 などを 参 照 また 全 般 的 に 対 外 関 係 史 総 合 年 表 編 集 委 員 会 編 対 外 関 係 史 総 合 年 表 吉 川 弘 文 館 1999 年 を 参 照 した 2) 高 麗 使 金 有 成 の 来 日 と 日 本 側 の 対 応 に 関 しては 池 内 1931 龍 1959 対 外 関 係 史 総 合 年 表 編 集 委 員 会 編 1999 佐 伯 2003などを 参 照
257 日 本 侵 攻 以 後 の 麗 日 関 係 255 将 軍 に 決 定 した 12 月 8 日 鎌 倉 幕 府 の 使 者 は 異 国 牒 状 を 持 って 上 洛 した 鎮 西 六 波 羅 探 題 ( 京 都 ) 鎌 倉 幕 府 ( 鎌 倉 ) 朝 廷 ( 京 都 )という 異 国 牒 状 伝 達 の 一 連 の 流 れは 文 永 の 役 以 前 と 全 く 変 わらな い 12 月 10 日 幕 府 の 使 者 は 関 東 申 次 西 園 寺 実 兼 に 高 麗 牒 状 を 届 け これ 以 降 朝 廷 院 内 部 で 高 麗 牒 状 への 対 策 が 検 討 される 治 天 の 君 である 後 深 草 法 王 は 対 策 について 指 示 し この 牒 状 を 無 礼 尾 籠 奇 怪 と 評 した 金 有 成 が 日 本 にもたらした 高 麗 国 書 は 高 麗 史 などに 記 されているし 金 沢 文 庫 には 写 しが 残 っ ている それによると 日 本 商 人 が 耽 羅 で 捕 らえられ フビライの 命 によって 護 送 された 経 緯 をのべ 高 麗 が 元 に 臣 属 して 国 家 を 保 ったが 宋 は 元 に 逆 らって 国 を 滅 ぼしたこと 皇 帝 フビライは 徳 が 高 い ことなどをのべ 元 への 遣 使 入 朝 を 促 している この 国 書 を 見 た 朝 廷 幕 府 は 異 国 降 伏 祈 祷 を 寺 社 に 行 わせた 先 にのべたように 幕 府 は この 使 節 の 来 日 に 危 機 感 をつのらせ 北 条 兼 時 同 時 家 を 異 国 打 手 大 将 軍 に 任 命 し 九 州 に 下 向 させ た 二 人 は 翌 1293 年 に 九 州 博 多 に 下 向 した 北 条 兼 時 は 北 条 時 宗 の 甥 であり 得 宗 と 大 変 近 い 関 係 にあったし 当 時 は 六 波 羅 探 題 北 方 という 要 職 にあった この 人 事 が 元 の 再 襲 来 を 想 定 して 並 々 ならぬ 決 意 のもとでなされたことを 物 語 っている 一 方 の 北 条 時 家 は 北 条 氏 の 有 力 一 族 名 越 氏 であ る この 二 人 の 異 国 打 手 大 将 軍 任 命 と 九 州 下 向 をもって 鎮 西 探 題 の 成 立 とみる 見 方 も 有 力 であ る 3) この 二 人 が 九 州 に 下 向 する 直 前 鎌 倉 幕 府 は 為 異 賊 警 固 所 下 遣 兼 時 々 家 於 鎮 西 也 防 戦 事 加 評 定 一 味 同 心 可 運 籌 策 且 合 戦 之 進 退 宜 随 兼 時 之 計 ( 異 賊 警 固 のため 兼 時 時 家 を 鎮 西 に 派 遣 するところである 防 戦 については 評 定 を 行 い 一 味 同 心 し 計 略 をめぐらすべきである 取 りあえず 合 戦 の 進 退 は 兼 時 の 計 らいに 随 うべきである)と 薩 摩 守 護 島 津 忠 宗 に 命 じている 4) 臨 戦 的 な 雰 囲 気 が 強 く 感 じ 取 られるが 兼 時 が 首 班 であったことがわかる こうした 異 国 打 手 大 将 軍 の 派 遣 と 前 後 して 幕 府 は 関 東 にまだ 残 っていた 九 州 に 所 領 を 持 つ 御 家 人 を 九 州 に 下 向 させ さらに 来 るべき 異 賊 合 戦 の 勲 功 賞 を 九 州 の 御 家 人 たちに 約 束 し 九 州 の 防 備 を 固 めようとした 博 多 に 下 向 した 兼 時 時 家 は 石 築 地 修 造 や 異 国 警 固 番 役 勤 仕 の 徹 底 をはかっ たようである さらに1294 年 3 月 には 北 部 九 州 沿 岸 や 島 嶼 部 で 烽 火 の 演 習 を 行 った それを 指 令 した 文 書 5)に 異 国 用 心 が 大 事 である 決 して 緩 怠 してはならない とのべ 元 の 再 襲 来 を 想 定 しての 演 習 であることがわかる しかし 元 の 再 襲 来 はなく 兼 時 時 家 は1295 年 4 月 に 関 東 に 帰 った 日 本 側 の 史 料 6)によると 1293 年 4 月 に 幕 府 の 計 らいで 異 国 牒 使 を 本 国 へ 送 還 したとしているが 3) 例 えば 村 井 章 介 アジアのなかの 中 世 日 本 校 倉 書 房 1988 年 4) 島 津 家 文 書 正 応 6 年 3 月 21 日 関 東 下 知 状 大 日 本 古 文 書 島 津 家 文 書 之 一 34 5) 来 島 文 書 永 仁 2 年 3 月 6 日 北 条 定 宗 書 下 ( 鎌 倉 遺 文 24 巻 号 ) 6) 師 守 記 貞 治 6 年 5 月 9 日 条
258 25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高 麗 史 列 伝 金 有 成 によると 金 有 成 は 日 本 に 抑 留 されたまま 帰 国 せず 1307 年 7 月 5 日 に 日 本 で 病 死 したとする いずれが 正 しいのかはわからないが 文 永 の 役 以 後 の 元 使 は 幕 府 によって 殺 害 さ れることを 例 としており あるいは 高 麗 使 節 は 帰 国 できなかったのかもしれない 1298 年 日 本 の 商 船 が 元 の 明 州 ( 慶 元 )に 到 った 翌 年 この 船 が 帰 国 するとき 元 使 ( 国 信 使 ) 一 山 一 寧 が 便 乗 して 日 本 に 渡 航 した 従 来 の 元 使 は 高 麗 経 由 で 高 麗 の 案 内 を 前 提 とした 日 本 に 派 遣 されることが 恒 例 であり 慶 元 から 海 路 しかも 日 本 からの 貿 易 船 に 便 乗 して 来 日 するのは 初 めてで あった 禅 僧 が 正 使 に 任 じられるのも 異 例 であった 一 山 一 寧 は 10 月 には 鎌 倉 に 到 着 している そ の 後 一 寧 は 帰 国 することなく 建 長 寺 の 住 持 となるなど 日 本 の 禅 宗 界 で 重 きをなした これが 最 後 の 元 の 日 本 招 諭 の 使 者 であったが これも 成 功 しなかった 2) 日 本 の 大 陸 軍 事 情 報 の 収 集 弘 安 の 役 直 後 から 日 本 が 元 高 麗 の 軍 事 情 報 の 入 手 に 努 力 したことが 明 らかにされている 7) すな わち 1282 年 に 日 本 は 賈 祐 という 弘 安 の 役 の 南 宋 降 兵 を 江 南 に 派 遣 し 元 の 遠 征 計 画 を 偵 察 して いた 日 本 商 船 に 便 乗 して 入 元 する 日 本 僧 も 偵 察 の 役 目 をになった こうした 元 の 偵 察 は おそらく 幕 府 の 主 導 で 行 われたと 推 測 される 南 宋 の 滅 亡 を 日 本 に 伝 えたのは 貿 易 船 であった 文 永 の 役 後 も 日 元 貿 易 は 行 われており 日 元 貿 易 船 が 元 の 偵 察 の 受 け 皿 になったことは 容 易 に 推 測 できる 高 麗 に 対 しても 弘 安 の 役 の 直 前 に 高 麗 の 軍 事 基 地 がある 合 浦 周 辺 で 漁 者 が 連 続 して 倭 賊 に よってさらわれているのは 高 麗 の 軍 事 情 報 を 得 るための 偵 察 行 動 であると 位 置 づけられている 世 紀 の 麗 日 関 係 1) 前 期 倭 寇 の 活 動 前 期 倭 寇 が 活 動 する1350 年 より 以 前 にも 倭 寇 の 活 動 がある 13 世 紀 前 半 に 小 さなピークを 迎 える 倭 寇 を 初 期 倭 寇 と 呼 ぶ 14 世 紀 代 になると 元 に 対 する 倭 寇 活 動 が 行 われた これは 元 寇 を 契 機 とし て 元 側 が 日 本 商 人 に 対 する 迫 害 を 行 い これに 対 する 日 本 商 人 の 自 衛 的 な 暴 力 行 為 が 海 賊 団 の 発 生 展 開 につながったという 説 8)があったが 近 年 の 研 究 9)では こうした 日 本 人 の 倭 寇 行 為 は 元 7) 南 1996 pp
259 日 本 侵 攻 以 後 の 麗 日 関 係 257 側 の 現 地 役 人 の 日 本 商 人 への 侵 漁 に 対 する 暴 動 事 件 であり 決 して 組 織 的 計 画 的 な 海 賊 行 為 では なかったことが 明 らかにされている 1323 年 6 月 に 倭 が 会 元 の 漕 船 を 群 山 島 で 掠 奪 し 楸 子 島 に 寇 し 老 弱 男 女 を 虜 にして 去 ったとい う 事 件 10)が 起 こった 漕 船 の 襲 撃 と 被 虜 人 の 掠 奪 は 前 期 倭 寇 の 特 徴 でもあり 前 期 倭 寇 に 連 なる 海 賊 行 為 であるといえる したがって 庚 寅 以 来 の 倭 寇 は 少 数 ながら14 世 紀 前 半 からすでに 起 こって いる 点 を 確 認 しておきたい 1350 年 2 月 倭 が 固 城 竹 林 巨 済 に 寇 した 11) 合 浦 千 戸 崔 禅 らがこれと 戦 い 三 百 余 級 を 斬 獲 し た 倭 寇 の 侵 ここに 始 まる と 高 麗 史 が 記 すように この 事 件 以 降 倭 寇 の 活 動 が 急 に 活 発 化 し 朝 鮮 半 島 を 頻 繁 に 襲 撃 するようになった 倭 賊 祈 穣 法 席 倭 賊 防 禦 使 という 語 句 が 高 麗 史 に 散 見 するように 当 初 倭 寇 は 高 麗 政 府 から 倭 賊 と 称 されていたようである こうした 前 期 倭 寇 の 関 しては いくつかの 時 期 区 分 がなされている 田 中 健 夫 氏 は 大 きく4 時 期 に 分 けた 12) 第 1 期 は1350 年 2 月 以 降 の 初 期 の 段 階 第 2 期 は 恭 愍 王 の 時 代 (1352~74)で 倭 寇 活 動 が 本 格 化 した 時 期 第 3 期 は 倭 寇 活 動 の 最 盛 期 で 辛 禑 王 (1375~88) 代 に 極 点 に 達 する 第 4 期 は 倭 寇 勢 力 の 減 退 期 であり 高 麗 恭 譲 王 の 時 代 から 朝 鮮 太 祖 定 宗 太 宗 の 時 期 にあたる その 大 きな 画 期 となったのが 1389 年 2 月 の 高 麗 軍 による 対 馬 攻 撃 であったとする 田 村 洋 幸 氏 は 大 きく 初 期 中 期 終 焉 期 の3 期 細 かくは6 期 に 時 期 区 分 している 13) 頻 度 が 少 ない 初 期 は1350~73 年 で 倭 寇 に 対 する 無 策 の 時 期 である 前 半 期 (1350~62 年 )と 積 極 的 に 倭 人 招 致 策 を 立 て 進 んで 日 本 に 禁 賊 を 請 う 後 半 期 (1364~73 年 )に 分 ける 最 盛 期 である 中 期 は1374~89 年 であり 倭 寇 猖 獗 期 の 前 半 期 (1374~80 年 )と 漸 次 衰 勢 に 向 かう 後 半 期 (1381 年 ~89 年 )に 分 ける 倭 寇 終 焉 期 の 終 焉 期 は1390~1418 年 で 小 規 模 の 非 組 織 的 倭 寇 と 大 船 団 の 倭 寇 が 混 じる 前 半 期 (139 0~1400 年 )と 小 規 模 化 する 後 半 期 (1401~18 年 )に 分 ける 両 者 の 時 期 区 分 は 細 かい 年 代 については 相 違 しているが 1350 年 以 降 次 第 に 増 加 し 辛 禑 王 の 時 期 に 最 盛 期 を 迎 え 高 麗 末 から 朝 鮮 初 期 に 衰 退 するという 流 れは 共 通 している 日 本 におけるかつての 通 説 14)では 倭 寇 たちの 主 要 な 目 的 は 漕 船 倉 稟 等 の 襲 撃 による 食 糧 の 掠 奪 と 人 の 掠 奪 であったとされている その 根 拠 地 の 中 心 は 対 馬 壱 岐 松 浦 地 方 の 三 島 地 域 であり 8) 森 克 己 新 訂 日 宋 貿 易 の 研 究 国 書 刊 行 会 1975 年 9) 榎 本 ) 高 麗 史 世 家 忠 粛 10 年 (1323)6 月 丁 亥 同 戊 子 条 11) 高 麗 史 世 家 忠 定 王 2 年 2 月 条 12) 田 中 健 夫 倭 寇 と 勘 合 貿 易 至 文 堂 1966 年 pp ) 田 村 洋 幸 中 世 日 朝 貿 易 の 研 究 第 2 章 三 和 書 房 1967 年 14) 田 中 健 夫 中 世 海 外 交 渉 史 の 研 究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59 年 田 中 196な
260 25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その 発 生 の 主 要 な 原 因 は 農 業 生 産 によっては 島 民 の 生 計 を 維 持 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 三 島 の 経 済 的 事 情 であったとされる さらに 高 麗 朝 鮮 側 の 外 交 政 策 や 倭 寇 懐 柔 政 策 等 によって 倭 寇 たち は 向 化 倭 ( 投 化 倭 )や 使 送 倭 人 興 利 倭 人 等 に 変 質 していった ともされている 1980 年 代 後 半 日 本 では これまでの 倭 寇 の 理 解 を 大 きく 変 える 研 究 が 相 次 いだ 田 中 健 夫 氏 15) は 大 規 模 集 団 倭 寇 の 実 体 を 検 討 し 大 量 の 人 員 船 舶 馬 匹 の 洋 上 移 動 を 考 えると 倭 寇 が 日 本 人 のみの 海 賊 集 団 であるという 考 えは 不 自 然 であり 大 規 模 倭 寇 集 団 は 日 本 と 高 麗 朝 鮮 両 国 人 民 と の 連 合 によって 成 立 したという 説 を 提 示 した いっぽう 高 橋 公 明 氏 16)は 倭 服 を 着 て 倭 語 を 話 し 各 地 を 移 動 する 済 州 島 の 海 民 を 検 討 するな かで 倭 寇 に 朝 鮮 国 内 のかなりの 海 上 勢 力 が 関 与 しており その 基 層 部 分 を 済 州 島 の 海 民 が 担 った という 説 を 示 した 日 本 においては この 両 氏 の 新 しい 考 え 方 は 倭 寇 研 究 に 大 きなインパクトを 与 えたが いっぽうで 様 々な 批 判 の 対 象 ともなった 浜 中 昇 氏 17)は こうした 田 中 健 夫 氏 高 橋 公 明 氏 の 見 解 に 批 判 を 加 え た 高 麗 史 高 麗 史 節 要 の 夥 しい 倭 寇 記 事 のなかで 高 麗 の 民 が 詐 って 倭 賊 となったことを 示 す 事 例 は2 例 にすぎず 倭 人 不 過 一 二 という1446 年 の 李 順 蒙 の 言 は 裏 付 ける 史 料 がないこと 高 麗 朝 鮮 の 禾 尺 才 人 たちが 盗 賊 行 為 を 働 く 記 事 は 多 いが 彼 らと 倭 人 たちとの 連 合 を 示 す 史 料 がないこと 済 州 島 などの 海 民 を 海 賊 集 団 として 組 織 しうるような 主 体 は 朝 鮮 国 内 にはなく 朝 鮮 半 島 南 部 の 海 民 が 高 麗 末 期 の 倭 寇 に 参 加 したとしても 個 別 的 な 次 元 に 止 まったこと 倭 人 日 本 人 による 大 規 模 な 倭 寇 は 可 能 であることなどを 指 摘 し 朝 鮮 半 島 南 部 の 海 民 が 個 別 に 参 加 した 可 能 性 はあるが 倭 寇 を 構 成 したのは 基 本 的 に 倭 人 ないし 日 本 人 であったとした 村 井 章 介 氏 18)は 禾 尺 才 人 たちが 倭 賊 を 偽 装 したことはあったが それは 彼 らが 倭 賊 と 連 合 して 一 つの 集 団 となって 倭 寇 行 為 を 行 ったことを 示 すものではないこと 李 順 蒙 の 言 は 国 家 の 役 を 逃 れ ているものが 非 常 に 多 く 軍 隊 の 数 が 足 りなくなっているという 文 脈 のもとで 記 されたものであり その まま 信 用 することはできないことを 指 摘 し 田 中 説 を 批 判 した 李 領 氏 19)は 庚 寅 年 の 倭 寇 は 足 利 直 冬 の 攻 勢 に 慌 てた 少 弐 頼 尚 が 対 馬 の 軍 勢 を 動 員 し 兵 粮 米 を 求 めて 高 麗 に 攻 め 入 ったものであるという 新 しい 見 解 を 示 し 倭 寇 は 海 賊 に 限 定 すべきではなく 15) 田 中 健 夫 倭 寇 と 東 アジア 通 交 圏 日 本 の 社 会 史 1 岩 波 書 店 1987 年 16) 高 橋 公 明 中 世 東 アジア 海 域 における 海 民 と 交 流 済 州 島 を 中 心 に 名 古 屋 大 学 文 学 部 研 究 論 集 史 学 年 17) 浜 中 昇 高 麗 末 期 倭 寇 集 団 の 民 族 構 成 近 年 の 倭 寇 研 究 に 寄 せて 歴 史 学 研 究 年 18) 村 井 章 介 倭 寇 の 他 民 族 性 をめぐって 大 隅 和 雄 村 井 章 介 編 中 世 後 期 における 東 アジアの 国 際 関 係 山 川 出 版 社 1997 年 19) 李 領 倭 寇 と 日 麗 関 係 史 第 4 章 第 5 章 東 京 大 学 出 版 会 1999 年
261 日 本 侵 攻 以 後 の 麗 日 関 係 259 むしろ 悪 党 というより 広 い 社 会 的 階 層 であり 多 くの 倭 寇 集 団 は 公 権 力 とくに 南 朝 側 と 強 く 結 ばれ ていたこと 田 中 健 夫 氏 の 禾 尺 才 人 = 倭 寇 論 に 関 しては 大 規 模 の 禾 尺 才 人 が 倭 寇 と 連 合 したこと を 立 証 しうる 史 料 はないこと 高 橋 公 明 氏 の 済 州 島 人 = 倭 寇 論 に 関 しては 済 州 島 人 が 倭 寇 であるこ とを 示 す 史 料 は 皆 無 であること 倭 寇 = 高 麗 人 主 体 論 を 述 べた 李 順 蒙 に 関 しては 倭 寇 に 関 する 記 事 が 伝 聞 に 基 づくものであり 李 順 蒙 の 人 格 性 向 が 狂 妄 とされ その 発 言 も 信 用 しがたいことを 指 摘 した 以 上 の3 氏 の 見 解 は 田 中 氏 高 橋 氏 の 新 見 解 を 真 っ 向 から 批 判 するものであり 前 期 倭 寇 の 主 体 を 日 本 人 と 高 麗 朝 鮮 人 の 連 合 としたり 高 麗 朝 鮮 人 とする 理 解 は 再 検 討 すべきであるといえる むしろ 旧 説 の 日 本 人 主 体 説 が 見 直 されてきている 20) ただし 庚 寅 年 の 倭 寇 は 少 弐 氏 が 派 遣 したも のであるという 李 領 氏 の 見 解 には 日 本 の 学 界 は 否 定 的 である 21) いっぽう 中 国 で 活 動 した 前 期 倭 寇 に 関 しては 元 時 代 に 関 しては 史 料 が 乏 しいが 1358~63 年 ごろ 連 年 倭 寇 は 沿 海 の 郡 県 を 襲 撃 していた 22) 元 末 の 倭 寇 については 方 国 珍 ら 群 雄 の 反 乱 と 関 連 づけて 研 究 が 行 われている 浙 江 沿 海 部 を 拠 点 とした 方 国 珍 は その 配 下 に 舟 山 列 島 などの 海 民 がおり 彼 らが 島 夷 すなわち 倭 寇 と 結 託 して 海 賊 活 動 をしていたこと 方 国 珍 や 張 士 誠 の 滅 亡 後 その 配 下 の 諸 豪 は 亡 命 し 島 夷 と 手 を 結 び 中 国 沿 海 に 入 寇 したことなどが 指 摘 されている 23) こうした 倭 寇 と 中 国 沿 海 部 の 海 民 の 連 合 による 中 国 沿 海 への 入 寇 と 高 麗 への 襲 撃 がどのように 関 係 するのかが 今 後 検 討 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 倭 寇 は 東 アジア 全 体 で 活 動 したのであり 東 アジア 的 ス ケールで 検 討 すべき 時 に 来 ている 2) 高 麗 の 日 本 への 使 節 派 遣 と 日 本 側 の 対 応 1 金 竜 金 逸 の 来 日 (1366 年 ) 倭 寇 の 活 発 化 という 状 況 に 直 面 した 高 麗 は 倭 寇 禁 圧 を 要 請 する 使 者 を 日 本 に 派 遣 した 1366 年 20) 橋 本 雄 米 谷 均 倭 寇 論 のゆくえ 桃 木 至 朗 編 海 域 アジア 史 研 究 入 門 岩 波 書 店 2008 年 21) 森 茂 暁 南 朝 全 史 講 談 社 2005 年 橋 本 米 谷 ) 榎 本 渉 東 アジア 海 域 と 日 中 交 流 九 ~ 一 四 世 吉 川 弘 文 館 2007 年 pp ) 奥 崎 裕 司 方 国 珍 の 乱 と 倭 寇 明 代 史 研 究 会 編 山 根 幸 夫 教 授 退 休 記 念 明 代 史 論 叢 上 汲 古 書 院 1990 年 藤 田 明 良 蘭 秀 山 の 乱 と 東 アジアの 海 域 世 界 歴 史 学 研 年 熊 遠 報 倭 寇 と 明 代 の 海 禁 中 国 学 界 の 視 点 から 中 世 後 期 における 東 アジアの 国 際 関 係 1997 年 壇 上 寛 方 国 珍 海 上 勢 力 と 元 末 明 初 の 浙 江 沿 海 地 域 社 会 京 都 女 子 大 学 東 洋 史 研 究 室 編 東 アジア 海 洋 域 圏 の 史 的 研 究 京 都 女 子 大 学 2003 年
262 26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9 月 高 麗 の 使 者 金 竜 らが 出 雲 に 到 着 した 24) 金 有 成 の 遣 使 以 来 実 に 七 十 余 年 ぶりの 遣 使 である 一 行 は 出 雲 で 方 物 を 奪 われたが 翌 年 2 月 に 上 京 し 天 龍 寺 に 宿 した 同 寺 への 宿 泊 は 室 町 幕 府 の 計 らいであったと 考 えられる 彼 らに 若 干 遅 れて 高 麗 から 金 逸 が 別 途 到 着 し 同 じく 天 龍 寺 に 宿 した 当 初 京 都 では 蒙 古 ならびに 高 麗 使 が 牒 状 を 持 って 来 朝 した いう 噂 が 広 がったが 後 に 高 麗 の 使 者 であることが 判 明 した 金 竜 が 持 参 した 牒 状 ( 外 交 文 書 )は 室 町 幕 府 を 経 て 朝 廷 に 伝 達 され た 蒙 古 襲 来 時 の 対 応 と 同 じである この 一 連 の 高 麗 の 外 交 文 書 は 現 存 している これによると 元 の 征 東 行 中 書 省 ( 高 麗 王 が 長 官 )が 日 本 国 に 対 して 至 正 10 年 (1350) 以 降 日 本 の 賊 船 多 数 が 高 麗 を 襲 撃 し 役 所 を 焼 き 民 衆 を 悩 ませているため 日 本 が 海 島 に 対 して 厳 重 に 禁 圧 を 加 えるように 依 頼 し たものであった さらに 高 麗 史 によれば 遅 れて 派 遣 された 金 逸 の 派 遣 目 的 も 日 本 に 行 き 海 賊 を 禁 ずることを 請 う ためであった 朝 廷 で この 牒 状 に 対 する 対 応 が 協 議 されているとき 室 町 幕 府 は 高 麗 使 一 行 を 厚 くもてなし 奈 良 大 仏 殿 への 観 光 も 行 っている 同 年 5 月 には 朝 廷 で 高 麗 への 返 牒 を 行 わないことが 決 定 し た これに 対 して 室 町 幕 府 が 返 牒 を 作 成 し 種 々の 贈 物 を 使 節 に 与 え 天 龍 寺 僧 を 使 者 として 派 遣 し 一 行 を 送 還 した これによって 日 本 の 外 交 を 室 町 幕 府 が 管 轄 するという 先 例 が 作 られた 倭 寇 禁 圧 要 求 の 高 麗 使 者 派 遣 は 日 本 においては 外 交 権 の 移 動 という 重 要 な 転 換 をもたらしたのである 2 羅 興 儒 の 来 日 (1375 年 ) 1375 年 2 月 高 麗 は 羅 興 儒 を 通 信 使 として 日 本 に 派 遣 した 25) 高 麗 史 列 伝 によると 羅 興 儒 が 日 本 に 到 ると 日 本 側 は 興 儒 を 諜 者 と 疑 って 捕 らえた 鄭 夢 周 伝 によると 夢 周 が 拘 禁 されたの は 博 多 であり 博 多 の 主 将 ( 九 州 探 題 か)が 拘 禁 したと 記 している 高 麗 出 身 の 僧 良 柔 が 興 儒 を 見 て 赦 されるように 請 うたという 1375 年 11 月 6 日 室 町 幕 府 は 高 麗 使 之 羅 興 儒 以 下 同 進 物 等 を 召 し 上 げるため 播 磨 守 護 に 対 して 人 夫 伝 馬 を 用 意 し 警 固 を 行 い 通 過 させるように 命 じた 26) すな わち1375 年 11 月 ~12 月 ごろ 羅 興 儒 一 行 は 播 磨 国 付 近 を 京 都 に 向 けて 通 過 した その 後 翌 76 年 5 月 3 日 近 衛 道 嗣 のもとへ 公 家 の 一 人 が 倭 寇 禁 止 を 求 める 高 麗 国 牒 状 を 持 参 した( 愚 管 記 ) 道 嗣 は 国 家 の 重 事 であるから 殿 上 定 を 行 うように 申 し 入 れた その 後 の 詳 しい 状 況 は 不 明 であるが 羅 興 儒 一 行 は1376 年 10 月 に 帰 国 した この 時 室 町 幕 府 は 僧 良 柔 を 使 者 として 高 麗 に 派 遣 した こ 24) 金 竜 金 逸 の 来 日 に 関 しては 青 山 公 亮 日 麗 交 渉 史 の 研 究 第 8 章 明 治 大 学 1955 年 中 村 栄 孝 太 平 記 に 見 える 高 麗 人 の 来 朝 同 日 鮮 関 係 史 の 研 究 上 吉 川 弘 文 館 1965 年 参 照 25) 羅 興 儒 以 後 の 遣 使 については 主 とし 青 山 195 対 外 関 係 史 編 集 委 員 会 編 1999を 参 照 し 26) 東 寺 百 合 文 よ 函 60 人 夫 役 文 書 案 相 生 市 史 第 8 巻 上 相 生 市 1992 年 pp
263 日 本 侵 攻 以 後 の 麗 日 関 係 261 の 時 禅 僧 周 佐 が 記 した 私 信 形 式 の 外 交 文 書 が 高 麗 史 辛 禑 伝 に 引 用 されている これには 我 が 西 海 道 の 九 州 は 乱 臣 が 割 拠 し 年 貢 を 納 めないこと20 年 以 上 になる 西 海 道 の 頑 民 が 敵 の 隙 に 乗 じて 入 寇 した 私 の 行 ったことではない このため 朝 廷 は 武 将 を 派 遣 して 倭 寇 たちを 征 討 し その 地 に 深 く 入 って 敵 味 方 が 合 戦 し 日 々 戦 っている 願 わくは 九 州 を 回 復 すれば 天 に 誓 って 海 寇 を 禁 止 する という 日 本 側 の 事 情 が 記 されている 倭 寇 の 根 拠 地 である 九 州 の 支 配 が 果 たされないため 倭 寇 の 禁 圧 ができないというのである 当 時 の 室 町 幕 府 の 事 情 がストレートに 語 られている 3 安 吉 常 の 来 日 (1377 年 ) 1377 年 6 月 高 麗 は 安 吉 常 ( 吉 祥 ともある)を 日 本 に 遣 わし 禁 賊 を 要 請 した 高 麗 史 にはこの 時 の 国 書 の 一 部 が 引 用 されている 安 吉 常 は 日 本 で 病 死 したという 東 寺 領 播 磨 国 矢 野 荘 のこの 年 の 算 用 状 には 高 麗 人 上 洛 人 夫 催 促 使 雑 事 と 同 下 向 時 送 夫 催 促 使 雑 事 が 記 されている 27) 羅 興 儒 の 時 と 同 様 に 播 磨 国 の 沿 道 の 荘 園 に 人 夫 伝 馬 等 が 賦 課 されたのである これは 播 磨 一 国 の みではなく 高 麗 使 が 通 行 する 沿 道 には 一 様 に 同 様 の 賦 課 がなされたと 考 えられる この 年 の8 月 に 日 本 国 は 僧 信 弘 を 高 麗 に 派 遣 し 倭 寇 禁 圧 が 容 易 でない 事 情 を 伝 えた この 信 弘 は 室 町 幕 府 ではなく 九 州 探 題 今 川 了 俊 が 派 遣 した 使 僧 であったことが 明 らかにされている 28) 了 俊 は 翌 年 6 月 に 信 弘 に 軍 69 人 を 率 いて 倭 賊 を 捕 らえさせようとした 7 月 に 信 弘 は 倭 寇 と 戦 い 船 1 艘 を 捕 獲 し 被 虜 婦 女 20 余 人 を 救 出 した 11 月 に 再 び 倭 賊 と 戦 ったが 勝 たず 遂 に 帰 国 した 4 鄭 夢 周 の 来 日 (1377 年 ) 1377 年 9 月 高 麗 は 鄭 夢 周 を 日 本 に 派 遣 し 禁 賊 を 要 請 した 高 麗 史 鄭 夢 周 伝 によると 鄭 夢 周 は 博 多 で 古 今 交 隣 の 利 害 を 極 陳 し 主 将 ( 今 川 了 俊 か)を 敬 服 させたという 鄭 夢 周 は 日 本 で 詠 んだ 漢 詩 を 残 している( 圃 隠 先 生 文 集 ) 夢 周 は 翌 78 年 7 月 日 本 から 帰 国 した 九 州 探 題 今 川 了 俊 は 周 孟 仁 を 使 者 として 派 遣 し 同 行 させ 尹 明 ら 数 百 人 の 被 虜 人 を 送 還 し 三 島 の 倭 寇 の 禁 圧 を 約 束 した 78 年 6 月 に 東 寺 領 播 磨 国 矢 野 荘 に 守 護 代 から 高 麗 人 送 夫 催 促 使 雑 事 が 賦 課 さ れている 29) のは 鄭 夢 周 が 京 都 から 帰 国 途 上 のことと 考 えられる 安 吉 常 の 使 節 派 遣 以 来 室 町 幕 府 よりもむしろ 博 多 の 九 州 探 題 との 交 渉 が 重 要 と 位 置 づけられた 感 があり 使 節 の 送 還 も 九 州 探 題 が 行 っている 鄭 夢 周 伝 によると 倭 寇 たちが 高 麗 の 良 家 の 子 弟 を 奴 隷 としているのをあわれみ 被 虜 人 の 身 27) 対 外 関 係 史 編 集 委 員 会 編 ) 青 山 ) 対 外 関 係 史 編 集 委 員 会 編 1999
264 262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代 金 を 払 って 帰 国 させようと 図 り 廷 臣 から 拠 出 させた 資 金 をもとに 元 被 虜 人 の 尹 明 を 博 多 に 派 遣 し 被 虜 人 百 余 人 の 送 還 に 成 功 したという 被 虜 人 の 送 還 が 使 節 たちの 重 要 な 使 命 であったことを 物 語 っ ている 5 李 子 庸 韓 国 柱 の 来 日 (1378 年 ) 1978 年 10 月 高 麗 は 李 子 庸 韓 国 柱 の 両 名 を 日 本 に 派 遣 し 禁 賊 を 要 請 し 今 川 了 俊 に 金 銀 酒 器 等 を 贈 った 翌 79 年 5 月 韓 国 柱 は 帰 国 した 大 内 義 弘 は 朴 居 士 に 軍 186 人 を 率 いさせて 韓 国 柱 に 同 行 させた 同 年 7 月 には 李 子 庸 が 帰 国 した 今 川 了 俊 は 被 虜 人 230 余 口 を 帰 し 槍 等 を 献 上 した 高 麗 の 交 渉 先 はますます 西 国 の 大 名 たちにシフトした 6 尹 思 忠 の 来 日 (1379 年 ) 1379 年 閏 5 月 高 麗 は 尹 思 忠 を 日 本 に 派 遣 した 日 本 での 活 動 や 帰 国 年 など 詳 しいことは 不 明 である 以 上 のように 高 麗 の 倭 寇 禁 圧 要 求 に 応 えたのは 外 交 権 を 掌 握 しつつあった 室 町 幕 府 ではなく 今 川 了 俊 や 大 内 義 弘 といった 西 国 の 有 力 大 名 たちであった 室 町 幕 府 は 何 も 行 動 しなかったわけではな く 例 えば1381 年 8 月 6 日 大 隅 守 護 今 川 了 俊 に 対 して 当 国 の 悪 党 人 たちが 高 麗 に 渡 って 狼 藉 をするので 厳 重 に 制 止 すべきである と 大 隅 国 の 倭 寇 の 禁 圧 を 命 じている 30) 高 麗 の 倭 寇 禁 圧 の 要 求 に 幕 府 としても 応 えようとしたのであるが 実 際 に 現 地 で 禁 圧 を 行 うのは 守 護 大 名 や 地 域 の 領 主 たちであった 今 川 了 俊 は 多 くの 被 虜 人 を 高 麗 朝 鮮 に 送 還 し その 見 返 りとして 大 蔵 経 を 要 求 したりしている 31) 高 麗 使 臣 が 金 銭 でもって 被 虜 人 の 購 入 送 還 を 意 図 したことに 象 徴 されるように 被 虜 人 の 送 還 は 貿 易 上 の 優 遇 や 貿 易 そのものの 拡 大 といった 利 点 があった おわりに 以 上 のような 高 麗 の 頻 繁 な 外 交 努 力 は 西 国 有 力 大 名 に 着 目 することによって ある 程 度 の 成 果 があったと 考 えられる 1380 年 代 になると 倭 寇 は 減 少 傾 向 となる いまひとつこの 時 期 に 注 目 されるのは 三 島 の 一 角 対 馬 の 島 主 宗 氏 の 動 向 である 高 麗 史 によると 1368 年 7 月 対 馬 島 万 戸 が 高 麗 に 遣 使 し 土 物 を 献 上 した 高 麗 は 閏 9 月 に 講 究 使 を 対 30) 寝 文 書 永 徳 元 年 8 月 6 日 室 町 幕 府 御 教 案 南 北 朝 遺 文 九 州 編 巻 号 31) 川 添 昭 二 対 外 関 係 の 史 的 展 開 第 5 章 文 献 出 版 1996 年
265 日 本 侵 攻 以 後 の 麗 日 関 係 263 馬 に 派 遣 11 月 には 対 馬 島 万 戸 崇 宗 慶 が 高 麗 に 遣 使 来 朝 し 高 麗 は 宗 慶 に 米 千 石 を 与 えた 崇 宗 慶 ( 宗 宗 慶 )は 本 宗 家 の 宗 経 茂 であり 先 の 対 馬 島 万 戸 とも 同 一 人 であろう 宗 経 茂 はこのころから 高 麗 に 遣 使 し 高 麗 との 通 交 関 係 を 結 ぼうとした おそらく 宗 氏 は 対 馬 近 海 における 高 麗 使 の 護 送 にも 関 与 したと 考 えられる こうした 遣 使 と 米 の 給 与 は 次 代 の 朝 鮮 時 代 における 宗 氏 と 朝 鮮 との 関 係 と 共 通 するものであり 中 世 日 朝 関 係 は 14 世 紀 後 半 の 高 麗 末 期 から 準 備 されつつあったということができる
266
267 토론문 일본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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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発 表 者 : 李 在 範 討 論 者 : 榎 本 渉 李 在 範 氏 の 報 告 は 前 期 麗 日 関 係 史 のトピックを 国 家 間 関 係 交 易 関 係 文 化 的 交 流 軍 事 的 葛 藤 漂 流 民 送 還 進 奉 関 係 の6つに 分 けて 概 観 したものだが 韓 国 日 本 双 方 の 史 料 研 究 史 を 踏 まえた 視 野 の 広 いもので 知 見 の 少 ない 当 該 分 野 でどのような 問 題 があるのか よく 整 理 されているという 印 象 を 受 けた 私 はこの 報 告 について 三 点 ほど 感 じたことを 述 べてみたい 1 李 氏 の 整 理 した6 項 目 は 李 氏 の 麗 日 関 係 史 に 対 する 理 解 を 反 映 したものとなっているが 相 互 に 関 係 が 深 い 項 目 もある たとえば 漂 流 民 逃 亡 人 戦 争 捕 虜 の 送 還 は しばしば 国 家 や 地 方 官 の 間 で 行 なわれているが 人 民 を 本 来 属 する 国 に 戻 すか 帰 化 人 として 受 け 入 れるかは 本 来 は 国 家 的 な 統 治 権 支 配 権 に 属 する 事 項 であり(10 世 紀 以 後 の 日 本 では 実 態 としては 必 ずしもそう ではなくなるが) その 送 還 はしばしば 国 家 レベルで 行 なわれた したがって 漂 流 民 送 還 という 機 会 に 当 たっては 国 家 間 の 交 渉 も 持 たれることになる 実 は 李 氏 が 国 家 間 関 係 として 挙 げたものには 漂 流 民 送 還 を 目 的 としたものが 散 見 する たとえ ば997 年 の 高 麗 からの 牒 状 送 付 については 抑 高 麗 使 大 宰 人 也 と 言 われ( 小 右 記 長 徳 3/6/1 3) この 時 に 日 本 で 出 された 太 政 官 符 には 須 専 国 信 先 達 大 府 何 脅 断 綆 漂 流 之 客 以 為 行 李 とあり( 水 左 記 承 暦 4/9/4) 高 麗 が 大 宰 府 の 漂 流 民 を 日 本 に 送 還 する 際 に 牒 状 を 託 したことが 知 られる また1051 年 の 高 麗 牒 状 については 高 麗 国 牒 状 定 返 上 日 向 国 女 事 ( 百 錬 抄 永 承 6 /7/10)とあり 日 向 の 女 性 を 日 本 に 送 還 した 際 に 牒 状 も 送 ったものだった これを 踏 まえると 成 果 を 出 さなかった 高 麗 建 国 当 初 の 外 交 交 渉 (937~940 年 )や 国 王 の 病 気 を 治 すための 医 者 派 遣 要 請 という 特 殊 な 事 例 (1080 年 )を 除 き 李 氏 が 麗 日 間 の 国 家 間 関 係 としたも ののすべては 漂 流 民 戦 争 捕 虜 の 送 還 に 限 定 される 1) 意 図 しない 人 民 の 移 動 が 両 国 間 で 起
270 268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こった 時 に その 解 決 の 過 程 で 国 家 間 関 係 が 問 題 とされたのであり 言 い 換 えればそうした 偶 発 的 な 事 件 以 外 に 国 家 レベルで 交 渉 が 行 なわれることは 無 かったということでもある 李 氏 の 挙 げた6 項 目 中 で 国 家 間 関 係 と 漂 流 民 送 還 は 特 に11 世 紀 以 前 に 関 しては 極 めて 密 接 な 関 係 を 持 つこと になろう 漂 流 民 を 自 国 民 として 受 け 入 れたり 拘 束 したりする 選 択 肢 もあるのだから 漂 流 問 題 の 下 位 レベルに 属 する 一 トピックとして 国 家 間 関 係 を 整 理 することすら 可 能 である 以 上 は 李 氏 による 分 類 に 異 議 を 唱 えたわけではなく 分 類 という 作 業 の 限 界 を 示 すために 述 べた に 過 ぎない 李 氏 の 報 告 は 関 係 資 料 の 分 類 を 主 な 目 的 としたもので どのような 問 題 があるのかに ついては 分 かりやすくなったが 分 類 作 業 は 各 トピックを 横 並 びに 提 示 することで 相 互 の 関 係 を 見 え づらくする 側 面 もある( 国 家 間 関 係 と 漂 流 問 題 の 他 には 進 奉 関 係 と 軍 事 的 葛 藤 交 易 関 係 と 文 化 的 交 流 進 奉 関 係 なども) その 先 にある 作 業 として 今 度 は 分 類 した 各 トピックを 有 機 的 に 結 び 付 けて 行 くことが 求 められよう それによって 李 氏 報 告 冒 頭 で 困 難 であるとした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を 全 体 的 にある 特 徴 的 な 状 況 として 言 うこと も 一 定 の 筋 道 が 立 ってくるものと 思 われる 2 第 3 章 の 交 易 関 係 に 関 しては 主 に 日 本 からの 商 人 来 航 に 関 する 高 麗 史 記 事 が 挙 げられて いる だがこれとは 別 に 第 4 章 の 文 化 的 交 流 のところで 1095~1120 年 に 宋 商 人 が 高 麗 で 仏 典 を 購 入 して 日 本 にもたらした 記 事 がいくつか 挙 げられている これらも 高 麗 と 日 本 の 間 の 物 の 移 動 という 意 味 では 明 らかに 麗 日 貿 易 の 事 例 である 宋 商 人 の 麗 日 貿 易 関 与 の 事 実 は 高 麗 史 に 日 本 商 人 来 航 記 事 が 集 中 する1073~89 年 の 後 の 時 期 であることと 関 係 し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が 断 言 は 避 けたい ただいずれにしろ 宋 商 人 と 見 られる 黄 仲 文 が1147 年 に 高 麗 に 来 航 して 日 本 都 綱 と 呼 ばれていること( 第 2 章 表 参 照 )も 含 めて 1) 972 年 に 金 海 府 南 原 府 が 派 遣 した 使 者 について 森 平 雅 彦 氏 はこの 時 点 で 地 方 官 の 派 遣 が 始 まってお らず 地 方 豪 族 が 自 主 的 な 通 交 を 図 ったものである 可 能 性 を 指 摘 する( 森 平 2008 日 麗 貿 易 中 世 都 市 博 多 を 掘 る 海 鳥 社 ) 1056 年 の 日 本 国 使 正 上 位 権 隷 滕 原 朝 臣 頼 忠 の 金 州 来 航 について その 官 位 を 正 七 位 権 掾 と 訂 正 できるとすれば( 掾 は 地 方 官 である 国 司 の 四 等 官 の 四 番 目 で 大 掾 の 相 当 位 は 正 七 位 少 掾 の 相 当 位 は 従 七 位 ) 滕 原 頼 忠 は 対 馬 などの 国 衙 の 在 庁 官 人 の 可 能 性 が 高 くなり 日 本 国 使 と 記 されていても 京 都 の 朝 廷 が 派 遣 した 使 者 ではないことになる 1147 年 に 高 麗 に 来 航 した 日 本 都 綱 黄 仲 文 は 日 本 の 使 者 であることは 確 認 できず 現 状 では 一 商 人 の 来 航 と 見 るべきであろう 年 の 事 例 とされる 李 文 鐸 墓 誌 銘 の 記 事 は 対 馬 が 辺 事 について 東 南 海 都 部 署 に 牒 を 送 ったとい うもので 東 南 海 都 部 署 は 開 城 にこの 件 を 伝 えたが 辺 事 をもって 尚 書 省 から 返 牒 するべきではない とされて 東 南 海 都 部 署 から 返 牒 することになった この 流 れを 見 る 限 り 対 馬 の 牒 で 扱 われた 辺 事 は 麗 日 間 の 国 家 的 な 案 件 ではなく 対 馬 に 関 する 案 件 だった 可 能 性 が 高 い 以 上 は 地 方 官 レベルでの 交 渉 と 見 るべきであり 公 的 な 性 格 を 有 するとしても 国 家 間 関 係 のトピックとして 扱 うべきではないだ ろう
271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269 考 えれば 日 本 人 の 名 を 持 った 商 人 や 使 者 の 他 に 宋 商 人 も 麗 日 貿 易 に 関 与 したことは 疑 いなく この 点 は 麗 日 貿 易 をアジア 史 の 中 に 位 置 づけるためにも 強 調 しておく 必 要 があると 思 う さらに 検 証 は 困 難 だが 高 麗 史 に 登 場 する 宋 商 人 に 実 は 日 本 を 経 由 して 来 航 した 者 が 含 まれる 可 能 性 もある だろう 日 本 商 人 の 活 動 の 場 が 高 麗 から 宋 へと 広 がっていったとする 森 克 己 の 発 想 が 朝 鮮 を 大 陸 進 出 の 足 場 と 見 る 卑 下 意 識 から 来 ているとする 李 氏 の 意 見 は 傾 聴 の 価 値 があると 感 じた この 森 説 を 乗 り 越 えるためには アジアにおける 貿 易 の 動 向 とその 担 い 手 の 問 題 を 麗 日 間 に 視 野 を 限 定 せず に 追 及 していく 必 要 があるだろう 3 日 本 の 仏 教 史 料 には 高 麗 の 仏 典 を 購 入 した 事 実 を 伝 える 記 事 の 他 にも 高 麗 に 関 する 記 事 が 散 見 する たとえば 日 宋 交 通 路 上 の 目 印 漂 着 地 として 高 麗 が 登 場 する 場 合 がある 2) 1072 年 の 成 尋 1082 年 の 戒 覚 の 例 については 李 氏 も 触 れている( 第 5 章 の 表 )が 他 の13 世 紀 半 ばまで の 事 例 で 言 えば 円 爾 が1241 年 に 宋 の 慶 元 から 出 航 した 途 次 に 高 麗 国 耽 没 羅 阿 私 山 下 に 漂 着 した 例 ( 聖 一 国 師 年 譜 ) 文 栄 房 (13 世 紀 前 半 の 入 宋 僧 湛 海 か)が 入 宋 する 際 に 悪 風 によって 高 麗 に 漂 着 した 例 3) 無 本 覚 心 が1254 年 に 宋 から 帰 国 した 際 に 船 が 漂 流 し おそらくその 時 に 高 麗 に 立 ち 寄 ったという 例 ( 明 極 和 尚 語 録 )が 挙 げられる 宋 から 日 本 に 向 かう 船 が 高 麗 に 漂 着 することが 多 いことは 京 都 の 藤 原 定 家 が1226 年 に 倭 寇 の 活 動 を 耳 にした 際 に 述 べており 4) 高 麗 を 敵 に 回 すことが 日 宋 間 の 往 来 断 絶 につながることを 心 配 し ている 一 方 で 高 麗 との 通 交 断 絶 への 危 惧 については 述 べていない この 時 代 の( 少 なくとも 中 央 の) 日 本 人 にとって 高 麗 の 重 要 性 は 日 宋 間 の 交 通 路 上 という 地 理 的 な 位 置 関 係 にあったと 言 える その 意 味 で 実 際 に 漂 流 した 人 に 近 い 立 場 から 書 かれたものとして 日 本 の 仏 教 史 料 は 貴 重 である ただし 仏 教 史 料 の 取 り 扱 いに 際 しては 他 の 史 料 と 同 様 にその 性 格 を 考 慮 する 必 要 がある たと えば 李 氏 が 日 本 における 高 麗 僧 の 自 由 な 活 動 の 具 体 例 として 評 価 する 了 然 法 明 であるが 16 世 紀 2) 拙 稿, 2008, 日 宋 日 元 交 通 における 高 麗 - 仏 教 史 料 を 素 材 として- 中 世 港 湾 都 市 遺 跡 の 立 地 環 境 に 関 する 日 韓 比 較 研 究 平 成 15~19 年 度 科 学 研 究 費 補 助 金 研 究 成 果 報 告 書 3) 高 橋 秀 栄, 2007, 泉 涌 寺 出 身 の 律 僧 たち - 金 沢 文 庫 の 聖 教 を 手 がかりに- 戒 律 文 化 5 4) 明 月 記 嘉 禄 2 年 10 月 16 日 条 午 時 法 眼 来 談 高 麗 合 戦 一 定 云 々 鎮 西 凶 党 号 松 浦 党 構 数 十 艘 兵 船 行 彼 国 之 別 嶋 合 戦 滅 亡 民 家 掠 収 資 財 所 行 向 半 分 許 被 殺 害 其 残 盗 取 銀 器 等 帰 来 云 々 為 朝 廷 太 奇 怪 事 歟 依 此 事 挙 国 興 兵 又 我 朝 渡 唐 之 船 向 西 之 時 必 到 着 彼 国 帰 朝 之 時 多 随 風 寄 高 麗 流 例 也 彼 国 已 為 怨 敵 者 宋 朝 之 往 反 不 可 輙 当 時 唐 船 一 艘 寄 高 麗 被 付 火 不 残 一 人 焼 死 云 々 末 世 之 狂 乱 至 極 滅 亡 之 時 歟 甚 奇 怪 事 也
272 27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までの 史 料 で 彼 を 高 麗 僧 としたものは 存 在 しない 彼 が 高 麗 僧 とされるのは 日 本 洞 上 聯 灯 録 に 収 める 伝 に 高 麗 国 人 とあることに 拠 るが この 本 は1727 年 の 成 立 であり 十 分 な 信 を 置 くこと はためらわれる 一 方 で1808 年 序 の 宗 門 略 列 祖 伝 のように 日 本 洞 上 聯 灯 録 以 後 でも 了 然 を 日 本 人 として 明 記 するものがあり 後 世 でも 必 ずしも 了 然 高 麗 人 説 が 受 け 入 れられていたわけでは ないらしい 高 麗 人 説 の 根 拠 はおそらく1645 年 成 立 の 玉 泉 寺 縁 起 で 了 然 が 開 創 した 出 羽 玉 泉 寺 の 由 緒 書 である これも 成 立 年 代 史 料 の 性 格 から 見 て やはり 信 を 置 くことは 難 しい ここでは 了 然 は 高 麗 人 ではなく 百 済 国 僧 也 とされ 来 日 を 斉 明 天 皇 の 時 代 (655-61) 玉 泉 寺 開 創 を663 年 とする モデルは 明 らかに 元 亨 釈 書 に 見 える 百 済 人 の 法 明 尼 (656 年 に 中 臣 鎌 足 の 病 気 を 治 した 尼 )で 了 然 法 明 と 法 明 尼 の 法 諱 が 一 致 することから 同 一 人 物 と 誤 解 されたものだろう だとすると 了 然 が 高 麗 僧 とされるのも 百 済 国 僧 とする 誤 伝 の 言 い 換 えに 過 ぎない 可 能 性 が 高 い このように 了 然 法 明 の 評 価 については 留 保 の 必 要 を 感 じるが 従 来 仏 教 史 料 は 十 分 に 活 用 さ れておらず 高 麗 関 係 史 料 もなお 発 掘 される 可 能 性 はある 麗 日 関 係 の 史 料 集 発 刊 は 今 後 の 研 究 進 展 にとって 歓 迎 すべきことであるが 一 方 でさらなる 史 料 探 訪 の 意 義 も 依 然 として 低 下 してい ないことは 最 後 に 付 言 しておきたい 972 年 に 金 海 府 南 原 府 が 派 遣 した 使 者 について 森 平 雅 彦 氏 はこの 時 点 で 地 方 官 の 派 遣 が 始 まって おらず 地 方 豪 族 が 自 主 的 な 通 交 を 図 ったものである 可 能 性 を 指 摘 する( 森 平 2008 日 麗 貿 易 中 世 都 市 博 多 を 掘 る 海 鳥 社 ) 1056 年 の 日 本 国 使 正 上 位 権 隷 滕 原 朝 臣 頼 忠 の 金 州 来 航 について その 官 位 を 正 七 位 権 掾 と 訂 正 できるとすれば( 掾 は 地 方 官 である 国 司 の 四 等 官 の 四 番 目 で 大 掾 の 相 当 位 は 正 七 位 少 掾 の 相 当 位 は 従 七 位 ) 滕 原 頼 忠 は 対 馬 などの 国 衙 の 在 庁 官 人 の 可 能 性 が 高 くな り 日 本 国 使 と 記 されていても 京 都 の 朝 廷 が 派 遣 した 使 者 ではないことになる 1147 年 に 高 麗 に 来 航 した 日 本 都 綱 黄 仲 文 は 日 本 の 使 者 であることは 確 認 できず 現 状 では 一 商 人 の 来 航 と 見 るべきであろう 年 の 事 例 とされる 李 文 鐸 墓 誌 銘 の 記 事 は 対 馬 が 辺 事 について 東 南 海 都 部 署 に 牒 を 送 ったというもので 東 南 海 都 部 署 は 開 城 にこの 件 を 伝 えたが 辺 事 をもって 尚 書 省 から 返 牒 するべきではないとされて 東 南 海 都 部 署 から 返 牒 することになった この 流 れを 見 る 限 り 対 馬 の 牒 で 扱 われた 辺 事 は 麗 日 間 の 国 家 的 な 案 件 ではなく 対 馬 に 関 する 案 件 だった 可 能 性 が 高 い 以 上 は 地 方 官 レベルでの 交 渉 と 見 るべきであり 公 的 な 性 格 を 有 するとし ても 国 家 間 関 係 のトピックとして 扱 うべきではないだろう
273 13 世 紀 以 前 の 麗 日 関 係 271 参 考 文 献 拙 稿, 2008, 日 宋 日 元 交 通 における 高 麗 - 仏 教 史 料 を 素 材 として- 中 世 港 湾 都 市 遺 跡 の 立 地 環 境 に 関 する 日 韓 比 較 研 究 平 成 15~19 年 度 科 学 研 究 費 補 助 金 研 究 成 果 報 告 書 高 橋 秀 栄, 2007, 泉 涌 寺 出 身 の 律 僧 たち 金 沢 文 庫 の 聖 教 を 手 がかりに 戒 律 文 化 5 明 月 記 嘉 禄 2 年 10 月 16 日 条 午 時 法 眼 来 談 高 麗 合 戦 一 定 云 々 鎮 西 凶 党 号 松 浦 党 構 数 十 艘 兵 船 行 彼 国 之 別 嶋 合 戦 滅 亡 民 家 掠 収 資 財 所 行 向 半 分 許 被 殺 害 其 残 盗 取 銀 器 等 帰 来 云 々 為 朝 廷 太 奇 怪 事 歟 依 此 事 挙 国 興 兵 又 我 朝 渡 唐 之 船 向 西 之 時 必 到 着 彼 国 帰 朝 之 時 多 随 風 寄 高 麗 流 例 也 彼 国 已 為 怨 敵 者 宋 朝 之 往 反 不 可 輙 当 時 唐 船 一 艘 寄 高 麗 被 付 火 不 残 一 人 焼 死 云 々 末 世 之 狂 乱 至 極 滅 亡 之 時 歟 甚 奇 怪 事 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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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13 世 紀 全 般 における 麗 蒙 交 渉 の 一 断 面 -モンゴル 官 人 との 往 復 文 書 を 中 心 に- 発 表 者 : 森 平 雅 彦 討 論 者 : 李 薰 1. 本 論 文 の 意 義 本 の 論 文 は 13 世 紀 高 麗 モンゴル 交 渉 の 推 移 を 外 交 文 書 の 様 式 的 な 側 面 から 検 討 し 麗 日 間 の 外 交 文 書 などとの 比 較 を 通 じて 高 麗 時 代 の 対 蒙 古 対 日 本 の 外 交 文 書 が 啓 式 ( 外 交 ) 文 書 であっ たことについて 気 を 配 りながら 主 張 するものであると 理 解 した 特 に 原 本 の 不 在 は 勿 論 写 本 と いっても 原 本 の 形 態 をそのまま 保 存 されていない 不 十 分 な 状 態 からの 文 書 学 的 な 研 究 は 方 法 論 的 な 側 面 で 韓 国 の 研 究 者 たちに 新 しい 刺 激 を 与 えられるだろうと 思 われる 2. 質 問 - 史 料 的 な 問 題 まず 題 目 の 副 題 を 見 れば 高 麗 側 ( 国 王 尙 書 省 など)とモンゴル 官 人 との 往 復 文 書 が 検 討 対 象 になっている 往 復 文 書 ならば 送 った 文 書 に 対 して 受 け 取 った 文 書 を1 対 1で 対 応 させて 相 互 検 討 する 方 が 理 解 しやすいだろう < 表 >を 見 れば 高 麗 側 の 文 書 だけが 示 されており なぜ 各 文 書 に 対 応 するモンゴル 側 の 外 交 文 書 はないのか? 本 論 文 で 提 示 された 史 料 が 現 在 確 認 されている 高 麗 時 代 の 外 交 文 書 の 全 部 であろうか?
276 274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 方 法 論 的 な 問 題 高 麗 側 の 外 交 文 書 については 差 出 し 人 の 銘 記 方 式 文 書 を 送 る 際 に 用 いる 文 言 末 尾 に 用 いる 文 言 年 紀 記 載 などの 書 式 的 な 側 面 からの 検 討 がなされている ところで モンゴル 側 の 実 際 外 交 文 書 としては 1231 年 撒 禮 塔 が 送 った 書 状 が 唯 一 であると 言 いながらも 文 体 (モンゴル 文 直 訳 体 白 話 風 漢 文 )だけが 紹 介 されているのみで 書 式 については 言 及 されていない 書 式 について 伺 いたいと 思 う 同 じ 方 法 で 検 討 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 思 うし この 時 書 狀 ならば 同 等 な 立 場 か ら 取 り 交 わした 書 を 意 味 するのか どうかについても 伺 いたい < 表 >の 1232 年 の 高 麗 側 の 文 書 が 啓 であるが モンゴル 側 の 文 書 が 書 であるならば このような 外 交 関 係 はどのように 理 解 すべきであろうか - 評 価 の 問 題 啓 を 上 行 文 書 書 を 平 行 文 書 など あるな 書 式 として 見 なすこと ひいては 外 交 関 係 を 反 映 し ていると 見 なすことについては 発 表 者 もためらっていたように 注 意 しなければならない 朝 鮮 時 代 の 朝 日 関 係 で 取 り 交 わした 文 書 ( 書 契 )の 例 をあげれば 等 しい 外 交 相 手 に 与 える 文 書 と いっても その 時 その 時 の 状 況 によって 多 様 な 文 言 を 用 いていた 17 世 紀 初 朝 日 関 係 が 安 定 して いない 状 況 で 対 馬 藩 主 が 礼 曹 参 議 に 文 書 を 送 るという 意 味 の 文 言 として 謹 啓 奉 啓 奉 書 啓 書 贈 書 致 書 啓 逹 の7 種 を 使 っていたが この 中 からどれを 選 択 するのかということは 相 手 に 対 する 尊 敬 の 程 度 による 差 であった すなわち 13 世 紀 高 麗 モンゴル 関 係 で 外 交 文 書 として 啓 を 選 択 するのか 書 を 選 択 するの かは その 時 その 時 の 外 交 的 な 姿 勢 や 態 度 を 反 映 することではあるものの 外 交 関 係 (システム)を 反 映 することではないのではなかろうかと 思 われる なぜなら 外 交 文 書 の 書 式 に 定 着 されるためには 兩 者 が 合 意 に 至 るまで 多 くの 摩 擦 と 交 渉 が 予 想 されるが そういう 記 録 が 残 っているのか? - 啓 式 文 書 であるといっても 文 章 の 末 尾 には 不 宣 といって 書 に 見 える 文 言 を 用 いている 啓 を 強 調 するためには 書 の 特 徴 について もう 少 し 紹 介 を 加 える 必 要 があるのではないか? - 上 行 文 書 として 啓 式 文 書 と 咨 式 文 書 の 差 は 何 だろうかについて 伺 いたい
277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高 麗 と 日 本 の 関 係 に 留 意 して へのコメント 発 表 者 : 南 基 鶴 討 論 者 : 舩 田 善 之 南 基 鶴 氏 の 報 告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高 麗 と 日 本 の 関 係 に 留 意 して ( 以 下 南 報 告 と 略 称 )は,モンゴルの 対 日 交 渉 侵 略 という 未 曾 有 かつ 緊 迫 した 東 アジアの 政 治 情 勢 において, 高 麗 日 本 がとった 対 応 について 論 じたものである 南 基 鶴 氏 には 労 作 蒙 古 襲 来 と 鎌 倉 幕 府 ( 臨 川 書 店,1998 年 )がある 氏 はこの 成 果 も 基 礎 にしつつ, 高 麗 日 本 の 立 場 対 応 と 高 麗 日 本 の 関 係 を 考 察 し, 新 たな 視 角 知 見 を 提 出 している かかる 内 容 の 報 告 に 対 するコメンテーターとしては,モンゴル 帝 国 史 を 専 門 とする 評 者 ではなく, 日 本 史 あるいは 高 麗 史 を 専 門 とする 研 究 者 が 本 来 ふさわしいだろう 評 者 のコメントは,おのずからモ ンゴル 帝 国 史 の 立 場 から 加 えることになるが, 的 を 外 した 議 論 を 含 む 可 能 性 をあらかじめお 断 りしてお き, 南 基 鶴 氏 のご 海 容 を 乞 う 次 第 である また, 評 者 は,ここ 数 年 九 州 大 学 大 学 院 のゼミにおいて, 佐 伯 弘 次 氏 森 平 雅 彦 氏 と 共 同 で 日 本 モンゴル 関 連 資 料 集 伏 敵 編 を 講 読 している 以 下 のコ メントもこのゼミでの 議 論 に 多 くを 依 拠 していることを 付 言 しておきたい もちろん, 不 適 当 な 内 容 があ れば, 評 者 が 責 を 負 うものである 南 報 告 の 新 視 角 は,モンゴルの 日 本 侵 略,モンゴル 日 本 関 係 というテーマに, 日 本 - 高 麗 と いう 座 標 軸 を 引 いた 点 にある 南 基 鶴 氏 は はしがき において, 今 まで 韓 国 学 界 では 高 麗 の 対 蒙 古 抗 争 に 力 点 を 置 く 一 方, 元 の 干 渉 期 の 高 麗 と 日 本 の 関 係 にはあまり 関 心 を 傾 けようとしなかった, 近 年 日 本 学 界 は 蒙 古 の 侵 略 に 対 応 した 国 内 政 治 史 を 重 心 にした 分 析 が 行 われており, 国 際 関 係 と 言 っ ても 日 本 と 大 陸 の 関 係 に 重 点 を 置 く 傾 向 が 強 い と 述 べる それぞれ, 韓 国 における 高 麗 史 学 界 と 日 本 における 日 本 史 学 界 の 状 況 を 指 摘 したものである こうした 状 況 は モンゴル 帝 国 史 学 界 においても 当 てはまる 中 国 の 蒙 元 史 学 界 についていえ
278 276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ば, 基 本 的 には 自 国 史 の 立 場 から, 対 外 関 係 史 ( 中 国 では 中 外 関 係 史 と 呼 ぶ)の 場 において 考 察 がなされている そこではおおむね, 対 高 麗 対 日 本 を 別 個 に 扱 っており, 通 史 断 代 史 の 概 説 書 でも, 対 外 関 係 を 叙 述 する 章 でそれぞれ 別 の 節 項 目 として 高 麗 日 本 を 別 個 に 取 り 上 げる 形 式 が とられている かかる 検 討 叙 述 は, 実 は 元 史 外 夷 伝 の 高 麗 日 本 という 歴 史 叙 述 の 枠 組 みを 踏 襲 しただけにすぎない 多 面 的 立 体 的 な 国 際 関 係 の 把 握 にはほど 遠 いものと 言 わざるを 得 ない 一 方, 日 本 でも 従 来 のモンゴル 帝 国 史 研 究 元 代 史 研 究 の 対 高 麗 対 日 本 に 関 する 叙 述 は, 中 国 のそれと 大 同 小 異 であった しかしながら, 近 年 の 日 本 では, モンゴル 時 代 史 という 概 念 が 提 唱 されるに 至 り,これより 後, 中 央 ユーラシア 史 の 視 角 からの 検 討,ユーラシア 史 規 模 での 考 察 が 主 流 となりつつある こうした 潮 流 が 新 しい 知 見 と 多 くの 成 果 をもたらしたことは 評 者 も 認 めるところであ る しかしながら,モンゴルの 対 高 麗 対 日 本 関 係 史 を 考 える 場 合,こうした 視 角 は 巨 視 的 に 過 ぎる 側 面 をもつ 実 際 に 微 視 的 な 検 討,とりわけ 高 麗 の 動 向 に 対 する 丹 念 な 分 析 については 不 十 分 であ ると 指 摘 せざるを 得 ない さらに, 近 年 の 日 本 の 学 界 は,モンゴル 帝 国 と 日 本 の 関 係 については, 経 済 文 化 交 流 に 関 心 の 重 点 が 移 行 しており, 政 治 外 交 戦 争 については, 杉 山 正 明 氏 が 一 連 の 概 説 書 通 史 でモンゴル 時 代 史 の 立 場 からの 言 及 をする 程 度 にとどまっている こうした 状 況 の 中, 南 報 告 は, 高 麗 朝 廷 と 三 別 抄 の 対 日 交 渉 の 一 節 において,モンゴルの 対 日 外 交 の 中 断 を 画 策 したり, 外 交 文 書 書 状 を 通 じて, 日 本 の 態 度 軟 化 を 試 みたりするなど, 高 麗 の 自 立 的 な 動 向 を 浮 かび 上 がらせている そこには,モンゴルという 大 国 に 服 属 しつつも, 自 らの 安 定 保 全 のため 戦 争 回 避 を 指 向 しつつ, 両 面 外 交 を 展 開 していたともいうべき 高 麗 の 主 体 性 を 見 いだ すことができよう このような 高 麗 の 立 場 対 策 に 着 目 した 点 は 大 きく 評 価 できる これによって 多 面 的 立 体 的 な 歴 史 像 構 築 に 寄 与 している この 功 績 に 対 して, 二 点, 望 蜀 の 言 を 述 べたい 第 一 に,モンゴル 帝 国 における 高 麗 の 位 置,と くに 高 麗 王 家 の 地 位 との 関 連 についてである 高 麗 国 王 は,1259 年 以 降,モンゴル 帝 国 内 での 地 位 上 昇 を 進 めていく その 駙 馬 高 麗 国 王 としての 地 位 を 確 立 するまでの 過 程 は, 森 平 雅 彦 氏 の 詳 細 な 検 証 によって 跡 づけられている こうした 高 麗 国 王 のモンゴルにおける 動 向 とモンゴル 高 麗 の 対 日 交 渉 政 策 を 有 機 的 に 結 合 させることも, 当 時 の 国 際 関 係 の 多 面 的 な 把 握 には 必 要 であろう 第 二 に,モンゴルが 日 本 へ 使 節 を 派 遣 した 際 に, 高 麗 がとった 両 面 外 交 とも 言 うべき 挙 措 につい てである 高 麗 は 日 本 に 宛 てた 文 書 の 中 で,やむなくモンゴルの 外 交 政 策 に 協 力 しているかのような 言 説 をもって 弁 明 するとともに, 日 本 にモンゴルへの 使 節 派 遣 を 勧 めている この 高 麗 の 挙 措 は 大 き な 問 題 をはらんでいる モンゴル 側 にとってみれば,このような 高 麗 の 両 面 外 交 は 容 認 できるもので はないだろう したがって, 高 麗 がモンゴル 側 に 知 られることなく, 隠 密 に 行 った 可 能 性 だけでなく,
279 蒙 古 の 日 本 侵 略 と 日 本 の 対 応 277 反 対 にモンゴル 側 (とくに 使 節 レベル)が 日 本 の 強 硬 な 姿 勢 を 軟 化 させるために,アメとムチを 使 い 分 ける 方 策 をとった 可 能 性 も 想 定 できるかもしれない 後 に 趙 良 弼 が 国 書 の 写 しを 日 本 側 に 託 しているこ とから, 使 節 らがこうした 外 交 文 書 の 写 しを 携 帯 していたことは 間 違 いない つまり,モンゴルの 使 節 は 高 麗 の 日 本 宛 て 文 書 の 内 容 を 確 認 できた 可 能 性 もあるからである これについては 推 測 を 交 えざる を 得 ないが,より 深 い 議 論 が 必 要 とされよう 続 いて, 日 本 の 国 内 情 勢 と 対 外 政 策 を 連 動 して 考 察 した 成 果 についてとりあげたい 杉 山 正 明 氏 は 鎌 倉 日 本 に 外 交 はなかった との 評 価 を 下 しているが, 実 際 はそのように 単 純 なものではなかった はずである 南 報 告 は, 日 本 -モンゴルの 座 標 軸 に 幕 府 - 朝 廷,さらに 北 条 得 宗 家 - 将 軍 - 天 皇 と いう 座 標 軸 を 加 えることにより,モンゴルの 国 書 に 対 して 返 牒 させなかった 幕 府 の 外 交 政 策,さらには その 後 の 異 国 征 伐 計 画 を, 整 合 的 に 説 明 することに 成 功 している そこで 気 になるのが, 日 本 ( 幕 府 朝 廷 )の 対 外 情 勢 認 識 である つまり, 日 本 はどの 程 度, 当 時 の 高 麗 の 半 島 情 勢 を 認 識 できていたか,という 問 題 である 従 来, 三 別 抄 からの 牒 文 をめぐって, 十 分 な 情 勢 分 析 はできていなかったと 議 論 される 傾 向 にある その 反 面, 三 別 抄 の 存 在 は 半 島 情 勢 の 一 部 分 に 過 ぎないいう 見 方 もあり 得 よう 武 臣 政 権 から 高 麗 国 王 の 復 権 という 大 まかな 情 勢 について は,ある 程 度 認 識 していた 可 能 性 もある かかる 情 報 が 使 節 から 伝 えられていた 可 能 性 は 高 いし, 何 よりも 届 けられた 国 書 二 通 は 大 蒙 古 国 皇 帝 と 高 麗 国 王 がそれぞれ 発 したものであった この 認 識 が 朝 廷 幕 府 の 対 応 に 影 響 を 与 えた 可 能 性 の 有 無 について, 南 氏 のご 意 見,さらにはフロアを 含 めた 議 論 を 期 待 したい 最 後 に, 高 麗 と 日 本 の 相 互 認 識 に 関 する 考 察 についてとりあげたい 上 述 のように,この 座 標 軸 を 引 いた 点 が, 南 報 告 の 成 果 の 一 つである 南 報 告 は,モンゴルの 日 本 侵 略 によって, 高 麗 日 本 の 相 互 認 識 は 否 定 的 で 屈 折 したものとなったと 結 論 している この 結 論 は, 確 かに 外 交 政 治 戦 争 の 面 についていえば, 妥 当 であろう ここで 想 起 されるのが,モンゴル 日 本 間 の 外 交 断 絶 と 経 済 文 化 交 流 の 活 況 である ここで 留 意 されるのは,その 経 済 文 化 交 流 を 担 った 仏 教 というコー ドである このことは, 寺 社 造 営 料 唐 船 の 存 在 からも 明 白 であるし, 直 接 の 玄 関 口 であった 中 国 江 南 だけではなく,モンゴルの 庇 護 を 受 けた 華 北 の 大 寺 院 でも 邵 元 のような 日 本 僧 の 活 躍 がみられている 一 方, 高 麗 の 仏 教 界 もモンゴルと 強 く 結 合 していた 近 年 紹 介 された 松 広 寺 のチベット 語 法 旨, 大 都 郊 外 や 安 陽 杭 州 の 寺 院 関 連 史 料 などからも,その 緊 密 性 を 窺 うことができる 換 言 すれば, 仏 教 というコードを 通 じて, 日 本 はモンゴルと 交 流 しており,そこには 高 麗 も 含 まれていたのである こう した 国 際 環 境 において, 日 本 と 高 麗 の 経 済 文 化 交 流 はど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のだろうか この 問 題 提 起 をもって, 本 コメントを 結 ぶことにし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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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日 本 侵 攻 以 後 の 麗 日 関 係 発 表 者 : 佐 伯 弘 次 討 論 者 : 金 普 漢 世 紀 は 北 方 モンゴル 草 原 からの 元 の 成 立 金 と 宋 の 滅 亡 高 麗 の 降 伏 と 日 本 の 侵 攻 室 町 幕 府 と 朝 鮮 の 成 立 元 の 滅 亡 と 明 の 成 立 など 東 アジア 情 勢 が 激 變 する 時 期 であった 本 の 発 表 文 では まず13 世 紀 モンゴル 侵 攻 以 後 の 使 臣 の 入 国 という 麗 日 交 渉 の 進 行 過 程 と 日 本 の 軍 事 情 報 の 収 集 を 紹 介 している 同 時 に 前 期 倭 寇 の 興 起 に 対 する 既 存 の 研 究 成 果 を 紹 介 し 中 国 沿 岸 に 出 現 した 倭 寇 と 高 麗 侵 入 倭 寇 の 関 連 可 能 性 を 提 示 しながら 東 アジアの 規 模 で 倭 寇 について 見 直 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 主 張 している また 高 麗 の 禁 寇 使 臣 の 派 遣 と 日 本 の 対 応 では 入 国 する 高 麗 使 臣 など 列 挙 しながら 被 虜 人 の 送 還 から 得 られる 經 濟 的 な 利 益 と 対 馬 に 支 給 される 米 の 支 援 が 高 麗 末 から 始 まっていたみている したがって 本 発 表 は 全 体 的 な 流 れとして モンゴル 侵 攻 に 対 する 軍 事 的 危 機 禁 冦 のための 麗 日 両 国 の 外 交 的 努 力 被 虜 人 送 還 の 経 済 的 な 価 値 などの 内 容 で 構 成 されていることが 特 徴 であるといえる ただ 本 発 表 は 論 文 の 完 結 性 という 面 では まだもう 少 し 時 間 が 必 要 ではないかと 思 われる とい う 面 で 少 しきを 兼 ねるが 本 文 では 言 及 されなかった 疑 問 がある 内 容 について 幾 つか 質 問 してみた いと 思 う 第 一 に 1292 年 に 金 有 成 によって 伝 達 した 高 麗 牒 狀 について 日 本 朝 廷 と 元 ( 院?)が 無 礼 愚 鈍 奇 怪 と 評 価 していたとしているが 以 前 に 伝 達 された 蒙 古 高 麗 牒 狀 に 対 する 朝 廷 の 評 価 とさほ ど 違 いはない このような 評 価 を 下 す 朝 廷 と 元 の 判 断 基 準 は 何 であっただろうか 例 えば 日 本 中 心 的 な 観 念 ( 神 国 思 想 など) あるいは 東 アジア 国 際 情 勢 に 対 する 未 熟 知 それとも 他 の 何 があったのか 疑 問 が 生 じる
282 280 蒙 古 의 高 麗 日 本 侵 攻 과 韓 日 關 係 第 二 本 文 で 大 陸 に 対 する 日 本 の 軍 事 情 報 の 収 集 について 元 の 偵 察 が 幕 府 の 主 導 の 下 で 行 われたと 推 測 される ( 中 略 ) 日 元 貿 易 船 が 元 の 偵 察 を 引 き 受 けていたことを 推 測 することができる と 敍 述 している 当 時 元 の 動 向 にもっとも 敏 感 な 存 在 は 一 次 的 に 幕 府 より 元 を 往 来 しながら 交 易 を 担 っていた 日 本 商 人 であったと 思 われる このような 側 から 商 人 は 貿 易 が 優 先 で 貿 易 過 程 で 収 集 される 情 報 は 次 善 であり 元 に 対 する 情 報 は 副 次 的 に 生 じた 結 果 物 として 見 な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 思 う 例 えば 高 麗 内 の 倭 寇 活 動 を 見 れば 漕 倉 の 位 置 情 報 人 物 に 対 する 情 報 ( 崔 瑩 将 軍 など) 地 理 地 形 の 情 報 などは 倭 寇 たちに 必 須 的 な 要 素 だったのであり 相 当 高 い 水 準 であった すなわち 倭 寇 の 高 麗 に 対 する 情 報 量 は 幕 府 のそれより 絶 対 的 な 優 位 を 占 めていたと 推 測 される したがって 日 元 貿 易 船 の 主 な 目 的 は 一 次 的 に 元 の 偵 察 より 貿 易 の 利 益 に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 事 である 第 三 史 料 を 通 じて 金 竜 は1366 年 8 月 に 高 麗 を 出 発 して9 月 日 本 に 入 国 し 金 逸 は1366 年 11 月 に 高 麗 を 出 発 して1367 年 2 月 日 本 に 入 国 していたと 把 握 されている 発 表 者 はこれらがともに 高 麗 王 が 送 った 使 臣 として 見 ているが 高 麗 がほぼ 同 じ 時 期 に 同 じ 目 的 ( 禁 寇 )で 使 臣 を 重 複 して 派 遣 したことには どのような 理 由 からであったのか 伺 いたいと 思 う 第 四 安 吉 祥 の 謝 絶 派 遣 の 以 来 室 町 幕 府 よりむしろ 博 多 の 九 州 探 題 と 交 渉 することが 重 要 で あったような 感 じがしており 謝 絶 の 送 還 も 九 州 探 題 が 行 っていた と 敍 述 している 本 来 日 本 の 外 交 権 は 朝 廷 の 固 有 の 權 限 であるが 金 竜 金 逸 の 入 国 以 後 には 室 町 幕 府 が 管 轄 し 安 吉 祥 の 入 国 以 後 には 九 州 探 題 または 西 国 の 大 名 へ 移 管 されている 比 較 的 に 短 い 期 間 の 内 に 外 交 権 の 回 変 化 が 見 られているが その 理 由 は 何 だろうか 最 後 に 1380 年 代 倭 寇 が 減 少 する 傾 向 について 高 麗 の 外 交 が 西 国 の 大 名 らを 注 目 するように なり その 成 果 を 得 ることができたと 分 析 いしている そして 対 馬 島 宗 氏 に 米 1,000 石 の 下 賜 に 注 目 し ている 高 麗 史 の 記 録 によると 1354 年 漕 運 船 40 余 隻 の 掠 奪 1355 年 200 隻 掠 奪 1360 年 閏 5 月 に4 万 石 を 掠 奪 した 以 後 に 相 当 期 間 (1 年 あるいは 9ヶ 月 間 )の 間 高 麗 には 倭 寇 が 全 く 出 現 されていない ま た 1368 年 11 月 に 高 麗 朝 廷 で 対 馬 の 崇 宗 慶 ( 宗 宗 慶 )に 米 1 千 石 を 下 賜 した 以 後 にも 約 1 年 間 の 間 倭 寇 の 形 跡 を 捜 すことができない 以 上 4 件 の 記 録 の 共 通 点 は 大 量 の 掠 奪 品 と 下 賜 品 が 伝 達 さ れた 以 後 には 長 期 間 にわたり 侵 入 と 掠 奪 が 起 らなかったという 点 である
283 日 本 侵 攻 以 後 の 麗 日 関 係 281 ところで この 問 題 は 単 純 に 高 麗 時 代 だけの 問 題 にとどまらず 朝 鮮 時 代 にまで 及 んでいたと 考 えることはできないだろうか すなわち 海 東 諸 國 記 と 經 國 大 典 の 規 定 で 貿 易 を 除 いた 純 粋 な 接 待 費 が1 万 石 であり 中 宗 實 錄 からは1509 年 ( 中 宗 4)の 接 待 費 用 が2 万 2 千 石 であったという 記 録 が 見 える 結 局 中 世 の 朝 日 関 係 は 高 麗 が 奪 われた 総 量 を 朝 鮮 がそのまま 引 き 受 けたから 可 能 な 外 交 関 係 であったと 見 ることができるだろう このような 面 から 麗 日 関 係 は 貿 易 より 掠 奪 の 側 面 朝 日 関 係 は 内 在 した 掠 奪 と 貿 易 の 側 面 から 相 互 統 一 された 眺 望 が 必 要 ではないかと 思 われるが 先 生 のご 意 見 をお 聞 きしたいと 思 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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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蔿 蔿 蔿 蔿, 蔿
Title 旺 山 許 蔿 [ウィ](ワンサン ホウィ)の 逮 捕 後 の 動 向 考 察 ( fulltext ) Author(s) 李, 修 京 Citation 東 京 学 芸 大 学 紀 要. 人 文 社 会 科 学 系. I, 63: 119-135 Issue Date 2012-01-31 URL http://hdl.handle.net/2309/125470 Publisher
1861 1883 1912 9 30 3 1914 4 2 1916 4 19 1919 4 6 6 4 5 1909 1923 14 3 1915 103-105 1910 1906-1918 1979 4 1941 120 5 476 1988 2013 146
6 1.はじめに 15 1 2 1 1915 7 2 1995 258 김민철 식민지조선의 경찰과 주민 일제 식민지지배의 구조와 성격2005 6 145 1861 1883 1912 9 30 3 1914 4 2 1916 4 19 1919 4 6 6 4 5 1909 1923 14 3 1915 103-105 1910 1906-1918 1979 4 1941 120 5 476
2007 6 Ⅱ. 韓 国 に 吹 く 多 文 化 ブームの 現 状 1. 韓 国 社 会 における 外 国 人 数 の 増 加 2000 2008 21 90 4 OECD 5.9% 2 2009 1,168,477 3 49,593,665 2.2% 83.6% 73,725 6.7% 107,
5 2011.3 李 善 姫 Ⅰ. はじめに 1 2000 2000 2006 NGO 2007 1 006 2007 6 Ⅱ. 韓 国 に 吹 く 多 文 化 ブームの 現 状 1. 韓 国 社 会 における 外 国 人 数 の 増 加 2000 2008 21 90 4 OECD 5.9% 2 2009 1,168,477 3 49,593,665 2.2% 83.6% 73,725 6.7%
5 1 2008 4 2 2009 4 2010 3 5 2 3 2 2010 4 1 2009 1 10 200 46 2009 4 3 5 2009 3 2006 2 4 5
5 1 2008 4 2 2009 4 2010 3 5 2 3 2 2010 4 1 2009 1 10 200 46 2009 4 3 5 2009 3 2006 2 4 5 2009 11 2010 4 30 2009 6 2010 4 2010 2015 2015 2010 3 3 3 10 2010 8 2009 1 1 2009 12 22 2 2009 3 2009 2 4 2009
2
1 2 3 GHQ Liberated peoples GHQ GHQ GHQ GHQ 4 GHQ GHQ W.J.Sebald GHQ W.H.Sullivan GHQ GHQ GHQ 5 SCAP 6 GHQ GHQ SCAP SCAP GHQ J.Bassin a b c 7 a b c d e b 8 b b GHQ 9 10 0 0 0 0 0 0 0 0 0 0 0 0 0 0 0 0
永長大田楽における貴族と民衆
No.27 2003 7 에이쵸원년에교토의상하사람들을많이휩쓸려들게한유명한대전악소동은중앙정권과민중 농민들을자극했고중세기사회에큰영향을끼친것은더말할것도없다 당시참가자들의모습은 낙양전악기 중우기 등에서엿볼수있으며피리를불고북을두드리며세차게또한미칠듯춤추던상황을그려볼수있다 그렇다면왜다른예능도아니고오직전악이란형태로서만표현할수밖에없었은가? 본논문에서는 10 세기의왕권력에전악이이용된이유로서전악춤에는주술적인기능이잠재여있고또민중들이전악열풍을일으킨것도전악에는악령을몰아내고악귀제거의기능이작용하고있다고예측되며그것을가지고여러가지의사회불안을해소하려고한의도를파악할수있다
( 二 ) 概要 국가기록원, 위의사이트. 검색일 도입배경, 국민재난안전포털, jsp 검색일 2
189 資 料 ( 一 ) 沿革 3 1 1975 1951 1 1 3 2 1962 1971 12 3 1975 1 국민여러분! 민방위본부에서알려드립니다, 국가기록원, http://theme. archives.go.kr/next/koreaofrecord/civildefense.do 검색일 2016. 10. 27. 2 국가기록원, 위의사이트. 검색일 201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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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명동에 가려면 몇 호선을 타야 해요? ( 明 洞 に 行 くには 何 号 線 に 乗 らなければいけませんか ) 학습목표: 대중교통 이용하기 学 習 目 標 : 公 共 交 通 を 利 用 する こんにちは 今 日 は 公 共 交 通 の 利 用 について 勉 強 しましょう 皆 さんは 韓 国 でどのような 交 通 機 関 を 一 番 多 く 使 いますか 韓 国 の 交 通 機
2-1_鄭.indd
조선통신사의문학 戶 諉 김양수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 에 나타난 의 활동과 새로 발견된 일본사행록들 김양수 조선후기 우봉김씨의 발전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 賫 槩 戶 槩 남옥 지음 김보경 옮김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소명출판사 潝 辝 潝 이상태 백두산정계비 설치와 김지남의 역할 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 潝 潝 양흥숙 세기 전반 의 파견과
燈 光 会 創 立 百 周 年 に 当 たり 永 年 にわたり 航 路 標 識 関 係 に 尽 力 のあった 燈 光 会 会 員 等 茶 会
1 燈 光 会 創 立 百 周 年 に 当 たり 永 年 にわたり 航 路 標 識 関 係 に 尽 力 のあった 燈 光 会 会 員 等 茶 会 茶 会 風 景 ( 於 宮 殿 連 翠 )( 天 皇 陛 下 ) 茶 会 風 景 ( 於 宮 殿 連 翠 )( 皇 后 陛 下 ) 小 林 道 男 五 賀 利 雄 中 村 桂 千 葉 文 夫 土 谷 文 夫 遠 藤 文 友 高 橋 理 夫 友 常 晶 池
庁議案件No
庁 議 案 件 No.1 平 成 24 年 4 月 24 日 所 管 市 長 公 室 企 画 部 件 名 関 西 広 域 連 合 への 加 入 について 経 過 現 状 政 策 課 題 対 応 方 針 今 後 の 取 組 ( 案 ) 関 係 局 と の 政 策 連 携 関 西 広 域 連 合 の 概 要 複 数 府 県 により 設 立 される 全 国 初 の 広 域 連 合 として 平 成 22 年
( ( - ) ) ( ( ) ) 25 東 山 法 門 五 慧 能 人 々 傳 記 に つ い て ( ) 成 立 年 未 詳 ) ( 成 立 年 未 詳 ) ( 代 傳 記 慧 能 傳 記 に 言 及 す 文 獻 は 多 い が 時 代 が 降 ほ ど 後 世 創 作 を 多 く 含 み 史 實
( ( - ) ) ( ( ) ) 25 東 山 法 門 五 慧 能 人 々 傳 記 に つ い て ( ) 成 立 年 未 詳 ) ( 成 立 年 未 詳 ) ( 代 傳 記 慧 能 傳 記 に 言 及 す 文 獻 は 多 い が 時 代 が 降 ほ ど 後 世 創 作 を 多 く 含 み 史 實 か ら ほ ど 遠 い も と な っ て - ) ) 禪 師 碑 銘 し ま っ て い 從 っ
平 成 22 年 12 月 第 5 回 定 例 会 (11 月 26 日 招 集 ) 会 期 日 程 表
平 成 22 年 12 月 第 5 回 定 例 会 (11 月 26 日 招 集 ) 会 期 日 程 表 平 成 22 年 12 月 第 5 回 水 俣 市 議 会 定 例 会 会 議 録 目 次 平 成 22 年 11 月 26 日 ( 金 ) 1 日 目 ⑴ 平 成 22 年 12 月 7 日 ( 火 ) 2 日 目 平 成 22 年 12 月 8 日 ( 水 ) 3 日 目 平 成 22
ごあいさつ
( 浅 利 氏 ) 檜 山 安 東 氏 脇 本 湊 戸 沢 氏 角 館 赤 尾 津 氏 岩 屋 氏 本 堂 氏 六 郷 氏 内 越 氏 石 沢 氏 滝 沢 氏 仁 賀 保 氏 祢 々 井 氏 矢 島 氏 下 村 氏 小 野 寺 氏 横 手 ごあいさつ 秋 田 藩 家 蔵 文 書 歴 史 上 の 人 物 と 秋 田 秋 田 藩 家 蔵 文 書 に 見 る 秋 田 の 戦 国 時 代 戦 国 時 代
協 議 会 事 務 局 長 民 生 委 員 協 議 会 会 長 身 体 障 害 者 協 議 会 会 長 老 人 クラブ 連 合 会 会 長 ( 平 成 25 年 6 月 1 日 現 在 ) 母 子 寡 婦 福 祉 会 会 長 手 をつなぐ 育 成 会 会 長 中 馬 惠 雄 元 野 濱 子 里 島
市 町 村 社 会 福 祉 市 町 村 長 福 祉 主 管 課 課 ( 所 ) 長 名 称 所 在 地 郵 便 番 号 電 話 番 号 会 長 福 祉 事 務 所 重 田 久 夫 福 祉 政 策 課 重 山 納 奄 美 市 幸 町 894-8555 52-1111 朝 山 毅 前 田 篤 夫 保 護 課 中 元 幸 立 高 齢 者 福 祉 課 泉 賢 一 郎 大 和 村 大 和 浜 894-3105
平 成 26 年 第 1 回 益 城 町 議 会 臨 時 会 目 次 7 月 16 日 ( 第 1 日 ) 出 席 議 員 1 欠 席 議 員 1 職 務 のため 出 席 した 事 務 局 職 員 の 職 氏 名 1 説 明 のため 出 席 した 者 の 職 氏 名 1 開 会 開 議 2 日 程
写 平 成 26 年 第 1 回 臨 時 会 (7 月 16 日 招 集 ) 町 議 会 会 議 録 益 城 町 議 会 平 成 26 年 第 1 回 益 城 町 議 会 臨 時 会 目 次 7 月 16 日 ( 第 1 日 ) 出 席 議 員 1 欠 席 議 員 1 職 務 のため 出 席 した 事 務 局 職 員 の 職 氏 名 1 説 明 のため 出 席 した 者 の 職 氏 名 1 開 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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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下 野 市 ホームページ 市 の 概 況 より> < 下 野 市 文 化 財 マップ しもつけシティーガイド 下 野 市 都 市 計 画 マスタープランより> 指 定 文 化 財 下 野 文 化 財 件 数 内 訳 ( 平 成 21 年 3 月 31 日 現 在 ) 有 形 文 化 財 無 形 文 化 財 民 俗 文 化 財 記 念 物 建 造 物 絵 画 彫 刻 工 芸 品 書 跡 古 文 書
中 等 野 球 編 [9 大 会 登 録 人 ] 岡 村 俊 昭 ( 平 安 中 学 京 都 ) 98( 昭 0) 第 回 優 勝 大 会 平 安 中 学 - 松 本 商 業 未 登 録 平 安 中 学 -0 平 壌 中 学 右 翼 99( 昭 0) 第 回 選 抜 大 会 平 安 中 学 0- 海
これは 春 夏 の 全 国 大 会 において 出 場 登 録 された 回 数 の 多 い 選 手 について 調 べたものです 中 等 野 球 編 [9 大 会 登 録 人 ] 岡 村 俊 昭 / 波 利 熊 雄 / 光 林 俊 盛 ( 平 安 中 学 ) [8 大 会 登 録 人 ] 小 川 正 太 郎 ( 和 歌 山 中 ) 築 地 藤 平 ( 静 岡 中 学 ) 小 林 政 重 ( 松 本 商
家族間の呼称表現における通時的研究
No.24 2002 7 본고에서는가족성원간의호칭표현중, 일본특유의언어습관이라고여겨지는친족호칭의 아이중심 ( 최연소자중심 ) 적 용법에주목하여그사용원리를규명하고자한다. 일본의가족성원간호칭표현의사용원리가무엇인가를밝히려는연구는지금까지수없이연구되어왔는데, 아이 가그기준이라는생각과, 아이는전혀호칭에관여하지않고집안내의 위치 / 지위 가그기준이라는두종류의생각으로의견이나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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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人 事 異 動 表 発 令 年 月 日 平 成 17 年 4 月 1 日 部 長 級 区 長 発 令 発 令 権 者 中 野 区 長 田 中 大 輔 発 令 氏 名 旧 備 考 区 長 室 長 寺 部 守 芳 区 民 生 活 部 ごみ 減 量 清 掃 事 業 担 当 参 事 総 務 部 未 収 金 対 策 担 当 参 事 ( 総 務 部 長 石 神 正 義 兼 務 ) 区 民 生 活
目 標 を 達 成 するための 指 標 第 4 章 計 画 における 環 境 施 策 世 界 遺 産 への 登 録 早 期 登 録 の 実 現 史 跡 の 公 有 地 化 平 成 27 年 度 (2015 年 度 )までに 235,022.30m 2 施 策 の 体 系 1 歴 史 的 遺 産 とこ
Ⅲ 歴 史 的 文 化 的 環 境 の 確 保 古 都 鎌 倉 の 歴 史 的 遺 産 を 保 全 活 用 し 世 界 遺 産 に 登 録 されることをめざしま 現 状 と 課 題 わが 国 初 めての 武 家 政 権 が 誕 生 した 本 市 南 東 部 は 三 方 を 山 に 囲 まれ 南 に 相 模 湾 を 望 む 特 徴 ある 地 形 をしており この 地 形 を 生 かした 独 自 の 都
6/19 +0.5 小 高 孝 二 23.28 中 嶋 憲 一 24.02 小 町 谷 直 樹 27.44 200m 愛 知 駒 ヶ 根 市 駒 ヶ 根 市 6/19 松 下 正 浩 59.49 400m 静 岡 6/19 森 田 俊 一 5:52.36 1500m 愛 知 6/19 中 澤 俊 喜
6/19 M30-0.7 小 野 宏 貴 7.25 60m 岐 阜 6/19 0.0 小 野 宏 貴 11.16 上 原 隆 伸 17.35 100m 岐 阜 松 本 市 6/19-1.7 小 野 宏 貴 22.53 200m 岐 阜 6/19 小 林 祐 也 2:10.86 6/19 小 林 祐 也 4:30.04 浅 井 祐 一 郎 5:04.71 1500m 長 野 市 松 本 市 6/19
2 EXECUTIVE BOARD 1 2 3 4 班 地 区 開 催 場 所 地 区 開 催 場 所 地 区 開 催 場 所 地 区 開 催 場 所 9 時 30 分 ~ 13 時 30 分 ~ 伊 香 牛 地 区 プラットホール 中 央 1 区 ~4 区 農 協 3 階 大 ホール 開 明 地
2 EXECUTIVE BOARD 1 2 3 4 班 地 区 開 催 場 所 地 区 開 催 場 所 地 区 開 催 場 所 地 区 開 催 場 所 9 時 30 分 ~ 13 時 30 分 ~ 伊 香 牛 地 区 プラットホール 中 央 1 区 ~4 区 農 協 3 階 大 ホール 開 明 地 区 開 明 公 民 分 館 北 星 地 区 北 星 地 域 集 会 所 東 地 区 東 公 民 分 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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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5 6 7 8 9 10 11 12 地 区 名 区 長 および 副 区 長 施 設 名 第 1 地 区 区 長 竹 下 仁 大 阪 府 三 島 救 命 救 急 センター 副 区 長 田 野 孝 則 大 阪 府 済 生 会 茨 木 病 院 第 2 地 区 区 長 船 越 あゆみ 阪 大 微 生 物 病 研 究 会 副 区 長 厚 東 良 輔 市 立 吹 田 市 民 病 院 第 3 地
七 の 二 自 然 公 園 法 ( 昭 和 三 十 二 年 法 律 第 百 六 十 一 号 ) 第 二 十 条 第 一 項 に 規 定 する 国 立 公 園 又 は 国 定 公 園 の 特 別 地 域 のうち 同 法 第 二 十 一 条 第 一 項 に 規 定 する 特 別 保 護 地 区 その 他
地 方 税 法 ( 固 定 資 産 税 の 非 課 税 の 範 囲 ) 第 三 百 四 十 八 条 市 町 村 は 国 並 びに 都 道 府 県 市 町 村 特 別 区 これらの 組 合 財 産 区 及 び 合 併 特 例 区 に 対 しては 固 定 資 産 税 を 課 することができない 2 固 定 資 産 税 は 次 に 掲 げる 固 定 資 産 に 対 しては 課 することができない ただし
為 が 行 われるおそれがある 場 合 に 都 道 府 県 公 安 委 員 会 がその 指 定 暴 力 団 等 を 特 定 抗 争 指 定 暴 力 団 等 として 指 定 し その 所 属 する 指 定 暴 力 団 員 が 警 戒 区 域 内 において 暴 力 団 の 事 務 所 を 新 たに 設
暴 力 団 員 による 不 当 な 行 為 の 防 止 等 に 関 する 法 律 の 一 部 を 改 正 する 法 律 暴 力 団 員 による 不 当 な 行 為 の 防 止 等 に 関 する 法 律 例 規 整 備 * 暴 力 団 員 による 不 当 な 行 為 の 防 止 等 に 関 する 法 律 の 一 部 を 改 正 する 法 律 例 規 整 備 公 布 年 月 日 番 号 平 成 24 年
役員の異動に関するお知らせ
平 成 27 年 2 月 27 日 各 位 会 社 名 大 成 建 設 株 式 会 社 代 表 者 名 代 表 取 締 役 社 長 山 内 隆 司 コード 番 号 1801 上 場 取 引 所 東 証 名 証 各 一 部 問 合 せ 先 コーポレート コミュニケーション 部 長 井 上 泰 夫 電 話 番 号 03-3348-1111( 大 代 表 ) 役 員 の 異 動 に 関 するお 知 らせ
代表取締役等の異動に関するお知らせ
各 位 代 表 取 締 役 等 の 異 動 に 関 するお 知 らせ 平 成 28 年 5 月 17 日 会 社 名 東 日 本 旅 客 鉄 道 株 式 会 社 代 表 者 名 代 表 取 締 役 社 長 冨 田 哲 郎 (コード 番 号 9020 東 証 第 一 部 ) 問 合 せ 先 広 報 部 長 薬 師 晃 (TEL.03-5334-1300) 当 社 は 平 成 28 年 5 月 17 日
近畿中部防衛局広報誌
近 畿 中 部 防 衛 局 広 報 誌 舞 鶴 地 方 総 監 部 大 講 堂 海 軍 記 念 館 近 中 くん 多 々 見 良 三 舞 鶴 市 長 と 田 渕 眞 二 近 畿 中 部 防 衛 局 長 との 対 談 自 衛 隊 施 設 巡 り ~ 海 上 自 衛 隊 舞 鶴 地 区 と 歴 史 的 建 造 物 ~ シリーズ 各 課 紹 介 防 音 対 策 課 当 局 のマスコットキャラクター 決 定!
2. ど の 様 な 経 緯 で 発 覚 し た の か ま た 遡 っ た の を 昨 年 4 月 ま で と し た の は 何 故 か 明 ら か に す る こ と 回 答 3 月 17 日 に 実 施 し た ダ イ ヤ 改 正 で 静 岡 車 両 区 の 構 内 運 転 が 静 岡 運
地 本 業 務 ニ ュ ー ス J R 東 海 労 静 岡 地 方 本 部 NO.1 8 2 0 1 2 年 6 月 1 9 日 発 行 者 : JR 東 海 労 静 岡 地 方 本 部 山 本 繁 明 申 6 号 に 関 する 幹 事 間 折 衝 を 開 催!! 6 月 15 日 地 本 は 静 岡 車 両 区 に お け る 構 内 運 転 士 に 対 す る 誤 支 給 及 び 戻 入 に つ
埼玉県高校受験 私立高校学費一覧
埼 玉 / 近 県 私 立 高 校 学 費 一 覧 (2014 年 度 参,ただし 判 明 分 ) 就 学 支 援 金 と 県 の 学 費 軽 減 制 度 年 4 月 より 公 立 高 等 学 校 の 無 償 化 がスタートしました 同 時 に 設 けられた 高 等 学 校 就 学 支 援 金 制 度 は, 国 私 立 の 高 校 や 中 等 教 育 学 校 後 期 課 程, 高 等 専 門 学 校
定 員 現 員 1 1 氏 名 職 業 任 期 柏 原 雅 史 広 福 寺 住 職 H2.4.1 ~ H29.3.31 親 族 等 特 殊 関 係 者 の の 親 資 格 親 族 他 の 社 会 族 社 会 福 祉 地 域 の 福 地 域 の 代 施 設 長 利 用 者 の 施 設 整 備 又 は
Ⅲ 組 織 定 員 現 員 役 職 氏 名 職 業 任 期 親 族 等 特 殊 関 係 者 の 親 族 他 の 社 会 福 祉 法 人 の 役 員 社 会 福 祉 事 業 の 学 識 経 験 者 地 域 の 福 祉 関 係 者 資 格 施 設 長 施 設 整 備 又 は 運 営 と 密 接 に 関 連 する 業 務 を 行 う 者 報 酬 職 員 給 与 ともに 支 給 報 酬 ( 職 員 と 兼
0605調査用紙(公民)
社 会 公 民 番 号 2 略 称 東 京 書 籍 書 名 新 編 新 し 公 民 1 基 礎 基 本 確 実 な 定 着 を 図 るため を 促 すため や 個 応 じた 3 単 元 ( 単 元 設 定 4 各 年 ( び や 考 え 展 開 5 特 徴 的 な 単 元 おけ る 課 題 関 わり 等 ア 1 単 位 時 間 ( 見 開 き 2 頁 ) 毎 課 題 を 設 定 し 課 題 関 連
インカレ歴代ランキング(女子).xls
全 日 本 大 学 対 抗 卓 球 大 会 歴 代 ランキング 女 子 昭 和 25 年 度 (1950 年 度 )まで 全 国 学 校 対 抗 卓 球 大 会 昭 和 23 年 度 昭 和 2 年 度 昭 和 25 年 度 昭 和 26 年 度 昭 和 27 年 度 (19 年 度 ) (199 年 度 ) (1950 年 度 ) (1951 年 度 ) (1952 年 度 ) 第 1 回 第 19
2 2015 August
2015 AUGUST No.70 CONTENTS 2 2015 August 2015 August 3 役 員 改 選 ( 任 期 : 平 成 27 年 6 月 平 成 29 年 6 月 ) 任 期 満 了 に 伴 う 役 員 改 選 において 第 3 期 目 を 担 う 役 員 の 皆 様 が 次 のとおり 決 定 いたしました 印 は 新 任 会 長 藤 波 一 博 副 会 長 金 子 重
2. 建 築 基 準 法 に 基 づく 限 着 色 項 目 の 地 区 が 尾 張 旭 市 内 にはあります 関 係 課 で 確 認 してください 項 目 所 管 課 窓 口 市 役 所 内 電 話 備 考 がけに 関 する 限 (がけ 条 例 ) 都 市 計 画 課 建 築 住 宅 係 南 庁 舎
重 要 事 項 調 査 シート( 法 令 に 基 づく 限 の 調 べ 方 ) 尾 張 旭 市 版 1. 都 市 計 画 法 に 基 づく 限 項 目 市 内 所 管 課 窓 口 市 役 所 内 電 話 区 都 市 計 画 区 有 都 市 計 画 課 計 画 係 南 庁 舎 2F 76-8156 都 市 計 画 道 路 有 都 市 計 画 課 計 画 係 南 庁 舎 2F 76-8156 都 市 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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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二 三 四 五 * 栄 光 ある 過 去 の 実 績 ( 男 子 の )- 優 勝 今 高 橋 青 森 佐 藤 星 山 新 潟 有 賀 阿 佐 野 東 京 佐 藤 小 野 崎 宮 城 松 崎 千 葉 福 島 宮 城 本 田 大 和 田 新 潟 宮 城 吉 村 上 田 準 優 勝 橋 場 新 井 北 海 道 越 浦 小 笠 原 宮 城 北 山 鈴 木 宮 城 松 井 中 村 東 京 三 浦 石 上
第 63 回 ( 平 成 26 年 度 ) 横 浜 文 化 賞 選 考 委 員 会 日 時 平 成 26 年 8 月 22 日 ( 金 ) 午 後 2 時 ~ 場 所 市 庁 舎 2 階 応 接 室 次 第 1 開 会 2 開 会 あいさつ 横 浜 市 副 市 長 渡 辺 巧 教 3 委 員 紹 介
第 63 回 ( 平 成 26 年 度 ) 横 浜 文 化 賞 選 考 委 員 会 会 議 録 日 時 平 成 26 年 8 月 22 日 ( 金 )14 時 ~15 時 40 分 開 催 場 所 市 庁 舎 2 階 応 接 室 出 席 者 窪 田 吉 信 委 員 長 並 木 裕 之 副 委 員 長 新 井 鷗 子 委 員 稲 田 奈 緒 美 委 員 逢 坂 恵 理 子 委 員 佐 々 木 謙 二
地 区 追 浜 N0 施 設 名 契 約 年 月 日 備 考 21 追 浜 下 水 ポンプ 場 旧 海 軍 天 神 用 地 235 - - - 平 成 7 年 7 月 18 日 22 市 道 敷 ( 第 4,818 号 ) 旧 第 一 海 軍 技 術 廠 42 - - 昭 和 26 年 3 月 2
地 区 N0 施 設 名 1 日 向 公 園 旧 海 軍 運 輸 部 日 向 地 区 1,509-3 昭 和 26 年 3 月 2 日 昭 和 26 年 6 月 1 日 2 夏 島 小 学 校 旧 海 軍 鉈 切 山 用 地 21,302-12 昭 和 29 年 12 月 20 日 昭 和 31 年 11 月 7 日 3 鷹 取 公 園 旧 海 軍 追 浜 高 等 官 宿 舎 11,963-17 昭
総 合 政 策 局 情 報 政 策 課 長 補 佐 内 田 謙 一 総 合 政 策 局 行 政 情 報 化 推 進 課 情 報 システ ム 最 適 化 推 進 総 合 政 策 局 行 政 情 報 化 推 進 課 情 報 システ 浜 田 義 和 総 合 政 策 局 情 報 政 策 課 情 報 危 機
人 事 異 動 ( 第 1 号 ) 平 成 2 8 年 1 月 1 日 付 国 土 交 通 省 発 令 事 項 氏 名 現 職 大 臣 房 付 即 日 辞 職 (12 月 31 日 付 ) 辞 職 (12 月 31 日 付 )( 独 立 行 政 法 人 鉄 道 建 設 運 輸 施 設 整 備 支 援 機 構 共 済 業 務 室 長 ) 桑 原 幹 幸 独 立 行 政 法 人 鉄 道 建 設 運 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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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25 075029 4 61 29 1 1 2 1.1 2 1.2 3 1.3 5 1.4 6 2 12 2.1 12 2.2 13 3 15 3.1 15 3.2 17 3.3 19 20 21 web 21 はじめに 研 究 概 要 2 研 究 方 法 CSV ArcGIS 21 1 第 1 章 新 聞 業 界 の 現 状 1.1 全 体 の 売 上 1 図 1: 業 界 全 体
標 記 本 朝 通 鑑 近 衛 帝 卅 五 林 鵞 峰 撰 9627 標 記
1 1 2 9591 標 記 本 朝 通 鑑 前 編 神 書 完 林 鵞 峰 撰 9592 標 記 本 朝 通 鑑 神 武 帝 至 安 康 帝 一 林 羅 山 撰 ウア1 1-1 明 治 八 年 十 一 月 十 五 日 ウア1 1-2 版 権 免 許 ( 見 返 し)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Microsoft Word - 080321jJinji.doc
各 位 2008 年 3 月 21 日 組 織 改 正 人 事 についてのお 知 らせ 中 外 製 薬 株 式 会 社 [ 本 社 : 東 京 都 中 央 区 / 社 長 : 永 山 治 ]は 2008 年 3 月 27 日 付 で 次 記 の 組 織 改 正 および 人 事 発 令 を 行 いますのでお 知 らせいたします 組 織 改 正 組 織 改 正 都 道 府 県 毎 のがん 診 療 連 携
- 1 - 総 控 負 傷 疾 病 療 養 産 産 女 性 責 帰 べ 由 試 ~ 8 契 約 契 約 完 了 ほ 契 約 超 締 結 専 門 的 知 識 技 術 験 専 門 的 知 識 高 大 臣 専 門 的 知 識 高 専 門 的 知 識 締 結 契 約 満 歳 締 結 契 約 契 約 係 始
部 案 参 照 文 目 1 1 持 可 能 療 険 制 構 築 国 民 険 部 9 部 11 1 5 特 別 15 6 17 7 運 確 18 8 0 9 独 立 10 - 1 - 総 控 負 傷 疾 病 療 養 産 産 女 性 責 帰 べ 由 試 ~ 8 契 約 契 約 完 了 ほ 契 約 超 締 結 専 門 的 知 識 技 術 験 専 門 的 知 識 高 大 臣 専 門 的 知 識 高 専 門
174977_広島市報(第1028号).indd
平 成 28 年 2 月 1 日 第 1028 号 91 江 口 悦 子 主 婦 45,000 雑 費 春 日 トシ 子 主 婦 45,000 79,152 福 間 健 無 職 45,000 原 田 美 佐 子 主 婦 45,000 隅 田 杉 子 主 婦 45,000 151,200 330,804 竹 野 早 苗 主 婦 45,000 竹 野 里 夏 主 婦 45,000 216,000 佐 々
1 育 児 休 業 代 替 任 期 付 職 員 ( 一 般 事 務 職 )とは 育 児 休 業 代 替 任 期 付 職 員 とは 一 般 の 職 員 が 育 児 休 業 を 取 得 した 際 に 代 替 職 員 とし て 勤 務 する 職 員 です 一 般 事 務 職 については 候 補 者 として
川 崎 市 育 児 休 業 代 替 任 期 付 職 員 一 般 事 務 職 の 候 補 者 登 録 案 内 川 崎 市 総 務 企 画 局 人 事 部 人 事 課 概 要 登 録 選 考 ( 教 養 考 査 及 び 作 文 考 査 )を 実 施 し ます 登 録 選 考 実 施 日 平 成 2 8 年 7 月 31 日 ( 日 ) 受 付 期 間 平 成 28 年 6 月 1 日 ( 水 ) ~ 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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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54 回 福 島 県 高 等 学 校 体 育 大 会 柔 道 競 技 県 大 会 試 合 記 録 平 成 20 年 6 月 7 日 ( 土 )~6 月 10 日 ( 火 ) いわき 市 立 総 合 体 育 館 柔 剣 道 場 男 子 学 校 対 抗 の 部 女 子 学 校 対 抗 の 部 種 目 順 位 学 校 名 種 目 順 位 学 校 名 男 子 学 校 対 抗 の 部 1 田 村 高 等
M 田 村 博 37 ( 宝 達 志 水 陸 協 ) 2 位 13"58 M 西 村 隆 則 39 ( 福 井 北 ) 1 位 12"30 ( 女 子 ) W 福 田 外 枝 75 ( 石 川 マスターズ) 1 位 21"65 W 北 田 聡 子 42
第 31 回 石 川 マスターズ 陸 上 競 技 選 手 権 大 会 (2013.5.12 金 沢 市 営 ) 60m ( 男 子 ) M80 85 今 井 治 一 82 ( 福 井 マスターズ) DNS M75 598 高 嶋 賢 二 77 ( 石 川 マスターズ) 1 位 9"72 M70 25 高 橋 進 73 ( 新 潟 マスターズ) 1 位 8"82 M65 375 山 下 昭 夫 68
学 校 対 抗 男 子 学 校 対 抗 6 月 3 日 ( 金 ) 9:00~ 開 始 式 ~ 学 校 対 抗 決 勝 リーグ2 回 戦 まで 6 月 4 日 ( 土 ) 9:00~ 学 校 対 抗 決 勝 リーグ3 回 戦, 個 人 戦 ( 複 ) 決 勝 まで, 個 人 戦 ( 単 )1 回 戦
学 校 対 抗 女 子 学 校 対 抗 6 月 3 日 ( 金 ) 9:00~ 開 始 式 ~ 学 校 対 抗 決 勝 リーグ2 回 戦 まで 6 月 4 日 ( 土 ) 9:00~ 学 校 対 抗 決 勝 リーグ3 回 戦, 個 人 戦 ( 複 ) 決 勝 まで, 個 人 戦 ( 単 )1 回 戦 まで 6 月 5 日 ( 日 ) 9:00~ 個 人 戦 ( 単 ) 決 勝 まで 1 佐 賀 商
第 日 0 年 0 月 08 日 第 節 試 合 時 間 : 0 時 間 分 0 0 0 0 0 勝 敗 0 分 ホンダエンジニアリング ( 投 手 ) 岡 﨑 建 斗 0 0 0 0 0 x 勝 0 敗 0 分 ( 投 手 ) 浅 野 公 太 ( 捕 手 ) 佐 藤 輝 長 岡 孝, 川 田 寛
第 日 0 年 0 月 08 日 第 節 試 合 時 間 : 0 時 間 0 分 埼 玉 県 庁 クラブ 0 0 0 0 0 0 0 勝 敗 0 分 ホンダエンジニアリング 0 0 0 0 x 勝 0 敗 0 分 ( 投 手 ) 吉 形 太 佑, 矢 野 崇 史 ( 投 手 ) 永 吉 孝 臣, 吉 田 大 祐 北 澤 慶 介 床 井 優 介 第 日 0 年 0 月 08 日 第 節 試 合 時 間
Microsoft PowerPoint - 経営事項審査.ppt
経 営 事 項 審 査 建 設 業 を 取 り 巻 く 環 境 工 事 不 足 は 深 刻 化 しており 建 設 業 者 の 統 廃 合 も 活 発 化 している 中 選 ばれる 企 業 となる 事 が 生 き 残 りをかけた 最 重 要 課 題 といえる 選 ばれる 企 業 の 指 標 となるものが 経 営 事 項 審 査 であり この 評 点 はインターネット 等 にて 公 開 されている 事
佐渡市都市計画区域の見直し
都 市 計 画 区 域 の 拡 大 について 佐 渡 市 建 設 課 都 市 計 画 とは 土 地 の 使 い 方 や 建 物 の 建 て 方 についての ルールをはじめ まちづくりに 必 要 なことがら について 総 合 的 一 体 的 に 定 め まちづく り 全 体 を 秩 序 だてて 進 めていくことを 目 的 と した 都 市 計 画 法 という 法 律 で 定 められた 計 画 です 住
道 化 と 死 ~ ~ 信 波 路 J ~ 坂 本 龍 馬 上 杉 謙 信 ~ ~ 風 よ 軍 師 よ 落 日 よ 詩 集 に 領 事 館 の 虫 などがある 趣 味 は 山 上 人 となり E I 本 臨 済 担 j\ に ~;t~~~w 638~713 広 東 省 出 身 中 国 禅 の 第 6 祖 であ 町 南 宋 禅 の 始 祖 である 弘 忍 に 師 事 し 本 来 無 ー やがて
理化学研究所の役職員への兼業(兼職)依頼について
理 化 学 研 究 所 の 役 職 員 への 兼 業 ( 兼 職 ) 依 頼 について 役 職 員 が 兼 業 を 行 なう 場 合 事 前 に 弊 所 の 承 認 が 必 要 です 役 職 員 へ 兼 業 を 依 頼 さ れる 場 合 は 下 記 を 御 一 読 戴 き 役 職 員 本 人 宛 に 御 依 頼 くださいますようお 願 い 致 し ます 1. 兼 業 依 頼 から 承 認 までの 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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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 戦 開 始 :08 時 47 分 ( 時 間 55 分 ) 須 賀 川 0 2 0 0 0 0 0 2 藤 崎 桜 城 2 0 4 0 0 0 X 6 球 場 : 鷹 来 の 森 運 動 公 園 野 球 場 第 試 合 開 始 :07 時 50 分 ( 時 間 38 分 ) 第 2 試 合 開 始 :0 時 05 分 (2 時 間 22 分 ) 盛 岡 北 0 0 0 0 0 0 0 0 東 松
講義要項-日本文化科目-1年
日 本 文 化 科 目 日 本 文 化 フィールド 科 目 言 語 文 化 フィールド 科 目 日 本 史 フィールド 科 目 241001 日 本 文 化 概 説 1 年 次 2 単 位 中 村 幸 弘 教 授 10 11 12 13 14 15 241011 日 本 文 学 概 説 Ⅰ 1 年 次 2 単 位 林 田 孝 和 教 授 60 3010 10 11 12 13 14 15 23 241012
国 立 研 究 開 発 法 人 日 本 原 子 力 研 究 開 発 機 構 防 災 業 務 計 画 平 成 17 年 10 月 1 日 制 定 平 成 25 年 3 月 8 日 修 正 平 成 26 年 6 月 19 日 修 正 平 成 27 年 12 月 1 日 修 正 国 立 研 究 開 発 法 人 日 本 原 子 力 研 究 開 発 機 構 国 立 研 究 開 発 法 人 日 本 原 子 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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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 成 24 年 2 月 1 日 現 在 ( 単 純 集 ) ( 大 槌 町 復 興 局 復 興 推 進 室 ) 1/26 住 宅 再 建 に 関 する 意 向 調 査 について 1. 調 査 目 的 被 災 者 住 宅 再 建 について 見 通 しや 考 え 方 を 明 らかにすることにより 大 槌 町 東 日 本 大 震 災 津 波 復 興 画 ( 実 施 画 ) 策 定 に 係 る 基 礎 資
豊 住 直 樹 岩 沢 雅 司 渡 邉 幸 彦 7 中 林 信 男 高 橋 功 7 竹 原 奈 津 紀 滝 沢 義 明 コ 9 片 見 明 コ ム ム 高 橋 進 小 峰 直 ム 中 島 克 昌 55 0 松 島 誠 55 滝 邦 久 関 竹 夫 嶋 田 道 夫 信 7 栗 原 孝 信 ム 竹 井
コート 般 男 子 人 用 開 始 時 間 終 了 時 間 ブロック 佐 野 博 士 佐 久 間 弘 敏 信 信 井 上 友 幸 田 中 英 司 横 尾 昌 法 加 賀 重 隆 ム ム - 0 0 コート 般 男 子 人 用 開 始 時 間 終 了 時 間 B ブロック 武 田 長 谷 部 弘 之 根 岸 修 55 中 村 亘 55 宮 木 伸 夫 寺 西 信 ム ム 8 0 5-7 0 8 9 -
室 內 空 氣 品 質 維 護 管 理 專 責 人 員 設 置 管 理 辦 法 修 正 第 一 條 條 文 對 照 表 修 正 條 文 現 行 條 文 說 明 本 辦 法 依 室 內 空 氣 品 質 管 理 法 ( 以 下 簡 稱 本 法 ) 第 九 條 第 三 項 規 定 訂 定 之 第 二 條
室 內 空 氣 品 質 維 護 管 理 專 責 人 員 設 置 管 理 辦 法 修 正 總 說 明 室 內 空 氣 品 質 管 理 法 ( 以 下 簡 稱 本 法 ) 於 一 百 年 十 一 月 二 十 三 日 經 總 統 公 布, 並 自 公 布 後 一 年 施 行 為 有 效 推 動 本 法 施 行, 實 施 室 內 空 氣 品 質 專 責 人 員 制 度, 建 立 公 告 場 所 自 我 維
入 札 参 加 者 は 入 札 の 執 行 完 了 に 至 るまではいつでも 入 札 を 辞 退 することができ これを 理 由 として 以 降 の 指 名 等 において 不 利 益 な 取 扱 いを 受 けることはない 12 入 札 保 証 金 免 除 13 契 約 保 証 金 免 除 14 入
入 札 公 告 次 のとおり 一 般 競 争 入 札 に 付 します なお 本 業 務 の 契 約 締 結 は 当 該 業 務 に 係 る 平 成 27 年 度 予 算 の 執 行 が 可 能 となってい ることを 条 件 とします 平 成 27 年 2 月 17 日 独 立 行 政 法 人 鉄 道 建 設 運 輸 施 設 整 備 支 援 機 構 契 約 担 当 役 鉄 道 建 設 本 部 九 州
